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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유럽]롱보우(Longbow:영국장궁)와 화살

작성자청4대황제강희제|작성시간06.09.30|조회수3,818 목록 댓글 6
롱보우(Longbow:영국장궁)와 화살 그리고 플레처의 기원 -1편- | 중세사 2006.08.24 18:28
강희대제(sunho1007) 카페매니저 http://cafe.naver.com/booheong/4419 이 게시물의 주소를 복사합니다
-장궁, 화살 그리고 플레쳐의 기원-
 
 

편집 and 번역: 강희대제
 
 

'플레처' 는 13세기 초에 쓰여진 사람의 "성"이다. 플레처 사람들은 1203년 영국의 스태퍼드셔 《Staffordshire 잉글랜드 중부의 주》에

서 거주하였으나, "Ralph le Flescher" 와 "Nicholas le Fletcher"는 1273년에 링컨셔 《Lincolnshire 영국 동부의 주(州);略 Lincs.》라

는 곳으로 이주하였다.

 

 플레처사람들과 길드의 활제조장인들은 1363년 런던시 상업조합으로 인정되어졌다. 하지만, 1370년에 플레처사람들과 다른 활제조장

인들은 둘로 나뉘어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1429년 도시에서 포고가 내려져 그들 각각의 영역이 규정 지어질때까지 그들 사이에서의 관

할문제에 대한 논쟁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플레처 사람들은 런던에선 1386년에 정식으로 독립되어 등록되었는데, 이것은  전설적인

웨일즈 longbow사수의 기술과 플레처 사람들의 전문기술이 퍼져나간 역사의 증거다.


일부 역사학계에서는 현대의 플레처 성을 가진 사람들의 선조들은 중세longbow사수에게 기본적인 보조 노동 인구로 행동했다는 학설

제시하기도 하는데, 이게 가능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 학설이 영국의 longbow궁수 집단내에서 플레처사람들이 타협했다는 것을 설

명하는것일까?

 

 

 


1. 웨일즈 longbow사수의 기원과 역사

 

 


<그림1> 웨일즈지방의 궁수

 

 

영국안에 기원전 3천년의 고고학증거물을 찾아보면 longbow의 사용을 살펴볼수 있는데, 그것은 유럽전체에서 널리 사용되어졌다.

 그때부터도 longbow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현재까지 발전되어졌는지는 모른다. 고대 켈트족과 로마인들은 지금의 longbow와

유사한 무기가 존재했고, 그들은 소규모로 그것을 운용하였다. 바이킹은 농사를 위해 활과 화살의 제공을 제한하였고, 서기 633년

Offrid에 있는 Northumbria의 왕 Edwin의 아들은 웨일즈의 Mercians전쟁에서 화살에 맞고 전사하였다 그화살이 웨일즈의 longbow

에 의해 발사된 화살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이야기는 일찌기 웨일즈 궁수가 군사작전에 활약했다는 증거가 된다.

 

알아주는longbow   전문가인 Robert Hardy의 의견을 들어보면 웨일즈에서 longbow가 영국이라는 섬에 먼저 소개되어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주는데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주장하길 "웨일즈인들은 덴마크인들이 활을 무기로 채택하기 이전부터 이미 활을 사용했

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사람들이 활을 사용하기 이전부터 영국에는 웨일즈 지방을 중심으로 먼저 활이 보급되어 있었다" 고한다.


17세기까지 영국안에는 제대로된 정규 육군이 없었고, 13, 14세기 그리고 15세기동안 궁수는 영국의 비정규 육군의 일부에 포함되어 전

투에서 활약했다. 그나마 배치된 육군 전투병들은 해산되었고, 궁수들은 고향에 있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갔다.  궁수가 다시 필요 해졌

을 때는 봉건 상류 계급에 의해 징집되거나 보충되었다.

