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흠~ 오랫만에 이번엔 전국기에 신겐과 겐신,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최대 라이벌이자 결코 만만치 않았던 무장 호죠 우지야스에 대한 프로필을 적겠습니다. 이번건 다른분의 작품으로 출처는 일본 역사군상 시리즈 전국합전대전 상권에 수록된 호죠 우지야스편에서 발취된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럼 재미있게 보세요! 이 친구때문에 신겐과 겐신이 상경을 못했지요! 후훗!!
호조 우지야스 (北條氏康) 1515-1571 관동무쌍의 패왕
에도시대, 스즈키 시게히데(鈴木 重秀)라는 사람이, 호죠가 대대의 당주들을 촌평했는데, 우지야스에 대해서는, [문무겸비의 무장으로, 생애 수많은 합전을 했지만, 크게 패한 적이 없었다. 거기에 인덕도 있었다.
이 대에 관팔주(關八州;관동 8주)의 병란을 평정해, 크게 가명(家名)을 높였다. 고금무쌍의 명장이다.]고 칭송했다.
우지야스는, 관동의 대부분을 장악해, 조부 소우운(早雲)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현재, 우지야스 치하의 오다와라(小田原)을 레포트한 귀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51년 4월, 하코네(箱根) 유모토(湯本)의 소우운지(早雲寺)에 참배해 오다와라를 방문한 쿄우토(京都)난젠지(南禪寺)의 261세 토우레이치오우(東嶺智旺)의 실담록이다.
[.....유모토의 소우운지에서 일리(4킬로), 부츄우(府中)인 오다와라에 도착했다. 마을엔 작은 길이 수만개, 길에는 먼지 하나 없다. 동남은 바다로, 바다물이 오다와라를 감싸고 있다. 태수 우지야스의 저택은 웅장하고 미려하며, 삼방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은 깊이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백조나 수조가 날개를 쉬게 하고 있다.
태수 우지야스는, 겉으로는 문(文), 속으로는 무(武)의 인간으로, 정치를 잘해, 먼 곳의 사람들도 복종하고 있다. 그야말로, 당세 천하무쌍의 패왕이다....] 불패의 용장으로 불리어, 16세의 초진(初陳;첫 출진)부터 죽을때까지 36번의 합전에 출격해, 한번도 적에게 아게마키(갑옷의 등부분)를 보인 적이 없었다 한다.
군의 선두에서 적과 부딪혀, 몸에 도창의 상처 7개를 입어, 얼굴에 2개의 상처가 있었다. 때문에 얼굴이나 몸의 정면을 향해 입은 상처를 "우지야스키즈(氏康傷)"라 해 존중받았다.
소년시대의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2살때였다. 철포가 아직 신기한 때였을 때, 어느날 우지야스는 그 사격연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귀를 뜯는 듯한 굉음에 우지야스는 일순 얼굴을 창백히 하며,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무사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우지야스는 참을 수 없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새빨개 지며, 곧바로 소도를 뽑아 자해하려고 했다. 근습인 무사가 당황해 하며 이것을 막았다. 우지야스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츠키비토(付人-시중드는 사람)인 시미즈(淸水)가 [옛날부터 용기가 있는 무사일수록 쉽게 놀란다고 합니다. 뛰어난 말도, 감이 뛰어나 잘 놀라는 것입니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참았다고 한다.
우지야스의 무명을 천하에 울리게 한 것은 일본 삼대 야전의 하나로 불리는 카와고에(川越)의 합전이다.
천문 14년(1545년) 8월, 호죠가의 령국과 국경을 맞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山內 上衫憲政)는,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토모사다(扇谷 上衫朝定)와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과 손잡고, 우지야스를 일거에 궤멸하려 하였다.
요시모토는, 우지야스쪽의 스루가 나가쿠보(長久保)성을 포위해, 타케다 신겐(武田信玄)과 함께 공격해 왔다.
한편 노리마사는, 토모사다와 함께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條 綱成)가 지키는 카와고에성의 탈취를 꾀했다. 카와고에성은 1537년 츠나시게에게 빼앗긴 토모사다의 거성이었다.
