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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날림번역 <열세번째 지파: 하자르 제국의 역사> 쇠퇴

작성자Τιταυιζ|작성시간09.02.13|조회수551 목록 댓글 0

쇠퇴.

 

1

 

"하자르 제국이 그 전성기에 다다른 것은" 라고 시노르 D.Sinor 는 쓰고 있습니다. "8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 시기는 불란의 개종과 오바이아의 종교개혁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자르인들이 자신들의 성공을 유대신앙에 빚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즉 그들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력했기에 유대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세력의 산 증인은 775년에서 780년에 걸쳐 비잔티움을 다스린 레온 Leo the Khazar 황제였는데, 그의 별명인 "하자르인 the Khazar" 은 그의 어머니인 하자르 공주, 즉 "꽃" 의 출신지역을 따라 붙여진 것이었으며, 또한 그녀는 시집올때 비잔티움 궁정에 새로운 패션의 바람을 몰고 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혼인이 하자르인들에 무슬림들에 대항하여 거둔 아르다빌 전투의 승리 직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는데, 이는 또한 요시폰 (요셉) 왕의 편지와 다른 사료에서도 나타나는 바입니다. 던롭교수의 지적대로 이 두 사건이 "서로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 것" 입니다.

 

하지만 음모가 극성이던 이 시기에는, 왕조간의 혼인이나 약혼은 위험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 -적어도 핑계- 를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얼핏 보기에는, 하자르인들의 옛 대군주였던 아틸라가 세운 것이었습니다. 450년,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여동생인 호노리아로부터 편지와 함께 약혼반지를 전달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로맨틱하면서도 야심만만한 귀부인은 이 훈족의 우두머리에게 자신을 죽음보다도 더 잔인한 운명 -연로한 원로원 의원과의 강제결혼- 으로부터 구해줄 것을 간청하면서 반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아틸라는 즉시 그녀를 자신의 신부로 선언하면서 그 지참금으로 제국의 절반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발렌티니아누스가 거절하자, 아틸라는 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하자르인들의 역사에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불가르인들의 군주가 자신의 딸을 유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져 있었다는 것과, 이를 칼리프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자르인에 맞선 요새를 건설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할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랍 사료를 신뢰할 수 있다면, 이와 유사한 사건들 (세부사항은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잠시동안의 평화시기 후, 8세기 말경에 벌어진 마지막 하자르-무슬림 전쟁을 야기했다고 합니다.

 

알 타바리 al-Tabari 에 따르면 서기 798년, 칼리프는 아르메니아 총독에게 카간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하자르인들과 접한 국경을 더욱 안전하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총독은 명문가인 바르메시드 Barmecides (아라비아 나이트에서 걸인을 초대해 놓고는 빈 접시만 제공한, 그 이름의 시조가 된 가문의 군주를 생각하시라.) 가문의 일원이었다고 합니다. 바르메시드는 이 명령에 승복했으며, 공주와 그녀의 수행원들과 합당한 지참금이 화려한 마차행렬에 실려 그에게 도착했습니다 (챕터 1의 12장 참조.) . 하지만 공주는 아직 어려서 죽었으며,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곧 죽었습니다. 그 후, 그녀의 수행원들은 하자리아로 돌아가서 카간에게 그녀가 독살당했음을 넌지시 비추었습니다. 이에 카간은 즉시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두 아랍 사료에 따르자면) 5만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이에 칼리프는 어쩔 수 없이 하자르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수천명의 죄수들을 석방하여 이들을 무장시켰습니다.

 

아랍 사료들은 8세기에 벌어진 하자르인들의 침공 후 교섭된 왕조간의 혼인이 불발로 끝났다는 또 다른 이야기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그루지야의 연대기에는 특기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주가 카간의 침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 물론 이 이야기들의 세부사항과 그 연대는 의심의 대상이며, 이러한 전쟁뒤에 숨겨진 전쟁목적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연대기에서 자주 나타나는 신부 교환과 독살된 왕비에 대한 언급 자체는 별다른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이러한 이야기들은 민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마련이며 또한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2

 

8세기 말 이후로 하자르인과 아랍인들 사이의 충돌은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9세기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이름이 연대기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것으로 보아 하자르인들은 적어도 수십년간 평화를 누렸던 것으로 보이니, 역시 역사에서는 무소식이 희소식이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남쪽 국경은 안정되었으니, 칼리프국과의 관계는 암묵적인 비적대적 상태를 유지했으며, 비잔티움과의 관계는 여전히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대적인 소강상태 중에서도 불길한 징조를 암시하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기 833년, 혹은 그 무렵에 하자르인들의 카간과 베크는 로마 황제 테오필로스에게 사절을 보내어 돈 강의 하류지역에 건설될 요새를 짓는데 필요한 솜씨좋은 건축가들과 장인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가 보낸 함대는 흑해를 건너고 아조프해를 거슬러 올라가 돈강 입구의, 요새가 세워질 예정의 전략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건설된 유명한 요새이자 값을 매길 수 없는 고고학 유적이 된 사르켈은, 볼가-돈 운하 인근의 침랸스크 Tsimlyansk 호수에 잠기기 전까지 하자르 역사를 해결하는 유일한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역주/최근들어 이곳에서 활발한 발굴작업이 이루어 지고 있다고는 합니다..) .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게니토스 황제는 이 이야기를 좀더 자세하게 전하고 있으니, 이 지역의 석재는 요새를 짓는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르켈 요새는 특별히 제작된 화로에서 구워진 벽돌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는 요새 건설자들이 비잔티움 양식의 대리석 기둥 (이것들은 이 유적지가 아직 물에 잠기기 이전에 소련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을 사용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전하고 있지 않은데, 이 기둥들은 6세기의 양식으로 보이며 아마도 몇몇 비잔티움 촌락의 폐허에서 가져와 재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제국의 절약정신을 보야주는 좋은 예라 할 것입니다.   

 

 

 수몰되기 전의 사르켈 유적

 

로마와 하자르의 공동노력에 의해 건설된 이 훌륭한 요새를 짓게 만든 잠재적인 적은, 이제 역사의 장에 새롭게 나타나는 무시무시하고도 위험한 이들이었으니, 이들은 서방인들에 의해 바이킹 혹은 노르만이라고 불렸으며, 동방인들에 의해서는 루스 (Rhous 혹은 Rhos 혹은 Rus..) 인이라 불린 이들이었습니다.  
 
2세기 전, 승승정구하는 아랍인들은 문명세계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합동으로 공격했으니, 그 좌익은 피레네 산맥을 관통했으며, 그 우익은 코카서스 산맥을 관통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된 바이킹들의 시대의 역사는 이러한 옛날의 미러 이미지를 보는 것 같은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이슬람 정복전쟁을 촉발시킨 첫번째 폭발은 기존 세계의 최남단인 아라비아 사막에서 벌어졌습니다. 한편 바이킹인들의 약탈과 정복은 지상의 최북단, 스칸디나비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랍인들은 육지를 따라 북방으로 진출했으며, 북방인들은 해로와 수로를 통해 남방으로 내려왔습니다. 아랍인들의 전쟁은, 적어도 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성전을 수행하는 것이었지만, 반면 바이킹들은 불경스런 해적질과 약탈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희생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결과는 똑같았을 겁니다. 역사가들은 아라비아와 스칸디나비아와 같은 조용한 지역을 하룻밤사이에 풍부한 생명력과 무모한 모험이 끓어넘치는 화산지대로 바뀌게 만든 경제학적, 생태학적,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들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두 폭발은 그들의 힘을 몇세기동안에 다 소비해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역사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애초의 야만성과 파괴성에서 벗어나 화려한 문화적 성취를 이루는 발전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동방의 바이킹들에 대항하여 사르켈 요새가 비잔티움인들과 하자르인들의 공동노력에 의해 건설되고 있을 무렵, 그들의 서쪽 지류는 이미 유럽의 모든 주요 항로를 관통했으며, 이들은 심지어 아일랜드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차지했습니다. 그후 몇십년동안 그들은 아이슬란드를 식민지화했으며, 노르망디를 정복하고, 반복적으로 파리일대를 약탈했으며, 독일과 론강 삼각주, 제노바 만을 약탈했으며, 이베리아 반도를 주항하여 지중해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쳐 콘스탄티노플까지 공격했는데 이것은 드네프르강과 흑해를 통해 이루어졌던 루스인들의 공격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토인비가 기록한대로, "9세기는 루스인들이 하자르인들과 동로마인들과 충돌한 시기였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많은 지역을 약탈하고 정복하고 식민지화했으며, 결국에는 남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의 세력은 북쪽으로는 아메리카에, 남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 이르렀다."

