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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유럽]앙주제국의 창시자 헨리2세 프로필입니다.

작성자정충영|작성시간03.09.06|조회수476 목록 댓글 2
출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입니다. 헨리2세는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아버지이며, 콩가루 집안의 대명사입니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 헨리2세에게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켰고, 아버지 또한 그들을 진압했죠. 또한 프랑스 국왕 필리프2세의 이복누이 알레가 리처드1세와 약혼을 할 동안 헨리 2세의 궁정에 사는동안 헨리2세는 그녀에게 손을 뻗쳐 겁탈해 한동안 같이 쾌락을 즐기기도 했죠. ㅡ.ㅡ

하지만 그의 통치능력에는 의심할바 없이 훌륭하다고 했습니다. 그럼 보시죠.

헨리 2세 Henry Ⅱ
별칭은 Henry of Anjou, Henry Plantagenet, Henry FitzEmpress, Henry Curtmantle.
1133. 프랑스 멘 르망~1189. 7. 6 투르 근처.
노르망디 공작(1150~), 앙주 백작(1151~), 아키텐 공작(1152~), 잉글랜드의 왕(1154~).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있는 영토를 크게 넓히고, 잉글랜드에서 왕권을 강화했다.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머스 베켓 및 자신의 가족(아내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아들인 리처드·존)과 벌인 싸움은 결국 그의 파멸을 초래했다.

[초기생애]
헨리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훌륭한 문학교육을 받은 뒤, 1150년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고, 1151년에 아버지인 조프루아(제프리) 플랜태저넷이 죽은 뒤 그뒤를 이어 앙주 백작이 되었다.

어머니인 헨리 1세의 딸 마틸다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요구했지만, 마틸다의 사촌인 스티븐 왕은 1152년에 이 요구를 거부했다. 헨리는 얼마 전에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이혼한 아름답고 유능한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여 영지를 늘렸다. 엘레오노르가 아키텐의 영주권(領主權)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헨리는 1153년에 잉글랜드를 침략했고, 스티븐 왕은 그를 보좌인 겸 상속인으로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 이듬해에 스티븐이 죽자, 헨리는 누구의 반대도 받지 않고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여, 스코틀랜드에서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의 주인이 되었다.

젊은 왕은 외모적으로 위엄이 부족했다. 땅딸막한 체격에 주근깨가 난 얼굴, 짧게 자른 황갈색 머리카락과 회색 눈을 가진 그는 아무렇게나 옷을 입었고, 점점 뚱보가 되었다.

그러나 인품은 주목을 받았고, 사람들은 자진해서 그에게 봉사했다. 그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려고 서로 밀치는 군중 속에서 언제든지 재치있는 응답을 할 수 있었지만, 때로는 성난 짐승처럼 억제할 수 없는 성미를 보이기도 했고, 필요할 때는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형편은 아랑곳 없이 항상 바쁘고 성급한 그는 학자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꼈고, 행정에 관한 법령은 냉정한 현실주의자가 만든 작품이었다. 34년이라는 오랜 통치기간 가운데 잉글랜드에서 지낸 기간은 통틀어 14년뿐이었다.

[통치]
그의 활동은 3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영토 방위와 확장, 둘째, 오랫동안 계속되어 결국 그에게 파멸을 가져온 2가지의 개인적 싸움, 셋째, 오래 지속된 행정·사법 개혁이 그것이다.

그의 영토를 흔히 앙주 제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헨리의 통치권은 다양한 칭호에 의존해 있었고, 이 여러 지역 사이에 제도나 법률적인 유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일부 영토에 대해서는 프랑스 왕이 봉건적 종주권을 행사했다. 헨리는 정복과 외교 및 두 아들의 결혼을 통해 노르망디 북쪽 끝에서 피레네 산맥의 카르카손 근처에 이르는 오늘날 프랑스의 서부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다.

그는 통치하는 동안 세 딸을 다른 왕가에 출가시켜, 독일과 카스티야 및 시칠리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얻었다. 유럽 대륙에 있는 영지 때문에 프랑스 왕 루이 7세 및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접촉하게 되었고, 통치하는 동안 거의 내내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접촉했다. 루이와 그의 관계는 모호했다. 헨리는 루이의 전처를 아내로 삼아 많은 상속 재산을 차지했다.

