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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날림번역 <열세번째 지파: 하자르 제국의 역사> 유대교로의 개종

작성자Τιταυιζ|작성시간09.02.13|조회수735 목록 댓글 3

개종.

 

1

 

베리교수는 "히브리인들의 종교는 이슬람 신앙의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기독교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어쨋든 그들도 산발적인 개종자들을 얻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여호와의 종교로 개종한 하자르인들의 이야기는 역사에서도 특기될만한 것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의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메일코트로 단단히 가려진 하자르 군주의 머릿속에 숨겨진 의향을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 이유를,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권력적 목적에서 찾는다면, 제법많은 그럴듯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8세기가 시작될 무렵, 세계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대표하는 두 세력들에 의해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적인 교시는 선전과 파괴, 그리고 군사적 정복이라는 고전적인 방식을 추구한 정치권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자르인들은 적으로서나 동맹으로서나 그들 두 세력과 똑같은 비중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해보인 제 3의 세력을 대표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독립성을 기독교나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지했습니다. 이들 두 종교의 선택은 그들이 자동적으로 로마 황제나 바그다드 칼리프의 정신적 영향권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양쪽 세력 모두 하자르인들을 기독교나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들은 모두 외교상의 호의나 왕조간의 결혼, 그리고 상호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군사동맹의 체결등에 부수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군사력과 가신 부족들의 충성에 의존하던 하자르 왕국은 제 3의 세력, 즉 중립적인 초원지대 민족들의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고수할 것이라는 결심을 다졌습니다.

 

당대에 그들은 비잔티움과 칼리프국과 가졌던 긴밀한 접촉을 통해 그들의 원시적인 샤머니즘은 훨씬 발전한 일신교 신앙과 비교해서 단순히 미개하고 구식일 뿐만 아니라, 그 지도자에게 당대 세계의 두 중요 세력의 수장인 칼리프와 황제가 가지고 있는 것 만큼의 정신적, 법적 권위를 부여해 주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쪽으로든지, 개종은 어쨋든 정신적인 복종과 독립성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이는 에초에 개종이 가졌던 목적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도 몰랐습니다. 이들 두 종교와 중립적인 관계에 있으면서도 양쪽의 존경받는 토대임을 의미하는 제 3의 신앙으로 개종하는 것보다 더욱 논리적인 선택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개종 결정뒤에 자리했던 이러한 논리는, 물론 지혜로운 현명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유대교로의 개종은 천재적인 연기를 필요로 했습니다. 개종에 대한 아랍인들과 히브리인들의 사료들은, 그 세밀함에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위에서 언급한 논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베리교수의 언급을 빌리자면:

 

그들의 군주가 정치적 동인에 의해 유대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신앙을 하자르인들에게 강요해온 칼리프에게 정신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렇다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로마 황제의 정신적 가신이 될 위험부담이 있었다. 유대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가 존중하는 성스러운 책을 바탕으로 하는 명성있는 종교였다. 이는 그를 이교도 야만족의 지위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 아니라 칼리프와 황제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할례의식과 같은 유대문화의 편협함을 강제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민들에게 그들의 이교문화와 우상숭배를 고수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비록 하자르 궁정의 개종이 의심할 바 없이 정치적인 동인에 의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평소에 친숙하지도 않은 종교를 맹목적으로 하루아침에 받아들였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의 존재는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들의 종교적 탐색은 그들이 개종하기 적어도 한세기 이전부터 이루어졌던 일이니, 이는 비잔티움의 종교박해에서 비롯되거나 아랍인들의 소아시아 침공에서 유래된 난민들의 유입을 통해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하자리아는 북방의 야만인들 가운데서는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지역이었으며, 게다가 호전적으로 신앙을 맹신하는 지역도 아니었기에, 개종이나 기타 다른 이유으로 위협받는 비잔티움 통치하의 유대인들의 주기적인 탈출을 유도한 천국이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니, 유스티니아누스 1세 (527-65) 시대부터 시작된 이러한 박해는 7세기의 헤라클레이오스와 8세기의 레온 3세, 9세기의 바셀레이오스 1세와 레온 4세, 그리고 10세기의 로마노스 황제 치하에서 특별히 악독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하자르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기 직전의 20년간 옥좌에 앉았던 레온 3세는 "(유대인에 대한 관용적인 분위기를) 자신의 모든 유대인 신민들에게 세례받을 것을 명하면서 기이할 정도로 한방에 몰살시키려 했다." 고 합니다. 비록 이러한 명령의 이행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의 유대인으로 하여금 고향 비잔티움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관해 마수디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 (하자르인들의 수도 이틸) 에는 무슬림들과 기독교도, 유대인, 그리고 이교도들이 공존한다. 왕과 그의 수행원들, 그리고 하자르인들 중 그의 가문의 구성원들 (위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이른바 "백색 하자르인" 이라고 불린 지배계급을 말하는 듯) 은 유대인들이다. 하자르인들의 왕은 이미 하룬 알 라시드 시대에 유대인이 되었으며, 이로서 그는 이슬람과 그리스 (비잔티움) 지역에서 몰려온 유대인들과 하나가 되었다. 사실 당대의 그리스 왕은 헤지라 332년 (943-4년) 에 자신의 왕국에 사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따라서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인들의 나라에서 도망쳐서 하자리아로 이주해 온 것이다.. (이 시기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국사의 중대사였던 시기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때부터 기독교도를 유대교도로 개종하는 것은 법에 의거한 심한 처벌이라는 위협을 받았으며, 또한 유대인들을 기독교로의 개종을 방해하는 것은 화형에 해당하는 범죄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두 문장은 하자르인들이 개종을 결심한 뒤 2백년간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박해의 물결이 한세기가 넘도록 얼마나 끈질기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역시 끈질기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고문을 당했으며, 결국 그들의 신앙을 고수하지 못한 이들도 종국에는 한 기독교도 연대기 작가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한 것처럼, 즉 "자신의 구토물을 먹는 개처럼" 자신들의 신앙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히브리인 작가에 의한 생생한 묘사가 바실레이오스 황제 치하의, 남부 이탈리아 오리아 Oria 의 유대인 공동체를 강제개종시키기 위해 자행된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강요했느냐고? 누구든지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거부하는 이는 올리브 방앗간의 목제 압착기 밑에 깔려서 방앗간에서 올리브 기름을 짜는 방식으로 압착을 당했다.

 

다른 유대 사료는 로마노스 황제 (위에서 살펴본 마수디의 기록에서 "그리스 왕" 이라고 언급된 황제) 치하에서 벌어진 박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즉위한 왕은 그들을 파괴가 아닌, 그들 나라에서 내쫒는 '자비로운' 방식으로 박해했다." 

