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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의 반역에 대한 오수창과 계승범의 논쟁

작성자松永久秀|작성시간23.02.16|조회수722 목록 댓글 4

https://nocturnal-landscape.tistory.com/197

인목대비 폐위 논쟁과 인조반정의 명분 - 오수창 교수의 비판에 답함 

그런데 『역사비평』 지난호에서 오수창 교수가 내 책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 을 제기하였다. 001 내 책의 여러 내용 가운데 오 교수의 주요 비판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대비는 왕실서열1위였으며,따라서 논란의 본질은 충효문제 가 아니라 충역의 문제였다. 왕실 안에 효와 구분되는 충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② 주희는 무태후나 장황후에 대한 처벌이 옳다고 말한 적이 없다. 따라서 『모후의 반역』에서 제시한 논지와 구도는 모두 틀렸다.

③ 인조반정은 광해군 이주재하던 반역 상황을 바로 잡은 사건으로서,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이념적으로 정당한 사건이었다.

④ ‘효치국가의 탄생’은 그 논증 과정이 오류로 점철된만큼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허구이다.

 

이제 하나씩 살피면서 답하고자 한다. 위에 제시한 순서에 따라, 대비논쟁 의 성격이 과연 어떠했는지, 무태후와 장황후에 대한 송나라 신유학자들의 생 각이 주희를 비롯하여 어떠하였는지, 인조반정의 명분이 무엇이었으며 뒤에 어떤조정과정을거쳤는지,‘효치국가’의의미가무엇인지등을고찰한다

 

 

 

 

 

1번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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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의 상소에서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국왕에게는 효의 실천을 강조하였 다. 007 요컨대, 당시 영의정부터 유생에 이르기까지 국왕 광해군과 모후 인목대 비를 이어주는 관계의 본질이 효(孝)와 자(慈)에 있으며, 대비가 자(慈)하지 않을 지라도 자식인 왕은 효를 실천해야 한다는 논리뿐이었다. 국왕과 대비 사이를 오교수가 강조한 충역(忠逆)이라는 프레임으로 설명한 상소나 건의는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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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오 교수의 비판이 타당하다면, 정작 자기를 핍박한 주체인 광해군의 죄악을 열거하면서 인목대비는 왜 광해군을 가리켜 모후에게 반역하여 의리를 저버렸다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흥미롭게도, 같은 교서에서 대비가 광해군 을 집중적으로 단죄한 하이라이트는 그가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두 마음을 품어 후금과 화친했다”라는 부분이다.  이는 명나라 황제에대한 배신행위를 가리킨다. 문맥상 천명(天命)은 명나라 황제의 명이며, 이심(貳心)을 품었다 함은 황제에게 반역했다는 의미다. 이렇듯 교서에서는 광해군의 반역행위를 크게 문제 삼았다.그러나 그것은 대비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에 대한 반역이었다. 교서 내용의 상세한 분석은 이미 나의 책에서 충분히제공하였다(계302~306쪽).

 

 

 

 

2번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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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와 관련하여 오 교수는 중요한 점 두 가지를 간과하였다. 첫째, 당나라 황실이라면 무후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한 주희의 기본 생각을 무시하였다. 반정 직후 황실의 1인자는 누구였을까? 중종 아니었나? 둘째, 반역하여 종사에 죄를 지은 태후를 처벌하는 일이 비단 죽이는 것뿐이었나? 폐위도 처벌이고, 유폐도 처벌이고, 봉공을 깎거나 폐지하는 것도 처벌이며, 거처를 다른 궁으로 옮기게 강제하는 것도 처벌이다.

 

폐위하고도 유폐할 수 있으며, 봉공을 하면서도 유폐할 수 있다. 그런데 오 교수는 죽이는 문제를 처벌 문제로 바꿈으로써, 무후에게어떤처벌도불가하다고주희가말한것처럼유도하였다. 조선의대비논쟁에서도 인목대비를 죽여야한다고주장한이는없었다.광 해군은 인목대비를 공식적으로는 폐위하지 않았다. 존호나 대비 호칭을 없애 지도 않았다. 봉공을 폐하지도 않았다. 대비의 궁에 유폐했을 뿐이다.