 

이 시기 서방 가톨릭의 연도문에 다음과 같은 특별한 문구가 삽입된 일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A furore Normannorum libera nos Domine (주여, 북방에서 온 이들의 잔인함으로부터 저희를 지켜 주옵소서.) . 몇 세기전에 예언자의 초록 깃발을 든 적들에 맞서 하자르인들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콘스탄티노플은 이번에도 바이킹 배의 이물에 새겨진 용들에게 맞서기 위한 방패로서 그들의 하자르인 동맹군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하자르인들은 예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격의 예봉의 역할을 받아들였으며, 마침내 그들의 도시가 폐허속에 묻힌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자르인들이 북방에서부터 대 항로를 따라 내려오는 루스인들의 함대가 남진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사람들은 비단 비잔티움 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세기 후에 요시폰이 하스다이에게 포낸 편지에 담긴 수수께께 같은 다음의 문장에 대해 더 정확한 이해를 얻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조력으로, 나는 강 (볼가강) 어귀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 곳을 아랍인들의 땅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배를 타고오는 루스인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오.. 나는 그들 (루스인) 과 격전을 벌이고 있소."

 

3

 

당대의 비잔티움 사람들은 바이킹인들을  "로스인 Rhos" 이라고 불렀으며, 아랍 연대기 작가들은 "바랑인들 Varangians" 이라고 불렀습니다. "로스" 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 토인비에 의해 시도된 가장 유력한 설명은 "'노젓는 사람' 을 뜻하는 스웨덴어의 'rodher' 에서 유래되었다." 는 것입니다. 한편 "바랑인들" 이라는 표현은 아랍인들이나 초기 러시아 연대기에서 북유럽인들이나 스칸디나비아인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발트해는 그들에 의해 "바랑인들의 바다" 라고 불렸습니다. 비록 이들 바이킹들의 기원이 노르웨이인들이나 서유럽을 침공한 데인인들과는 구분되는 동스웨덴인들이긴 하지만, 그들은 그들과 비슷한 행동유형을 보였습니다. 즉 그들의 행동은 계절주기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대륙에 대한 공격을 위한 거점역할 뿐 아니라 무기고와 보급기지 역할까지 수행하는, 전략적인 지역에 위치하는 섬들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주기적인 약탈과 강제적인 무역에서 다소간의 확고한 정착생활로 변해갔으며 마침내는 정복당한 원주민들과 동화되었습니다. 바이킹인들의 아일랜드 침공은 더블린 만의 Rechru (람베이 Lambay) 섬의 점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잉글랜드는 타넷 Thanet 섬으로부터 침공을 받았습니다. 대륙을 목표로 한 침공은 왈슈렌 Walcheren (네덜란드) 과 누아르무티에 Noirmoutier (루아르강 어귀에 위치) 과 같은 섬들의 공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이킹인들의.. 장례식.

 

유럽의 동쪽 변경에서 북유럽인들 역시 이와 똑같은 청사진을 따라 정복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발트해와 핀란드 만을 건넌 후, 볼호프 Volkhov 강을 따라 일멘 Ilmen 호수 (레닌그라드 남방) 에 도달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안성맞춤의 섬 -아이슬란드 사가의 홈가르다 Holmgard- 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이 섬에 훗날의 노보고로드 (니주니 노브고로드 Nizhny Novgorod -현재의 고르키- 와 혼동하지 말것) 가 될 정착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을 기지로 하여 수로를 따라 남방을 침략했으니, 즉 볼가강을 통해 카스피해로, 드네프르강을 통해 흑해에 다다른 것입니다.

 

전자의 루트는 호전적인 불가르인들과 하자르인들의 영토를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후자의 루트는 하자르 제국의 북서 변방지역에 거주하는 잡다한 슬라브 부족들의 영토를 지나고 있었는데, 이 부족들은 카간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었으니, 이들 중에는 키에브 지역에 거주하는 Polyane인들, 모스크바 남방의 Viatichi 인들, 드네프르강 동방의 Radimishchy 인들, 데르나 Derna 강 유역의 Severyane 인들.. 기타등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슬라브인들은 발전된 농업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볼가강의 "투르크인" 이웃들보다 소심한 이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관해 베리교수는 이들이 스칸디나비아 침략군들의 "자연적인 먹이" 가 되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드네프르강과 볼가강, 돈강 유역에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노르만인들의 사가에서 "Austrvegr", 즉 "대 수로" 라고 기록된 드네프르강은 발트해에서 흑해를 연결하고 있었으며, 이를통해 북방인들은 콘스탄티노플까지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이들 사가는 일곱개의 주요 폭포에 그 원 슬라브어 명칭을 음차하여 스칸디나비아식 명칭을 부여하기도 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이들의 이름을 바이킹, 슬라브 두가지언어로 성실하게 열거하고 있습니. (예를들면 "소용돌이치는 폭포" 라는 이름은 북방어로 Baru-fors 이고, 슬라브어로 Volny.. 등등..) .

 

이들 바랑기-루스인들은 그들의 바이킹 형제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생활풍습을 가지고 있었으니, 여기에는 해적, 강도질과 함께 저질 장삿꾼의 삶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검과 도끼로 강제한 무역조건에 따른 교역을 강요했습니다. 그들은 모피, 검, 그리고 호박을 황금과 교환했지만, 그들의 가장 중요한 교역품은 다름아닌 노예였습니다. 동시대의 한 아랍 연대기 작가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섬 (노보고로드) 에는 10만명의 남자들이 사는데,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배를 타고 지나가는 슬라브인들을 공격하여 이들 슬라브인들을 붙잡고 포로로 잡아 하자르인들과 불가르인들에게 이들을 판다. (우리는 마수디의 기록중에, 이틸에 노예시장이 있었다는 언급을 살펴본바 있습니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지도 않으며, 땅에 종자를 뿌리지도 않고 오로지 슬라브인들에게 얻은 약탈물로만 살아간다. 그들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그들은 칼집에서 빼낸 칼을 아기앞에 놓는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는 너에게 물려줄 금이나 은이나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단다. 다만 이것 (검)이 너에게 물려주는 유산이니, 이것으로 너 자신을 위한 안전한 행복을 누리거라."

 

현대 역사가인 맥에베디 McEvedy 는 이를 깔끔하게 종합하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에서 투르키스탄 변경에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북극권에까지 이른 바이킹-바랑인들의 활동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생명력과 대담함을 보여주며, 흔히 그러한 엄청난 노력은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이들 북방의 영웅들은 그들이 정복에 실패할 때까지 무역이란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감질나는 상업적 이익보다는 피묻은 영광스러운 황금을 더욱 선호했다.

 

여름에 남쪽으로 떠나는 루스인들의 수송선들은 상선단일뿐만 아니라 해군함대이기도 했습니다. 이 두 역할은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어느 경우에나 이들 상인들이 언제 전사로 돌변할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들 함대의 규모는 엄청났습니다. 마수디는 볼가강에서 카스피해로 들어왔던 (912-13년의 일) 루스군대에 관하여 "500여척의 배에 각각 100명의 사람이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이들 5만명의 전사들중 35000명이 전장에서 쓰러졌다고 합니다. 마수디는 아마도 사실을 과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하지만 그 과장의 정도는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들의 탐험의 초기시기 (860년경) 에 루스인들은 200척에서 230척으로 다양하게 추산되는 규모의 함대를 이끌고 흑해를 건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전적이 있었습니다.

 

예측불가능하고 믿을 수 없는 이들 무시무시한 침략자들에 대해 비잔티움인들과 하자르인들은 전해지는 것처럼, 일이 되는대로 처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르켈의 요새가 축성되고 한세기 반동안 루스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무역협정과 사신의 교환의 풍경은 야만적인 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북방인들은 확고한 정착지를 건설하면서 느리고도 점진적으로 그들의 특성을 변화시켜 나갔으니, 그들은 그들의 가신들과 피정복자들과 섞이면서 슬라브인화되어 갔으며, 결국에는 비잔티움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10세기 직전에 해당하는 바로 이 시기부터 이들 "루스인" 들은 "러시아인" 이 되어 간 것입니다. 초기의 루스 군주들과 귀족들은 여전히 슬라브어화된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을 고수했으니, 그 예로 류릭 Rurik 은 Hrorekr 에서 유래된 것이며, 올레그 Oleg 는 Helgi 에서, 이고르 Igor 는 Ingvar, 올가 Olga 는 Helga 에서 유래된 것 입니다. 이고르-잉그바르 Igor-Ingvar 공이 945년에 비잔티움과 교환한 무역 협정에는 그의 전우들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들 중 50명이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슬라브식 이름을 가진 전사는 세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잉그바르 (이고르) 와 헬가 (올가) 의 아들은 슬라브식 이름인 스뱌토슬라프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동화의 과정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습니다. 바랑인들은 독립된 민족으로서의 그들의 특성을 점차적으로 상실했으며, 이렇게 북방인들의 영향은 러시아 역사에서 천천히 사라지게 됩니다.