 

 

633년 Offrid에서 에드윈의 아들이 웨일즈인의 화살에 의해 전사했고, 이것때문에 그후 수백년후의 영국인과 노르만 왕조에 의해 널리

사용되어졌고, 웨일즈인들이 longbow를 군사작전에서 가장 먼저 사용했다는 사실은 1054년 영국의 웨일즈 지방으로 쳐들어온 Saxon

족의 기병대가 longbow 궁수로 이루어진 웨일즈 산적들의 매복에 의해 격퇴당한 사건에서 찾을수 있다. 그당시 궁수들은 정확하면서도

 맹렬하게 사격을 가했고, 웨일즈인들이 다가가 창을 던지기 전에 Saxon의 기병대는 도망갔다.

 

1182년에 있었던 Abergavenny성 포위전 때는, 웨일즈 longbow궁수가 쏜 화살이 4인치짜리 목재성문 을 관통했고, William de Braose

가 웨일즈 궁사가 쏜 화살에 맞아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 화살은 정확히 사슬갑옷(chainmail)의 넙쩍다리 부분과 안장,

그리고 그가 타고 있던 말까지 관통시켜 버렸다.

 

영국의 왕 Edward 1세는 웨일즈 궁사가 사용하는 longbow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이것을 발전시켜 13~15세기의 군사원정기간 동안 웨

일즈 궁사를 적극 활용했다. 남동 웨일즈 지방은 훌륭한 longbow궁사를 창시해낸 곳이였고, 그들은 곧 매우 멀리 떨어진 Pembroke로

 보충되었다.

 

1299년 봄 Falkirk에서 Edward가 거둔 승리는 웨일즈의 longbow궁사의 강력한 효과 덕분에 이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투이다.

 

 

 

 

 

 

 

 
<그림-2>cracy 전투
 
 
 

1346년 프랑스에서의 crecy전투는 롱보우의 뜻있는 무대가 되어주었고, 전쟁양상을 변화시켜 버렸는데, 당시 Edward 는 웨일즈 지방

출신의 3천~6천 궁사를 이끌고 가던중 적의 기사들과 직면했으나, 잘 훈련된 웨일즈 궁사는 분당 약 10발 가량을 쏠수 있어 전투

당시에는 금세 수천발에 달하는 화살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고, 목격자들은 그것이 흡사 하늘에서 눈비가 내려오는 모습같았다고한다.

프랑스 석궁수들은 longbow궁수들보다 화살을 장전하는 속도가 느렸고, 이 이점은 결정적으로 영국군의 전황이 유리하게 끔 만들었다.

 

 

 

 

 

 

 

 

 

 
<그림-3>agincourt 전투
 
 
 
웨일즈의 궁사들은 또한 Agincourt전투에서 긴요한 역활을 담당했는데, 1415년 10월 25일 헨리 5세의 지휘아래 longbow궁수와 영국군
은 Agincourt에서 프랑스의 기병부대를 완벽하게 격퇴했다. 이로써, 숙련되고 경험있는 궁수들에 의해 움직이는 longbow의 화살은 적
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강한 활에서 발사되는 화살은 180~200야드 사이의 먼 거리에 있는 사슬갑옷과 투구를 관통할수 있었는데,
 이 겁없는 longbow 궁사들은 그들의 적과 바다건너 유럽인들을 약 3세기동안 두려움에 떨게했다. 이 두려운 중세 longbow궁사들은
일반적으로 두손가락을 사용해 활사위를 잡아 당겼는데, 프랑스 군인은 이들의 손가락을 잘라버렸으나, longbow사수들은 전투가 임했
을때, 항상 두손가락을 적군이 잘볼수 있게 떠받들어주어 상대방 병사들을 조롱했다.