 

요컨대, 주희가말한사료ⓐ는무후는 죽일만한데,중종의 신하로서 중종의 어미를 죽이면 장차 군신이 어떻게 얼굴을 마주 대하겠는가, 그래서 곤란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즉 ⓒ 죽여야 하겠지만 과연 ⓓ 누가 차마 죽일 수 있겠느냐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도 오 교수는 ⓒ는 아예 무시한 채 ⓓ를 ‘처벌’이라는 단어로희석해버렸다

 

 

 

 

3번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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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반정 주체 세력은 반정의 명분을 크게 배명과 폐모 두 가지로 공식화하였다.이 명분이 조선왕조의 향후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이유는 후대의 누구도 이 명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터였기 때문이다. 명나라와 후금(청) 사이 에서 정세 변화와 상관없이 명나라와 보조를 함께해야 하는 국가로,어미가 설사 반역에 가담할지라도 자식인 왕은 어미를 어떤 식으로든 처벌하기는커녕 무조건 효도해야하는 나라로 진화의 방향성을 잡은 셈이었다.

 

...........

아니나 다를까. 병자호란과 항복 이후에 반정의 동기·이유·명분 등을 기술한 관찬·사찬 사서나 문집 등을 두루 일람하면, 반정의 명분이 죄다 광해군의 내정 문제 하나로 수렴되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반정 다음 날 반포한 교서와는 달리,광해군의 최고 죄악인 명나라에 대한 배신 문제를 더는 거론하지 않았다. 반정의 양대 명분은 광해군의 배명과 폐모에 대한 응징이었는데, 전자 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강조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된 것이다. 인조의 행장을 비롯하여 1637년 이후에 편찬된 거의 모든문헌자료에서 반정의 명분을 광해군의 폐모행위에 맞추고 배명행위를 거론하지 않은점은반정의 명분에 대한 조정이 불가피했던 정황을 잘보여준다.

 

이런 명분조정은 쉽게성공할수있었다.반정의 또 다른명분인 폐모문제 또한 양반사회의 폭넓은 공감대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조 정권의 이념적 양 날개라 할 수 있는 반정의 양대 명분 중에서 한쪽을 잃고 다른 한 쪽만으로는 정상적으로 비행하기 어려웠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직 붙어 있는 한쪽 날개(폐모→불효)를 더욱 소중히 여겨 극도로 강조하는 한편, 이미 없어진 다른 한쪽 날개(배명→불충)도 마치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뒤따랐다.

 

이를테면 청나라가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새 국제 질서를 부정하면서 외부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국내에서는 이미 망해 없어진 명나라를 여전히 군부로 받들며 북벌론·대명의리론·조선중화론 등을 발전시킨 것은 바로 현실에서 이미 잃어버린 한쪽 날개를 이념적으로나 마 되찾기 위한 자구책이자 장기간에 걸친 자기의식화요 일종의 프로파간다 (propaganda)였다(계319~323)

 

그런데 오 교수는 대비논쟁 곧 폐모 문제를 대비에 대한 반역 한 가지로만 이해하였다. 광해군이 주재하던 반역 상황을 바로 잡은 사건으로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고 이념적으로 정당한 사건이라 단언하였다(오546쪽). 정작 최초의 교서에는 거사 이유가 다양하게 담겨 있는데도 말이다.정변의 명분을 제대로 보 여주는 1차 사료는 『광해군일기』의 버전인데, 그 소중한 1차 사료를 제대로 분 석하지도 않은 채, 또한 삼전도 항복 이후에 명분 조정과 기억의 전환이 전방위적으로 발생한 사실도 무시한 채 그저 광해군의 폐모 문제만으로 반정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인조반정 관련 여러 사실이나 기억의 전환 등을 통시적으로 추적하기보다는 그 성격을 오로지 폐모 행위 곧 광해군의 반역에 대한 정당한 조치로만 이해하겠다면, 시간성(변화)을 중시하는 역사학의 존재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4번 부분

