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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Forum

방랑자-1.

작성자폼카|작성시간05.12.02|조회수119 목록 댓글 0


(1)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어디에선가 물방울이 수면에 떨어지는 소리가 높게 울렸다. 그리고는
이내,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실처럼 비가 내린다.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어둠 속에, 내가 있었다.

가는 소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마치 깜깜한 동굴 속에 있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
이지 않는다.

이 어둠은 아주 깊고 넓게 퍼져있는 듯 하다.

이상했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 추위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곳은
꿈속이다. 떨어져내리는 비소리는, 어딘가에 한정되어 그 수위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듯 하다. 소리가 계속 가늘어지는 곳까지 걸어갔다.

이내, 비가 멈추었다.

그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엷은 홍련의 불빛이 나타났다.
어둠의 저편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홍련의 빛은 모습을 바꾸며 춤춘다.
붉은 빛을 등지고 무수히 많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불빛에 비친 것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만큼 기괴한 모습들.
그들은 말 그대로 도약하면서, 불빛 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온다.

원숭이도 아니고,쥐도 아니다. 또한 새도 아닌 것이, 굳이 말로 설명하자면,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놈들이 떼를 지어 다가오고 있다.

붉은 짐승과 검은 짐승과 푸른 짐승이.
앞발을 뻗으며, 빠른 걸음으로 달려온다

간혹 도약하고, 공중을 선회하며, 마치 활기찬 축제의 행렬과도 같았다.
몸 속에서 혈액이 역류하는 것을 느낀다.

저것들은 분명히,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일터다. 그리고, 저 거대한 앞발로,
저 날카로운 이빨로, 나의 몸집만한 저 팔뚝으로 갈기갈기 찢겨질 것이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무서운-




(2)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새하얀 빛이 갚자기 눈을 뒤덮어, 한동안 홍채가
빛에 적응하는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와
발자국소리,그리고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비명소리.

시야가 다시 확보된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붉은 것.

푸하아아아악.

무언가 뒤짚어썼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 역겨운 냄새다. 이것은, 피냄새다.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발은 계속 뒤로 걷는다. 보이는 것들은, 시체들.
두부(頭部)가 말 그대로 으깨어져 있는 시체가 있는가 하면, 목구멍에 칼을
박고 벽에 기대고 있는 시체도 있다.

덜커덕.

뒤에 있던 무엇인가에 걸려 주저앉았다. 문득, 자신이 앉은 바닥을 보았다.
검붉은 피가 묻어있는 붉은 카펫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르릉-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가슴전체를 가린 갑옷을 입고 있는 이가, 칼을 들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투구를 쓰고 있는 사내의 표정이 보일리는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즐거운 듯한 눈. 투구사이로, 붉은 눈이 보였다.

사내는 칼을 높이 들어올리다니, 일시에 내려친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공포에 눌려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다.

캉------!

피했다. 그다지 빠르지 않은 검속도. 갑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몸놀림이 둔하다.
사내는 한번 피한 나를 경계하는 듯, 째려보더니, 또다시 알수없는 말을 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대충 알게 되었다. 7,8명인가의, 사내와
동일한 갑옷을 입은 이들이 몰려오는 것이다.

-죽을거야.

이것은 꿈이 아니다. 이렇게 생생한 꿈이 있을리가 없다.

사내들은 다시 무어라 말하며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른쪽 왼쪽 할것 없이, 빈틈없이
포위를 하려는 모양이다.

칼이 다가온다.

휘이잉.

머리 위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발이 풀려버린 탓에 병사가 횡으로
그은 검이 지나친 것이다.

헛손질을 한 병사는 다시 검을 들어 내려치려 한다. 나는, 공포에 눈을 감아버렸다.

-죽고싶지 않아.  

순간, 여자아이의 기합소리에, 눈을 떴다.
지척까지 다가온 검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였다. 그리고, 주위에서 휘둘러진 검도
보였다.

휘이이이이이이잉!

허리를 숙여 검을 피하고, 나를 향해 칼을 휘두른 이를 향해 뛰어들었다.
나는- 그 병사의 안면 부위를 팔꿈치로 강타했다.

퍼어어어어억!

익숙하지 않은 무게감이 전해져 왔다.

"크에에엑!"

병사는 얼굴을 감싸쥐며 쓰러진다. 그와 동시에, 나는, 아무런 확신도 없이, 앞으로
굴렀다.

휘이이이잉.

뒤에서 덮친 것이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나는 뒤돌아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쓰러진 1명을 제외하고, 4명정도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건."

