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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의 신화 19부 황제의 전쟁

작성자제국의명장|작성시간04.12.28|조회수173 목록 댓글 1
[14년이 지났다....아직 수만의 반군은 동부에 웅거 하고 있었다.제국의 재정 수입은 반으로 줄

어 있었으나 지출은 전혀 줄지 않았다.오히려 군사력 증강으로 인해 배로 늘었다.마침내 제국의

국고는 바닥 났다.이것이 동부 토벌을 14년이나 지속한 제국의 현실 이었다.결코 불리한 상황도

아니고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다.다만 사실일 뿐 이었다.]

-루드비히 황제의 자서전 중-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항상 태연자약 했다.아니 그래야만 했다.약한 모습을 절대로 보여줄수

없었다.선제들이 유지하고 발전시킨 제국은 돈과 군사력과 태연자약함으로 지킬수 있었다는 것

을 1184년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알고 있었다.


제국의 경제력은 제국을 지탱하는 힘 이었다.수만의 병력을 양성한다고 해도 경제력이 뒷바침

되지 못한다면 유지시킬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이다.제국은 초기에 농업국가 였다.따

라서 초기의 제국군은 규모도 작았고 빈약 했다.그러나 프랑스를 병합시켜 제국의 영토가 2배로

늘자 군사력은 증강되었고 국고의 수입도 늘었다.그때부터 제국은 군사국가로 변모 했다.군대

의 힘으로 주변의 약소국을 침공하여 약탈하여 국고를 채우고 점령지의 경제를 발전시켰다.국토

는 더욱 넓어 졌고 인구와 재정은 증가 했다.제국이 유럽의 동부를 평정하고 이탈리아 북부를 장

악한 이후,제국은 해군의 증강에 힘을 기울였고 제국은 상업국가로 변모 하기 시작 했다.초기 제

국의 무역은 주로 육로와 발트해에서 이루어 졌었지만 곧 북해로 확대 되었고 1170년에는 아퀴

덴에서 발트해까지 이어지는 해로가 개척 되었으며 1184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발트해까지 가는

해로가 개척 되기 직전 이었다.

그러나 경제의 육성과 상업의 장려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수입은 늘지 않았다.사실 제국 국고의

반 이상은 정복전쟁을 통해 획득하고 약탈한 돈 이었다.제국의 수입은 1150년을 기준으로 조금

씩 줄고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걱정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하지만 1170년 동부에서 대규모 반

란이 일어나자 동부의 풍요로운 곡창지대의 3분의 2가 반군에 넘어가거나 전화를 입었다.동부

의 반군 점령지역의 시설들은 반군에게 파괴 되거나 제국군 스스로 파괴 시켜야 했다.그러나 제

국의 수입을 보관하던 많은 창고들이 반군에게 넘어 갔고 피해는 심각 했다.제국은 토벌군을 조

직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썻고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써야 했다.그리고 반란이 제국

전체로 번지지 않도록 세금도 낮춰야 했다.그런데 하필이면 그 무렵 제국은 한창 해군을 증강시

키고 있었고 영국과 전쟁중 이었으므로 이중삼중으로 돈이 쓰였다.그리고 그무렵의 제국은 외교

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피레네 산맥과 이탈리아 남부,발칸반도,프랑스 북부에 배치 되어 있는 제

국군을 반군 토벌에 투입 시킬수 없었다.

그러나 제국의 대외사정과는 상관 없이 제국 내부는 평온했다.물론 1170년의 대규모 반란은 제

국 사회에 큰 충격 이었고 사람들은 동요했다.하지만 동부전선에서 프레드릭 볼프강 군단이 보

여준 활약은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1170년 이후에도 제국은 막대한 돈을 들여 성

을 축조하고 문화시설을 만들고 있었다.동부의 제국군 방어선 서쪽에 있는 지역을 다스리던 영

주들은 안심했고 그들의 여가 생활(?)을 다시 즐길 수 있었다.영주들은 정말 황제 못지 않는 생

활을 누릴수 있었다.신성로마제국의 영주들은 부러움과 조롱의 대상 이었다.