츠나시게는 원래 후쿠시마(福島)라 했으나, 호죠가에 맡겨져, 우지야스의 동생격이 된 인물이었다. 이 카와고에성공격에는, 또한 우지야스의 매제인 코가쿠보우(古河公方)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도 가담했다. 노리마사의 꼬드김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카와고에성은, 노리마사, 토모사다, 하루우지의 8만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당해 버렸다. 그리고 반년에 걸쳐 공격받아, 낙성은 촌전이었다.
1546년 4월 우지야스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8천을 이끌고 달려왔다. 병력의 차는 10대 1이었다. 적당한 수단으로는 어떻게도 우지야스의 이길 만한 수는 없었다.
우지야스는 우선 아시카가 하루우지에게 사자를 보내 [카와고에성에서 농성하는 병사의 생명만은 구해주십시요. 그래주신다면 카와고에 성과 령지도 쿠보우님에게 받치겠습니다] 고 세 번에 걸쳐 애원했던 것이다.
하루우지는 듣기는 커녕 조소하며 [니가 주지 않아도, 내일이라도 되면 성은 떨어질 것이다. 성병은 모두 죽여버려, 우지야스놈도 죽여버리겠다.]고 말했다.
우지야스는 그 후, 우에스기의 부장 오다(小田)씨의 대관 스가야(管谷)에게도 사자를 보내 [어떻게든 성의 츠나시게를 구해줄 수는 없는가? 구해주신다면, 카와고에성은 당신께 넘겨 드리겠습니다. 만약 합전이라도 되면, 우리쪽은 중과부적,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고 전했다.
우에스기쪽은, 우지야스의 이러한 신청에 [호우죠우쪽은, 겁쟁이병에 걸렸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 소문은 우에스기 연합군 전체에 퍼져가, 이제는 거의 이겼다는 분위기가 넘쳐 흘렀다.
이것이 우지야스의 노림수였다. 우지야스는 시노비(忍び)를 이용해 적측의 정세변화함을 즉시 알고 있었다.
?4월 20일밤, 우지야스는 경장의 정병으로 돌격대를 편성하자, 적진 깊숙히 잠입시켜, 성쪽과 호응해 기습했다.
어두운 밤의 기습에, 우에스기 연합군은 단지 허둥댈 뿐으로, 결국 패주해, 오오기가야츠 토모사다는 전사해, 노리마사, 하루우지는 겨우 생명을 건져 도망쳤던 것이다.
1554년, 우지야스는 원래의 숙적 타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삼국동맹을 맺어, 우지야스의 장남 우지마사(氏政)와 신겐의 딸을 결혼시켜, 우지야스의 딸을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氏眞)와 결혼시켜, 혼인관계를 맺었다.
스루가의 센토쿠지(善德寺)에서 회합했기에, 세상은 이것을 [센토쿠지의 회맹]이라 한다. 그러나 이 동맹도, 요시모토의 사후 파기된다. 우지야스는 민정가로써도 뛰어나, 다른 제대명보다 먼저 본격적인 검지(논밭등의 석고를 정하는 것)와 세제의 개혁을 행해, 텐마(傳馬-수송용의 말)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통화를 명의 영락전으로 통일해, 상공업자를 보호하는등 경제정책에도 평가할 만한 것이 있다. 또한 아시카가(足利)학교의 부흥을 원조하기도 했고, 와카(和歌)를 산죠우니시 사네타카(三條西 實隆)에게 배우는등 문화인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삼국동맹이 깨진후 신겐이 이마가와의 옛영지을 노리자 그와의 동맹을 깨고 오랜숙적인 우에스기 겐신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신겐이 오다와라에 까지 침공하여 포위전을 벌였으나 급히 회군, 가신들과 동생들의 주장에 밀려 추적을 감행하다 선봉이 신겐의 별동대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가 바로 미마세 골짜기의 전투이다.
우지야스는 곧바로 회군하여 결전을 피했고 씁씁한 미소을 앉고 신겐은 회군했다. 이후 우지야스는 곧 발병하여 유언으로 겐신과 손을 끊고 다시 신겐과 손을 잡으라는 말을 남기고 1571년에 죽었다.
[호죠 우지야스] 1515년 우지츠나(氏綱)의 아들로써 태어나다. 소우운에서부터 3대째이다. 1541년 부친 우지츠나가 죽은 뒤 27살에 가독을 잇다. 카와고에의 야전에서 이겨 무사시(武藏)의 대부분을 령유해, 관팔주를 손에 넣다. 우에스기 켄신(上衫 謙信), 타케다 신겐과도 싸웠다. 1571년 죽다. 56세.묘는, 하코네 유모토의 소우운지에 있다.
