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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원정 (콘스탄티노플)

작성자대포|작성시간04.04.06|조회수318 목록 댓글 1
1392년
이슬람의 대국이 되어버린 투르크의 대대적인 공세속에 동유럽 왕국 헝가리, 폴란드는 멸망을 당하여 속국이 되어버리고 이름만 남은 신성로마제국은 주변국과의 동맹으로 간신히 명맥만 이어가는 작은 나라와 같이 되어 버렸으며, 이탈리아는 왕조의 내분으로 말미암아 서유럽의 대투르크 전선에서 저무는 해가 되어 해양왕국으로써의 여러식민지를 모두 투르크에게 빼앗기고 장화신 모양의 반도안에 갇혀있는 상태가 되었고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반란군과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데에 자국의 모든 정력을 투입하는 상황이 였다.
이 상황에서 영국을 아일랜드로 몰아내고 자국내의 모든 반역세력을 몰아낸 가장 굳건히 내실을 다진 프랑스만이 그 힘을 잃어가지 않고 있었다.
교황은 이슬람세력이 동유럽 왕조를 멸망시키고 어느덧 베네치아까지 다가오자 유럽의 모든 카록릭 세력에게 대대적인 대투르크전을 외치는 편지를 각국에 보내게 되었고, 가장 큰 역활을 하던 이탈리아가 빠진 각국은 그 누구도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적인 영국과의 전투로써 교황의 눈밖에 있던 프랑스 황제는 마침 왕실과 자국민의 이슬람교의 격멸과 본격적인 투르크의 서유럽침공을 막아야한다는 마음을 읽고 드디어 명분과 기회를 포착하게 되어, 대투르크전의 중심역활을 맡게 되었고 그리고 서유럽인들은 모이게 되었다.

1393년
프랑스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되찾기 위한 십자군을 일으킨다.

1394~8년
서유럽의 각국에서 원정군을 모집(육상이동) 인원 약1900명, 콘스탄티노플 함락시 병력공급을 위해 건조한 프랑스의 대함대 이동 계시.

1399~1404년년
투르크의 영토내로 진입, 투르크의 내해로 해군 도착과 작은 해전 개시. ㅣ 중동쪽의 농민 반란으로 적의 주력군은 이미 떠난상태이며, 원정군의 침입을 예상치못함.

1405~8년
콘스탄티노플 방위군과 회전후 성을 포위, 적을 고사시킴, 큰 피해없이 성을 함락,
원정성공, 대대적인 해전과 기술적, 수적열세인 투르크 해군을 거희 전멸시킴 ㅣ 적의 주력군은 반란을 진압하고 육상 진군개시, 자국내에서의 자하드가 발생하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

1409년
투르크의 내해를 모두 장악하고 콘스탄티노플로 프랑스 본국과의 보급로 연결 & 병력 수송개시, 원정군은 투르크의 보급을 막기 위해 주변성을 공격하여 대대적인 총체적인 파괴를 시작.

1411년
1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시작. 방어군인 원정군은 본국의 보급과 병력의 우세한 질적 차이로 말미 암아 적의 모든 지하드군을 패퇴시킴. ㅣ 투르크 주력군의 인근지역 도착과 동유럽 군단과의 연개작전을 위하여 대기.

1412~4년
프랑스 본국의 최정예 군단과 원정군은 적의 심장에 꽂힌 비수와 같은 자신들을 보며 어느때 보다도 사기가 높은 상태, 해군은 원활이 역활을 수행하며 간혈적인 해전이 벌어짐 ㅣ 투르크의 주력군은 원정군의 총체적인 파괴와 해상로의 차단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도 보급로가 길어져 사기 저하, 동유럽군은 때마침 다른 유럽국가의 반격으로 많은 영토를 빼앗기지만, 우선 목표인 콘스탄티노플을 주력군과 함께 공략하라는 술탄의 명령으로 대기 상태. 폴란드 왕자의 세력 제건으로 투르크군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플 동쪽으로 한정됨.

1415년
2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시작. 원정군의 대부분은 전멸, 프랑스 본국의 잘 훈련된 군단의 분투로 인하여 승리함. ㅣ 투르크의 유럽군은 전멸당하고 주력군은 길어진 보급로로 인하여 큰 피해와 함께 후퇴.

1416~8년
원정군은 모두 해산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은 프랑스 본국의 군대가 방어를 맡고 지속적인 병력 수송 ㅣ 투르크는 국가내의 총체적인 지하드 발생과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 동로마의 수도 탈환을 노림.

1419년
3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인해전술로 나오는 투르크와의 회전으로 양측 모두 제기 불능 상태가 됨.

1420년
프랑스 본국내의 엄청난 비용 소모로 인하여 농민반란과 이베리아 반도내의 모든 이슬람세력을 몰아내고 10년동안 내실을 다진 스페인이 프랑스의 약해진 남쪽 전선으로 침입개시. 스폐인 해군과의 격렬 한 해전으로 해상 보급가 차단되어 콘스탄티노플 방위군은 영토내에서 병력을 모으나 그 큰성체를 방위하기에는 이미 제기 불능상태 ㅣ 투르크는 서유럽에 심어놓은 첩자들로 인하여 프랑스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되어 세번째 지하드 개시.

1421년
4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보급로가 끊긴 상태에서 방위군과 투르크군의 병력차이는 약 550:8000, 동맹인 폴란드군 600명과 함께 1150:8000의 회전을 벌이지만 적의 예니체니 4부대로 방위군은 패퇴, 삼중성벽안에 들어가 농성시작.

1422년
투르크군의 공성전 시작으로 혈전이 벌어지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삼중성벽과 투르크의 술탄이 친정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소극적 전술로 일관하던 투르크는 결국 폐퇴. 400:2000의 병력차이

1423년
5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시작. 다시 내해를 장악하고 술탄이 직접 친정을 나와 대대적인 공략을 시작하여 30년동안 십자군에게 빼앗겼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ps. 이것은 전에 정말로 해보았던 일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였으며, 약간의 오류가 있어도 대략 이해해 주십시요 --; (대략 한 달전의 일입니다 -0-!)
그리고 4차전투에서 승리한 법은 초반의 대대적인 투르크의 공격으로 1차성벽은 완전히 부서져서 성내로 침입했고, 2차성벽은 녀석들이 문을 열었지만 대기중인 병력으로 성문에서 공방전을 했고 성내의 화살들로 큰피해를 입은 1진이 후퇴하더군요. 그리고 나머지 지원군들은 컴터가 바보인지 한부대에서 두부대씩만 진격시켜서 성벽에서 나오는 화살맞고 결국에는 후퇴해서 이겼습니다 --;; 3시간동안 컴터 켜놓은거 같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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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OJOCLAN | 작성시간 04.04.18 그래서..뒷 얘기는 어떻게 되죠?...이 전쟁 하는동안 유럽에도 꾀나 강대국 하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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