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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의 신화 18부 지옥의 행진곡

작성자제국의명장|작성시간04.12.25|조회수250 목록 댓글 1
1181년...18세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루드비히 4세는 대머리 였다.그는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머리가 허옇게 보일 정도로 머리숱이 적었다.황제는 평소에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았고 책

을 손에서 놓는 일이 드물었다.아마 그것이 원인이리라.결국 그는 머리를 밀었고 덕분에 그의 머

리에는 머리카락 한 올도 없었고 평생 그런 헤어 스타일을 유지 했다.


루드비히 4세는 스위스와 남부유럽에서 약 300여명의 용병을 고용하여 동부전선으로 이동케 한

다음 프랑스 해안에 있는 제국군에 명을 내려 영국 본토를 공격케 하였다.그리고 덴마크 쪽에서

꾸준히 양성하던 해군을 대서양으로 이동 시켜 영국 해군을 섬멸케 하였다.그리고 동부 전선에

는 반격을 명령 했다.황제는 동부의 각 주의 치안 유지를 시민군이 아닌 정규군이 담당케 하였

다.그리고 1185년까지 치안 유지를 완전히 제국군이 담당하게 하였다.그 결과 약 2200여명의 시

민군이 해산 되었다.황제는 그들중 상당수를 제국군 정규군으로 재편성 하게끔 하였다.그리고

폴란드와 인접한 각 주의 병력을 폴란드 근처로 집결시키게 하였다.마침 동부 전선의 병력 보강

을 위해 예비한 부대와 비잔틴과의 국경선에서 모집된 병력을 합류시켜 약 700여명의 진압군

을 편성 시킬수 있었다.


1182년 영국 본토에서 제국이 승리 했다.서부의 제국군은 영국의 본토에 무사히 상륙하고 영국

군을 공격하여 영국왕 리처드의 목을 베고 영국군 630여명을 사살하고 170여명을 사로 잡았다.

제국군 군단장 오토는 런던 성을 포위하고 런던시민들에게 포로를 식량과 교환하려고 했다.그러

으로서 성안의 양식을 줄여 좀 더 일찍 포위전을 빨리 끝내려고 할 생각 이었다.그러나 런던 시

민들은 응하지 않았고 결국 170여명은 모두 참수하여 목을 성에서 보이는 곳에 보이게 하고 시

체의 내장과 생식기와 피를 강을 통해 런던으로 흘려 보냈으며 시체의 팔과 다리는 잘라서 성안

으로 던졌다.몸뚱아리는 들판에 버려 까마귀 밥이 되게 하였다.이것으로 영국의 전투의지를 꺽

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새로 즉위한 영국왕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남진하

려고 하였으며 런던시민들의 의지는 꺽기지 않았다.그러나 황제는 군단장에게 영국본토에서 철

수를 명령하지 않았다.황제는 비책이 있다고 했다.

동부에서는 각 주의 병력과 진압군의 규합이 완료되어 970여명의 폴란드 진압군을 형성 할수 있

었다.이듬해 진압군은 폴란드 탈환전을 전개 하였다.


1183년 노르웨이에 주둔중 이던 친위대 300여명이 런던 이북 지방에 상륙하고 영국군을 공격하

여 영국군 230여명을 사살하고 70여명을 사로잡았다.이번에도 포로들은 모두 참수 되어 1182년

의 포로들과 똑같은 방법을 당했다.성을 포위한 친위대는 이듬해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그때

황제는 3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을 참수시키고 16~40세 사이의 영국 여성들은 친위대와 동침케

하였다.


[그곳은 인간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악마가 사는 지옥 같은 곳 이었다.친위대는 창과 검을 쥘 만

한 사람에서 말 하고 걸을수 있는 아이까지 남자로 보이는 모든것을 찌르고 베고 찍어 죽였다.그

리고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어느 정도 있는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은 무자비한 친위대에 의해 순결

과 정조를 잃었다.인간 사냥과 남녀의 강제적인 육체적 결합은 며칠이 지나도 그치지 않았다.그

곳은 화염과 시체와 비명소리와 신음소리와 울부짖음과 살인과 광란만이 남아 있을 뿐 이었

다.]