호조 우지야스 (北條氏康) 1515-1571 관동무쌍의 패왕
에도시대, 스즈키 시게히데(鈴木 重秀)라는 사람이, 호죠가 대대의 당주들을 촌평했는데, 우지야스에 대해서는, [문무겸비의 무장으로, 생애 수많은 합전을 했지만, 크게 패한 적이 없었다. 거기에 인덕도 있었다.
이 대에 관팔주(關八州;관동 8주)의 병란을 평정해, 크게 가명(家名)을 높였다. 고금무쌍의 명장이다.]고 칭송했다.
우지야스는, 관동의 대부분을 장악해, 조부 소우운(早雲)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현재, 우지야스 치하의 오다와라(小田原)을 레포트한 귀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51년 4월, 하코네(箱根) 유모토(湯本)의 소우운지(早雲寺)에 참배해 오다와라를 방문한 쿄우토(京都)난젠지(南禪寺)의 261세 토우레이치오우(東嶺智旺)의 실담록이다.
[.....유모토의 소우운지에서 일리(4킬로), 부츄우(府中)인 오다와라에 도착했다. 마을엔 작은 길이 수만개, 길에는 먼지 하나 없다. 동남은 바다로, 바다물이 오다와라를 감싸고 있다. 태수 우지야스의 저택은 웅장하고 미려하며, 삼방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은 깊이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백조나 수조가 날개를 쉬게 하고 있다.
태수 우지야스는, 겉으로는 문(文), 속으로는 무(武)의 인간으로, 정치를 잘해, 먼 곳의 사람들도 복종하고 있다. 그야말로, 당세 천하무쌍의 패왕이다....] 불패의 용장으로 불리어, 16세의 초진(初陳;첫 출진)부터 죽을때까지 36번의 합전에 출격해, 한번도 적에게 아게마키(갑옷의 등부분)를 보인 적이 없었다 한다.
군의 선두에서 적과 부딪혀, 몸에 도창의 상처 7개를 입어, 얼굴에 2개의 상처가 있었다. 때문에 얼굴이나 몸의 정면을 향해 입은 상처를 "우지야스키즈(氏康傷)"라 해 존중받았다.
소년시대의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2살때였다. 철포가 아직 신기한 때였을 때, 어느날 우지야스는 그 사격연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귀를 뜯는 듯한 굉음에 우지야스는 일순 얼굴을 창백히 하며,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무사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우지야스는 참을 수 없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새빨개 지며, 곧바로 소도를 뽑아 자해하려고 했다. 근습인 무사가 당황해 하며 이것을 막았다. 우지야스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츠키비토(付人-시중드는 사람)인 시미즈(淸水)가 [옛날부터 용기가 있는 무사일수록 쉽게 놀란다고 합니다. 뛰어난 말도, 감이 뛰어나 잘 놀라는 것입니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참았다고 한다.
우지야스의 무명을 천하에 울리게 한 것은 일본 삼대 야전의 하나로 불리는 카와고에(川越)의 합전이다.
천문 14년(1545년) 8월, 호죠가의 령국과 국경을 맞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山內 上衫憲政)는,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토모사다(扇谷 上衫朝定)와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과 손잡고, 우지야스를 일거에 궤멸하려 하였다.
요시모토는, 우지야스쪽의 스루가 나가쿠보(長久保)성을 포위해, 타케다 신겐(武田信玄)과 함께 공격해 왔다.
한편 노리마사는, 토모사다와 함께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條 綱成)가 지키는 카와고에성의 탈취를 꾀했다. 카와고에성은 1537년 츠나시게에게 빼앗긴 토모사다의 거성이었다.
츠나시게는 원래 후쿠시마(福島)라 했으나, 호죠가에 맡겨져, 우지야스의 동생격이 된 인물이었다. 이 카와고에성공격에는, 또한 우지야스의 매제인 코가쿠보우(古河公方)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도 가담했다. 노리마사의 꼬드김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카와고에성은, 노리마사, 토모사다, 하루우지의 8만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당해 버렸다. 그리고 반년에 걸쳐 공격받아, 낙성은 촌전이었다.
