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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Forum

다른 스토리 2부

작성자이찬선|작성시간04.08.17|조회수109 목록 댓글 4
헨리 대공은 자신앞으로 나온 포상금이 왕자에 의해 빼앗긴데 앙심을 품고 윌리엄 왕자의 왕위 등극을 방해하기로 결심한다. 왕자가 대관식이라도 치르면 자신은 더이상 부정축재를 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과거의 부정이 드러나 쫓겨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헨리 대공과 왕자의 사이가 그리 좋지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헨리는 일단 왕자에게 아부하는 척 그의 관심을 사기로 했다. 일단 멍청한 윌리엄 왕의 아들이라 해도 왕자의 통찰력은 7에 달하기에 얄팍한 수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그는 왕자에게 정확히 20년을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에 암살을 하든지 쫓아내든지 해서 자신이 대권을 손에 쥘 계획이었다.

20년이라면 왕자도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했고 이는 적중했다. 헨리 대공의 지도하에 대대적인 영주 교체가 이루어졌다. 기존의 겨우 글줄이나 알고 쓸줄 알던 영주들을 대거 해임시키고 최하 통찰 4짜리의 영주들을 임명하며 왕국의 수입을 늘려갔다.(물론 헨리의 수입도 늘어갔다.) 그리고 가장 급한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왕을 설득하였다. 왕은 그럭저럭 구워삶았지만 문제는 왕자였다. 윌리엄 2세는 이미 늙고 쇠약해서 사실상 왕자가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이 놈의 왕자는 앞뒤가 꽉막혀도 제대로 막힌 놈이었다.

왕자가 휴전을 적극 반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플랑드르 때문이었다. 플랑드르라면 앙쥬와 노르망디의 수입을 메꾸고도 남을 북유럽의 노른자 땅이란 걸 어찌 알았는지 죽어도 플랑드르를 병합하겠다는 것이었다. 헨리는 거의 미칠지경이었다. 현실적으로 프랑스의 대군이 밀어닥치면 영국은 그대로 끝장이었고 자신도 끝장이었다. 헨리는 왕자와 프랑스 사이에서 온갖 잔머리를 굴리며 최대한 조기 종전을 이끌어내려 하였고 마침내 해답을 찾았다.

대국 프랑스로 쏠린 왕자의 관심을 아라곤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아라곤 지역은 플랑드르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지역이 아니었다.(당시 플랑드르 수입 1100, 아라곤 수입 650) 게다가 철광산 까지 있기에 주변 스페인이나 프랑스도 군침을 흘리는 지역이었다. 헨리는 필사적으로 왕자를 설득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갖고 있는 현실적 어려움은 물론이고 철광산 개발을 통한 강병 육성, 당장의 앙쥬와 노르망디의 상실로 인한 세수 감소 복구 등 갖다 부칠수 있는건 다 갖다 부쳤다.

결국 왕자는 깊은 사색후에(깊은 사색가로 발전) 프랑스와의 휴전을 허락하고 아라곤과의 전쟁을 결심했다. 당시 아라곤은 발렌시아로 원정을 나간 상태였기에 공격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본래 비열하고 돈만 밝히는 윌리엄 왕자는 주저없이 앙퀴탱 주둔군 일부로 하여금 아라곤 침공을 명령했고, 결국 전투없이 아라곤을 병합한다.(아라곤 병합은 훗날 영국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교황은 무모한 영국 윌리엄 왕자의 행동에 초강력 태클을 걸어 아라곤 불침공을 명하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 영국군은 아라곤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다. 한편 교황은 윌리엄 왕자를 나무라는 서신을 보내며 십자군 출병을 강요한다. 당시 교황청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는 이집트를 상대로 열국의 십자군 출병을 요청했고, 대부분의 국가가 이에 응해 십자군을 출병시켰다.(단 스페인은 알모하드쪽으로 십자군 출병) 유독 영국만이 유럽 서쪽 끝 섬나라라는 지형적 이유도 있었고 또 워낙 돌머리 윌리엄이기에 교황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십자군의 거듭된 실패로 보다 많은 국가의 협조가 필요한 교황청은 결국 영국에게까지 손을 벌리게 되었다. 당시 카톨릭이 삶의 전부였던 유럽 국가에게 교황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윌리엄 왕자도 이것은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또라이 윌리엄은 교황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십자군 출병은 맞는데 지역이... 바로 북유럽 반란군 지역이었다. 포메라니아를 목표로 영국의 십자군이 출진했고 그래도 한뿌리에서 나온 그리스정교인데 설마 카톨릭이 공격할까 안심하고 있던 포메라니아 반란군은 황당해하며 리투아니아로 후퇴해버렸다.

윌리엄은 십자군이 성공했다는 소식에 으쓱해하며 교황청으로 승전 소식을 알렸다. 교황은 이 소식을 듣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영국에게 손을 빌렸던 내가 미친놈이지...' 포메라니아 정벌 성공에 탄력을 받은 윌리엄은 즉각적으로 리투아니아, 노브고로드, 핀란드 등지로 십자군을 연이어 보냈고, 플랑드르 주둔 프랑스군은 영국의 엄청난 십자군 러쉬로 다수이 병력이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했다.

한편 헨리 대공은 부국 강병책으로 적극적인 무역을 골자로 하는 중상주의를 채택하며 노섬브리아와 앙퀴탱에서 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왕자에게 미리 알리면 또 석달 열흘은 설득해야 하기에 이는 독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왕자에겐 다 플랑드르 침공 때 쓸 전함이라고 속였고 윌리엄 왕자는 큰 의심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윌리엄 왕자의 통치중 윌리엄 2세가 붕어했다. 왕자는 런던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윌리엄 3세로 등극했다. 귀족들은 경악했고, 프랑스는 이를 반기며 공주까지 주었다. 영국이 윌리엄 3세의 통치하에 있는한 프랑스의 브리튼 병합의 시기가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었다.

한편 스페인은 알모하드와의 대전을 승리로 이끌며 남부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 되었고, 이집트는 계속된 유럽국의 십자군 러쉬로 투르크를 견제하지 못하여 투르크는 동방제국을 제압하며 소아시아 최대 강국이 되었다. 윌리엄의 재물욕심으로 영국의 국고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갔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플랑드르에 대한 윌리엄 3세의 열망은 그의 치세동안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 바로 헨리 대공이 스스로에게 약속한 20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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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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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RLAXOGKS | 작성시간 04.08.17 그럼 이제 헨리가 윌리엄을 죽이는군요 재미있을듯 그리고 정말 잘 쓰시네요
  • 작성자이찬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8.17 감사함다 귀차니즘에 빠져 더 이상의 진전이 읍네요... 문명3 하느라
  • 작성자Berserk_Chang | 작성시간 04.08.21 문명 그거 좀 지나면 진짜 질립니다. 완전 노가다형. 이 글 완성하는데 주력 하세요.^_^
  • 작성자이찬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8.22 왕 난이도 도전했다가 컴터 부숴버릴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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