-음류시인 토마스의 [여행기]-


이로서 런던과 스코틀랜드와의 연결은 불가능 해졌다.영국군을 수송할 영국해군은 이미 제국 해

군에 의해 전멸을 하였다.그러나 런던은 제국군에 대항하여 필사적으로 싸웠다.무엇보다 스코틀

랜드에서 지원을 할수 없게 되자 이제는 웨일즈에서 제국군을 공격하려고 했다.웨일즈는 제국군

의 후면에 있는 지역 이었다.웨일즈에서의 공격은 스코틀랜드에서의 공격보다 더 위협적 이었

다.그러나 이번에는 황제에게 방도가 없는 것 같았다.

동부에서는 폴란드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 되고 있었다.폴란드군은 제국군에 비해 수도 많았

고 훈련과 무장상태도 훌륭했다.폴란드의 왕은 제국의 최고 명장 이었던 프레드릭 볼프강을 골

로 보낸 사람 이었다.쉽지 않는 진압전이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알았으며 그것은 실제로 쉽지

않게 전개 되었다.


[제국군과 폴란드군은 양측 모두 평지에 진을 쳤다.제국군이 고지로 이동하면 적도 다른 고지를

점거 했고 제국군이 이동하면 폴란드 군도 이동 했다.폴란드 왕은 장기전으로 전투를 이끌고자

하였다.제국군 군단장 크레퓌만은 기병대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매우 넓게 전개하고 숲을 통해

적의 고지로 진군케 하였고 보병대를 적의 고지로 진군 시키게 하였으며 기마 궁수와 궁병들을

적이 점령한 고지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배치 시켰다.제국군의 주력인 보병대가 적의 고지 앞

마당 까지 이르자 적은 화살을 쏘고 기병대로 보병대를 공격케 하였다.적의 보병대는 움직이지

않았다.제국군 군단장은 보병대를 퇴각시키지 않고 옆으로 이동케 하였다.그 무렵 제국군 기병

대는 2파트로 나누어 친위대는 고지의 보병대를 공격하고 기사들은 적의 기병대를 대각선 방향

으로 공격 했다.그리고 기마궁수와 궁수들을 적의 고지로 이동시켰다.

제국군 보병대는 적 기마병대의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곧 대각선에서 기병대가 합류하

자 적의 기병대가 붕괴 되었다.친위대는 비록 적은 수지만 적의 보병대를 상대로 분전을 하였고

적의 주력인 기병대가 붕괴 될 때 까지 버텼다.기마궁수들은 고지 정상으로 이동하여 폴란드 군

을 향하여 활을 쏘았고 궁수들은 고지 중앙에서 적을 향해 쏘았다.폴란드 왕은 상황이 불리하다

고 느꼈던지 퇴각을 명령하고 도주 했다.제국군은 기병대를 동원하여 추격하는 한편 보병대는

고지 정상에서 적의 추가 병력에 대비하였다.그리하여 폴란드 왕과 잔당이 도주하고 적의 추가

병력이 등장하자 기병대를 후퇴시켜 적군이 고지에 오게끔 하고 궁수들을 숲에 매복 시켰다가

적이 가까이 오자 화살을 쏘고 기병대와 보병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적과 싸웠다.그러나 적의 수

가 상당히 많아서 궁수부대의 화살이 다 떨어져 궁수들이 단도를 들고 폴란드군과 싸웠고 몇 개

의 부대는 엄청난 손실을 입어 도주하기도 했다.그러나 다행히 승리를 향한 의지는 아군이 더 높

았기 때문에 결국 폴란드 군을 격퇴 할 수 있었다.그 전투에서 폴란드군 920여명이 전사하고 290

여명이 사로잡혔다.제국군은 470여명이 전사 했다.포로들은 이단자들에게 행하는 처형방식 으

로 모두 죽였다.]

-제국군 군단장 크레취만의 [동부에서의 회상]-


폴란드군을 성으로 몰아 넣은 제국군은 이듬해 성을 공격하여 폴란드 반란을 진압 하였다.폴란

드 군이 비록 요격전에서 패배 했으나 성안에는 상당수의 폴란드 군이 있었다.굳이 공성을 하지

않고 런던처럼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폴란드군을 아사시켜서 성을 점령 할수도 있었고 그것은 황

제나 제국의 장군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그러나 황제는 폴란드를 빨리 진압하고 동부의 반군을

평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중대한 난관이 있었다.1184년 마침내 제국의 재정이 바닥이 난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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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OJOCLAN | 작성시간 04.11.13 오~ 되게 재밋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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