 

야만적인 시대에서도 걸출하게 빛난 잔인성으로 유명한 이 기괴한 민족들의 정신세계를 묘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들에 대한 연대기들은 편견에 치우쳐 있으니, 이는 그 작가들이 이 북방의 침략자들에 의해 고통을 당한 민족들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바이킹인들 자신들의 시각에서 기록된 이야기들은 한동안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먼 훗날 바이킹들의 시대가 지난 이후에 스칸디나비아 문학이 시작되면서 그들의 모험은 전설로 꽃을 피웠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초기 북유럽 문학은 그들의 전투에 대한 억제되지 않는 욕망을 증언해주는 것처럼 보이니, 여기서는 특이한 형태의 격앙이 때때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이킹인들은 이 상태를 설명해주는 고유명사를 가지고 있었으니 berserksgangr, 즉 버서크 관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랍 연대기 작가들은 그들의 존재에 매우 당황했으니 이는 그들 각자가 쓴 글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이 쓴 글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점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젠 아예 우리들의 친근한 친구가 된 이븐 파들란은 볼가강의 불가르인들의 지역에서 만난 루스인의 지저분하면서도 음탕한 버릇에 극도의 혐오감을 표하고 있습니다. 루스인들에 대한 다음의 문장은 우리가 앞서 보았던 하자르인들에 대한 그의 기록에 앞서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이 만든 가장 추악한 창조물이다. 아침이 되면 노예소녀가 물이 가득담긴 대야를 가장에게 들고 온다. 그가 그 물로 그의 얼굴과 머리를 씻어내고 대야에 코를 풀면 소녀는 그것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주고 그는 앞서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데, 이러한 광경은 그 집의 모든이가 대야에 코를 풀고 그 물로 얼굴과 머리카락을 씻을 때까지 반복된다.

 

한편 이븐 루스타는 이와는 상반되는 기록을 거의 동시기에 남겼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의복에 한해서는 깨끗하게 처신한다." ..루스인들의 위생관념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언급하기로 합시다.

 

또한 이븐 파들란은 루스인들이, 심지어 그들의 지도자까지도 공공장소에서도 사랑을 하고 배변을 보는 것에 매우 분개하고 있는데, 반면 이븐 루스타와 가르데지 Gardezi 는 이러한 혐오적 습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록은 똑같이 의심스러우며 모순된 부분이 많습니다. 이븐 루스타는 "그들은 그들의 손님을 환대하며, 그들에게서 피난처를 찾으려는 이들과 그들 사이에서 불운을 당한 모든이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그들은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을 압제하도록 놔 두지 않으며, 만약 그들 중 누구든지 잘못된 행동이나 압제적인 태도를 취하면, 그들은 그러한 자를 추적하여 자신들로부터 추방해버린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단락 및에 그는 이와는 아주 다른 그림, 즉 다소 불명료한 삽화를 남기고 있습니다. 루스인들의 사회상태에 대한 그의 언급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들의 천부적인 필요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신을 지켜줄 세 친구들과 함께 동행한다. 그들은 치안의 부재와, 그들사이에 벌어질지 모르는 배신에 대비하여 모두 자신들의 검을 지니고 있으니, 만약 한 남자가 약간의 재산이라도 가지고 있을치면 그의 친형제와 그와 함께 지내는 그의 친구들은 그것을 갈망하면서 그를 죽이고 약탈할 기회만을 엿본다.

 

하지만 그들의 무용에 관해서는, 사료들이 만장일치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민족들은 활기차고 용감한 이들이니, 이들이 일단 쳐들어오면, 그 누구도 자신들의 재산이 파괴당하고 그들의 여자들이 끌려나가고 그 자신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4

 

..이러한 광경들은 이제 하자르인들이 부딪혀야 할 장면이었습니다.

 

사르켈은 아주 적시에 건설되었으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돈강 하류와 돈강과 볼가강 사이의 육운 (이른바 "하자르 길") 을 건너는 루스 함대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루스인들의 약탈행렬은 그 첫세기 동안에는 대체로 비잔티움 (말할것도 없이 풍부한 약탈물이 기대되는) 을 향한 것이었으며, 반면 그들과 하자르인들간의 관계는, 물론 이따금씩 불화와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무역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어쨋든 하자르인들은 루스인들의 상업로를 통제하면서 비잔티움과 무슬림들의 나라로 가기위해 자신들의 영토를 통과하는 모든 상인들에게서 10 퍼센트의 관세를 물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모종의 문화적 영향력을 이들 북방인들에게 끼칠 수 있었으니, 비록 그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바이킹인들은 그들과 접촉한 다른 민족들로부터 기꺼이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향력의 유입은 노브고로드의 초기 루스인 지도자가 "카간" 이라는 칭호를 채택한 것에서 명백히 나타납니다. 이는 비잔티움과 아랍 사료 모두에서 나타나는 사실입니다. 예를들어 이븐 루스타는 노브고로드가 건설된 섬에 대해 묘사한 다음에 기록하기를 "그들은 루스인들의 카간 Kagan Rus 이라고 불린 왕을 모시고 있었다." 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븐 파들란은 루스인들의 카간이, 군대를 이끌고 또한 그들의 백성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역할을 맡은 장군을 두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키 발리디는 지적하기를 이러한 군 지휘권의 위임은 왕이 가장 중요한 전사의 역할을 수행하곤 했던 북방의 게르만 민족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관습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여기서 그는 루스인들이 하자르인들의 이중권력 체제를 받아들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기 루스인들이 그들의 정복의 과정에서 접촉한 민족들 중 하자르인들이 가장 번영하고 문화적으로도 앞선 민족들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접촉은 이틸에 위치했던 루스 상인들의 군락이나 키에프에 존재했던 하자르 유대인 공동체를 고려할 때, 제법 열정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 천년도 더 지난 오늘날 소련 정권이 하자르인들의 역사적인 역할과 문화적 성과를 적극적으로 부정해 버린 것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1952년 1월 12일자 타임지에는 다음과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초기 러시아 문화가 꼬투리를 잡히다.
소련 역사가가 문책당하다.

 

한 소련 역사가가 초기 러시아 민중의 문화와 발전을 과소평과했다는 이유로 프라우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가 바로 아르타모노프 교수였으니, 그는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역사와 철학분과에서 일하면서 그가 1937년에 쓴 책에서 주장한 바 있는, 고대 키에프 도시가 하자르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이론을 반복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인들의 호전적인 대망에 희생된 진보된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하자르인들을 묘사했습니다.

 

 

 아르타모노프

 

"이러한 모든 주장은" 이라고 프라우다는 비난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때 사실이 아니다. 서로다른 부족들의 원시적인 융합에 불과한 하자르 왕국은 동 슬라브인들의 국가형성에 어떠한 긍정적인 역할도 담당한 바 없다. 고대 사료들은 동슬라브인들의 국가형성이 하자르인들이 기록에 나타나기 전부터 이루어졌음을 입증하고 있다. 고대 러시아 국가의 발전의 촉진과는 관련이 없는 하자르 왕국은 동슬라브 부족들의 발전을 저지했을 따름이다. 우리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유물들은 고대 러시아의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준다. 하자르 문화의 우월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오직 역사적 진실을 모욕하고 진실을 무시함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하자르 왕국의 이상화는 러시아민중의 자생적인 발전을 경멸하는 부르주아 역사가들의 잘못된 시각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잘못은 명백하다. 그러한 시각은 소련의 사료편찬에 반영될 수 없다."

