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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의 신화 24부 중심부의 적

작성자제국의명장|작성시간05.01.30|조회수121 목록 댓글 2
1197년,34세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드비히4세는 비잔틴.투르크.스페인.이탈리아 공국.시칠

리아 왕국.이집트 라는 잠재적인 적국들 외에 내부의 잠재적인 적과 다시 대치 하고 있었다.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스위스의 반란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황제가 전문을 읽고 있을때 주변은 고요 했다.주변의 측근들은 물론 이요,황제의 방에 있던 모

든 지휘관들은 숨소리 조차 작게 내었다.동부 내란때 황제가 보여주었던 황제의 잔인한 내면은

전설에 가까웠다.황실의 조사관들은 내란에 희생된 자들의 수가 30만 이라고 추산 했다.그 중

20~22만명 정도는 루드비히4세의 등극 이후 희생된 숫자라고 했다.또한 그 20여만명의 사람들

중 5분의 4 정도는 민간인들 이었다.아직 동부에서의 종교재판은 끝나지 않았다.과연 얼마나 많

은 사람들이 더 죽을지 알 수 없었다.황제는 항상 반역의 무리들을 징취 할때 이렇게 말했었다.

[짐과 제국에 거스르는 자들은 그 수가 얼마가 되든지 징벌을 피할수 없으며 하느님이 재림 하신

다고 해도 부활 할 수 없으리라.]황제는 사로잡은 반역자들을 모두 사지를 끊어 죽이고 살아 있

는 상태에서 내장을 끄집어 내는 형벌을 좋아 했다.처형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구경

하게 하여 경각심을 느끼게 하였고 소문을 멀리까지 퍼지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두려워 하게 만

들었다.(중세시대에 사지를 찟는 형벌은 형벌자에게 고통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구경하는 사

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게 하고 처형당하는 사람이 다시 부활 할 수 없게 하는 주술적 의미도

있었다.)

황제는 단검을 만지작 거리며 전문을 내려놓고 지도를 펼쳤다.시종들이 수많은 병정 장난감들

을 들고 와서 지도에 배치 했다.병정 장난감은 제국의 지역에 배치 된 군사수를 나타내었다.제국

의 어느 지방에도 장난감이 배치 되지 않은 지역이 없었다.장난감들은 프랑스 전 지역과 이탈리

아 전 지역,제국의 동남부에 집중적으로 배치 되어 있었다.황제의 눈은 스위스에 고정되어 있었

다.스위스에 배치된 장난감은 1개 밖에 없었다.황제는 스위스 주변의 모든주의 장난감들을 스위

스에 몰아 넣고 프로방스에 있는 10여개의 장난감을 스위스 방향으로 올려 보냈다.그리고 황제

는 지휘관들을 가까이 불러모아 작전을 설명하고 전령들에게 지령을 내려 병력을 이동케 하였

다.루드비히4세의 치세중 처음으로 찾아온 평화는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스위스는 신성로마제국의 본토(독일)의 바로 밑에 위치한 지역이었다.따라서 본토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비록 산악 지역이라서 농사도 지을수 없었고 상업도 활성화 되지는 못했지만

군사적인 면에서 스위스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도시 였다.제국이 동부로 진출하면서 많은 용병들

을 스위스에서 고용 했었다.그리고 이탈리아를 정벌 했을때 스위스에서 징집한 정규병들은 전투

에서 큰 활약을 했다.이제 제국의 중심지에서 피바람이 불게 되었다.


반군은 3000여명이 넘었다.물론 대다수가 농민들 이었으나 기본적으로 창칼을 소지한 병력도

꽤 되었다.스위스를 방비할 병력은 스위스의 치안을 당담하던 병력 200여명과 각주에서 집결시

켠 병력을 포함하여 760여명 이었다.아쉽게도 스위스와 행정경계선을 맞댄 모든주에 배치된 병

력은 많지 않았다.여태까지 제국의 중심에서 반란이 일어난 일은 없었다.

제국군은 험준한 알프스산맥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원래 제국군의 방어전술은 고지를 선점

하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접근하면 돌격을 감행하는 것 이었다.공격전술은 단지 적을 유인하

는 것 외에는 차이가 없었다.제국군은 대오를 정비하고 반군이 다가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대

규모의 반군은 제국군이 진을 친 산으로 몰려들었다.반군이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반군은 쐐기

대형을 형성하고 반군에게 달려들었다.곧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반군이 죽어나갔다.

제국군의 얼마 되지 않은 기병대도 돌격을 하여 반군들을 짓밟아 버렸다.전투는 제국군이 우세

해 보였다.다만 뒤에서 제국군을 지원할 궁수들이 없었다.궁수들이 있었다면 적은 더많은 피해

를 입었을지도 몰랐다.그러나 곧 화살이 쏟아졌다.그 화살은 제국군이 쏘는 화살이 아니라 반군

의 궁수들이 쏘는 화살 이었다.반군은 같은편을 희생시키면서도 승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

았다.제국군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고 가장 취약한 중앙부분의 제국군이 붕괴되면서 제국군

은 2갈래로 갈라져 버렸다.제국군 기병대는 반군의 창병들의 창진에 포위되어 장렬히 전멸 했다.

곧 퇴각 나팔이 불었다.제국군 지휘관이 전사 했다.얼마남지 않은 제국군 병사들은 험준한 산맥

을 넘어 성으로 달아났다.반군에게는 기병이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도주한 제국군은 적에게

사로잡히지 않았다.반군에게 사로잡힌 제국군은 10명도 되지 않았다.그 전투에서 제국군은 사령

관을 포함하여 680여명의 병력을 잃었다.반군은 800여명이 전사 했다.반군은 7개의 공공기관을

파괴하거나 약탈하고 2700플로린을 약탈한 다음,성을 포위했다.


