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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Forum

알렉시우스2세의 승부수-오리엔트 대공세

작성자제국의명장|작성시간04.03.10|조회수233 목록 댓글 2
사실 신성로마제국은 우리 비잔틴과 동맹국이었다.이번에 십자군에게 길을 터준것

은 비잔틴의 우정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신성로마제국은 상당히 돈

이 많은 국가라 설마하니 비잔틴을 지나면서 약탈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

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2세의 생각대로 십자군은 아무

탈 없이 비잔틴을 지나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1132년 로마교황청에서 동맹을 요청하여 승인하였다.이로써 그리스 정교와 로마 카

톨릭은 제휴를 맺은 것이고 더 이상의 종교분쟁이 없어졌으므로 서방이나 동방(비잔

틴)모두 합당하게 여겼다.그리고 이해에는 유럽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나라로 비

잔틴이 선정되었기 때문에 한없이 마음이 푼푼하였다.국고는 플로린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무렵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2세가 이끄는 800여명의 병력이 트리폴리로 이

동을 하였다.트리폴리에는 황제의 아우인 로마누스 군단장이 약660여명의 병력을 거

느리고 있었다.그리하여 약1500여명의 비잔틴군이 모여 있었다.그들의 목표는 예루

살렘이었고 십자군이 괴멸되는 즉시 공격할 예정이었다.


그무렵 한때 1100여명에 이르던 신성로마제국군은 팔레스타인을 방어하는 3000여명

의 이집트군에 밀려 290여명으로 줄어져 있었다.더욱이 팔레스타인은 기근으로 인

해 민심이 흉흉해져 마침내 반란의 분위기 마저 감돌고 있었다.


한편 비잔틴제국에서는 소문이 하나 돌고 있었는데 왈카비아의 영주인 이작은 여성

보다는 어린 소년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즉 성도착자라는 것이었다.비잔틴 제국 황

제 알렉시우스2세는 종교적 본보기가 필요하다고 판단,암살자를 보내 이작을 살해하

려고 했으나 이작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그후로 민감한 사람이 되어 정사

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반대로 아나톨리아에 파견중이었던 밀사 한명이 머리에 칼

이 꽃힌채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덮고도 남을 사건이 발생했다.1135년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

시우스2세가 성급하게 십자군이 주둔중인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만것이다.황제는

뒤늦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일은 크게 번져 있었고 로마 교황청은 노발대발하여 제휴

파기를 선언했다!!이로서 모처럼의 종교단합은 깨졌다.물론 이와 동시에 신성로마제

국과의 국교도 끊어 졌다.


그러나 스페인.프랑스.덴마크.헝가리 국왕들은 비잔틴을 지지하여 신성로마제국과

의 관계를 끊었다.이에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2세는 크게 고무되어 전략을 좀

더 대담하게 새웠다.즉 십자군과 이집트 두 강력한 군사집단을 동시에 상대하겠다

는 것이었다.알렉시우스 2세는 트리폴리의 로마누스 군단장에게 아라비아 침공을 지

시하고 황제는 스스로 팔레스타인으로 침공을 하였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때의 일을 1136년에 있었던 비잔틴군의 대공세,즉 오리엔트(동

방)대공세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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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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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겨울달 | 작성시간 04.03.10 긴장감이 장난 아니군요. 스펙타클한 전쟁이 유럽과 아프리카를 휩쓸듯....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3.10 지금 현재 우리 제국의 주요 전장터는 소아시아 입니다.이곳에서 40년간 비잔틴군 480여명,이집트.투르크군 4000여명.십자군 1200여명이 전사 했는것으로 추정 합니다.그만큼 지금 전쟁이 심합니다.과연 서방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 될지 궁금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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