 

내가 이 책에서 통해 자주 언급한 아르타모노프는 1937년에 하자르인들의 초기역사에 관한 그의 첫 책 (그가 전문지에 기고한 많은 기사들은 논외로 하고) 을 출판했습니다.그 후에 쓰여진  그의 대표작인 '하자르인들의 역사' 는 전술한 프라우다의 공격이 있을 즈음에 출판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결국 그 책은 10년 후 -1962년- 에나 출판될 수 있었으며, 그나마 그 마지막 장은 그의 모든 연구 -와 작가의 생애까지도- 를 부인하는데 할당되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문장을 뽑아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자르인들의 왕국은 붕괴되고 산산조각났으니, 대다수 주민들은 다른 민족들과 합병되었으며, 이틸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던 소수는 그들의 민족성을 잃고, 한낱 유대화된 기생계급으로 전락하였다.

 

러시아인들은 동방의 문화적 성과를 기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이틸 하자르인들에게서 아무것도 빚진것이 없다. 호전적인 하자르 유대문화는 그들과 관련된 다른 민족들, 즉 마자르인, 불가르인, 페체네그인, 알란인, 폴로프트시아인 Polovtsians 등등.. 을 다루는데 사용되었다.. 이틸에서 온 모험가들에 맞서기 위한 필요성은 구즈인들과 키에프 옥좌 인근에 거주하는 슬라브인들의 통합을 촉진시켰으니, 이러한 통일이 러시아 국가 체계뿐만 아니라 고대 러시아 문화의 맹렬한 성장의 가능성과 전망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 문화는 언제나 그들 고유의 것이었지, 결코 하자르인들의 영향에 의존한 적이 없다. 루스 문화에 있어서 오직 시시한 동방적 요소만이 하자르인들에 의해 전해진 것이며, 루스인들과 하자르인 사이의 문화적 유대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요소가 러시아 문화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것이 아닌, 표면적으로 단기간동안 보잘것없는 중요성을 의미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러시아 문화의 역사에 있어 이른바 "하자르" 시기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어떠한 기반도 마련하지 못한다.

 

이러한 당의 정책노선은 사르켈의 유적을 침수시키는 것으로 역사 말소를 완수했습니다.

 

5

 

활발한 교역과 문화의 상호교환도 루스인들로 하여금 점진적으로 하자르 제국을 잠식해 들어가는 경향을 억제하지는 못했으니 이는 그들이 하자르인들의 슬라브인 가신들과 다른 복속된 부족들을 통합해 나가면서 진행되었습니다. 초기 러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사르켈 요새가 축성된 후 대략 25년이 흐른뒤인 859년에 슬라브 민족들에게서 바쳐지는 조공은 "하자르인들과 발트해 너머에서 온 바랑인들 사이에 배분" 되었다고 합니다. 바랑인들은 주드인 Chuds, 크리비치아인 Krivichians 과 더욱 북방에 거주하는 슬라브 민족들.. 로부터 공물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한편 하자르인들은 비아티츠 인 Viatichi, 세비안 인 Seviane, and, 그리고 가장 큰 중요성을 가졌던, 케리브 중심부분에 거주하던 폴리안 인 Polyane 들로부터 계속 조공을 받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러시아 연대기에 기록된 날짜를 신뢰한다면, 이로부터 3년뒤 기존에 하자르인들의 종주권 하에 있었던 드네프르강의 요지 키에프가 루스인들의 영향권에 넘어갔다고 합니다.

 

비록 이 사건은 무장투쟁으로 초래된 일은 아니었지만,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연대기에 따르면, 당시 노브고로드는 준 신화적인 군주였던 류릭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은 Hrorekr) 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의 휘하에 모든 바이킹 정착지들과 북부 슬라브인들, 그리고 일부 핀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류릭의 두 부하인 오스콜드 Oskold 와 디르 Dir 는 드네프르 강을 타고 내려가는 여행을 하는 와중에 그들이 좋아하는 풍경인, 즉 한 산악지대에 위치한 요새화된 지역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동네가 키에프이며 "하자르인들에게 조공을 바친다."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사람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이 마을에 정착하였으며 "많은 북방인들을 모아서 마치 류릭이 노브고로드를 다스리는 것처럼 인근 슬라브인들을 복속시켰다. 약 20년 후, 류릭의 아들인 올렉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은 Helgi) 이 나타나 오스콜드와 디르를 죽이고 키에프를 자신의 지배권하에 병합시켰다."

 

곧 키에프는 그 중요성에서 노브고로드를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바랑인들의 도읍이 되었으며 "러시아 도시들의 어머니" 가 되었으니, 그 이름을 딴 공국은 첫번째 러시아 국가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루스인들이 키에프를 접수한 뒤 대략 1세기 뒤에 작성된 요시폰의 편지에서는 하자르인들의 소유지의 명단에서 더 이상 이 도시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향력이 있는 하자르 유대인 공동체는 키에프 지역에서 살아남았으며, 그들은 그들의 나라 (하자르) 가 붕괴된 후에 많은 하자르 이주민들로 그 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러시아 연대기는 Zemlya Zhidovskaya, 즉 "유대인들의 나라" 에서 온 영웅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키에프의 이른바 "하자르인들의 문" 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옛 지배자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6

 

이제 우리는 9세기 후반부로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러시아인들의 확장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우리의 관심을 초원지대 민족들의 중요한 발전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는데, 이 자리에서는 그 중에서도 특히 마자르인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 사건들은 루스인들 세력의 흥기와 동시에 일어난 일이며, 하자르인들과 유럽지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자르인들은 하자르 제국의 여명기때부터 하자르인들의 동맹자였으며,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들의 신실한 가신이었습니다. 이에대해 매카트니 Macartney 는 "그들의 기원과 초창기의 방황에 관한 문제는 오랜 시간동안 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들어왔다." 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이를 가리켜 "역사적인 수수게끼 중 가장 혼란스러운 것" 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그들의 기원에 대해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자르인들이 핀족과 관련이 있으며, 그들의 언어는 북부 우랄의 삼림지대에 살았던 보굴 Vogul 인들과 오스탸크 Ostyak 인들과 같은 이른바 핀-위구르 어족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원래 슬라브인들과, 그들(마자르인들) 이 살게된 스텝지역의 투르크 민족들과 관련이 없습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한가지 인종학적 질문은 그들이 자신들의 특성을 유지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작은 국가들과는 달리, 현대의 헝가리는 그 인근국가들과 아무런 언어학적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자르인들은 그들의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의 사촌인 핀족과 함께 유럽의 언어학적 섬으로 남아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전파되던 시기의 언젠가부터 이 유목민족은 우랄지역에 있던 그들의 옛 고향을 떠나 초원을 거쳐 남쪽으로 이동하여 마침내 돈강과 쿠반강 사이의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하자르인들의 이웃이 되었으니, 이는 하자르인들이 강성해지기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얼마동안 이들은 준 유목민족의 연맹인 오노구르 Onogurs 인 ("10개의 화살" 혹은열개의 부족이라는 뜻) 의 일부로서 살았습니다. 오늘날의 "헝가리인" 이라는 단어는 이 오노구르 라는 단어의 슬라브식 발음으로 생각됩니다. 반면 "마자르" 라는 이름은 먼 태곳적때부터 자신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 단어로 보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은 대략 7세기 중반에서 9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동안 하자르 제국의 가신이었습니다. 다른 부족들이 무시무시한 자리뺏기 놀이를 하는 동안 하자르인들과 마자르인들 사이에는 무력충돌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입니다. 이 두 민족은 각각 그들의 인근 혹은 멀리 떨어진 이웃들에 맞서 한번이상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즉 볼가 불가르인, 다뉴브 불가르인, 구즈인, 페치네그인들.. 등등이 그들과 싸운 민족들입니다. 아랍인들과 루스인들, 즉 러시아인들의 연대기에 따르면 핀족은 마자르인들이 소유하는 초원지대 이북의 흑토지대와 삼림지대에 살았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마자르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것은 북부 러시아의 이 지역에 붙여진 얼마간의 지역명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들 지역명들은 아마도 옛 마자르인들의 수비대와 전초기지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항들을 살펴볼 때, 마자르인들은 그들의 슬라브인 이웃들을 지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토인비는 결론내리기를, 조공을 강제하는데 있어서 "하자르인들은 마자르인들을 자신들이 부리는 세리로 여겼다. 그렇긴 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마자르인들은 이러한 그들의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했다" 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루스인들의 도래는 이러한 즐거운 상황을 급격하게 변화시켰습니다. 사르켈의 요새가 완성되었을 무렵, 상당수의 마자르인들이 돈 강을 건너 그 서안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렇게 대략 830년 이후로 민족 태반이 돈강과 드네프르 중간에 위치한 지역에 새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이 지역은 후에 레베디아 Lebedia 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왜 이러한 이동을 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토인비의 설명은 가장 최근의 설명이자 가장 그럴듯한 설명입니다.