1546년 4월 우지야스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8천을 이끌고 달려왔다. 병력의 차는 10대 1이었다. 적당한 수단으로는 어떻게도 우지야스의 이길 만한 수는 없었다.
우지야스는 우선 아시카가 하루우지에게 사자를 보내 [카와고에성에서 농성하는 병사의 생명만은 구해주십시요. 그래주신다면 카와고에 성과 령지도 쿠보우님에게 받치겠습니다] 고 세 번에 걸쳐 애원했던 것이다.
하루우지는 듣기는 커녕 조소하며 [니가 주지 않아도, 내일이라도 되면 성은 떨어질 것이다. 성병은 모두 죽여버려, 우지야스놈도 죽여버리겠다.]고 말했다.
우지야스는 그 후, 우에스기의 부장 오다(小田)씨의 대관 스가야(管谷)에게도 사자를 보내 [어떻게든 성의 츠나시게를 구해줄 수는 없는가? 구해주신다면, 카와고에성은 당신께 넘겨 드리겠습니다. 만약 합전이라도 되면, 우리쪽은 중과부적,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고 전했다.
우에스기쪽은, 우지야스의 이러한 신청에 [호우죠우쪽은, 겁쟁이병에 걸렸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 소문은 우에스기 연합군 전체에 퍼져가, 이제는 거의 이겼다는 분위기가 넘쳐 흘렀다.
이것이 우지야스의 노림수였다. 우지야스는 시노비(忍び)를 이용해 적측의 정세변화함을 즉시 알고 있었다.
?4월 20일밤, 우지야스는 경장의 정병으로 돌격대를 편성하자, 적진 깊숙히 잠입시켜, 성쪽과 호응해 기습했다.
어두운 밤의 기습에, 우에스기 연합군은 단지 허둥댈 뿐으로, 결국 패주해, 오오기가야츠 토모사다는 전사해, 노리마사, 하루우지는 겨우 생명을 건져 도망쳤던 것이다.
1554년, 우지야스는 원래의 숙적 타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삼국동맹을 맺어, 우지야스의 장남 우지마사(氏政)와 신겐의 딸을 결혼시켜, 우지야스의 딸을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氏眞)와 결혼시켜, 혼인관계를 맺었다.
스루가의 센토쿠지(善德寺)에서 회합했기에, 세상은 이것을 [센토쿠지의 회맹]이라 한다. 그러나 이 동맹도, 요시모토의 사후 파기된다. 우지야스는 민정가로써도 뛰어나, 다른 제대명보다 먼저 본격적인 검지(논밭등의 석고를 정하는 것)와 세제의 개혁을 행해, 텐마(傳馬-수송용의 말)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통화를 명의 영락전으로 통일해, 상공업자를 보호하는등 경제정책에도 평가할 만한 것이 있다. 또한 아시카가(足利)학교의 부흥을 원조하기도 했고, 와카(和歌)를 산죠우니시 사네타카(三條西 實隆)에게 배우는등 문화인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삼국동맹이 깨진후 신겐이 이마가와의 옛영지을 노리자 그와의 동맹을 깨고 오랜숙적인 우에스기 겐신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신겐이 오다와라에 까지 침공하여 포위전을 벌였으나 급히 회군, 가신들과 동생들의 주장에 밀려 추적을 감행하다 선봉이 신겐의 별동대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가 바로 미마세 골짜기의 전투이다.
우지야스는 곧바로 회군하여 결전을 피했고 씁씁한 미소을 앉고 신겐은 회군했다. 이후 우지야스는 곧 발병하여 유언으로 겐신과 손을 끊고 다시 신겐과 손을 잡으라는 말을 남기고 1571년에 죽었다.
[호죠 우지야스] 1515년 우지츠나(氏綱)의 아들로써 태어나다. 소우운에서부터 3대째이다. 1541년 부친 우지츠나가 죽은 뒤 27살에 가독을 잇다. 카와고에의 야전에서 이겨 무사시(武藏)의 대부분을 령유해, 관팔주를 손에 넣다. 우에스기 켄신(上衫 謙信), 타케다 신겐과도 싸웠다. 1571년 죽다. 56세.묘는, 하코네 유모토의 소우운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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