그러나 이제 1184년 이후의 제국은 변할 것이다.황제는 그렇게 생각 했다.재정 문제는 군사력 으

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은 오직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 밖에 없었

다.


1185년 황제는 [특수 전력 양성]이라는 기밀 명령을 각주에 보냈다.황제의 기밀 문서 였으므로

영주들이 그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직속기관에서 전달되어 실행 될 것 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동부의 방어선 서쪽 지역의 모든 건설 사업을 중단시키고 제국군 소속 조선소에

서 군함 건조를 모두 취소 시켰다.그리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본토의 세금을 매우 높게 측정

시켜 거두게 하였다.그 지역의 주민들은 불평 없이 세금을 바쳤다.황제는 그것을 [눈물 날 정도

로 고마운 일]이라고 기록 했으며 나중에 황제 스스로 그 지역을 순회하며 주민들을 치하 했다

고 한다.1185년에는 제국의 군사적 행동이 없었다.


1186년 황제는 [변혁]을 선언 했다.황제는 직무에 충실하지 않고 나태한 자들은 징계를 면치 못

할 것 이라고 했다.곧 황제의 기밀 명령이 시행 되기 시작 했다.황제의 비밀 정보 기관에서 양성

된 소위 [밀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영주들을 조사 하기 시작 했고 곧 수많

은 비리들이 적발 되었다.프리슬란트의 영주는 정직한 상인들을 속이고 뒷돈을 받았다.아퀴덴

의 영주는 무능한 자신의 친족들에게 중요관직을 주었다.밀라노의 영주는 재정수입중 일부를 착

복 했다.스웨덴의 영주는 도박에 제국의 공돈을 사용 했다.브루고뉴의 영주는 재정수입중 일부

를 자신의 사치에 사용 했다.일 드 프랑스의 영주는 선행을 베풀기 위해 공적 자금을 사용 했으

며 스위스의 영주는 정치를 오직 자신의 감정에 의지 하여 재정을 낭비 했고 오스트리아의 영주

는 재정을 종교적인 사업에 지나치게 사용하여 재정을 낭비 시켰다........이것이 1185년에 적발

된 영주들의 주요 비리 내용 이었다.황제는 이들의 관직을 모두 몰수하고 전장에서 활약하는 용

맹스럽고 행정에 유능한 장군들에게 관직을 주었다.비리에 고통스러워 하던 지역의 신민들은 크

게 환영 했다.다만 일 드 프랑스 지역을 제외 하고는.....

1186년에도 제국의 군사적 행동은 없었다.그러나 제국의 재정은 이제 돈을 빌려쓸 처지가 되었

다.황제는 재정문제에도 신경써야 했지만 군사문제에도 신경써야 했다.황제는 폴란드에서 1개

군단을 이끌고 군사들을 격려시키고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주력 하고 있었다.


1187년에도 수많은 영주들의 비리가 황제에게 전달 되었고 황제는 그들을 가차 없이 해임시켰

다.간혹 일 드 프랑스의 경우 처럼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공적인 돈을 쓴 일 때문에 명단에 오른

경우도 있었지만 해임 시킬수 밖에 없었다.

황제도 가난한 신민들을 구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하지만 제국이 처한 상황은 그로 하

여금 선행을 베푼 영주를 해고 시키는 상황 이었다.24세의 황제는 군사적 문제나 재정문제 외에

도 감정의 문제와도 싸워야했다.그렇게 황제는 어려운 현실을 지내고 있었다.


1187년도 전쟁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제국군은 유럽 최강의 군대 였지만 돈에 발이 묶여 있었다.

제국은 7000플로린의 빛을 지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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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저스티니안™ | 작성시간 04.12.27 인플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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