 

우리는.. 초원지대에 살던 마자르인들이 돈강 서쪽으로 이주해간 것이 그들의 하자르 종주국의 허가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 초원지대가 이전에 하자르인들의 소유였다는 것과, 마자르인들이 하자르인들의 종속적인 동맹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때 우리는 마자르인들이 하자르인들의 의향을 거스르면서 까지 하자르인들의 영토에서 거주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이주가 단지 하자르인들이 마자르인들을 위해 그들을 돈강 서쪽으로 이주하게 함으로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실은 하자르인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그들을 이 지역에 옮겨 살게 하였다고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전략적인 목적에서 복속된 민족들을 재배치하는 것은 예전의 유목 제국의 건설자들에 의해 흔히 실행되곤 했던 과업이었다.. 이 새로운 고향에서 마자르인들은  남서쪽의 상황과, 남방으로 향하는 로스인들의 움직임을 체크함으로서 하자르인들을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마자르인들을 돈강 서쪽으로 이주하게 한 것은 돈강 동안에 사르켈 요새를 세운 것과 동일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7

 

이러한 마자르족의 재배치는 거의 반세기동안 잘 작동했습니다. 이 시기동안 마자르인과 하자르인들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졌으며, 이는 헝가리 민족에게 계속하여 그 영향이 남겨질 두 사건을 통해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 첫번째 사건은 하자르인들이 그들에게 첫번째 마자르인 왕조를 세울 왕을 인정했다는 것이었으며, 두번째는 몇몇 하자르 부족들이 마자르인들과 합류하여 그들의 특징을 많이 변화시킨 것입니다.

 

첫번째 사건은 콘스탄티노스의 '제국의 행정에 대하여' (950년경) 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여기에 언급된 이름들이 헝가리인들의 첫번째 연대기 (11세기) 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확실한 사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노스는 우리에게 하자르인들이 마자르 부족들의 내정에 끼어들기 전까지는, 마자르인들이 최고 지도자를 가지지 못하고 오직 부족단계의 족장들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들 족장들 중 가장 걸출한 이는 레베디아스 Lebedias (위에서 언급한 레베디아는 그의 이름을 따 붙여진 지명입니다.) 라고 불린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마자르인들은 일곱 무리로 이루어졌지만 그들 출신이든 이방인이든, 어쨋든 그들의 최고 지도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족장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족장은 앞에서 말한 레베디아스였다.. 그리고 하자리아의 지배자인 카간은 그들 (마자르인) 들의 여러가지 공로와 군사적 조력에 대한 답례로 레베디아스라고 불린 그들의 가장 유력한 족장에게 고귀한 하자르 귀부인을 내렸으며, 그는 그녀의 아이들을 함께 맞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레베디아스는 결국 그 하자르 여인과의 사이에서 자신의 가족을 얻지는 못했다.

 

이렇게 민족간의 동맹은 불발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카간은 레베디아스와 그의 부족과 하자르 왕국간을 이어주는 유대관계를 더욱 강하게 만들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자리아의 지배자인 카간은 마자르인들에게.. 그들의 가장 유력한 족장을 데려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이에 레베디아스는 하자리아의 카간 면전으로 가서 그가 자신을 부른 연유를 물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대를 불렀소. 즉 당신은 고귀한 가문 출신이고 현명하고 용감하고 마자르인들의 가장 유력한 족장이니, 우리는 그대를 당신 종족의 지배자로 임명하겠소. 이로서 그대는 우리의 법과 명령에 더 잘 부응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레베디아스는 자부심강한 사람의 태도를 취했으니, 그는 적절한 감사의 표시와 함께 이러한 괴뢰왕이 되는것을 거절했으며, 그러한 명예는 알무스 Almus 라고 알려진 그의 동료 족장이나 혹은 알무스의 아들인 아르파드 Arpad 에게 주어지는 것이 가하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에 왕은 "그의 언변에 기뻐하면서" 레베디아스에게 적정한 호위대를 붙여 그들 민족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자르인들은 아르파드를 그들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콘스탄티노스의 언급에 따르면 아라파드의 즉위식은 "하자르인들의 관습에 따라 이루어졌으니, 즉 그들은 그를 그들의 방패위에 태웠다. 하지만 마자르인들은 이 아라파드 이전에는 다른 지도자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헝가리의 지배자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가계에서 이어져 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스가 이 사건을 기록한 "지금" 은 이 사건이 벌어진 지 한 세기가 지난 950년 경이었습니다. 사실 아르파드는 자신의 마자르인들을 헝가리 정복때 이끌었습니다. 그의 왕조는 1301년까지 이어졌으며, 그의 이름은 헝가리 초등학생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것 중 하나입니다.

 

8

 

두번째 사건은 헝가리 민족성에 대해 더욱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지는 사건입니다. 그 정확한 시기까지는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어쨋든 콘스탄티노스는 우리에게  하자르족 일부가 그들의 지배자들에 대항하여 반란 (원래 단어는 배교라는 뜻도 포함하는 apostasia) 을 일으킨 적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반자들은 세 부족들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카바르인 Kavars 이라 불리는 이들로서 하자르인들 자신들의 혈통이었다. 정부군이 이들을 압도했다. 반란군 중 일부는 도살되었으며 다른 일부는 망명하여 마자르인들과 살았으니, 그들은 서로를 친구처럼 대했다. 또한 그들은 하자르인들의 언어를 마자르인들에게 가르쳤으며 이 날로부터 그들은 같은 방언을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자르인들의 다른 언어로도 의사를 소통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한 지도자가 있으며 또한 그들은 마자르인 가운데에서 가장 유력한 무리로 선출되었으니, 이들은 원래 카바르인의 세 부족의 후예이며 이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오고 있다."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의 책의 그 다음 장을 "카바르인과 마자르인 무리의 명단" 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들 중 으뜸은 하자르인들에게서 갈라져 나온 이들이니, 이들은 말할것도 없이 카바르인들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 "마자르" 라고 기록된 무리, 혹은 부족은 단지 세번째로 언급될 따름입니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자면, 마자르인들은 -문자 그대로든지 혹은 은유적인 의미로든지- 하자르인들과 피가 섞이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에게 여러가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중 가장 첫번째 사실은, 놀라운 일이지만, 적어도 10세기 중엽까지 헝가리에서는 마자르어와 하자르어가 함께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몇몇 현대 권위자들은 이 기이한 사실에 대해 언급을 남기고 있습니다. 베리교수는 "이 이중 언어의 결과는 현대 헝가리어의 혼합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마자르인들의 인종적 인척관계에 관한 두가지 상반되는 의견에 대해 그럴듯한 시각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토인비는 비록 헝가리인들이 그들의 국가의 초기단계에 해당하는 먼 옛날에 이중언어생활을 그만두긴 했지만 이러한 사실은 하자르인들이 말했던 투르크어에 속하는 옛 추바쉬 방언에서 유래된 200여개의 차용의 존재에서 입증되는 것이라는 언급을 남겼습니다 (챕터 1참조.) .

 

루스인들처럼 마자르인들 역시 하자르인들의 이중왕위 제도를 변형된 형태로서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대해 가르데지는 "..그들의 지도자는 2만기의 기병과 함께 말을 달린다. 그들은 그를 칸다 Kanda (헝가리어로는 켄데 Kende) 라고 부르며 이것이 그들의 더 위대한 왕의 명칭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을 다스리는 사람의 명칭은 율라 Jula 이다. 그리고 마자르인들은 그들의 율라의 명령이 무엇이든 간에 복종한다. 사실 마자르 부족들에 대한 지휘권을 인계받은 반항적인 카바르 부족들 중에는 유대인이거나, 적어도 "유대교" 추종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아르타모노프와 바르타가 제시한 것처럼- 이들 카바르 "배교자" 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오바이아 왕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랍비들의 법과 까다로운 규정들, 그리고 탈무드적인 궤변등등은 반짝반짝한 갑옷을 걸친 이들 초원의 전사들의 성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유대식 교의" 를 고백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신앙은 랍비식 정통교의 보다는 사막에 살았던 고대 히브리인들의 신앙에 더 가까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카라이트 분파에 속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추종자들일수도 있겠으며, 따라서 이단으로 간주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아직 추측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9

 

하자르인들과 마자르인들 사이의 관계도 이제 그 종말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니, 마자르인들은 896년에 유라시아 초원을 떠나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그들의 영원한 고향이 될 새로운 토지를 정복했습니다. 이 이주에 관련된 사항들 역시 논쟁의 대상입니다만, 적어도 대략적인 아웃라인을 잡는것은 가능할 겁니다.