쓰러진 병사가 놓친 검을 주워들자, 병사들의 경계가 한층 강해졌다.
검에는 피가 묻어 있다. 진검이다. 정말로, 싸웠다간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대로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

병사들이 무어라 소리지르며 쫓아오지만, 무거운 중장비를 두르고 있는지라 쉽게
쫓아오지 못한다. 심장은 더욱더 많은 피를 돌려 나의 동작을 기민하게 만들었고,
나의 몸은 그에 해당하는 부담을 받았다.

"따돌렸나."

간신히 따돌리고 들어간 곳은, 가늠하기조차 힘든 넓이의 회랑(回廊).

그곳에는, 한명의 소녀가 있었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백금발. 소녀의 외모는, 기품이 있으면서도 요염한-분위기를
흘리고 있다.

그 소녀는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듯, 피를 흘리고 있다. 드레스로
보이는 것은, 찢기고 찢겨져 이미 거의 걸레 수준이었다. 그 소녀는 레이피어와
비슷한 종류의 검을 들고 있었다.


연약한 소녀가 악의를 품은 남자들에게 둘러쌓여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갈등을 안겨
주었다.

그녀를 무시하고 일단은 도망가라. 내 안에서 그리 말하고 있었다.

뒤에서 쫒아오는 병사들과 8명의 병사가 합류한다면, 도망갈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소녀를 무시하고 도망간다면, 저 소녀로 인해 병사들의 눈을 돌릴 수
있겠지.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소녀가 나를 알아챘는지, 내쪽을 바라보았다.

"도망가라---."

'한국어!'

나는, 검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도망가라고 하지 않았나-! 가서 지원을 받아와라!"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지원이니 뭐니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날더러
뭘 어쩌란 말인가. 딱히 정의의 용사 역을 맡을 생각은 없다. 저 소녀는 한국어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겠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갑자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제는 화가 난다. 어째서, 어째서 내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
면 안되는 거냐.

차르륵- 나를 가로막는 한명의 병사.

나는, 발을 멈추고, 오른발을 내밀고, 뒷발의 뒷꿈치를 들었다. 그리고는 검을 들어, 병사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 자세는, 검도용어로는 정안(正眼)이라 한다.

휘이이이이잉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치는 병사. 나는 왼쪽으로 살짝 보폭을 밟은 다음, 그대로 몸의 무게를 실어, 목을 찔러갔다.

푸우우우우우우우욱!

생경한 무게감이, 소름끼치도록 절절히 느껴졌다.
베는 상대를 제대로 보지 않았지만, 이 끔찍한 감각만은 생생히 느껴진다. 그러나,
이어지는 생명의 위기는 그런 감상에 빠질 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휘이이익, 뒷쪽에서 다시 칼이 휘둘러져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느리다.
나는, 위축된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허풍을 부렸다.

"검도부 부장이 명예직이냐!"

검을 가볍게 흘려내고, 투구를 칼로 치고 나갔다. 검의 무게중심을 잘 알 수 없어, 검도의 기술을 그대로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저렇게 투구에 맞더라도 충격에 뇌진탕에 걸릴 수준은 되었다.

"하앗!"

"쿠엑!"

소녀가 내지른 검에 병사 한명이 나가 떨어졌다.
묘한 일이었다. 소녀와 내가 양쪽에서, 6명의 병사들을 포위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이었다.

"-------------!"

그런 호기로운 감상도 잠시. 뒤쪽에서 돌아온 이들의 목소리에 나는 또다시 조급해
졌다.

-왼발을 앞으로, 왼쪽으로 가볍게 연다.

-칼을 수평으로 세우고, 비스듬히 눕힌다. 그리고, 가슴쪽으로 끌어당겨 붙인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오른발을 앞으로 디딛으며 검을 누르듯이 밀어내어 찌른다!

푸우우우우우우욱!

찌르기에 병사 한명이 쓰러지자, 몇몇 병사가 동요했다.

"-------!"

왼쪽에서 어떤 병사가 쇄도해 들어왔다.

-검으로 검을 감싸안 듯이, 돌린다. 그러나 마지막은 강하게!

원심력에 의해 병사가 칼을 놓쳤다. 병사의 칼은, 높게 떠서 날아간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목줄기를 벤다-

피이이이익!

오른쪽에서 달려오는 병사는 검을 가볍게 비껴내고, 발로 차버린다. 그리고는, 넘어진
병사의 얼굴을 찌른다.

푸우우우우욱!

팩.

털썩.

쓰러진 병사에게서 검이 뽑히지 않는다.

"하앗-"

그동안, 마치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듯한 검술로 여자아이는 또 한명의 병사를 쓰러트렸다.