 

이런 변화 현상을 장기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내 책에서는 반정의 명분도 살폈다. 이에 따르면, 반정 주체 세력이 거사 다음 날 천명한 거사의 핵심 명분 곧 광해군의 주요 죄악은 배명(背明)과 폐모(廢母)로 대별할 수 있다. 교서의 구성이나 분량면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배신 곧 황제에 대한 반역이 하이라이트 였다. 그러나 호란과 삼전도 항복을 겪으면서 반정의 명분은 수정이 불가피하 졌다. 인조는 광해군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명나라를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반정의 제1명분을 졸지에 잃은 것이다. 그 결과, 이후에 나온 거의 모든 관찬·사찬사서 및 여러문집에서는 반정의 명분을 폐모하나로 집중하여 강조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광해군을 쫓아낸 핵심 명분에서 배명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폐모만 남았고, 이런 명분의 전환 내지 새로운 역사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정사실화였다.반정의 명분에서 사실상 효만 남은셈이었다.

 

반정이 아니었으면 왕위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을 인조와 그 후손이 대를 이어 즉위한 조선에서 반정 명분에서 자유로울 이는 아무도 없었다.특히 정치 무대에서는 이를 나위도 없었다.그들은 반정의 명분을 광해군의 폐모 곧 패륜으로만 기억하였다.이런 흐름 속에서 충의 실제 의미는 현실에서 점차 관념화 한데 비해, 효는 여전히 굳건하였다. 상대적으로는 오히려 충을 앞서기 시작 하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범할 수 없는, 심지어 모후가 종사에 죄를 짓는 반역을 꾀하였어도 자식인 왕으로서는 전혀 건드릴수 없는 절대가치로 우세를 점하였다

 

이미 여러 붕당으로 갈라져 피의 당쟁을 일삼던 양반사대부들은 왕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유학자라면 본래 그런 성향을 공유하기 마련인데, 조선 후기에는 그것이 치열한 당쟁과 맞물리며 더욱 심해졌다. 그들이 실제로 충성한 대상은 붕당 내지는 붕당의 우두머리였다. 공론은 사실상 사라지고 당 론만 무성한 시대로 들어섰다. 개항 후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에 필요했 던 것 가운데 하나는 온 나라의 역량을 중앙으로 모아 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 한 대응 체제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지상 최고의 유교국가이던 조선에서는 유교의 핵심가치 중 하나인 충의 현실적 개념이 현저히 약해진 상태였다. 왕이나 왕실이라 해도 양반사대부들의 사적 영역을 충이라는 가치로 통제하기 힘들었다. 충·효라는 양 날개로 비행해야 하는 유교국가로서 균형을잃은지오래였다.그래서‘이상한’유교국가였다는것이다(계342~360쪽).

 

 

 

 

 

 

 

 

오수창 교수의 반론은 위에 링크에서 잘 정리되있어서 이걸로 갈음하고

계승범 교수는 아래와같이 재반론을 했는데

 

조선후기에 대한 이해가 팽팽하게 갈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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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마법의활 | 작성시간 23.02.16 그 구한말 때도 일제 군인한테 너희들의 충 개념은 상당히 이상하다, 효만 중요하냐? 는 식으로 비아냥을 샀던 일화가 있었죠. 계승범 교수 말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松永久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2.16 어떤 상황이었길래 그런 비아냥을 했던건가요?

    계승범의 논리에 부합하는 사례가 있네요
  • 답댓글 작성자마법의활 | 작성시간 23.02.16 松永久秀 상 치러야 한다고 갑자기 돌아가버린 의병장 사례였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松永久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2.16 마법의활 13도 창의군 그 사례보고 한 얘기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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