1198년에 황제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을때,황제는 즉시 편지를 써서 프로방스에서 스위스로 이동

하던 군단장 토마스에게 보냈다.편지를 읽은 군단장 토마스는 오스트리아에서 출동한 군단장 임

펠만의 군대와 스위스 인근 지역 병력을 규합하여 스위스를 총공격 했다.토벌에 동원된 제국군

은 1700여명이나 되었다.재편성 된 제국군은 보병위주의 제국군이 아니었다.1198년의 스위스

에 파견된 제국군은 수백명의 궁수들과 중.경무장 기병들이 있었다.프로방스에 주둔하고 있었

던 토마스의 군대는 이탈리아 정벌전에 동원 되었던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단 이었고 오스트리아

에서 출동한 임펠만의 군대는 많은 훈련,질 좋은 장비들로 무장한 정예군단 이었다.


이번에도 제국군은 높은 산맥을 중심으로 진을 쳤고 반군이 쳐들어 오기를 기다렸다.토벌군은

임펠만 군단의 대부분을 후방에 배치 시켰다.덕분에 토벌군은 1년전의 제국군과 다른게 거의 없

었다.달라진 점은 기병의 좀 더 늘고 궁수부대가 배치 된것 뿐 이었다.반군은 1년전때 처럼 수많

은 병력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상황은 별로 다른게 없었다.그러나 반군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장

한 제국군 보병들만이 아니었다.수많은 화살들이 갑주도 갖추지 못한 농민들을 쓰러뜨렸다.그

와 동시에 토벌군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궁수들의 지원 외에는 1년전과 다를바 없었다.곧 치열

한 접전이 벌어졌다.수도 없이 죽어나갔다.반군들도 화살을 쏴댔다.제국군의 피해도 늘었다.양

측이 팽팽하게 싸웠다.사령관 토마스는 불안을 느꼈지만 후방에서 지원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퇴각 나팔도 불지 않았다.토벌군 궁수들의 화살이 거의 떨어졌을때에도 반군은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싸웠다.제국군 기병들의 상당수가 전사 했다.마침내 제국군 궁수들의 화살이 다떨어졌

을때,마침내 퇴각나팔의 소리가 들렸다.하지만 그 나팔은 제국군이 아니라 반군의 퇴각나팔 이

었다.반군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 했다.아직 반군의 궁수들이 화살을 쏴댔다.그러나 그들도 곧

덩달아 퇴각하거나 토벌군 기병대에 쫓겨 달아나기 시작 했다.사령관 토마스는 모든 보병과 기

병들에게 추격 명령을 내리고 궁수들을 퇴각케 하였다.궁수들이 퇴각하고 마침내 임펠만의 기병

들이 등장 했다.그들은 재빨리 반군들을 추격 했다.그들의 말발굽은 시체들을 짓밟고 지나갔다.

격전이 벌어졌던 산은 반군과 제국군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격전이 끝난 격전지에 비가 추적추

적 내렸다.우천의 퇴각하는 반군이나 추격하는 토벌군의 모습은 비참했다.사로잡은 포로들의 수

가 늘어갔고 그중에 반군의 지도자도 있었다.그러나 포로들을 죽이지는 않았다.임펠만의 기병들

은 반군의 후속부대를 격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따라서 임펠만 부대의 전공는 경미 했으

나 피해는 전무 했다.이 전투에서 반군 830여명을 죽이고 추격해서 잡은 반군을 포함하여 1500

여명을 사로잡았다.토벌군은 550여명이 전사 했다.사로잡힌 반군의 운명은 뻔한 것 이었다.그러

나 토벌군 사령관 토마스는 반군 지도자 3명을 처형하는 것으로 토벌을 마무리 하였다.나머지

1500여명의 반군은 모두 석방되었다.이 명령은 황제가 편지로 직접 명령한 것 이어서 더욱 놀라

웠다.황제는 동부에서 보여줬던 잔악한 면모을 제국의 중심지인 스위스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다.

황제는 밀정들과 영주들의 보고를 통해 스위스 반란 전과 후에 스위스 인근 지역 7개주의 민심

이 동요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영주들에게 세금감면을 명령하고 병력을 징집하도록 하였다.


성의 포위가 풀리고 성에 고립되었던 제국군 60여명은 출성 했다.그들은 모두 해산되었다.그중

에서 스위스 출신의 병사는 단 7명 이었다.


[그들은 집에 가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그들은 장차 무슨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수 없다고 말

했다.갑주와 무기를 갖추지 못한 그들의 모습은 공포와 무기력으로 가득차 있었다.]

-종군 신부 헉슬리의 일기-


1198년의 제국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그리고 한동안 평화는 유지 되었다.그러나 그 평화는 또

다른 전란을 위한 준비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병사들은 부대장들의 명령에 따라 대오를 다시 재정비 했다.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비는

산과 들판.도주하는 반군과 추격하는 토벌군의 피투성이 모습과 죽어 나자빠진 시체들을 씻겨

주었다.병사들중 누군가 말했다.[올해 스위스 농사는 풍년이겠는걸?]다른 병사가 말했다.[모르

는 소리하지마.]병사는 말했다.[여기는 산악지역이야.이곳 사람들은 농사를 않짓는다고.더욱이

우리와 싸웠던 사람들이 뭐였는지 알아?바로 스위스 농부들 이야.]병사들은 물론 장수들은 침묵

했다.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군단장 토마스의 일기-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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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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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엘 테무르 | 작성시간 05.01.30 앞으로의 행보가 어찌 될지.......
  • 작성자최진호 | 작성시간 05.01.31 아.. 이게 스크린샷 게시판에 올리셨던 스위스 토벌전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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