   

이렇게 고향을 등지고 달아다는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유대교로의 개종 전후를 막론한 하자리아의 존재였습니다. 즉 하자리아는 개종 전에는 난민들의 천국이었으며, 개종 후에는 일종의 새로운 민족적 고향이 되었습니다. 난민들은 보다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왔으며, 또한 이미 언급된대로 아랍인 연대기 작가들을 크게 감명시켰던 사해 동포주의와 관용의 정신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도 의심할 바 없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 -그리고 의심할 바 없는 그들의 전도의 열성- 은 그들의 모든것을 궁정과 사회 지도층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전도노력에 신학적인 논쟁과 메시아의 예언에다 하자르인들이 "중립적" 인 종교를 받아들임으로서 얻게 될 정치적 이익에 대한 그럴듯한 설득을 혼합시켰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의 이주는 하자르인들에게 비잔티움 예술과 기술, 그리고 진보된 농업과 상술과 히브리 알파벳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이전 시기에 하자르인들이 사용한 문자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지만, 적어도 이븐 나딤 Ibn Nadim 이 서기 987년경에 서술한 일종의 만국 서지학 기록인 피흐리스트 Fihrist 에 의하면, 당시의 하자르인들은 히브리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두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니, 하나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학문적인 기록들을 작성하는 것이고 (서방에서 라틴어를 공용어로 쓴 것처럼), 다른 하나는 이러한 문자로 하자리아에서 사용된 다양한 언어를 표기한 것 (라틴 알파벳으로 서방의 다양한 언어를 표기한 것처럼) 입니다. 그리고 하자리아에서부터 이러한 히브리 문자가 인근 지역으로 퍼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되어 Chwolson은 보고하기를 "비 셈계 언어 (어쩌면 두가지 이상의 비 셈계의 언어) 를 히브리 문자로 표기한 비문이 크리미아의 파나고리아와 파르테니트 지역의 묘비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아직 해독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비문은 역사가들 사이에 악명높은 피르코비치 Firkovitch 의 위조품들과는 다른 부류에 속하는 것입니다.) "라는 언급을 남겼습니다. (크리미아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간헐적으로 하자르인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역시 먼 옛날 건설된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으며, 또한 그 비문은 어쩌면 하자르인들의 개종 전에 제작된 물건일지도 모릅니다.) 그 밖에 키릴 알파벳으로 기록된 몇몇 히브리어 서간들 (shin 과 tsadei) 도 발견되었으며, 게다가 12세기에서 13세기의 물건으로 추정되는 많은 폴란드 은화가 발견되었으니, 여기에는 폴란드어가 히브리 문자로 세겨져 있으며, 이것과 나란히 폴란드어가 라틴 알파벳으로 세겨진 은전도 있습니다. 이 유물들에 대해 폴리악은: "이 동전들은 히브리 문자가 하자리아에서 인근 슬라브 나라들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이러한 동전의 사용은 종교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는 그 위정자들이 딱히 유대인들을 고려했다기 보다는, 많은 폴란드인들이 로마자보다는 이러한 유형의 문자에 친숙했기에 이러한 화폐를 주조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비록 개종이 의심할 바 없이 기회주의적인 동기 -교활한 정치적 행동-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개종은 이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많은 문화적 발전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 문자는 하자리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3세기 후에 다가온 하자르 국가의 몰락의 시기에는 메시아적인 시오니즘의 물결이 자주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다비드 알 로이 (디즈라엘리가 쓴 소설의 주인공) 와 같은 유사 메시아가 나타나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돈키호테식의 십자군 원정을 시도했습니다.

 

737년에 아랍인에게서 패배를 맛본 뒤, 카간이 강요당했던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곧 취소되었기에 백성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교로의 자발적인 개종은 영구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2

 

유대교로의 개종 과정은 온갖 전설에 가리어 분명하지 않은점들이 많습니다만, 아랍과 히브리 사료들은 몇가지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알 마수디가 남긴 하자리아의 유대인 법률에 관한 기록은 그의 이전의 저작에 관한 언급과 함께 끝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당대의 분위기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마수디의 이전 저작들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저작에 기반을 둔 두 기록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기록인 디마스키 (1327년에 작성) 의 기록에는 하룬 알 라시드의 시대에 비잔티움 황제가 유대인들의 이주를 강요했다는 사실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이에유대인들은 하자르인들의 나라로 이주했으니, 거기서 그들은 "영리하지만 교육을 받지는 못한 민족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선사했다. 원주민들은 그 종교가 자신들의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고 합니다.

 

두번째 기록은 알 바크리 al-Bakri 가 작성한, '왕국들과 도로에 대한 책 Book of Kingdoms and Roads' (11세기에 작성) 에 기록된 훨씬 자세한 언급입니다.

 

이전에 이교를 신봉했던 하자르인들의 왕이 유대교로 개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는 애초에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른 사료는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것의 허위성을 인식했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를 매우 근심하게 만들었다. 이에 왕은 이 문제를 자신의 고위 신료들과 의논했다. 그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오, 왕이시여, 성서의 유산은 세 그룹에게 나뉘어져 있사옵니다. 그들을 각각 불러들이시어,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시고 그들 중 진실을 말하는 이의 의견을 따르십시오."

 

그래서 그는 기독교도들에게 주교를 보내달라고 명했다. 왕이 주재한 논쟁의 자리에는 논쟁에 능한 한 유대인이 왕의 옆에 있었으니, 그는 이 논쟁을 위해 준비를 단단히 했었다. 그가 주교에게 물었다. "당신은 암란 Amran 의 아들인 모세와 그에게 계시된 토라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에 주교는 대답했다. "모세는 예언자이며, 토라는 진실을 말하고 있소." 그러자 그 유대인은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미 제가가진 신앙의 진실성을 인정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그가 믿는 바를 질문해 보시옵소서." 이에 왕은 주교에게 물었고 그는 대답했다. "나는 메시아인,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증언하니, 그는 말씀이시요, 주의 이름으로 진실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이 하자르인들의 왕에게 말했다. "그는 저의 신조를 인정하면서도 제가 알지 못하는 교리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교는 자신의 주장을 고집할 정도로 심지가 굳지 못했다. 그러자 왕은 이번에는 무슬림들에게 학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니, 여기에 불려나온 현명한 이는 논쟁에 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유대인은 그의 여정동안에 그를 독살할 사람을 고용했기에 그는 죽고 말았다. 이렇게 그 유대인은 왕에게 자신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성공했으며, 이에 왕은 결국 유대교로 개종했다.

 

아랍 역사가들은 분명히 쓴 약을 달게 만드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무슬림 학자가 논쟁에 참여했을지라도 그는 주교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의 진실을 인정했을 것이기에 주교와 마찬가지로 함정에 빠졌을 것이며, 반면 신약성서와 코란의 지지자들은 각각 2대 1의 투표차로 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왕이 이러한 논법을 승인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그는 오직 그 세가지 사상이 공유하고 있는 교의 -그들의 공통분모- 만을 받아들였으며, 라이벌들이 주장하는 그 밖의 주제에 자신이 휘말리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렇게 중립의 원칙은 신학의 문제에도 다시한번 적용된 것입니다.