 

9세기의 마지막 몇십년동안, 또 다른 투박한 민족이 유목민족들의 자리뺏기 경쟁에 뛰어들었으니 이들은 바로 페체네그인 (헝가리어로는 Bescnyok) 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투르크계 부족에 대해 알고있는 빈약한 지식은 대부분 콘스탄티노스 7세의 서술에 의한 것인데, 여기서 그들은 다른 야만족인 루스인들에 맞서기 위해 많은 금을 주고 고용할 수 있는, 탐욕스로운 야만족 떼거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원래 하자르인들의 종주권 아래서 볼가강과 우랄강 사이의 지역에 살았는데, 이븐 루스타의 기록에 따르자면, 하자르인들은 그들에게서 조공을 강제하기 위해 "매년 그들을 습격" 하곤 했다고 합니다.

 

9세기가 끝나갈 무렵, 한 대재앙이 페체네그인들을 덮쳤습니다. 즉 그들은 그들의 동쪽에 거주하는 이웃들에 의해 자신들의 고향에서 축출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웃들은 다름아닌, 이븐 파들란이 그렇게나 혐오한 민족이었던 구즈인 (혹은 오구즈) 들이었는데, 이 무수를 헤아리는 투르크계 부족은 이따금씩 그들의 중앙 아시아의 황무지를 떠나 서방으로 이동하곤 했습니다. 유랑하는 이들 페체네그인들은 하자리아에서 정착을 시도했습니다만, 하자르인들은 그들을 격퇴시켜버렸습니다. 이에 페체네그인들은 서방으로의 이주를 계속하여 돈강을 건너서 마자르인들의 영토를 침공했습니다. 결국 마자르인들은 더욱 서방에 위치한 드네프르강과 세레스 Sereth 강 중간부분으로까지 밀려나갔습니다. 그들은 이 지역을 Etel-Koz, 즉 "두 강사이에 낀 지역"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이 지역에 889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뉴브 불가르인들과 동맹을 맺은 페체네그인들이 896년에 그들을 다시금 공격했으며, 이에 마자르인들은 현재의 헝가리가 위치한 지역으로까지 밀려나갔습니다.

 

간단하게 살펴본 이러한 이야기들은 마자르인들이 동방 초원지대를 떠난 것과, 마자르-하자르인간의 관계의 종말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세부사항들은 아직 논의가 끝나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특기할만한 열정을 가지고 설명하기를, 마자르인들은 페체네그인들에게 두번 패배한 것이 아니라 한번 패배했을 뿐이며 Etel-Koz 는 그저 레베디아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러한 논쟁의 결말은 이들 전문가들의 몫으로 남겨놓도록 합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당당한 전사의 모습으로서의 마자르인들의 이미지와 그들의 연이은 불명예스러운 축출이 서로 상반된다는 겁니다. 이에 관해 우리는 렝스의 힌크마르 Hinkmar of Rheims 의 연대기를 참조하여 그들이 862년에 프랑크 제국을 공격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그 다음 세기동안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야만인들의 침입의 서막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슬라브인들의 사도인 성 키릴루스가 하자리아를 향한 여행의 와중인 860년경에 마자르인 무리와 가졌던 무시무시한 만남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자신에게 "늑대처럼 짖어대면서" 돌격해 올때 자신의 기도문을 암송했다고 합니다. 어쨋든 그의 신앙심은 그를 위험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다른 연대기는 마자르인들과 카바르인들이 881년에 프랑크인들과 충돌했다는 언급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스는 그 후 대략 10년 뒤, 마자르인들이 "(다뉴브 불가르인들의 군주인) 시메온에게 전쟁을 걸어서 그를 호되게 격파하여 그를 문드라가 Mundraga 라는 요새에 고립시킨 후 프레슬라브까지 진격한 다음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하지만 이러한 영웅적인 업적과 동시대에 벌어진 돈강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일련의 후퇴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좋은 걸일까요? 콘스탄티노스가 기록한 다음의 문장이 이 대답을 제시해 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가르인 시메온은 다시금 그리스의 황제와 평화를 체결했으며, 이렇게 안전을 확보한 그는 페체네그인들에게 사절을 보내어 마자르인들을 절멸시킬 전쟁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마자르인들이 다시 전장에 나타나자 페체니그인들과 시메온은 마자르인들에게 맞서서 그들의 가족들을 몰살시키고 그들을 혹독하게 추격하여 자신들의 땅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마자르인들은 다시 돌아왔으나 이전의 그들의 지역이 황폐한 폐허가 된 것을 보고는 그곳을 떠나 지금 그들이 사는 곳 (즉, 헝가리) 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즉 마자르 군대의 태반이 "전장에 나타" 났을 때 그들의 영토와 가족들이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연대기들을 바탕으로 판단해 볼 때, 그들은 그들의 고향에는 별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먼 나라들에 대한 "원정" 에 상당히 빈번하게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위험한 습관은 그들이 하자르인 대군주와 평화로운 슬라브 부족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었을 때에는 감수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굶주린 페테네그인들이 나타나자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콘스탄티노스에 의해 기록된 이러한 재앙은 이와 비슷한 일련의 사건들 중 마지막 사건에 불과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그들은 산맥 너머에 있는 더 안전한 새 고향을 찾도록 하였으니, 이 고장은 그들이 이전에 벌였던 최소한 두 차례의 약탈에 의해 이미 알고 있었던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정을 뒷바침할 또 다른 연구가 있습니다. 마자르인들은 이러한 약탈습관을 9세기 후방에야 얻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는 그들과 하자르인 간의 결정적인 혈통적 융합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이 사건은 마자르인들에게 있어 여러 의미에서 축복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전쟁에 더욱 익숙하고 더욱 남자다웠던" 카바르인들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같이 지도적인 부족이 되었으며 마자르인들에게 모험 정신을 불어넣었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이미 훈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유럽의 재앙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마자르인들에게 "먼 옛날부터 오직 모든 투르크 민족 (역주/투르크라는 명칭이 특정 민족을 가르키지 않음을 명심하시라.) 들 -훈족, 아바르인, 투르크인, 페체네그인, 쿠만인- 들에게만 계승되어온 독특한 전술을 가르쳤다. 경기병대는 옛부터 거짓 도주에 사용된 방법들을 사용했으니, 이들은 달아나면서 활을 쏘거나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늑대와 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돌격을 가하곤 했다. (매카트니의 설명)"

 

이러한 전쟁방식은 헝가리인들이 9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기까지, 독일과 발칸인들, 이탈리아, 그리고 심지어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동안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똑같은 전술을 사용하는 페체네그인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으니, 이들에 대해 그들은 그저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울음소리만을 낼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하자르인 자신들은 안개속으로 사라졌지만, 한편 그들은 이렇게 멀리 우회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헝가리 국가의 건설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을 전개하는 매카트니는, 카바르인들의 영향의 주입이 수행한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함으로서 이에서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핀-위구르 Finno-Ugrians 어계이자 상대적으로 (비록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평화를 선호하던 정주농업민족인 마자르족의 태반은.. 다뉴브강 서쪽의 곡식의 물결이 굽이치는 고장에 그들의 새 고향을 정했다. 그 중 알포드 Alfold  평야는 유목부족이자 진정한 투르크인이요, 목동이자 기병이며 전사이자 정력적인 전투민족인 카바르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콘스탄티노스 7세 시절에도 "마자르인 가운데서 으뜸가는 무리" 라는 자랑스러운 명칭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초원에서 출격하여 슬라브인들과 러시아인들을 공격한 이들은 주로 이 카바르인들로 보인다. 그들은 895년에 불가르인들에 대한 전쟁을 벌였으며, 이후 반세기 동안에도 이들은 유럽 절반의 지역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헝가리인들은 어쨋든 자신들의 혈통적 특성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카바르인들은 줄곧 60년간 이어진 불안하고도 잔인한 공격의 예봉에 섰으며, 이 와중에 그들의 밀도는 놀라울 정도로 희박해졌다. 이에 반해, 상대적으로 평화속에서 살아갔던 마자르인들은 그들의 수를 불려나갔다." 투르크계 언어를 잊고 슬라브어 방언을 사용하게 된 다뉴브 불가르인들과는 대조적으로 마자르인들은 이중언어 사용시기가 지난 후에도 그들의 독일과 슬라브인 이웃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핀-위구르계 언어를 계속 지켜 나갔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카바르인들의 영향은 헝가리에서도 계속 이어졌으며, 하자르인과 마자르인 사이의 관계는 그들이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분단된 뒤에도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습니다. 바실리에프에 따르면 10세기의 헝가리 공작인 타크소니 Taksony 는 확실한 수가 알려지지 않은 하자르인 무리를 초청하여 자신의 영토에 정착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주민들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하자르계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있음직한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카바르인들과 이들 후대의 이주민들이 헝가리인들에게 자신들의 예술을 가르친 유명한 장인들과 함께 이주해 왔다고 가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챕터 1참조.) .