"으,으아아아아아-"

달려드는 한명의 검을 밑으로 살짝 튕겨내고, 죽도로 치듯이 병사의 머리를 친다.

캉-

털썩.

쓰러진 병사에게 눈을 돌릴 틈은 없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소녀는 아름답다. 그러나, 아까 느꼈던, 인형과 같다는 느낌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달라졌다.

무섭도록 차갑고 냉정하면서도, 불타오르는 무엇인가가, 그녀의 눈 안에서 비쳤다.

"유성진. 네 이름은?"

"샤피르 데 프리시아."

샤피르라 자신을 소개한 소녀는 다친 곳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일어섰다.
붉은 피와 찢어진 드레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하이얀 허벅지가 나를 자극했다.

그녀는 왼손을 오른쪽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을 뻗으며말했다.

"그대에게 감사를."

"아아."

기세에 압도되어, 얼빠진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다.
많아봐야 14,15살정도 되어보이는 소녀가, 필사적으로 아픔을 누르고, 냉정해지려고 하며,
당당한 행동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주위의 광경을 보고 관찰하려 했다.
책이나 영화등에서 보았던 중세시대의 모습과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보다도 더더욱 눈에 들어왔던 것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시체들.
일정한 갑옷을 입고 있는데, 대부분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세력의 무력충돌이 있었던 듯 하다.

"아차!"

나는 나를 찾고 있는 무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이 어디인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우선 이 홀에서 도망가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샤피르에게 다가가 소녀의 손을 잡았다.

"!!!"

샤피르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손을 뿌리쳤다.

"이곳은 위험해!"

나는 다시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소녀는 갑자기 민첩하게 물러나면서, 주변에 떨어져있던 얇고 예리한 검을 잡았다. 외견상으로는 레이피어나,
에스톡과 닮아 있었다.

"뭣----"

"무례하다!"

소녀는 왼발을 내밀고, 오른발을 뒤로 빼며, 왼손으로 검을 잡고 내밀었다. 잘 잡혀있는 밸런스와, 무게중심의 이동이 용이하도록, 뒷발을 살짝 드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랫동안 검을 다뤄온 것 같았다. 소녀는 고함치며 검을 나의 목쪽으로 겨냥했다.

나는 네 적이 아니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나는 들고 있던 무기를 버렸다.

"무슨 짓이냐."

난 뒤쪽을 가리키며, 필사적으로 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소녀는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검을 겨누고 있을 뿐이다.

쾅.

일단의 무리들이 회랑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복장은, 전부 중무장. 굳이 말하자면,
중세의 비잔틴 기사들이 입었던 갑옷과 흡사하다.

'끝장인가.'

그러나 나의 생각은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들어온 무리들이 모두, 소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하는 것이었다.

"샤피르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전하? 사극도 아니고, 전부 한국어를 쓰잖아. 설마, 연극인건가?'

"테오로 후작-, 폐하는 무사하신가?"

"무사하십니다."

"그런가. 레크슈는 어찌 되었나."

"제 2궁전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궁 밖에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꿔다놓은 보릿자루,인가. 샤피르와 험상궂은 사내들은 나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기들
끼리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야기하길 거의 5분, 그제서야 나를 눈치챘는지, 테오로 후작이라 불린 이가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소녀에게 물었다.

"전하, 이자는?"

"아아, 생명의 은인이다."

"네놈은 누구인가."

......갑자기, 네놈은 누구냐,라고 물으면 어찌하란 말인지. 어쨌든, 꽤 높은 지위에 있는 듯한
이다. 존대는 해야겠지.

"저는 유성진이라고 합니다."

"네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 성에서는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무슨 일을 맡고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지나가던 고등학생,이라고 말했다간, 분명 맞아 죽겠지.
이런 난처한 상황은, 외부요인에 의해 해결되었다.

나를 뒤쫓던 병사들이 회랑으로 들어온 것이다.
샤피르는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처결하라."

테오로 후작이 대답하고,수하로 보이는 자들에게 명령했다.

4명의 병사는 이쪽을 보자 도망가려 했으나, 모두 샤피르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장면을, 차마 나는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동안, 나의 머리는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샤피르는, 다시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전하,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왕자나 왕녀등이 있겠지. 그에, 나는 도박을 걸었다.

"저는,2왕자를 모시는 몸입니다."

"피플린-. 그 수하가 이곳에는 왜-."

아, 있긴 있었구나.

"피플린전하께서는 샤피르전하의 안전을 염려하여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장내가 술렁인다. 샤피르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테오로후작은 나를 잡아먹기라도 하려는 듯, 화난 표정을 지었다.

"이제와서 피플린전하가 어째서-."

"......"