 

베리교수가 지적한대로 이 이야기는 하자르 궁정에서의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개종 전에도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니, 논쟁을 한 유대인이 이미 "그(왕)와 함께" 있었던 것에 반해 주교와 무슬림 학자들인 "파견되었던" 것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3

 

이제 우리는 개종과 관련된 주요 아랍 사료 (마수디와 그의 동료들의 것) 로부터 주요 유대 사료로 눈을 돌려보려 합니다. 이것들은 이른바 "하자르 편지" 라고 불리는 것인데, 코르도바 칼리프의 유대인 재상인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 Hasdai Ibn Shaprut 와 하자르인들의 왕인 요시폰 Joseph 의 필기자에 의해 기록되어 교환되었던, 히브리어로 쓰여진 서한들입니다. 이 서신들의 진정성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오늘날에는 후대의 필사자들에 의한 변형을 참작하여 인정되곤 합니다.

 

이 서신들의 교환은 아마도 954년에서 961년 사이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는 대략 마수디의 기록이 이루어졌던 시기와 일치합니다. 이 서신들의 중요성을 인정하기에 앞서,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논해야 할 것인데, 그는 아마도 스페인에 거주했던 유대인들의 "황금시대 (900-1200년 경)" 가 배출했던 가장 걸출한 인물로 생각됩니다.

 

929년에, 옴마야드 왕조의 일원이었던 아브드-알-라만 3세 Abd-al-Rahman III 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와 중부의 무어인들의 영토를 통일시킴으로서 서방 칼리프국을 건설했습니다. 그의 도읍인 코르도바는 아랍 스페인의 영광스러운 도시가 될 참이었으며, 또한 사십만권의 책이 꽂힌 도서관 등으로 유럽 문화의 새로운 중심이 될 것이었습니다. 하스다이는 910년, 코르도바의 한 유대인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의사로 일하면서 보여준 뛰어난 의술덕분에 칼리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아브드-알-라만은 그를 궁정의사로 임명했으며, 점점 그의 판단력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다가, 나중에는 외상으로 일하면서 이 새로운 칼리프국과 비잔티움, 독일황제 오토, 카스티야, 나바라, 아르콘, 기타 북부 스페인의 다른 기독교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복잡한 외교 문제의 해결사로서 활동했습니다. 하스다이는 르네상스 이전의 진정한 만능인 uomo universale 이었으니, 그는 국사에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의학서적을 번역하기도 했고, 바그다드의 박식한 랍비들과 사신교환을 하기도 했으며, 히브리 문법학자와 시인들의 마에케나스 (로마시대의 문학, 예술의 보호자) 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분명 계몽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사람이기도 했으니, 그는 자신이 수행하는 외교적 접촉을 세계의 여러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활용하기도 했으며 가능한 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로마노스 황제 치하의 비잔티움 제국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 (전술, 챕터 1참조) 를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다행히 그는 비잔티움 궁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는 비잔티움이 동방 무슬림들에 대한 원정을 벌이고 있는 동안 코르도바가 제국에게 보여준 우호적인 중립적인 태도와 큰 관련이 있었습니다. 하스다이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많은 협상을 통해 비잔티움 유대인들의 처지를 개선하는데 사용했으며, 이는 다소간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하스다이는 페르시아의 쿠라산 Khurasan 에서 온 상인들에 의해 독립된 유대왕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전해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는 그 이야기의 사실성을 의심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코르도바에 파견된 비잔티움 외교단의 일원에게 그 문제를 질문했으며, 이에 그들은 하자르 왕국에 대한 상당한 분량의, 사실에 입각한 세부사항 -당대의 왕의 이름인 요시폰을 포함하여- 을 알려줌으로서 그 상인의 이야기를 보증해 주었습니다. 이에 하스다이는 밀사에게 서신을 들려보내어 요시폰 왕에게 파견했습니다.

 

이 편지 (이것들은 나중에 좀더 자세하게 논의하겠습니다.) 에는 하자르국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었으니, 그 민족들, 정부체제, 군대 기타등등과 함게 요시폰 왕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 어느 지파에 소속되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하스디가 이들 하자르 유대인들을 자신들 스페인 유대인들처럼 팔레스타인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생각했으며, 또한 하자르인들이 옛 지파들 중 하나를 대표한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후손이 아닌 요시폰은 어떠한 지파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스다이에게 보낸 답장에는 우리가 살펴볼 바와 같이 완전히 다른 가계가 설명되어 있었지만, 그가 하스다이에게 보낸 답장의 주된 내용은 당시로부터 2세기 전에 벌어진 개종과, 그것을 이끈 상황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입니다.

 

요시폰의 답장은 자신의 선조에 대한 찬송으로 시작하고 있으니, 위대한 정복자이자 현자였던 불란 Bulan 왕은 "자신의 영토로부터 마법사들과 우상숭배자들을 몰아냈다." 고 합니다. 그 후 불란왕의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났으니, 천사는 그가 유일한 참된 신을 숭배할 것을 권고하면서 그 대가를 약속하기를 "불란의 자손들을 번성하고 번창하게 할 것이며, 그의 적들이 그의 손안에 들어오게 할 것이며, 그의 왕국이 세상 끝까지 이르게 하겠다" 고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창세기의 계약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은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그들 하자르인들이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과 계약을 맺은 선택받은 민족임을 주장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요시폰의 이야기는 돌발적인 방향변화를 보여줍니다. 분명 불란왕은 기꺼이 절대자를 받들고 싶어했지만, 그는 곧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여, 당신은 가장 현명한 분이시여, 나의 심장에 머무르시는 비밀스런 마음이시요, 나의 당신에 대한 신뢰를 굳게 하시고자 나의 속을 살펴들여다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오나, 제가 다스리는 신민들은 이교 신앙을 숭배해 왔으며, 저는 그들이 저를 따를지 확신하지 못하겠나이다. 만약 제가 당신의 눈에서 호의와 자비를 찾을 수 있다면, 모쪼록 저를 조력할 수 있을, 그들의 대군주의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내시기를 또한 간청하나이다.

 

영원하신 분께서는 불란 왕의 간청을 허락하셨으니, 꿈에 이 군주에게 나타나시었으며 아침이 되어 왕이 일어나자, 왕에게 다가오셔서 이 사실을 그에게 선포하셨소..

 

이렇게 개종을 위해 하늘의 대군주의 승낙이 얻어져야 했다는 이야기는 창세기나, 개종에 대한 아랍인들의 다른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틀림없이 하자르인들의 이중왕권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대군주" 는 아마도 베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왕" 이 베크요 "대군주" 가 카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아랍과 아르메니아 사료에 따르면, 731년 (개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로부터 몇년 전) 에 트란스 코카서스를 침공한 하자르 군대의 지휘관은 "불칸 Bulkhan" 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요시폰의 편지는 왕의 꿈에 천사가 다시금 나타나, 주께서 거주할 신전을 지으라고 명령하는 부분으로 이어집니다.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들도 나를 담기에는 충분히 넓지 않도다." 이에 불란은 망설이면서 "물론 그것을 짓는 것은 저의 의무이자 기쁨이지만" 자신은 그러한 사업을 펼치기에 필요한 금과 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다음과 같이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이제 불란이 해야 할 일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금은보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르메니아의 다리엘라 Dariela 와 아르다빌 Ardabil 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개종전에 벌어진 불란, 혹은 불칸의 침공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랍 사료에 따르면 하자르인들은 한때 코카서스의 금광과 은광을 차지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쨋든 불란은 천사가 그에게 일러준대로 했으며, 약탈물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돌아가 "지금까지 전해지며 여전히 나 (요시폰) 의 소유물로 남아있는 신성한 궤 (언약의 궤) 와 촛대, 제단, 그리고 성물들이 비치된 신전을 세웠소." 고 합니다.

