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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Forum

비잔틴 이야기 4

작성자겨울달|작성시간04.02.27|조회수102 목록 댓글 0

<황태자의 계략>

조지 파브라고니안 장군은 갑옷을 입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1년 가까이 농성을 하고 있었다. 눈앞의 투르크군은 물샐틈 없는 포위망을 구축해놓고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소 아르메니아의 농성전은 그야말로 처절한 전투였다. 어느 한 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약이 오를대로 오른 터키의 아이바크 왕자는 적이 공포에 떨도록 성을 함락시키면 모든 병사들에게 5일간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약탈하도록 허락하겠노라고 큰소리를 쳐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비잔틴 방어군의 전의만을 오르게 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소 아르메니아가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파브라고니안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왕자의 장담을 듣자마자 병사들에게 연설했었다.
“로마의 병사들이여! 저 소리를 들었는가! 저들은 우리의 시체를 넘어 우리 아들의 목을 베고 우리의 아내와 딸을 강간하려고 한다. 다른 것은 생각지 마라. 오직 우리의 가족들만을 생각하자. 무슨 일이 있어도 성을 내주어서는 안된다!”
효과는 엄청났다. 사실 싸우는 입장에서 처자식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성안의 수비군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때때로 공격하는 터키군이 질려버릴 정도로 용맹하게 싸웠다.
원래 수성전의 약점은 병력의 수가 아니다. 어느 군대에서건 용맹한 자가 있는반면 겁쟁이도 있게 마련이다. 수성을 하는 입장에서는 몇배의 병력을 상대하면서 쌓이는 피로보다는 용맹한 전사들이 전투중에 죽어나가면서 점차 그 수가 감소하고 종국에는 겁많은 병사들만이 남게 됨으로써 성의 수비력이 약화되는 것이 더 두려운 법이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 아내와 딸을 능욕하겠다고 호언한 적앞에서 등을 돌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투르크군은 성난 파도처럼 성을 연신 몰아쳤으나 그때마다 많은 사상자만을 내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술탄의 아들 아이바크는 전술을 전면 수정했다. 그는 성으로 이어지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고 두터운 포위망을 구축함으로써 성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파브라고니안 장군은 성벽에 올라 성 내부를 살펴보았다. 아직 성안의 물자는 넉넉한 편이었고 수비군도 피로한 기색은 있었으나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남은 것은 비잔틴 구원군이 오는 것 뿐이었다. 소문으로는 황제와 황태자가 친히 출정했다고 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올 것이다. 장군은 고개를 돌려 적진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깊은 밤,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트레비존드의 임시 사령부에서 한창 회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트레비존드의 터키 수비병은 비잔틴을 상대로 한달도 버티지 못했다. 황제는 성에 입성하여 모든 투르크군을 말살하도록 명했다. 한차례의 학살이 끝나자 황제는 목욕으로 피를 씻어내고 사제들과 기도를 올린 뒤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목표에 대해 장군들과 회의를 열었다. 며칠 전 사령부로 온 전령에 따르면 니케아에서 단독으로 출병한 구원병이 아나톨리아의 투르크군의 계략에 넘어가 재기불능의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고 했다. 황제는 이런 전시에 귀중한 병력을 낭비한 니케아의 장군을 처단하고 싶었으나 너무도 급박한 상황에서 한 일인데다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었으므로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회의의 주제는 트레비존드에서 아나톨리아를 구출하러 갈 것인가, 아니면 곧바로 소아시아로 진격하여 적의 병력운용에 타격을 줄 것인가였다.
“먼저 아나톨리아를 탈환해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니케아의 구원군이 패했으니 아나톨리아에서 니케아로 투르크군이 진격하면 수도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사옵니다.”
포카스 장군은 매사 신중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당연히 수도의 안위를 우선순위로 놓고 전략을 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매니아케스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폐하. 소아시아는 저들의 전략적 요충지이옵니다. 소아시아를 타격하면 아나톨리아의 투르크군은 보급로의 차단을 걱정하여 자연히 후퇴할 수 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게다가 지금 소 아르메니아는 수비군이 수성전을 펼치고는 있사오나 한시라도 빨리 구원군을 보내야 할 것이옵니다. 아나톨리아의 적군은 가벼이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오니 당장은 심려하지 않으셔도 될 줄로 사려되옵니다.”
장군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끝없는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은 모두 옳았다. 비잔틴에게는 양쪽을 동시에 타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겠으나 불행히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르메니아 지방으로 후퇴한 술탄이 여전히 1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들의 공론을 가만히 듣고있던 황제는 문득 옆자리의 태자를 바라보았다. 알렉시우스 2세는 약 550명의 병력을 이끌고 트레비존드 공성전에 합류했다. 기골이 장대한 태자는 이미 황통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의젓함에 황제는 세삼스럽게 부자의 정을 느끼는 동시에 그에 대한 나쁜 소문도 떠올랐다. 이런 자랑스런 아들이 성도착자라니.... 문득 황제는 감상에 빠지려는 자신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황제이자 모든이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랬다가는 전쟁은커녕 언제 자신의 등에 칼이 박힐지도 모르는 것이다.
“태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먼저 알아볼 것이 있습니다. 장군 로마누스! 그대는 <스트라티오시곤>을 이끌고 있으니 아시리라 믿소. 현재 그루지야의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대략 260명 정도입니다.”
“....폐하. 소자가 작은 계책을 하나 생각해내었는데 허락해주신다면 말씀드리겠사옵니다.”
“말하라.”
“먼저 그루지야의 병력으로 하여금 아르메니아로 진격토록 하게 하시옵소서.”
일순간 의아함과 놀람이 표정들이 교차하면서 침묵의 분위기가 감돌더니 이윽고 장군들이 술렁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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