그후 어린 아들 헨리를 루이의 딸과 서둘러 결혼시켜, 노르망디의 벡생 지방을 얻었다. 그는 통치하는 동안 거의 내내 프랑스 왕과 싸워서 이기거나 프랑스 왕을 계략으로 앞서려고 애썼으며, 프랑스 왕은 헨리의 정적인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루이와 헨리의 반목은 독일과 헨리의 우호관계를 수반했다. 헨리의 어머니가 처음 결혼한 남자는 독일 황제 하인리히 5세였다.

독일에서 헨리는 이 결혼의 덕을 보았지만, 프리드리히 황제가 1159년에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교황 선거의 결과로 대립 교황을 옹호한 것은 헨리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루이는 좀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했고, 헨리는 유럽 여론의 중재자가 되었다. 그는 알렉산데르를 교황으로 인정했지만, 토머스 베켓과 논쟁을 벌이는 동안 줄곧 프리드리히가 지지하는 대립 교황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위협해 알렉산데르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제한했다.

통치 초기에 헨리는 스코틀랜드의 맬컴 3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고 노섬벌랜드·컴벌랜드·웨스트몰랜드를 되찾았으며, 통치 후반기(1174)에는 맬컴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사자왕 윌리엄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157년 헨리는 웨일스를 침략하여 충성 서약을 받았지만, 웨일스는 정복하지 않았다.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그에게 주었다고 전해지는 아일랜드에서 헨리는 렌스터에 앵글로노르만족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사우스웨일스 출신 봉건 영주들의 원정을 허용했고(1169), 1171년에는 왕이 직접 렌스터에서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그의 두드러진 업적은 토머스 베켓과의 논쟁 및 가족의 불화가 낳은 긴장으로 손상되었다. 토머스 베켓은 헨리의 신임을 받고 대법관(1154~62)으로 입신한 인물이었다. 헨리와의 논쟁은 베켓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된(1162. 5) 직후에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완전한 절교로 이어졌고 대주교는 망명했다.

이런 상황은 교회의 공식 활동을 혼란시켰을 뿐만 아니라, 헨리와 루이 7세 및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사이에 불화를 낳았다. 이것은 겉으로는 헨리의 활동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협상과 사절단에 들인 시간과 노력은 상당한 것이었고, 결국 베켓이 죽음을 당한 비극적인 결말은 헨리에게 많은 비난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왕실 내부의 불화였다. 이 집안 싸움은 헨리의 계획을 방해했고, 생명까지 위협했으며, 결국에는 그를 슬픔과 수치로 몰아넣었다.

어른이 된 뒤 줄곧 헨리의 성도덕은 느슨해졌다. 그러나 11세 연상인 아내 엘레오노르와의 관계는 오랫동안 꽤 화목했고, 1153~67년에 엘레오노르는 8명의 자녀를 낳았다. 헨리는 이 자녀들 가운데 어려서 죽지 않은 네 아들(헨리·제프리·리처드·존)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아들들은 이 애정을 아버지에 대한 원한과 형제들 사이의 불화로 갚았다.

여기에 책임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영지는 아들들에게 나누어주되 진정한 권력은 자신이 계속 보유하겠다는 헨리의 정책이 분쟁의 원인이었다. 1170년 그는 맏아들 헨리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젊은 왕은 사실상 아무 권력도 갖지 못했고, 보잘것없는 자신의 신세에 분개했다.

1173년 아버지는 사랑하는 막내아들 존에게 줄 영토를 마련하기 위해 둘째 아들 제프리를 희생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젊은 왕은 이 제안에 반대했다. 셋째 아들 리처드도 다른 사람의 항의에 가담하여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지지를 받았다.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의 지원을 받는 봉건 영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베켓을 죽인 뒤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헨리의 위신은 얼마 전에 부과한 무거운 세금으로 바닥까지 떨어졌지만, 그는 정력적으로 대응하여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1년 동안 싸움이 계속되고 있던 잉글랜드로 건너왔다.