 

이러한 기록에서 주장하고 있는 사건이 벌어진 뒤의 2백년이 지난, 즉 10세기 전반부에 작성된 요시폰의 편지는 분명히 사실과 전설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의 묘사에 나타난, 성전에 비치된 빈약한 가구들과, 보존된 성물들의 빈약함은 그 (요시폰) 가 서간의 다른곳에서 언급한 당시 자신의 나라가 누리고 있는 번영의 모습과 현저히 대조되는 것입니다. 그의 조상인 불란의 시대는 그에게 먼 옛날 이야기로 여겨지고 있으니, 사실 가난하지만 덕망있는 왕 (불란) 은 실제로는 성전을 지을 돈이 없었습니다. 결국 성전은 사실 하나의 천막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요시폰의 편지에 나와있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지 개종의 실제역사에 앞선 전주곡에 불과하니, 그는 개종을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불란이 "유일한 참된 신" 의 뜻에 따라 우상숭배자들을 재통합한 것은, 이를 위한 첫걸음에 불과했으며, 하자르국에는 여전히 세 일신교 신앙을 선택할 기회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요시폰의 편지가 전해주는 사항들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무공 (아르메니아 침공) 을 세운 뒤, 불란 왕의 명성은 여러 나라에 뻗어 나갔소. 에돔 (비잔티움) 의 왕과 이스마엘 (무슬림들을 뜻함.) 들의 왕은 이 소식을 접하고는 귀중한 보물과 돈, 그리고 그를 자신들의 신앙으로 개종시킬 학자들을 포함한 사절단을 보냈소. 하지만 왕은 현명했으니, 지식이 풍부하고 통찰력이 있는 유대인을 불러와 이 세 종교의 대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들의 교의에 대한 논쟁의 장을 마련했소.

 

여기서 우리는 무슬림 학자가 독살당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마수디가 기록한 것과 같은, 질문에 즉석으로 대답해주는 전문가 집단 혹은 원탁회의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논쟁의 패턴역시 마수디의 기록과 아주 흡사합니다. 길고 무익한 토론끝에 결국 왕은 논쟁을 사흘뒤로 연기했으며, 그동안 참가자들은 각자의 천막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왕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토의자들을 따로따로 소집했다. 그는 기독교도에게 나머지 두 종교중 어느 종교가 진실에 가깝냐고 물었으며 기독교도는 "유대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무슬림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같은 대답을 얻었습니다.. 즉 중립주의가 다시한번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4

 

지금까지 개종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살펴보았군요. 그 외에 우리가 이 유명한 "하자르 편지" 에서 알아낼 수 있는 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하스다이의 편지를 봅시다. 그의 편지는 히브리어 시로 시작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최신의 스타일로 쓰여진 피유트 Piyut, 즉 은근한 암시나 수수께끼, 그리고 자주 아크로스틱 (언어유희) 가 포함되곤 했던 서사시적 싯구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이 싯구는 수신자인 요시폰 왕의 군사적 승리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각 행의 첫 문자들은 아크로스틱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니, 그것들을 한자한자 읽으면 하스다이의 비서요 부하이자 문법학자이고 사전 편찬자였던 당대의 한 유명한 히브리 시인인 므나함 벤 샤룩 Menahem ben Sharuk 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화려한 문체로 요시폰 왕에게 보내는 서신의 초안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이로서 그는 그의 후원자 이름 다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아크로스틱에 추가함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불후의 것으로 만들 기회를 잡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메나헴 벤 샤룩이 작성한 몇몇 다른 작품들이 현존하고 있는데, 그중 일부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작성한 하스다이의 편지임에 틀림없습니다.

 

시가 끝난 다음에는 의례적인 인삿말들과 외교적인 미사여구가 이어지고 있는데, 후자는 무어 스페인의 번영과 칼리프 아브 알 라흐만 치하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행복한 환경을 찬양하는 언급이니, 그는 여기서 "이러한 일은 분명히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길잃은 양들은 보살핌을 받으며 박해의 손은 마비되어 있으며, 멍에는 벗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히브리어로는 세파르드 Sepharad 라고 불리고 있는데, 반면 이곳에 사는 이스마엘의 자손들 (무슬림들) 은 이 나라를 알-안달루스 al-andalus 라고 부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하스다이는 어떻게 그가 쿠라산에서 온 상인들로부터, 그 다음에는 비잔티움 사절들로부터 유대 왕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었는지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그 사절들이 자신에게 전해준 바를 적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 (비잔티움인들) 에게 그것을 물었으며, 이에 그들은 그 이야기가 사실이며, 그 왕국의 명칭이 알-하자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비잔티움 사절단의 시점)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나라까지는 해로 (이것은 이른바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하여 흑해를 건너 돈강에 도착한 후 돈강과 볼가강 사이의 육운陸運 을 거쳐 볼가강에 들어가 이틸에 이르는 "하자르 길" 일 것입니다.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지름길로는 콘스탄티노플을 출발, 흑해의 동안에 내리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로 보름이 걸리지만 육로로 가자면, 우리와 그 나라 사이에 많은 다른 민족들이 위치하고 있다오. 그 나라의 군주의 이름은 요시폰이요. 그들의 나라 (하자르) 에서 출항한, 생선과 모피, 그리고 온갖 종류의 상품을 실은 배들이 비잔티움으로 온다오. 그들은 우리 (비잔티움) 들과 동맹을 맺고 있으며, 우리들의 찬탄의 대상이오. 우리는 그들과 대사들과 선물들을 교환하오. 그들은 강력하며, 국경지대에 요새 (이 요새는 돈강 유역의 사르켈 요새임이 거의 분명합니다.) 를 가지고 있소. 그들의 군대는 때때로 약탈을 위해 길을 떠난다오.

