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서양사

북방의 사자 - 구스타부스 아돌푸스(Gustavus Adolphus)

작성자왕마귀|작성시간06.03.26|조회수1,320 목록 댓글 4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2세는 1611년 즉위한 후 사망할 때까지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북방의 사자(Lion of the North)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웨덴 국왕 가운데서 유일하게 대왕 칭호로 불리는 사람이다. 아돌푸스는 바사 왕조의 카를 9세와 홀슈타인 고트롭 가문의 크리스타나 사이에서 출생했다.





구스타부스는 1611년 부터 스웨덴의 국왕으로 군림했으며, 30년 전쟁을 주도한 주요 인물 중 한명이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브란덴부르그 프러시아 제후의 딸이었던 마리아 엘레노라와 결혼했으며, 프러시아의 도시인 엘빙을 독일에 대한 군사 작전 본부로 만들었다. 그는 1632년 독일에서 벌어진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다.





제위기간 동안 구스타부스는 스웨덴 왕국에 소속된 타르투와 에스토니아에 대학을 설립했다. 이 당시 왕국의 가장 큰 도시는 리가(이전에는 라트비아의 수도였다.)와 스톡홀름, 탈린(에스토니아의 수도)이었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브레이텐펠트 전투에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며, 기존의 선형 전술보다 방어와 기동성에 중점을 둔 역동적인 전술 운영과 마찬가지로 포병을 기동성있게 운용하는 작전으로 명성이 높았다.


위의 사례는 칼 폰 클라우제비츠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왜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를 다른 군사 지휘관보다 우상시했지의 한 부분일 뿐이다. 작전 장교로부터 대열에 위치한 병사들에까지 공감을 얻었던 아돌푸스의 목적성과 친화성이라는 양쪽 개성은 그에게 거의 확고히 문서화된 명성을 얻게했고 주요 지휘관들은 구스타부스와 관련된 일화를 항상 농담삼아 이야기 할 정도였다.


국왕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기 때문에 목과 복부의 총상을 비롯해서 여러번 상처를 입었다. 전쟁 당시 입은 부상 때문에 일반적인 철제 흉갑 대신 유연성있는 갑옷을 입어야만 했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의 친필 서명


구스타부스는 익명으로 유럽을 여행할 때 가르스(Gars) 대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가르스(Gars)는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렉스 수에시아애(Gustavus Adolpus Rex Sueciae)", 라틴어로 "스웨덴 국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라는 문장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구스타부스는 뤼첸 전투 당시 짙은 안개가 끼어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군의 대열로 돌진하다가 전사했다. 아돌푸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인 브란데부르그의 마리아 엘레노라는 즉시 남편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나중에는 그의 심장을 자신의 성에다 1년 동안 간직하기도 했다. 오늘날 아돌푸스의 시신은 (심장도 포함해서)스톡홀름의 리달홀름스키르칸에 안치되어 있다.


위대한 국왕이 사망한 후 스웨덴의 중산계급은 그의 이름에 작위를 부여해 찬양하고 구스타브 아돌프 덴 스토레(Gustav Adolf den store) - 구스타브 아돌프 대왕(Gustav Adolf the Great)이라는 뜻의 스웨덴어 - 품격있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스웨덴 역사에서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이후 아직까지 이런 영예를 누린 인물은 없다.


스웨덴의 왕관은 바사 가문으로 상속되었으나 카를 9세 시대부터 왕실을 찬탈한 자 또는 역적의 후손인 바사 가문의 왕자들은 왕위 계승에 서 제외되었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의 동생은 그가 전사하기 몇년 전에 죽었으므로 오로지 여자들만 남았다. 마리아 엘레노라와 국왕의 총리는 구스타부스가 전사한 후 그의 어린 딸을 대신해서 국정을 담당했다. 아돌푸스는 우리에게 알려진 두 명의 아이를 남겼다.






바사보르그의 공작이자 서출인 아들 구스타브, 그리고 적출이자 왕위계승자인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다.