1174년 7월 12일 그는 캔터베리에서 공개적으로 참회를 했다. 이튿날 스코틀랜드 왕이 애닉에서 붙잡혔으며 3주 뒤에 헨리는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아들들은 사면을 받았지만 엘레오노르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감금되어 있었다.

2번째 반란은 1181년 아키텐을 다스리는 문제를 둘러싸고 두 아들(헨리·리처드)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불이 붙었다. 그러나 아들 헨리는 1183년 죽었다. 1184년 리처드는 아키텐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을 받은 동생 존과 싸웠다. 제프리의 죽음(1186)으로 문제는 쉬워졌지만, 리처드는 존에게 줄 상속재산을 찾으려는 왕의 노력에 반발하여, 아버지 루이 7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이 된 젊은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었다.

패배한 헨리는 아들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사랑하는 존마저 적과 손을 잡았다는 소식은 왕의 죽음을 재촉했다. 왕은 1189년 투르 근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헨리의 전쟁과 그 구상은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유형을 보였지만, 그의 잉글랜드 통치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의 목적(즉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행정기관이 봉사하는 왕국의 지배)을 이루기 위해 신중하고 성공적으로 수단 방법을 마련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동시대인과 후세의 역사가들은 그의 치세에 일어난 다양하고 극적인 정치적·개인적 사건에 관심이 쏠려 이런 성공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19세기에 와서 공문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영국의 법학자인 프레더릭 윌리엄 메이틀런드와 그의 제자들이 법제사에 조명을 비추었을 때에야 비로소 헨리와 그의 신하들의 천재적인 행정 능력이 참모습을 드러냈다.

헨리의 통치 초기에 잉글랜드는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왕의 권위는 내란과 봉건 귀족들의 부당한 권력 행사로 허물어진 상태였다. 그의 첫번째 과제는 제멋대로 날뛰는 이들을 분쇄하고, 앵글로노르만족 군주국에 잘 갖추어진 기존의 통치기구를 이용하여 확고한 정부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 통치기구 가운데는 핵심 장관들로 구성된 추밀원도 들어 있었다. 재판관이자 회계관인 이들은 재무재판소(→ 익스체커)를 관리했고, 왕의 지역대리인인 셰리프(각 주의 지방 행정관)가 각 주에서 거두어들인 세금과 수수료를 이 재판소에 납부했다. 추밀원에는 매우 유능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리처드 드 루시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먼트 같은 유력한 봉건 영주였고, 그밖에 엘리 주교인 나이절, 리처드 피츠닐과 그의 아들인 일체스터의 리처드 같은 공직자들이 끼어 있었다. 헨리는 재무재판소의 운영 기법에 개인적인 흥미를 갖고, 후세를 위해 유명한 〈스카카리오의 대화 Dialogus de scaccario〉에서 이 기법을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메이틀런드는 이 저술을 '헨리의 훌륭한 통치기에 있었던 가장 훌륭한 일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 신하들이 왕의 개혁에 얼마나 책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송 절차는 왕이 오래 나라를 비우고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에도 계속 꾸준히 발전했다.
통치 초기에 왕은 정력적이고 다재다능한 대법관 베켓을 이용하여 다루기 어려운 봉건 영주들과 그들의 성을 부수고, 다양한 형태의 재판 절차와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성직자의 범죄는 교회재판소에서 재판해야 한다는 성직자들의 권리 주장을 둘러싸고 당시 베켓이 이끌던 주교단과 헨리가 대립하게 된 것은 몇 년 뒤였다. 이 대립의 결과가 유명한 법령인 클래런던 헌장(The Constitutions of Clarendon : 1164)이다.

이 헌장은 성직자의 의무 면제, 주교 임명, 빈 주교 관구의 관리, 파문, 로마에 대한 청원 같은 문제에서 교회에 대한 국왕의 세습 권리를 공개적으로 재천명한 것이었다. 대주교는 처음에는 순종했지만 얼마 후에는 이 헌장에 따르기를 거부했고, 논쟁이 끝날 때까지 이 헌장은 합의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남아 있었다. 논쟁은 왕의 주요관심사인 나라의 사법체계와 관련이 되어 있었다.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는 2가지 재판소(경범죄를 심리하는 헌드레드 재판소와 셰리프가 주재하는 주 재판소)를 두고 있었다. 노르만족이 도입한 봉건정권은 여기에 장원 재판소와 오너(honour:영지들의 복합체) 재판소를 추가했다. 무엇보다도 우월한 것은 중요한 청원에 대해 법정을 열고 직접, 또는 장관들을 통하여 호소를 듣는 것은 왕의 권리였다. 체포는 현지의 책임이었고 명백한 범죄에 대해서는 대개 가혹한 체포가 이루어졌다.