하스다이가 하자르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와같이 그 왕의 국가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굳이 언급한 것은 분명히 요시폰으로부터 더 자세한 정보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이것은 좋은 심리학적 접근방식이었습니다. 하스다이는 분명히 사람을 거치면서 잘못 전해지기 쉬운 정보에 대한 비평방법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다음에 하스다이는 요시폰과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 자신이 처음에 동원했던 노력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이삭 바 나탄 Isaac bar Nathan 이라는 사자에게 하자르 궁정까지의 여로를 알려주며 하자르로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콘스탄티노플까지밖에 나아가지 못했으니, 거기서 비록 그는 예의바르게 처신했지만 여행을 계속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제국의 유대인 왕국에 대한 당대의 태도를 고려할 때 이해할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자리아와, 하스다이를 통해 코르도바 칼리프국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분명히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흥미거리가 아니었을 겁니다.) . 그래서 결국 하스다이의 사자는 스페인으로 돌아왔으며, 임무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다른 기회가 찾아왔으니, 동유럽에서 온 사절단이 코르도바에 도착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 중 두 사람, 즉 마르 사울 Mar Saul 과 마르 요셉 Mar Joseph 은 유대인이었으며, 그들은 하스다이에게 그의 서신을 요시폰에게 전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스다이에게 보내진 요시폰의 답장에 따르면, 실제 서신의 왕래는 제 3의 인물인 이삭 벤 엘리제르 Isaac ben Eliezer 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

 

이렇게, 자신이 어떻게 이 편지를 썼으며, 이 편지를 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세하게 밝힌 마스다이는 하자르인들의 땅의 모든점에 걸친 정보에 대한 그의 갈망을 보여주는, 일련의 직접적인 질문을 왕에게 하고 있으니, 이는 그 나라의 지리학적 특징에서부터 안식일을 통해 알 수있는 그들의 종교의식에까지 걸쳐 있습니다. 한편 하스다이의 편지의 맺음부분은 그 시작부분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로 이 세상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그 누구의 속박도 받지않고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나라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만약 이곳이 바로 그러하다면, 저는 제 모든 명예를 포기하고, 저의 높은 관직을 그만두고, 저의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나의 주군이신 (유대인) 왕이 계신 곳에 도착할 때까지 산과 평야, 땅과 바다를 건너가며 여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쪼록, 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떠돌아 다니면서도 잊지않고 고대하는 최후의 기적 (메시아의 도래) (의 시기) 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부디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흩어져 살면서 당하는 불명예와 치욕에 대해, 우리는 이와같이 조용히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모든 민족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가질 것이나 너희들만은 이세상 국가의 그림자도 가지지 못하리라."

 

이렇게 그의 편지의 서두는 스페인에 사는 유대인들의 행복함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지만, 그 끝은 추방된 삶의 고단함과 시온주의자들의 희망,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희망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반된 심정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 모든 유대인들의 가슴속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하스다이의 편지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모순은 그 편지의 진실성을 더욱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한편 그가 하자르 왕에게 봉사하겠다고 제안한 언급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는 이와 다른 문제이며, 아무도 해명하지 못할 문제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 자신도 정답을 알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요.

 

요시폰 왕의 답신은 하스다이의 편지보다 완성도가 떨어지며, 또한 감정적인 편지입니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카셀이 언급한대로 "학문과 문화는 볼가강 유역의 유대인의 것이 아닌, 스페인 유대인들의 것이었다." 라는 것일 테지요. 답신의 하이라이트는 이미 언급한 개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위심할 바 없이 요시폰 또한 편지를 기술한 서기를 고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아마도 비잔티움에서 건너온 난민학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답변의 문체는 10세기의 정치가 (하스다이) 의 문체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운율과 비교해서 묵직한 구약성서의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이 답장은 의례적인 인삿말의 팡파레로 시작되며, 하스다이의 편지의 주된 내용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강조하기를 하자르 왕국은 "유대의 주권은 유대인으로부터 영원이 벗어났다." 그리고 "지상에는 그들 자신들의 왕국을 위한 자리가 없다." 라고 말하여 슬퍼하는 이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해 준다고 서술했습니다. 이러한 편지는 다소 신비적인 분위기를 띠는 "이미 우리의 아버지들은 우호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으니, 그것들은 우리의 서고들에 보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장로들을에게 잘 알려져 있소." 는 문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항은 9세기의 유대인 여행가인 엘닷 하 다니 Eldad ha-Dani 에 의해서도 기록되어 있으니, 중세시대에 많은 인기를 모았던 그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하자리아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자리아에는 이스라엘의 사라진 세 지파가 살고 있으며, 주위의 28개의 왕국들에게서 공물을 받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엘닷은 880년경에 스페인을 방문했지만, 하자르국의 방문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스다디는 요시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가 쓴 이 이야기의 사실여부도 묻고 있습니다.) .

 

그 다음 요시폰은 자신의 백성들의 혈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열렬한 유대 민족주의자이자 "유다의 권세" 을 휘두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요시폰이지만, 그는 자신이 샘계 혈통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었으며,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조를 솀에게서 찾지 않았으며, 노아의 셋째아들 야벳에게서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대신 자신의 가계를 더욱 까다롭게, '야벳의 손자이자 모든 투르크 부족들의 선조' 인 토가르마 Togarma 에서 찾았습니다. 요시폰은 다음과 같이 뻔뻔하게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들의 가계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소. 토가르마는 열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소.:위구르, 두르수, 아바르, 훈, 바실리, 타르니아크 Tarniakh ,하자르, 자고라, 불가르, 사비르가 그들이요. 우리는 그중 일곱째인 하자르의 후손들이오..(아놔)"

 

이러한 부족들의 이름이 히브리 문자로 적혀져 있는 모습은 다소 수기묘하게 보일 테지만, 그것은 별 문제가 될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가계보에서 보여지는 특징은 창세기 이야기와 투르크 부족 전승이 융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가계를 소개한 다음, 요시폰은 다뉴브 강에까지 이어진 선조들의 군사 정복활동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불란의 개종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이 날로 부터" 라고 요시폰은 말했습니다. "주께서는 그분에게 힘을 주셨으며 그분을 도우셨소. 그분은 자신과 그 신하들에게 할례를 베풀었으며 유대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계명들을 설명해 줄 현자를 청하셨소." 그 뒤에는 군사적 승리라든지, 민족들의 정복등에 대한 자랑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구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 후, 그 분 (불란) 의 손자 중 한명이 왕이 되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오바디아브 Obadiab 였소. 그는 용감하고 존경받는 분이셨으니, 그 분은 통치를 개혁하고 전통과 실용성에 의거하여 법령을 강화시켰으며, 시나고그와 학교들을 세우시고 많은 이스라엘의 현자들을 조직하셔서 그들에게 금과 은을 관대하게 내리셨으며 그들에게 스물 네권의 책 (구약성서) 과 미슈나 (율법), 탈무드와 기도문들이 적힌 규율서들을 번역하게 하셨소.

 

이것은 불란 사후 몇 세대 후에 종교적인 부흥, 혹은 개혁이 일어났음 (전술한 아르타마노프의 설명에 따르자면 쿠데타에 수반된) 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보건데, 하자르인들 가운데서 이루어진 유대인화는 몇가지 단계를 거쳤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위에서 불란왕이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마법사들과 우상숭배자들" 을 추방했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중 어느 종교를 선택할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참된 신" 을 믿겠다고 서약한 것을 보았습니다. 불란왕과 그의 추종자들의 개종은 또다른 중간단계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이로서 그들은 오직 구약성서에만 기반을 두고 탈무드나 기타 랍비문학들을 배제한 원시적, 혹은 초보적 형태의 유대교를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당시의 계율들은 성서에서 직접 비롯된 것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그들은 8세기에 페르시아에서 기원하여 전세계의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소 하자리아" 즉 크리미아에서 위세를 떨쳤던 근본주의적 종파인 카라이트인 Karaites 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던롭과 몇몇 다른 권위자들은 가정하기를, 불란과 오바디아 Obadiah (대략 740-800년경) 의 치세 사이에 카라이트인들의 교의 Karaism 의 한 형태가 이 지역에서 우세했으며, 정통 "랍비" 유대교는 오바디아의 종교 개혁의 과정에서 소개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관점은 카라이트인들의 교의가 하자리아에서 끝까지 살아 남았으며, 명백히 하자르 기원을 가진, 터키어를 말하는 카라이트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때 다소간의 중요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카라이트파 유대인

 

이렇게 애초에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된 하자르인의 유대인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으니, 이는 천천히 그들의 마음속을 관통했으며, 마침내 국가의 쇠퇴의 시기 즈음에는 극단적인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에 대한 헌신은 국가의 붕괴를 막아 주었으며,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바와 같이 후의 러시아와 폴란드의 하자르-유대인 공동체에서도 끈질기게 고수되었던 것입니다.