무어라 말해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리 없다. 도박은,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이다.
샤피르왕녀는, 고개를 숙인 채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집으로 보내줘,라고 말했다가는
목이 잘리겠지.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금품을 받아보았자 소용이 없다.

"징병당하지 않고 뒈지지 않을 정도의 신분과, 지위를 내려주십시오."

"네 이놈----!"

테오로 후작이 휘두른 주먹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10년이상 검도를 해온 몸이다.
가볍게,는 아니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어오는 후속타가 너무
빨랐다.

"그만!"

샤피르의 외침에, 테오로 후작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마도 피플린 전하께서는, 페브다슈 남작의 영지를 되찾고 싶은 것이겠지."

"전하!"

"그래, 그대의 작위는 무엇인가."

"평민입니다."

"평민!"

나의 말에, 기사들과 후작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평민따위를 가신으로 삼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황인(黃人). 흥,역시 피플린전하시로군."

샤피르왕녀는 3분정도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힘든 결정이겠지,라고 포기하는 순간,

"다시한번 묻지,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성진입니다."

"그대에게, 폐브다슈의 영지와 남작의 칭호를 내리겠다. ."

한없이 차가운 말투로, 그렇지만 상당히 쿨하게 남작 작위를 내려주었다.

"전하!"

"감사합니다."

책망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후작은 무시한 채, 왕녀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은 전시(戰時)이므로, 약식으로 할 수 밖에 없으니, 훗날 제대로 된 작위수여식을
하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소녀는 수하가 주는 외투를 걸치고는 회랑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를 시작으로,
하나, 둘씩, 바깥으로 나간다.

"남작님은 저를 따라오시지요."

테오로 후작의 곁에 있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나에게 말했다.

"아,아아."

일단은, 그를 따라갈 수 밖에 없겠지.




(3)





나는 쫓기듯이 궁을 빠져나왔다. 붉은 머리의 안내인은 마차를 준비시켰고, 그것을 타고
야밤중에 성을 빠져나갈 수 밖에 없었다.

테오로 후작. 그리고 기사들.
그들이 보인 것은 살의(殺意)였다. 남작이란 지위를 얻었으니 나름대로 성공이라 할 만한
도박패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 미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권력자에게 미움받는 다는 것은 곧 생존확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붉은 머리의 안내인은 상당히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의 이름을 물었다.
계속해서 어이,등으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프틱 델 크슈트,입니다. 아프틱이라고 불러주시지요."

"아프틱님꼐서는 어떤 직위를 가지고 있는가."

이 물음에는 조금 망설이는 듯 하다가, 다시 대답했다.

"샤피르 왕녀님의 시종입니다."

"시종?"

"저 역시 남작가입니다만- 작위를 이은 것은 제가 아닙니다. 얼마전의 페브다슈 공과 같은
지위였지요."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음, 이 자는 나와 같은 고등학생이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일 리가
없지.

"그래서, 당신은 단순한 안내인으로서 따라온 것인가?"

"전하께서, 남작을 보좌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의 전장에서는 검은 벌의 문장을 볼 수
있도록."

"잠깐, 전장(戰場)? 전쟁터란 말인가?"

"물론입니다. 지금은 전시(戰時)이고, 귀족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왕의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아, 물론 검은 벌의 문장이란, 페브다슈가의 문장입니다."

"......징병당하지 않을 정도의 지위가 아니란 말인가, 남작은."

"아니, 이것은 징병이 아닙니다. 귀족의 의무와, 백성의 의무는 다릅니다."

......어찌되었던, 전쟁터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인가.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런 곳에 있다가는, 운이 나쁜 나는 분명 전쟁 초반에 뒈질 것이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다. 이 자는 아마도, 보좌로서의 의미보다는 감시자로서의 의미가 강한
자일 것이다. 우선, 이 자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를 얻어야겠지.

"전시라 하였는데, 지금 어느나라와 싸우고 있는지 아는가?"

"그것을 왜....."

새삼스럽게 왜 물어보느냐는 것이겠지. 그러나, 끼워맞추기의 대가,라고도 불렸던 나다.

"샤피르 전하께서는 너를 나의 보좌로 붙인다 하셨다. 보좌에 일개 시종을 붙인다는 것은,
그만큼 네가 능력이 있다는 뜻이겠지. 허나, 지금 확인해보고자 한다. 지금의 상황을 간단,
명료하게 분석하고, 너의 의견을 덧붙이라."

"......하겠습니다."

분한 듯 나를 쳐다보던(왜 그러는데? 왜?) 아프틱은 곧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창조주 발훼레께서 친히 열 두개의......"

"잠깐!"

아프틱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본다.