유죄 여부가 확실하지 않을 때는 용의자에게 결투를 시켜 그 승부에 따라 유죄와 무죄를 결정지었다. 주에서 고발당한 사람은 신의 판단을 알기 위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정복왕 윌리엄의 시대 이후 2가지 발전이 이루어졌다. 왕이 임명한 재판관들이 이따금 사명을 띠고 각 주에 파견되었고, 토지 보유 사건일 경우에는 이따금 현지의 명사들로 이루어진 배심원단을 실정 조사원으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헨리가 처음 내놓은 포괄적인 계획안은 형사 재판의 소송절차를 확립한 클래런던 조례(Assize of Clarendon : 1166)였다. 이 조례에 따르면 '법률상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고발 배심원단'을 구성하여, 현지인이 강도나 살인자인지 아닌지를 선언해야 했다. 각 헌드레드에는 이 배심원단의 수가 12명이었고, 마을에는 각각 4명씩으로 정해져 있었다. 고발당한 사람에 대한 재판은 왕이 임명한 재판관에게 맡겨졌고, 용의자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갇혀 있을 감옥은 왕의 돈으로 세우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나라 전체에 범죄를 자세히 조사하여 이치에 맞는 평결을 내리는 형사제도를 마련해주었다. 고발당한 사람이 엄격한 시련을 이겨내 혐의를 벗었다 해도, 배심원들이 단호하게 고발하면 추방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봉건 법정에서는 화해를 하거나 벌금을 냄으로써 결투 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왕이 임명한 순회 재판관의 정기적인 순방(전문용어로는 '순회 재판소')을 전제로 했고, 이 순회재판은 국가 행정의 일부가 되었다.

재판관은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순회 재판관이고, 또하나는 웨스트민스터에 '앉아 있는' 판사이며, 나머지 하나는 법정이 런던 밖에서 열릴 때 왕과 함께 배석하는 판사였다.
웨스트민스터 판사들은 비공개 탄원과 순회 재판관들이 보내온 사건을 다루었다.

'소유권 조례'도 그에 못지않게 효과적이었다. 봉건 사회에서, 특히 혼란기에는 폭력에 따른 추방과 강탈이 흔히 일어났고, 이것이 다시 피의 복수와 폭력을 불렀다. 봉건 법정에 탄원을 해도 재판이 지연되거나 완전히 좌절될 수 있었다. 이런 사태를 없애기 위해 헨리는 소유권 영장제도를 창설했다. 재무재판소의 명령인 이 영장은 선서한 현지 배심원단을 소집하여 재산 강탈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소규모 심리를 열도록 셰리프에게 명령했고, 이 심리가 끝나면 셰리프는 사건의 정당성을 입증할 대배심에서 추후 심리가 열릴 때까지 피고를 원래 상태로 복귀시켜야 했다.

이것이 '최근 부동산 점유 침탈'(Novel Disseisin) 영장이었다. 이 영장은 반송할 수 있었다. 즉 부동산 점유 상태를 원래대로 회복시키지 못한 셰리프는 왕이 임명한 재판관 앞에 출두하도록 피고를 소환해야 했고, 자신도 그 영장을 가지고 재판에 참석해야 했다. 이와 비슷한 '조상의 죽음'(Mort d'Ancestor) 영장은 원고의 조상이 실제로 그 부동산을 소유했는지 여부를 결정했고, '마지막 성직 추천'(Darrein Presentment) 영장은 실제로 누가 특정한 성직록에 마지막으로 성직자를 추천했는가를 결정했다.