 

6

 

요시폰은 오바디아의 종교개혁을 언급한 후, 그의 후계자들의 명단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 분 (오바디아) 의 후계자는 아들인 히스키아 Hiskia 였고, 그 다음은 그의 아들은 므낫세 Manasseh 였으며, 그 후계자는 오바디아의 동생 하누카 Chanukah 이고, 그의 후계자는 그의 아들인 이삭 Isaac 이었고, 그 후계자는 그의 아들인 므낫세였고, 그 후계자는 그의 아들인 니시 Nissi 였으며, 그 후계자는 아들 므나함 Menahem 이었으며, 그 후계자는 아들 베냐민 Benjamin 이었으며, 그 후계자는 아들 아론 Aaron 이었으며, 그 후계자는 아론의 아들, 바로 본인인 축복받은 요시폰이니, 우리모두는 왕의 자손들이며 다른 이들은 우리 선조들의 옥좌를 차지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오.

 

그 다음 요시폰은 하스다이가 물은, 자신의 나라의 크기와 지형학적 특징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궁정에 아랍 지리학자의 실력에 필적할만한 우수한 인재를 거느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며, 다른 나라들과 민족들에 관한 그의 애매한 설명은 우리가 이븐 하우칼, 마수디, 그리고 다른 페르시아나 아랍 사료에서 살펴본 자료들보다 그다지 더 자세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자신이 서른 일곱개의 민족들로부터 조공을 받는다고 썼는데, 이것들은 아마도 통행료라고 보는것이 좀더 적당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던롭교수는 이들 중 아홉 민족은 하자르국의 심장부에 사는 부족들이며, 나머지 스물 여덟 부족은 앞서 언급한 이븐 파들란이 언급한 (그리고 엘닷 하 다니 의 의심스러운 이야기) , 각각의 가신국 군주의 딸로 이루어진 스물 다섯명의 부인의 이야기와 상당히 잘 부합되는 사항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우리는 드네프르 강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지역의 여러 부족들이 앞에서 살펴볼 바와 같이 하자르인들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요시폰의 편지에는 왕실의 하렘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대신 한명의 왕비와 그녀에게 딸린 시녀들과 환관들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요시폰의 수도인 이틸에 있는 세 지역 중 한 지역에 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지역에는 이스라엘인들과 이스마엘 (이슬람교도) 인들과 기독교도들과 기타 다른 언어를 말하는 민족들이 산다오. 세번째 지역은 섬인데, 나는 이곳에서 왕자들과 나에게 속한 하인들과 노예들과 함께 산다오. 우리는 겨울동안 마을에 머물지만 니산 Nisan 의 달 (3월-4월경) 이 되면 우리는 길을 떠나 자신의 농장과 토지에서 일을 하러 간다오. 모든 혈족들이 자신들의 세습 토지를 가지고 있으니, 거기서 그들은 즐거움과 환희에 가득차 함께 일을 한다오. 거기서는 침입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적의 모습을 볼 수 없소. 그 지역은 비가 아주 많이 오지는 않지만, 큰 물고기가 무수히 잡히는 많은 강이 흐르고 있으며, 많은 자원이 묻혀 있소.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농장과 포도밭과 채소밭, 과수원은 비옥하고 기름지며 그것들은 강물로 관개되어 있으며 풍성한 과실이 열린다오.. 이렇게 나는 신의 은총속에서 평화속에 살고 있는 것이오."

 

편지의 그 다음 부분은 메시아의 도래시기에 대해 할당되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시온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예루살렘과 바빌론의 현인들에 주목하고 있소. 하지만 우리는 메시아의 도래가 우리의 끝없는 죄 때문에 늦춰지고 있다고 들었으며, 또한 영원하신 분만이 그 날을 알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소. 우리는 오직 다니엘 예언자의 예언에만 매달릴 뿐이니, 부디 영원하신 분께서 우리들의 구출을 앞당기시기를..

 

요시폰의 편지의 결말은 하자르 왕에게 복무하고 싶다는 하스다이의 제안에 대한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편지에서 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였소. 나 역시 당신의 고귀한 얼굴과 당신의 장엄한 광휘와 지혜와 위대함을 보고 싶소. 나는 당신의 제안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니, 당신을 포옹하고 친근하고 상냥한, 친애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나의 희망이오. 당신은 나를 아버지처럼 여겨도 좋으며, 나 또한 당신을 자식처럼 여길 것이오. 나의 모든 백성들이 당신의 입술에 입을 맞출 것이오. 우리는 그대의 지혜와 현명한 조언으로 번영을 이룰 것이오.

 

 

 

 

요시폰의 편지에는 당면한 정치적인 주제를 담은 부분도 있는데, 그것은 다소 불명료한 문체로 씌여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조력으로, 나는 강 (볼가강) 어귀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 곳을 아랍인들의 땅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배를 타고오는 루스인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오.. 나는 그들 (루스인) 과 격전을 벌이고 있으니, 만약 내가 이들에게 굴복한다면 그들은 심지어 바그다드까지 포함한 이스마엘의 아들들 (이슬람) 의 땅을 황폐화시킬 것이오.

 

여기서 요시폰은 노르만-루스 약탈자들에 맞서서 바그다드 칼리프국의 수호자로서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일한 상황은 코르도바의 옴마야드 칼리프국과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 사이의 맹렬한 적대감을 고려할 때 다소 눈치없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인즉슥, 하자르인들에 대한 비잔티움 정책의 변덕스러움은 요시폰으로 하여금 두 칼리프국 사이의 분열을 고려할 여지도 없이 이슬람의 수호자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그는 노련한 외교관인 하스다이의 존재에 희망을 걸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간의 만남은 -그들의 어조가 아무리 진지했더라도-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더 이상의 편지도 -만약 더 이상의 서신 교환이 있었다면-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습니다. 사실, 이 "하자르 편지" 에서 얻을 수 있는 사실자료는 빈약하며, 이미 기존의 사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료에 약간의 정보만을 추가해 줄 따름입니다. 이 편지의 매력은 그 이상야릇함, 그리고 그 시기를 가리고 있는 농무의 구석을 비추는 변덕스러운 탐조등과 같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파편적인 광경에 담겨 있습니다.