"너무 스케일이 크잖아 초반부터. 요점을 말하라고 요점을."

"요점.....입니까."

"우리나라의 상황과 병력, 주변국들의 상황과 병력, 외교관계 등을 나열하란 말이다."

"......저희 카프델 왕국은 현재......"

즉 중앙기사단격인 맹약기사단이, 3개연대 3750명.
제 1귀족이라 불리는 페레로 공작이 1개연대 1250명
제 2귀족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슈타텐 공작이 1개 기사단 300명.
등등, 대부분의 병력을 합치면 만 6만4천700에 달하는 병력을 갖고 있다.

침공을 하고 있는 슈발트의 경우,

슈발트의 경우, 국경수비대만해도 총 13개 연대로, 2연대는 영구해체 되었으나
중앙기사단과 상비 2연대가 주둔하고 있다.즉, 이것만으로도 15개연대 187500의 대군이며,

국왕 친위인 청기사단. 국경수비대 2연대의 후신이자, 신규창설 국왕 친위대이다.
6개연대에, 상비 3연대가 주둔한다. 총 9개 연대로 112500.

그 외에 스웬평야 주둔 자치기사단이 4연대, 그리고 그 위의 집단이 태양기사단으로서
총 11개 연대다. 이것 역시 187500.

총 병력으로 따지자면, 48만7500.

6만4천700대 48만 7500인가. 뭐, 해볼만한 싸움.....이 전혀 아니군.

전력차가 거의 8:1. 이런 전쟁에 끼어들었다간, 정말로 목숨이 남아남지 않을 것이다.

"전부 투입되지는 않겠지요. 슈발트도 아메른이란 숙적이 있는 이상."

"아메른의 경우는 병력자체로 보면 80만에 가깝습니다."

뭐가 그렇게 많아!

"물론, 총동원 가능한 병력이 그렇단 이야기이고, 평상시 병력은 12만정도입니다."

그래도 많아!

"그렇다면, 카프델의 경우는, 총동원을 해서 6만을 간신히 넘는단 말인가."

"예."

"......그래서, 저번의 그 소란은."

"슈발츠쪽에 넘어간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었지요."

말 다했다. 상대도 안되잖아, 애들.

"어째서 슈발츠가 전쟁을 일으킨 거지?"

"그건......"

꽤나 망설이는군.

"슈발츠의 노황제 슈텐베르크가 샤피르님을 후궁으로 들이겠다는 요구를.....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노황제?"

"올해로 62세입니다."

"미친-.이 로리콤플렉스 자식을 봤나-!"

".....로리콤플렉스?"

아프틱은 놀란 듯 눈을 치켜뜨고 날 바라보고 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중세의 관념과 비슷한 곳이라 한다면, 왕녀는 정치적 도구로서 사용되어지겠지.
왜 거부를 했는가는 대략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왕녀 역시 왕위계승권이 있으니,

황제가 그녀와 결혼을 한다면, 황제에게 왕위계승권이 돌아가게 된다. 즉, 현 국왕이
죽으면, 그녀를 왕으로 앉히고, 카프델 왕국을 힘 안들이고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거부를 하더라도, 체면을 구겼다고 침공을 하면 된다. 이러한 계략은 고대로부터 쭈-욱
강국이 약소국을 먹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그거야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내 목숨-

"남작정도면, 전장의 어디쯤에 서게되는가."

"최전선(最戰線)입니다."

쿨럭.

맙소사.

아프틱은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조금은 비꼬는 투로 말했다.

".......무리하게 동원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귀족의 의무를 저버리게되면, 어차피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다 하여 작위가 몰수됩니다. 평민이 되어버리면, 어차피 징병되어
전장에 서게 됩니다."

"아니, 책임을 맡은이상, 그 책임은 완수한다."

나는 특별히 현실에 불만따위 가지고 있던 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판타지소설을 보면서, 나
또한 그런 삶을 살아본다면- 하는 따위의 생각은 가져본 적이 있었다. 상상 속의 영웅들은
저마다의 빛을 뽐내며 휘광찬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중학교때의 나는, 그들을 동경하고 있었겠지.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나도 지겹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세상의 여러가지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나는 점점 환상을
멀리하고, 현실에서의 재미를 찾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의 이 상황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휴우-"

그렇긴 하나, 상황에 이다지도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몇백번이나 그러한 상황을
상정하고 그려보았던 탓이겠지. 그러나, 사람의 시체를 눈 앞에서 목격하고도 '익숙하다'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창 밖의 풍경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 농민으로 보이는 이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아니, 그들과 자신의 다름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싶은 것이다.

"중세-인가."