 

그들의 새로운 정주고향을 획득해가는 과정에서 마자르인들은 그 지역의 이전 주인이었던 모라비아인들과 다뉴브 불가르인들을 축출해내야만 했으며, 이에 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도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들의 다른 슬라브계 이웃들 -세르비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 역시 이미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멀고 먼 우랄-구즈인들이 페체네그인들을 몰아내고, 이들은 마자르인들을 몰아내었으며, 이들이 불가르인들과 모라비아인들을 몰아낸 이러한 연쇄반응의 결과로서 현대 중부유럽의 지도가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즉 변덕스러운 주마등 놀이가 (다소간의 논란의 여지는 있을지라도) 어쨌든 고정적인 직소퍼즐 게임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10

 

이제 우리는 루스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보고자 합니다 - 류릭의 부하들에 의해 수행된 키에프의 유혈병합은 서기 862년경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는 마자르인들이 페체네그인들에 의해 서방으로 밀려나감으로서 하자르인들이 그들 서측방의 마자르인들의 방어막을 상실한 시기와 대략적으로 일치합니다. 또한 이는 루스인들이 키에프의 통제권을 그렇게나 쉽게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자르인들의 군사력의 쇠퇴는 역시 루스인들의 공격을 받던 비잔티움인들에게도 악재가 되었습니다. 루스인들이 키에프에 둥지를 틀 무렵, 드네프르강을 타고 내려온 그들의 군선들은 흑해를 건너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습니다. 베리교수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멋들어지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서기 860년 6월, 황제 (미카엘 3세) 와 그의 모든 군대는 사라센인들에 대항한 출정에 나섰다. 군대가 멀리까지 행군했을때 황제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었으며, 이 소식은 황제를 전속력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한 러시아인 무리가 200여척의 군선에 분승하여 에우크시네 Euxine (흑해) 를 건너 보스포러스에 난입하여 인근의 수도원들과 교외지역을 약탈하고 왕자의 섬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도시의 주민들은 이러한 날벼락같은 공포와 자신들의 무기력함에 완전히 사기를 잃은 상태였다. 평상시 도시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 (타그마타) 는 황제와 함께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함대또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교외를 폐허로 만든 야만인들은 이제 도시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 위기의 순간은.. 박식한 귀족이었던 포티오스에게는 호기가 되었다. 그는 동료 시민들의 사기를 다시 고양시키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는 이러한 부조화를 설명하는 자리를 통해 "전 세계의 여왕" 인 황도가 야만족 무리에게 (역주/그들의 죄악 때문에) 치욕을 당해야만 한다는 일반의 생각을 대변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가 보여준, 이전의 포위전에서도 그 위력을 발휘했던 종교 의식에 더욱 감명을 받고 이를 위안으로 삼았을 것이다. 성모의 귀중한 의복을 앞세운 행렬이 시벽 주위를 돌았다. 그리고 그 옷은 폭풍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바닷물에 담그어졌다. 사실 어떠한 폭풍우도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인들은 곧 퇴각을 시작했으니, 이에 기뻐한 시민 들 중 이러한 구원을 천상 여왕의 개입의 덕분으로 여기지 않은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기록에 등장한, "박식한 귀족" 이자 그 웅변이 황도를 구했던 포티오스가 성 키릴루스에게 선교의 임무를 명했던 다름아닌 "하자르 대가리" 였다는 사실을 신랄하게 덧붙일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루스인들이 돌아간 것은 그리스인들의 군대와 함대가 황급히 황도로 돌아왔기 때문이지만, 이 "하자르 대가리" 역시 구원을 기다리는 동안 공황상태에 빠진 군중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공을 세웠습니다.

 

토인비 역시 이 사건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언급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860년에 "그들은 그들의 모습을 드러낸 이후의 어느때 보다도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에 근접해 있었다." 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흑해를 건넌 동방 북방인들의 드네프르 함대의 공격이 지중해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플로 접근했던 동시대의 서방 바이킹 함대의 공격과 합동으로 벌어졌다는 몇몇 러시아 역사가들의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실리에프와 파즈키에픽츠 Paszkievicz, 그리고 베르나드스키 Vernadsky 는 마르마라 해에서 모인 이 두 해군원정이 단순히 우연으로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리 합의된 것이었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이러한 대규모 스케일의 전략계획을 실행한 입안자의 성격을 추론하고 있다. 그들은 노브고로드의 류릭이 유틀란드의 로릭 Ririk 과 동일인이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의견은 독자들에게 하자르인들이 맞서야 했던 적의 재능을 인정하게 해 줄 것입니다. 비잔티움의 외교가 이러한 점을 인정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피할 수 없을 때에는 그들간에 벌어지는 전쟁들 사이에 오락가락하는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이중게임을 했으며, 그러는 가운데서도 러시아인들이 언젠가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동방 가부장 사회의 일원이 될 것이라는 경건한 희망을 품는데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반면 하자르인들은, 그들은 한때 비잔티움 인들의 중요한 자산이었지만 이제는 적당한 -혹은 부적당한- 기회에 팔아버릴 참이었습니다.

 

11

 

그후 2백년동안 비잔티움인들과 러시아인들 사이의 관계는 무력 충돌과 우호협정 사이를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들 사이의 전쟁은 860년 (콘스탄티노플의 포위), 907, 941, 944, 969-71년에 벌어졌으며, 그들간의 협정은 838-9년, 861, 911, 945, 957, 971년 에 체결되었습니다. 이러한 비밀협정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이것들의 횟수 만으로도 당시 정세가 놀라울 정도로 복잡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성전이 있고 몇년 후, 포티오스의 기록에 의하면 루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개종에 관한 비잔티움인들의 상투적인 설명에 따르자면- "황제에게 기독교도로의 세례식을 베풀어 줄 것을 간청했다." 고 합니다. 이에 대해 베리교수는 "우리는 이 사절단이 얼마나 많은, 혹은 어떠한 러시아 도시들을 대표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최근의 공격을 사과하는 것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니, 이는 아마도 포로의 송환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 러시아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복음의 씨앗은 아직 그 비옥한 토양에 뿌려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후 백년간 러시아인 사이에서 보여지는 기독교에 대한 사항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쨋든 그 협정은 860년과 866년 사이에 체결되었으며, 다른 결과들을 초래했다." 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들 중에는 비잔티움 함대를 위한 스칸디나비아 선원의 모집이 있었습니다. 902년부터 대략 700명 가량의 선원들이 이렇게 모집되었습니다. 다른 결과로는 유명한 "바랑 근위대" 의 창설이 있었으니, 이들은 루스인들과, 잉글랜드 인을 포함한 북방 용병들로 이루어진 정예병들이었습니다. 945년과 971년의 조약을 통해 키에프의 군주는 요청이 있을 시에는 원군을 보냄으로서 비잔티움 황제를 조력하게 되었습니다. 10세기 중반, 즉 콘스탄티노스 포르피로게니토스 황제의 시대가 되면, 보스포러스에 루스인들의 함대가 떠 있는 장면은 관례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성전을 벌이지 않았으며, 그러는 대신 그들의 상품들을 팔았습니다. 그들사이의 교역은 신중하게 조정되었습니다 (아따금씩 무력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 러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907년과 911년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루스인 방문자들은 성벽의 문들 중 특정한 한 문만을 통해, 한번에 50명이 넘지않는 인원으로 관리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도시에 체류하는 동안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곡물을 제공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교의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러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키에프의 섭정인 올렉이 비잔티움과 협정을 체결할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양측이) 조공에 대해 동의를 보고 맹세를 통해 이에 서로 구속되었을 때의 일이다. 레온 황제와 알렉산드로스 황제 (공동황제) 는 십자가에 입을 맞춘 뒤 똑같은 선서를 받기위해 올렉과 그의 부하들을 초대했다. 루스인들의 종교에 따라서 이들은 그들의 무기와 그들의 신 페룬, Perun, 가축들의 신인 볼로스 Volos 에 대고 맹세했으며, 이로서 조약이 비준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투와 협정으로 점철된 반세기의 세월이 지난 뒤, 성스러운 교회의 승리가 가시권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키에프의 올가 (이고르공의 과부) 는 957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체류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만약 그녀가 떠나기 전에 이미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 이는 논쟁의 대상입니다. ) .