 

7

 

히브리어 사료중에는 "캠브리지 문서 (이 문서의 현재 소재지가 캠브리지 대학 도서관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 라고 알려진 것이 있습니다. 이 문서는  캠브리지 대학의 연구원인 솔로몬 젯쳐 Solomon Schechter 에 의해 "카이로 게니차 Cairo geniza" 라고 알려진, 고대 시나고그의 저장고에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다른 문서들과 함께 지난세기 말엽에 발견된 것입니다. 이 문서의 보존상태는 좋지 못합니다. 이 문서는 히브리어로 100줄 정도 쓰여진 편지 (혹은 편지의 필사본) 인데, 그 도입부분은 현재 망실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를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요시폰 왕은 여기에서 동시대 인물로 묘사되어 있는 동시에 "나의 주군" 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또한 하자리아는 "우리의 땅" 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이 편지가 요시폰 왕의 치세때 요시폰 왕의 궁정에서 하자르 유대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는 것인데데, 그렇다면 이 편지는 앞서 살펴본 "하자르 편지" 와 대략 동시대의 문서일 것입니다. 몇몇 권위자들은 이 가설에서 더 나아가 이 편지가 하스다이 이븐 샤푸르에게 보내진 것이니, 이 편지는 하스다이가 보낸 하자리아에 들어가는 데 실패한 그의 사자인 이삭 바 나탄에게 건네졌으며, 그는 이 편지를 가지고 코르도바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 편지가 카이로에서 발견되었느냐고요? 아마도 후대에 스페인의 유대인들이 추방당하면서 이 편지도 함께 옮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 어쨋든, 여러가지 정황으로 살펴볼 때, 이 문서의 작성시기는 적어도 11세기 이후로 넘어가지는 않으며, 그보다는 요시폰의 생존시기였던 10세기로 추정됩니다.

 

여기에는 개종에 대한 다른 전설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래도 그 주된 주제는 정치적인 사항에 관한 것입니다. 이 편지의 필기자는 요시폰왕의 부왕인 축복받은 아론의 치세때에 하자리아가 비잔티움인들의 선동을 받은 알란인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그리스나 아랍 사료에는 이러한 전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콘스탄티노스 포르피로게니토스 시대인 947-50 년에 기록된 '제국의 행정에 대하여 De Adminisdrando Imperio' 에는 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기록자의 언급에 다소간의 신뢰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구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자리아에 대해서, 어떻게 전쟁이 그들에 대해 벌어졌으며, 공격자들이 누구인지 쓰겠다. 구즈인들이 그들 근처에 사는 연유로 하자르인들에 대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것처럼, 알라니아에서 가까운 하자리아의 아홉 지역 (코카서스 북부의 비옥한 지역들) 의 존재 때문에 알란인들의 지도자와 알란인들은 만약 그가 원한다면 그곳으로 쳐들어가서 그 지역의 하자르인들에게 심대한 피해와 곤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요시폰의 편지를 보면 알란인들의 지도자가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가 조공을 바쳤든 아니든간에 그가 카간에게 느끼는 감정은 불가르인들의 왕 (역주/위에서 언급한, 자신의 딸을 강제로 바쳐야 했던) 의 감정과 굉장히 흡사했을 겁니다. 알란인들을 부추겨 하자르인들에 대한 전쟁을 선동했음을 암시하는 콘스탄티노스의 저 문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일한 목적을 가졌던 이븐 파들란의 임무중 하나를 상기시킵니다. 분명히 비잔티움인들과 하자르인들간의 친선관계는 요샙의 시대에는 먼 옛날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더 이상의 이야기는 챕터 3 에서 계속하도록 합시다.

 

8

 

"하자르 편지" 와 아마도 동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캠브리지 문서가 작성된지 약 1세기 후에 예후다 할레비 Jehuda Halevi 는 사후에 쿠자리 Kuzari, 즉 '하자르인들' 이라는 유명한 책을 출판했습니다. 할레비 (1085-1141) 는 일반적으로 스페인 최고의 유대 시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 책은 애초에 아랍어로 쓰여졌으며 후대에 히브리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책의 부제는 "멸시받는 신앙의 수호에 대한 증거와 논의에 대한 책" 입니다.

 

 

라틴어판 쿠자리 

 

할레비는 시오니스트의 일원이었으며,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가는 도중에 세상을 떳습니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쿠자리는 유대민족이 신과 나머지 민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매개체라는 시각에서 쓰여진 철학적 소책자입니다. 이에 따르면 역사의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은 유대교로 개종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자르인들의 개종은 이러한 궁극적인 운명의 상징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할당된 하자르 국가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설명은 주로 왕, 천사, 유대인 학자 등등.. 그리고 왕과 세 종교의 지도자들 간의 철학적, 신학적 대화와 같은, 개종에 대한 다른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위한 조연역할만을 담당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도 다소간 사실에 입각한 부분이 있으니, 이는 할레비가 하스다이와 요시폰 왕 사이에 오간 서간문이나 하자르국에 대한 다른자료들을 읽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천사가 하자르인들의 왕에게 나타난 뒤, 왕은 "그의 꿈에 나타난 비밀을 그의 군대의 장군에게 밝혔" 으며, "그 장군" 역시 이를 근심스럽게 생각했으니, 이는 카간과 베크에 의해 수행된 이중왕권이 대한 확실한 언급입니다. 또한 할레비는 "역사서" 와 "하자르인들의 책" 을 언급하고 있으니, 이는 요시폰 왕이 말한, 국가의 문서들에 보관된 "우리의 서고들" 이라는 언급을 되살리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할레비는 자신의 책의 다른 두 장소에서 개종의 시기를 언급하고 있으니 이는 "400년 전" 인 "4500번째 해 (유대식 역법에 의한)" 의 일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는 740년을 가리키며, 가장 그럴듯한 개종의 시기입니다. 비록 이 책에는 사실에 입각한 기록이 적긴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중세시대의 유대인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기실 중세사람들의 마음은 사실보다도 전설에 끌렸으니, 유대인들은 지리학적인 자료들보다도 메시아가 도래할 시기에 더욱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랍 지리학자들과 연대기 작가들또한 거리와 연도의 스케일에 있어 이들과 비슷한 호방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유명한 독일 유대인 여행가이자 랍비였던 라티스번의 페타시아 Petachia of Ratisbon 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는 1170년에서 1185년에 걸쳐 동유럽과 서아시아 사이를 방문했습니다. 그의 여행담인 Sibub Ha`olam, 즉 "세계일주" 는 아마도 그의 기록이나 구술에 근거하여 그의 제자가 작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이 선량한 랍비가 크리미아 북방의 하자르 유대인들의 미개한 관습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에 대해 나와 있는데, 여기서 그는 하자르인들의 이러한 관습에 대한 고집을 카라이트적 이단에 돌렸습니다.