하지만, 기사단의 개념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사가 있으니 기사단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초딩의 개념은 이미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같이 버렸다. 기사를 대규모로 운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권력이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귀족들이 존재하는 상황이지만, 중세의 봉건주의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것은,

전쟁.

국가끼리의 전쟁은 총력전을 의미한다. 파괴행위이면서도 생산행위이기도한, 모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행위는, 서로의 사유재산을 노리고 행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적어도 교과서에는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귀족들은 왕 아래에 모이게 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하나의 중심점에 힘을 실어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하루 이틀 싸워 온 게 아니라면 기사단 따위- 만들어 질 리가 없다.
파괴행위의 극에 달한다는 것은 곧, 가장 효과적으로 조직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프틱이라고 했던가. 붉은 머리의,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는 사내는 시종일관 무엇인가를 품에
안고 중얼거림을 반복하고 있다. 손에 달려 있는 것은, 초승달 모양의 무엇.

"무엇을 하고 있나."

"이베리아 신께 '하루'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물을 수는 없다. 그는 내가 이곳의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니, 지금 그 의미를 묻는다면 의심을 받을 것이 뻔했다. 나는 그저, 그 차가운 대답에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기도로 보이는 아프틱의 행위는 오래가고 있었다. 이미 해는 산 너머로 넘어가는 상황. 그 때, 그는
기도가 끝난 듯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페트리아에서 묵도록 하겠습니다. 불편하셔도 참으십시오."

페트리아라는 곳이 어디인지, 무엇이 불편한지 짐작도 가지않았다. 단지, 쉴 수 있다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4)



녹아내리고 있다------.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은 한 장의 지옥도. 광경 뿐만이 아니다.
살이 녹아내리는 냄새는, 고기를 굽는 냄새와는 또 다른 풍미를 느끼게 한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대로 없어져버린다. 모든 것이 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터벅터벅 걷는 그의 발밑에서 용암과 같은 것이 올라오려 했다. 순간적으로 쇼크를
받아버린 대지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

툭.

앞만보고 걷고 있던 '주체자'의 발밑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누군가의 시체. 어린아이의 시체.
충격에 의해 튀어나온 돌에 머리를 맞은듯, 우측 두부에서 뇌수가 흘러나와 있다.
한쪽 팔은 짓이겨 있으며, 하반신은 대부분 녹아버린 듯 하다.

아- 아.

그는, 울고 있었다.




(5)



"으음-."

관자놀이 부근이 아파왔다. 한마디로 '엿같은 꿈'이었다. 상당히, 오랜만이로군. 어렸을 때부터
가끔씩 이러한 꿈을 꾸었다. 첫번째는, 무서워 어쩔 줄 모르며 어머니께 달려가 울어댔었다. 발밑에 걸려있는 시체라던가, 상완이 비틀려 있거나, 하반신이 뭉개져 있는 시체들을 보면서, 한없이 울어댔었다.

그리고, 이 꿈은, 비정기적으로 나타났다. 매일 나타났다면, 나는 지금쯤 미쳐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오는 그 공포에, 나는 점점 익숙해 져 갔다. 그리고, '죽음'에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페브다슈 남작각하. 기상은 하셨습니까."

바깥에서, 이제는 꽤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5일. 그 짧은 시간안에, 나는 이 세계에 적응해 버린 것이다.

"곧 나가겠다."

귀족의 옷 입는 방법은 꽤나 귀찮을 정도로 많은 일을 요구했다. 짧은 팬츠와 셔츠가 기본-, 물론 재질은 굉장히 부드러운 것으로. 그 위에, '펠트'라는 토시와 비슷한 것을 착용하고, 위 아래가 연결된, 원피스 같은 것을 입는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그것을 입고나면, 붉은 망토를 착용해 마무리. 본래라면 귀족가문 고유의 망토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그것을 손에 넣지는 못한 상황. 이 단순하고도 폼 나는 붉은 망토는, 아프틱 가문의 것다.

끼이익.

문을 나서자 아프틱은 붉은 망토를 입고 있었다. 그의 타는 듯한 머리와 같은 색-.

"식사는 어쩌시렵니까."

"가면서 들도록 하지. 육포나 건포로 충분하다."

아프틱은 그 말에 여관문을 열고 내가 마차에 타는 것을 기다렸다. 마차에 올라 탄 뒤, 나는 아프틱에게 요구한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생전 보지도 못한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읽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읽히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에 앞서 말이 통하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한 것일테지만.

"전사(戰史)에 관한 책은, 지금으로서 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 입니다."

'플랑드르쥬 전기'

"이곳에는, 서점이 없는 것인가."