 

의전서 De Caerimonus 에는 올가를 위해 베풀어진 다양한 연회와 축제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이 귀부인이 옥좌가 놓인 방에서 연출되는 기계완구로 가득찬 디즈니랜드 (예를들면 무서운 기계음을 표호하는 박제된 사자들이라든가.. 또다른 중요한 방문자였던 리우트프란드 Liutprand 주교는 기록하기를 ,자신은 방문객을 위한 상점에서 이에대해 미리 주의를 받았기 때문이 그 소리에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같은 광경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행사는 분명히 이 의식의 주관자 (콘스탄티노스 7세 자신) 을 고심하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니, 왜냐하면 여군주 올가뿐만 아니라 그녀의 수행원들 역시 많은수가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여든 두명의 남성 외교관들 (정확히 말하면, 아홉명의 올가의 남자 일가친척들, 20명의 외교관들, 43명의 상업 조언자들, 한명의 사제, 두명의 통역관, 외교관들에게 딸린 여섯명의 하인, 그리고 올가 전속의 통역관) 과 조언자들은 "표면에 나서지 않고 러시아 대표단의 뒤에서 걸었다." 고 합니다.  

 

연회가 열리기 직전에 러시아인과 비잔티움인 사이의 우호관계의 연약함을 상징하는 작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비잔티움 궁정의 귀부인들이 들어오자 그들은 예법에 따라 황가의 일원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올가는 계속 선채로 있었지만 "그녀가 상당한 정도로 자신의 머리를 기울였음을 만족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무슬림 국가의 손님들에게 그러하듯 별도의 테이블에 앉으라는 말을 들었다."

 

러시아 연대기는 이 방문에 대해 매우 윤색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식에 관한 문제가 꺼내어지자 올가는 콘스탄티노스에게 "만약 그가 그녀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원한다면, 그가 그러한 역할을 직접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지 않으면 세례를 받지 않을 자세였다." 황제는 이에 동의하고 포티오스를 불러 그녀에게 신앙을 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포티오스는 그녀에게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과 금욕의 미덕을 가르쳤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는 마치 해면이 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그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올가의 세례식 

 

세례식이 끝난 뒤, 황제는 올가를 불러 자신은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스스로 제게 세례를 베풀어주시고 저를 딸이라고 불러 주셨는데 어찌 저랑 결혼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아시는 바 대로 그것은 기독교도들의 법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한방먹은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가, 당신이 나보다 낫구려."

 

그녀가 키에프로 돌아갈때 콘스탄티노스는 "전령을 그녀에게 전사자를 보내어 '내가 그대에게 많은 선물을 내린 것처럼 그대도 그대가 로스인들의 땅으로 돌아가면 나에게 노예, 왁스, 모피, 그리고 나를 조력할 군인들을 선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기 바라오.' 라는 말을 전했다. 올가는 사자에게 대답하기를, 자기가 보스포러스에 있었던 시간만큼 황제도 포셰나 Pochayna 에서 그녀와 시간을 보낸다면 그때 왕제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그녀는 이 말을 전하고는 사절들을 내쫒았다."

 

이 올가-헬가는 분명 무시무시한 스칸디나비아의 아마존 전사였습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그녀는 아마도 류릭의 아들로 보이는 이고르 공의 과부였는데, 그는 러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탐욕스럽고 어리석으며 또한 가학적인 지배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941년에 대함대를 이끌고 비잔티움을 공격했는데, "그들이 사로잡은 이들 중 일부는 도살되었으며 일부는 사격 과녁으로 사용되었고 일부는 붙들려 손이 뒤로 묶인 뒤 머리에 철못이 박혔다고 한다. 많은 성스러운 교회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그들은 뱃머리에 장착된 관에서 그리스불을 내뿜는 비잔티움 함대에 의해 격퇴당했습니다. "그 불꽃을 보면서 러시아인들은 바다로 뛰어들었으며, 생존자들은 고향으로 들어가 그리스인이 하늘의 번개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것을 불로 만들어 앞으로 내쏘았기에 루스인들이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다는 말을 퍼뜨렸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몇년 뒤 우호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훌륭한 해양민족이었던 루스인들은 비잔티움을 공격한 다른 이들보다도 더욱 그리스불에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이른바 "하늘의 번개" 는 그리스 교회를 지지하는 강력한 논거가 되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들은 아직 개종을 할 준비는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고르가 자신이 터무니 없는 액수의 공물을 강제했던 슬라브계 민족의 일파인 데레브리아인 Derevlians 에게 945년에 살해당했을때, 과부가 된 올가는 키에프의 섭정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통치를 데레브리아인들에 대한 네 곱절의 복수로 시작했습니다. 그 첫번째로 데레비아인들의 평화 사절단은 생매장당했습니다. 그리고 귀족들의 한 대표자는 목욕탕에 갖힌 뒤 산채로 태워졌습니다. 이는 귀족들에 대한 학살극으로 이어졌으며, 마지막으로 데레비아인들의 도읍이 불살라졌습니다. 이와같은 올가의 피에 대한 욕망은, 후에 그녀가 세례를 받은 사실과 어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연대기는 말하기를, 어쨋든 그 날로부터 그녀는 "세벽이 태양을 예고하고 여명이 낮을 예고하는 것처럼 기독교 러시아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녀는 밤에 빛나는 달처럼 빛났으며 마치 진흙속의 진주처럼 이교도 사이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고 합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녀는 정교회에 의해 첫 러시아 성인으로 시성되게 됩니다.

 

 

 

 

12

 

이러한 올가의 업적과 그녀의 콘스탄티노플 방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그리스 교회의 품에 완전히 안기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올가의 아들인 스뱌토슬라프는 옛 이교 신앙으로 되돌아갔으며, 어머니의 간청을 듣기를 거부하면서 "용감한 대군을 모았으며, 마치 표범처럼 많은 전쟁에 뛰어들었는데" 그 전쟁들 중에는 하자르인들과 비잔티움인들에 대한 전쟁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지배가문이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인 것은 988년, 그의 아들인 성 블라디미르의 치세때와서였는데, 이와 거의 같은시기에 헝가리인, 폴란드인, 그리고 멀고 먼 아이슬랜드인을 포함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로마의 라틴 교회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앞으로 영속될 세계 종교지도의 아웃라인이 이제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유대교를 믿는 하자르인들은 시대 착오의 표본이 되어 갔습니다. 비록 많은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콘스탄티노플과 키에프 사이의 친선회복은 이틸의 중요성을 감소시켜 나갔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와 비잔티움 교역로 상에 존재하고 점점 증가해가는 상품들의 유통에 10 퍼센트의 세금을 꼬박꼬박 물리는 하자르인들의 존재는 비잔티움의 재무성과 러시아의 무장 상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갔습니다.

 

이전의 동맹군에 대한 비잔티움의 태도가 변했음을 보여주는 전조는 케르손이 러시아에게 항복한 사건이었습니다. 몇세기동안 비잔티움인들과 하자르인들은 이 중요한 크리미아 항구를 놓고 언쟁을 벌였으며, 이는 때때로 무력충돌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가 케르손을 987년에 점령했을 때 (역주/바실레이오스 2세가 약속한 결혼동맹을 강제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 비잔티움인들은 이에 항의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베리 교수는 "이 희생은 강력한 세력이 될 러시아 국가와의 영구적인 평화와 우정을 위한, 너무 비싸지 않은 대가였다." 라는 언급을 남기고 있습니다. 

 

케르손의 희생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자르인들과의 동맹을 희생시킨 것은 결국 짧은 안목에 의한 정책이었다는 것이 입증되게 될 터였습니다.

 

..<멸망>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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