 

..그리고 랍비 페타시아가 그들에게 물었다. "왜 당신들은 현자들의 말씀 (예를들면 탈무드..) 을 숭배하지 않는 것이요?"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조들이 그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오." 안식일 전날, 그들은 안식일 날에 그들이 먹을 모든 빵을 잘랐다. 그들은 그것을 어둠속에서 먹고는 하루를 꼬박 한 지점에 앉아 버티었다. 그들의 기도문은 오직 시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하자르인들의 영토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면서, 랍비는 매우 분개한 어조로 이 여행이 8일 걸렸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는데, 그 동안 그가 들은 것이라고는 "여자들의 통곡소리와 개들이 짖는 소리만을 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바그다드에 있을 때, 하자르 왕국에서 온 사절들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와 심지어는 이집트를 헤메고 다니면서까지 유대인 학자들을 간절하게 구하는 장면을 본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방에서 온 소수의 유대인 여행가들이 볼가강에까지 이른 모험적인 여행길에 올랐는데, 그들은 기록하기를 문명세계의 모든 중심지에서 하자르 유대인들을 만날 수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랍비 페타시아는 그들을 바그다드에서 만났습니다. 12세기의 다른 유명한 여행자였던 투델라의 베냐민 Benjamin of Tudela 은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에서 하자르인들과 만났다고 합니다. 할레비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이브라함 벤 다우드 Ibraham ben Daud 는 기롤하기를 톨레도에서 "그들 후손 중 몇몇과 만났는데, 그들은 현인의 제자들" 이었다고 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들은 하자르인들의 왕자였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를 접한 여러분 중 일부는 케임브리지로 유학보내진 인도의 소공자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그다드에 위치한 탈무드 학파를 지배하던, 동방의 정통 유대 사회 지도자들의 하자르인들에 대한 태도에는 기이한 모순이 담겨 있습니다. 엑실라크 Exilarch, 즉 "포로들의 왕" 이 얼마간의 자율적인 유대 공동체의 세속적 권력을 대표한 반면, 이 학파의 수장인 가온 Gaon (히브리어로 전하) 는 근동과 중동에 퍼져있던 유대 공동체의 정신적 수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수장들 중 가장 이름이 높았던 사댜 가온 Saadiah Gaon (882-942) 은 상당한 량의 저작물을 남겼는데, 여기에서 그는 하자르인들에 대한 언급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자리아로 이주한 한 메소포타미아 유대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이러한 일은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자르 궁정에 대해 모호한 언급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성서에 나오는 "티레의 히람 Hiram of Tyre" 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히람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왕실의 작위를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마치 "아랍인들의 지도자인 칼리프, 그리고 하자르인들의 왕인 카간과 마찬가지" 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쨋든, 하자리아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이든지 은유상의 의미이든지, 동방 유대 사회의 성직자들의 지도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자르인들은 그들의 혈통적 문제와 카라이트 이단에 오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에 의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11세기의 히브리 작가이자 그 스스로가 카라이트 일파였던 야벳 이븐 알리 Japheth ibn-Ali 는 mamzer, 즉 "사생아" 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혈통에 의한 유대인이 아닌 하자르인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반면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야곱 벤 르우벤 Jacob ben-Reuben 은 이와는 정 반대의 기록을 남기고 있으니, 그는 하자르인들을 가리켜 "추방의 멍에를 지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공물을 갈취당하지 않는 위대한 전사들"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져오는, 하자르인들에 대한 히브리어 사료를 살펴봄에 있어 독자들은 일종의 열광과 회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혹감을 느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랍비들에게 있어 이러한 투르크계 유대인들의 전사국가의 존재는 마치 할례를 받은 유니콘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흩어져 살면서, 자신들의 왕과 국가를 가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망각해 버렸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카간보다는 메시아의 도래가 더욱 현실적인 사안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개종에 대한 아랍인들과 히브리인들의 사료에 대한 후기로서, 이들보다 더 앞선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한 기독교 사료를 언급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마도 864년보다는 이른 시기에, 베스트팔렌인 Westphalian 성직자였던 아퀴타니아의 드루드마 Druthmar of Aquitania 는 라틴어 조약문인 Expositio in Evangelium Mattei 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하늘아래, 기독교도들이 찾아낼 수 없는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들이 존재하니, 그들 나라의 이름은 곡과 마곡이며, 바로 훈족의 국가를 말한다. 그들 중에서 가자리 Gazari 라고 불리는 한 무리는 할례를 받고 유대교를 온전히 그대로 준수한다." 이러한 의견은 하자르인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마태복음 24장 14절의 말씀의 인용에 관하여 나오는 것이며, 이 조약문에는 더 이상 하자르인들에 대한 언급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9

 

드루드마가 하자르 유대인들의 이단성에 대한 자신의 아는바를 기록했을 바로 그 당시에 비잔티움 황제가 보낸 한 유명한 기독교 선교사가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노력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키릴 알파벳의 발명가라고 전해지는 "슬라브인들의 사도" 성 키릴루스이었습니다. 그와 그의 형제 성 메토디오스는 슬라브인들을 전도하는 일 위에도 총대주교 포티오스 Photius (포티오스 자신이 하자르 혈통인 것으로 보이며, 황제는 언젠가 분노에 차서 그를 "하자르 대가리" 라고 부른일이 있었습니다.) 의 조언을 따른 황제 미카엘 3세에게 또다른 선교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키릴루스의 선교노력은 동유럽의 슬라브계 민족들 사이에서는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하자르인들에게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크리미아의 케르손을 통해 이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케르손에서 선교임무를 위해 6개월간 히브리어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 그는 이틸로 가기위해 "하자리아 길", 즉 돈강에서 볼가강 사이의 육운을 이용했으며, 카간을 만나기 위해 카스피해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당시 카간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 여기서 일상적인 신학적 논쟁이 이어졌으나, 그들은 하자르 유대인에게 별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했습니다. 아부체로 쓰여진 콘스탄티노스 (키릴루스의 원래 이름) 의 생애 Vita Constantine 에서조차 키릴루스가 그저 카간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에 소수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2백명의 기독교 포로들이 카간의 호의의 표시로 석방되었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운 말썽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나라에 온 황제의 사절단에게 카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였습니다.

 

이 이야기와 관련된 부수적인 사건이 슬라브어 문헌학자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해면 키릴루스는 키릴 문자뿐만 아니라 글라골 문자도 고안했다고 합니다 (역주/글라골 문자 관련은 오늘날엔 부정되고 있습니다.) . 배런 Baron 에 의하면 후자는 "17세기에 이르기까지 크로아티아에서 사용되었다. 부분적으로 슬라브어의 음가를 나타내는 글라골 문자 중 적어도 일곱 글자가 히브리 문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지적되온 사실이다 (일곱 글자란 A, B, V, G, E, K, P, R, S, Sch, T 를 의미합니다.) ." 라고 합니다. 이러한 의견은 하자르인들의 이웃들의 식자층 사이에서의 히브리 문자의 영향에 대한 기록들을 지지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쇠퇴>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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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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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알렉산드르2세 | 작성시간 09.02.13 포티오스같은 걸물이 하자르출신이라니 놀랍군요.
  • 답댓글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2.13 본문에도 나와있지만, 확실히 입증된 사항은,, 아닌 듯 합니다..^^;;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9.02.14 페네체그,쿠만,셀주크와 같은 전투민족 하자르!(카마공국을 세웠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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