"당연히 있을 리가 없지요."

아프틱은, 단언하듯 말했다. 나는 그 이유를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당연한 것을 물어서 무엇하는가.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되는 법. 이런 촌 마을에 책을 읽는 이들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 것인가. 있다고 하더라도, 몇 안되는 귀족들이 대도시까지 올라가서 사 오겠지. 인간 사는 곳, 어디나 같은 것이라.

"......그나저나, 현재 페브다슈 영지는 어떠한 상태인가."

"솔라렌 백작이 대리를 파견해 다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곳에 가신 후 전권을 이양받으실 겁니다.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듯 하니,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프틱의 말로는, 페브다슈남작령은 10년전의 왕위쟁탈전때 초토화당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 일로 인해 생산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이후로는 전 영지 중 최악의 생산성을 가진 영지가 되고 만 것이다. 아프틱은 이쪽이 어느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므로 될 수 있는 한 자세한 설명을 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 2왕자의 심복이라면, 그 대부분의 정보는 이미 알고 있을 터였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최대한 자세한 것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거짓을 말한 것을 말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경비병이 50명-?"

영지민이 800을 넘지 않는다,라. 지도에 나타난 영지 크기에 비해서는 꽤 적은 걸.

"예, 기사는 없습니다. 재정의 여유가 그만큼 없다는 이야기이도 하지만, 귀족이 다스리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중앙기사단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따로 기사를 모집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 권위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기사를 뽑는 것이 힘든 것이다.

"이제 곧 영지로 들어섭니다."

아프틱의 그 말과 함께, 꽤나 묘한 냄새가 코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악취는 모두 모아둔 듯한 그 냄새에 나는 얼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설마, 쓰레기장이 영지인건 아니겠지-.

대충 표현하자면 ‘썩어가는 하천 길을 따라 1년 넘게 씻지 않은 노숙자 무리들과 함께 한달 넘도록 푹 썩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갈 때 나는 냄새’가 그의 주위에 가득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참기 어려운 냄새들의 대향연이다.

길은 어찌나 진창인지 마차바퀴가 제대로 구르지 못할 정도였다.

아프틱은 이 엄청난 냄새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중세놈들은 지지리도 더럽게 살았다고 하더니만- 이런 것에는 익숙하겠지.

길-이라고 부르기에도 미안한 진흙 바닥-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움막 같은 집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오더니 남작의 휘장이 그려진 마차를 보더니 그 더러운 흙이 옷에 묻는 것도 생각치 않고 무릎을 꿇는다.

"욱-."

누더기로 보이는 옷을 입은 이들은 하나같이 검댕이를 칠한 듯 더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철 없는 어린 것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이었지만 대다수의 어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두려움과 적의는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인게로군."

그렇게 움막집들을 지나 조금 더 가다보니 제법 큰 목책이 멀리서부터 다가왔다. 대충 이삼백 미터는 될 것 같은 목책은 군대 군대 박혀 있는 큰 바위들과 끝이 날카롭게 갈린 통나무가 삐죽하니 튀어나온 것이 제법 ‘인간’이 만들어 놓은 듯 한 인상을 풍겼다. 게다가 망루로 보이는 구조물도 있었고 목책 안쪽의 조금 떨어진 언덕에는 투박한 모양의 낮은 성도 보였다.

“문을 열어라!”

목책의 문이 열리자 진창길 근처에 있던 움막 보다는 훨씬 사람이 살만한 가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목책 바깥에서 봤던 사람들 보다는 제법 생기가 도는 얼굴의 사람들이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농사를 짓는 흔적이 있긴 했지만 그리 크지 않았고 돼지 열댓 마리가 꿀꿀거리며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은 점점 나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음."

작다.키가 184인 내 키에 비하면 그들의 기껏해야 160을 상회할 듯 했다. 영양상태의 문제인가, 현대의 서양인의 체격과는 너무나 달랐다.
솔직히 말 해 사슬갑옷을 입은 것이 어색할 정도로 그들은 키도 작고 체격도 볼 품 없었다.

멀리서 볼 때는 좀 작아 보이던 성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축성을 하는데 있어서 기본이 되는 둔덕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언덕이 제법 훌륭하게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성벽은 7,8 미터 쯤 됐고 그 아래엔 나무를 통으로 짜 만든 방책이 둘러져 있었다. 방책 바로 아래에는 폭 5미터, 깊이는 3미터쯤으로 보이는 해자가 성벽을 따라 둘러져 있었지만 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성의 반대쪽과 내성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지만 일단 방어적 개념의
소성이 갖추어야 할 요소는 대략 다 갖춘 긴 마름모꼴의 전형적인 중세의 성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중세중에서도 암흑기에 해당했던 12세기의 양식일 터였다.