이런 영장들은 모두 신속하고 명쾌한 평결을 가져왔고, 이 평결은 나중에 바뀔 수 있었다. 재판 수수료는 국고를 풍부하게 해주었고, 백성들이 법정에 의지하게 되자 왕의 지배력이 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자구 행위가 많이 줄어들었다. 이밖에 헨리가 계발한 2가지 제도는 항구적인 것이 되었다. 하나는 돈을 내고 군역을 면제받는 군역대납금 (→ 스큐티지)이었고, 또하나는 '무장 조례'(Assize of Arms : 1181)에 따라 일정한 한도 이상의 재산을 가진 모든 자유인은 자기 신분에 맞는 무기를 소지하도록 의무화한 것이었다.

이런 개혁에 참여한 장관들은 재무재판소에 관한 피츠닐의 글과 대사법관인 래널프 데 글랜빌이 잉글랜드 법률에 대해 쓴 글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자신들이 다루는 일에 전문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왕이 채택한 방책은 대부분 그들이 제안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장기적인 결과는 막대했다.

헨리는 재무와 법률 분야의 전문가 계급을 늘림으로써 2가지 중요한 직업을 확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에 상설 법원을 둔 것과 그 법원의 업무 성격은 잉글랜드(그리고 대부분의 영어 사용권)에서는 로마 법이 아니라 보통법(→ 코먼로)이 법정을 지배할 것이며, 런던이 보통법의 주요 온상이 되리라는 것을 확정해주었다. 게다가 헨리의 법령 덕분에 재판관과 배심원의 결합은 결국 통상적인 것이 되고, 배심원단이 차츰 엄격한 시련이나 결투를 대신하여 평결을 책임지게 되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지막으로 군역대납금 이용이 차츰 늘어나고, 개인적인 소송에 왕실 법정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의회가 출현하기 전에 봉건 군주제를 군주 관료제로 탈바꿈시키는 데 효과적인 구실을 했다.

[평가]
헨리 2세는 천재적인 전기 작가와 서간문 작가들의 시대에 살았다. 솔즈베리의 존, 토머스 베켓, 지랠더스 캠브렌시스, 월터 맵, 블루아의 피에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를 잘 알았고, 그에 대한 인상을 적어서 남겼다.

이들은 헨리가 뛰어난 능력과 인상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고,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격의 여러 측면들과 실수도 기록했지만, 근대 역사가들은 이 성격의 주요특징들을 조화시키기가 어렵다는 데 의견이 일치해 있다.

헨리는 종교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깊은 확신을 갖지 못했지만, 동시대에 성인으로 여겨지던 3명(리보의 에일레드, 셈프링엄의 길버트, 링컨의 휴)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평소에는 허물 없고 신실한 친구이자 주군이었지만 때로는 터무니없이 무자비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그의 태도와 목적은 항상 자기중심적이었지만, 그는 폭군도 아니었고 불쾌한 이기주의자도 아니었다. 인간이자 통치자로서 그는 위대한 인물인 앨프레드 대왕이나 정복왕 윌리엄의 특징을 갖고 있지 못했다. 지혜와 차분함도 부족해보였고, 국익에 관한 포괄적인 견해나 왕의 통치에 대한 관념, 또는 백성에 대한 동정적인 관심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가 잉글랜드에 미친 결과를 토대로 하여 그의 통치를 평가한다면, 그것은 중요성에서 매우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통치의 원동력인 헨리는 잉글랜드의 왕들 가운데 아주 주목할 만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M. D. Knowles 글

참고문헌
헨리이세
영국사(기린총서 1) : A. 모로아, 신용석 역, 기린원, 1991
Henry Ⅱ : W. L. Warren, 1973
English Justice Between the Norman Conquest and the Great Charter, 1066-1215 :
D M. Stenton, 1965
The History of English Law Before the Time of Edward Ⅰ, 2nd ed. : F.
Pollock·F. W. Maitland,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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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충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3.09.06 요즘 도서관에서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을 읽고 잇는데, 어허 젊을적 리처드1세와 필리프2세가 서로 동성애관계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그랬던건가...둘이...재미있더군요..^^ 거기에 삼국지해제 라는 책도 괜찮더군요! 위나라 명제 조예가 원희의 아들일수도 있다는 얘기는 충격이었습니다. 0.0
  • 작성자BERSERK_SULTAN | 작성시간 03.09.06 와우.. 이것들 다 정리해다가 글로 묶어도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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