파라켈수스(Paracelsus)


스웨덴이 30년 전쟁에 개입한 이후 구스타부스 아돌푸스(Gustavus Adolphus)의 명성은 비정상일 정도로 빨리 퍼져나갔다. 그는 효율적인 군대 운용으로 불가사의할 정도의 전적을 이룩하고 일생동안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나폴레옹 같은 인물과 비견되고는 한다. 당시 구스타부스에 대한 잘 알려진 이미지는 다재다능한 그의 능력보다는 보다 불가사의한 이야기에 부분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다. 노스트라다무스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1549년에 출판된 파라켈수스의 예언서에서 그는 세계 전역에서 일어날 재앙에 대해 예언하다가 결국 북쪽에서 온 황금 사자가 독수리를 패배시킴으로써 끝을 맺을 것이라고 말미에 적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드 2세(Ferdinand III)


1618년에 30년 전쟁이 발발하고 검은 독수리를 문장으로 사용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톨릭 황제가 프로테스탄트 독일인들을 광폭하게 공격하면서 재앙은 시작된 듯 보였다. 1630년, 구스타부스는 - 프로테스탄트측의 마지막 챔피언 - 구원을 위해 왔다. 그가 독일 북부에 상륙하면서 이 후 벌어진 전투에서는 자욱한 연기속에서 기이한 괴물들이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보태졌다.





북방의 사자(Lion of the North) - 스웨덴 국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2세. 그가 매우 비범한 사람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돌푸스는 큰 키에 머리카락은 금발이었고. 지적이며, 예술에 애정이 깊었고, 확고한 복음주의자였으며. 무뚝뚝한 상관이었으며, 그와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었다.








남쪽으로 계속 행군하면서 구스타부스는 독일 중부에서 벌어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카톨릭 군대를 격파했다. 1632년에 구스타부스는 프로테스탄트 루터교의 발생지인 아우구스부르그(Augusburg)에 입성해 '북방의 사자(Lion of the North)' 라는 칭호를 부여받았고, 그가 얼마 후에는 비엔나에 있는 독수리 둥지로 쳐들어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불행하게도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기라도 한듯이)는 1632년 11월, 뤼첸 전투에서 무모하게 기병 돌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전사하고 만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의 전투 기록 ***





1630년 5월 구스타부스는 포메라니아에 군대를 상륙시킨다. 5월 6일 그는 독일에 상륙했다.





1631년 9월,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동맹군인 프로테스탄트 색슨 군대가 패주하여 보급품이 실린 마차를 가지고 달아난 후에도 구스타부스는 틸리가 이끄는 카톨릭 군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1632년 3월, 레흐 전투에서 구스타부스는 틸리를 한번 더 패배시켰다.


1632년 4월, 라인 전투


1632년 9월, 구스타부스는 발렌슈타인이 지휘하는 알테 페스트의 요새를 공격하지만, 격퇴당한다. 전투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프로테스탄트 군대내에 있던 몇몇 용병들은 탈영하기도 했다.





전투 직전 승리를 염원하며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구스타부스






알브레히트 벤첼 오이제비우스 폰 발렌슈타인(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1632년 10월,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부스는 사망하지만 스웨덴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발렌슈타인을 패배시켰다. 스웨덴의 승세는 호른, 바뇌르, 토르텐손 같은 지휘관들에 의해 베스트팔렌 평화 협정 때까지 계속되었다.


스웨덴에서는 매년 9월 6일을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의 날로 기린다. 이날에는 특별한 페스트리를 만들며, 왕의 모습이 새겨진 초콜릿 메달이 팔린다. 이날은 스웨덴의 연중 국기 제정일 이기도하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분노의 화신 복수의 화신 | 작성시간 06.03.26 살라딘 다음으로 갠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왕... 병법이 뭔질 아는 왕...
  • 작성자카이사르씨 | 작성시간 06.03.26 고대이후 잊혀진 전술적 기동을 깨운 인물... 명성은 익히 들었소만 저렇게 생긴 분이시구려 나폴레옹이 꼽은 위대한 지휘관중 하나...
  • 작성자멀티못해본쇼군 | 작성시간 06.04.01 난..덴마크 왕인줄 알았네...
  • 작성자태사문중 | 작성시간 06.04.01 덴마크하면 햄릿이 떠오른다는...퍽퍽퍽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