샤피르왕녀가 붙여준 경비병 프라하가 망루를 향해 크게 고함을 지르니 도개교가 내려왔다.
내려온 도개교 안쪽으로 매달려 있는 것은 굵은 쇠사슬이었다. 쇠사슬은 성 내의 위쪽 양 끝 부분에 매달린 거대한 통나무에 연결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십여 명의 병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쇠사슬을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양쪽 사슬이 내려가는 보조를 맞추기 위해 한 병사의 고함이 한번 끝나면 한 발짝씩 전진하면서 말이다.

거대한 통나무 위에 걸친 쇠사슬이 미끄러지지 않게 홈을 판 것이 아주 기초적인 도르래로 보였다.

성안으로 들어가자 양쪽으로 병사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이 병사들은 복장이 제법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봐야 30이 약간 넘는 정도의 병사지만, 이들은 앞으로 내가 영지를 꾸려나가는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이들이었다. 통치의 요건은 무력과 재력,정통성이다. 그 중 내가 가진 것은
무력뿐. 정통성이야- 내가 2왕자의 심복이 아니라는게 들통나게 되면 끝장이 나는 요소이므로,
일단은 지금 힘을 키워둘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새롭게 페브다슈남작으로 임명되신 성진 페브다슈 님이시다."

괴물이라도 되는 듯 쳐다보는 이들이 많았다. 우선, 그들보다 월등히 큰 키도 키이려니와, 검은
머리를 가진 인물을 본 일이 없는 듯한 이들도 많은 듯 했다. 어디선가 '악마'라는 소리도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내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고 절을 엎드리는 영지민들을 보면서, 나는 뼈저리게 통감했다. 이곳은-아무리 봐도
중세의 유럽이다. 굶어 죽는 사람이 태반이고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잘못 했다고 칼침을 놔도 하소연 할 곳도 없을 때가 중세다.

아프틱은 성을 관리하고 있는 집사 프레데릭을 소개해 주었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같은 인상
을 가진 그의 말로는,성 내부는 성주의 집무실과 침실, 손님을 접대할 때 쓰는 방등 모두 합해 24개라는 것 같다.

그에게 안내되어 들어간 집무실은 도저히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 황량한 방이었다.
프레데릭은 10년전의 반란으로 인해 성이 탄 그 사건이후, 재건은 했지만 이 성의 주인은 없었다고 했다.

집무실을 나와 응접실을 본 뒤, 성벽 위로 올라가는 도중, 나는 이상한 철문을 발견했다.

"저것은 무엇이오."

나는 프레데릭에게 물었다.

"아- 저것은......"

말하길 망설이는 프레데릭. 그 답은, 아프틱이 대신 해 주었다.

"대개, 저러한 곳은 감옥으로 쓰이지요."

기분 나쁜 냄새가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이것은 마치-

시체냄새,인가.

"혹, 저곳에 시체를 방치해 둔 것인가?"

"아, 그건- 보통 죄인의 경우는 사지를 찢어버리는 책형에 처하거나 굶어죽이는 형에 처하는데,
저 안은 대부분 굶어 죽이는 형에 처해진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굶겨,죽인다?

"내려가보지."

"아, 아니 저 기분 나쁜 곳에 어찌하여 내려가신단 말입니까-. 저주가 옮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수많은 원한과 피들이 쌓여있는 곳,인가. 프레데릭은, 필사적으로 미소를 잃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굉장히 초조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왼쪽
새끼손가락이 떨리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문을 열라 하였다."

살의(殺意)를 담아 말하니, 프레데릭은 겁에 질린 듯, 열쇠를 꺼내 감옥 문을 열었다.
감옥은 습기와 악취로 가득차 있었다. 횃불을 든 병사를 앞에 세우고, 나는 천천히 계단을
따라서 내려갔다. 냄새는 점점 지독해져갔다. 처음엔 악취냄새였던 것이, 시체가 부패한 이상
한 냄새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욱-

목 안쪽을 무엇인가에 뜯어먹힌 듯한 자 정맥 기관이 하나하나 잘려 끝없는 고통속에 죽어간 자
척수를 흘리며 죽어간 자 교감신경절이 모두 잘린 자
배가 갈려 좌우 양쪽 위 폐 상엽 중엽 하엽 대동맥 심장 횡경막 비장 위 간 쓸개 대장 8기-를
쏟아내다 죽은 자.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그것은-
새장과 비슷한 그 감옥. 그 안에 굶어죽은 이들의 유골이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현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곳은, '죽음'이 매우 흔한 '사건'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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