 

 


편집 and 번역: 강희대제

롱보우(Longbow:영국장궁)와 화살 그리고 플레처의 기원 -2편- | 중세사 2006.08.29 20:27
강희대제(sunho1007) 카페매니저 http://cafe.naver.com/booheong/4475 이 게시물의 주소를 복사합니다

2. 플레처 사람들의 임무
 
 
 
 
한때 유용한 전쟁무기로 이름을날린 longbow 궁수들과 플레처 사람들의 기술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기있는 사냥용 도구 와 레져 스포츠로 자리잡고있다. 당시 longbow궁수들과 플레처사람들은 비싼 가격으로 고용되는 아주 숙련된 일꾼들이였다. 이 장인들은 육군의 행진에 동참하여 전쟁에 사용하기 위한 화살을 소지해야 했다. 중세의 화살은 오늘날의 화살과 마찬가지로 크게 화살촉,자루,깃의 3부분으로 나뉘었다.  화살자루는 나무와 양물푸레나무, 자작나무, 오크나무, 주목등 다른 많은 재료들을 썼는데 길이가 크게는 1미터에 달했다. 특히 양물푸레나무는 강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자주 사용되어졌다.(중세 화살중 최고의 화살이였다.)
 
 
 
 
 
화살촉은 목적에 따라 다른형태로 제작되었다. 바늘 형태의 길고 뾰족한 화살촉은 갑옷과 투구를 뚫어버리기 위한 것이였다.
 (사진 위에서 4번째)
 
 
 
 
 
 
 

넓은 화살촉은 피부에 넓은 범위의 출혈을 내는 화살이였다. (위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세번째, 맨오른쪽)
 
 

때때로 상대방은 투구와 갑옷에 화살이 쉽게 박히는걸 예방하기위해 맞을만한 부위에 밀랍과 송진, 수지등을 발랐다.
 
 
 
 
 
 
중세 화살은 3개의 깃이 사용되는데, 모든 깃털이 화살깃으로 쓰기에 적합한 것은 아고,  중세의 궁수는 회색거위의 깃털을 화살깃으로 사용했는데, 구하기쉽고 가격이 저렴한데다가, 질기고 오래갔기 때문이였다.
 
 
중세궁사는 그들의 탄약을 원통에 넣고, 마차에 실어 운반했다. 때때로 통마다 화살촉과 화살자루를 나누어 두기도 했다.  될수있는한 매지않은 화살촉을 부드럽게 용해시킨 밀랍이 칠해진 화살자루에 정교하게 끼워맞추는데, 이작업으로 화살자루는 몇번이고 재사용이 되도록 한다.
 
 
과거 영국의 전쟁무기들인 '활, 화살, 도검, 보병용 창, 단검, 그리고 기병용 창' 등은 대량으로 제작되어 육지와 바다건너의 전쟁터의 육군에게로 보내졌는데, 1360년 5월에서 6월까지 대략 1만장의 활들과, 50만개의 화살이 런던에 있는 왕의 친위부대에게 보급되었다.


 
롱보우(Longbow:영국장궁)와 화살 그리고 플레처의 기원 -완결편- | 중세사 2006.09.0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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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플레처사람들?

 

 

 '플레처'라는 이름의 기원은 숙련된 솜씨로 화살을 만드는 장인혈통의 성씨에서 비롯되었다. 플레처 라는 이름은 프랑스어에서 비롯되

었는데, 이것은 그당시 1066년에 노르만 침략자들을 부르던 이름이였다.

 

 

 

웨일즈의 longbow 궁수들은 하나같이 용감하고 노련하며, 무섭기 짝이없는 적군 이였다. 그들은 에드워드 1세 의해 전쟁터에서 배치되

었고,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와 함께 "Crecy", "Agincourt" 등과 같은 수많은 전쟁터에서 활약했고, 웨일즈 longbow궁사는 어디서든

지 수천발의 화살을 날려보냈다.

 

 

 

대부분의 웨일즈 궁수들은 남부 웨일즈지방 출신이였는데 이 사실은, 화살을 만드는 장인가문이였던 플레처 사람들의 기원이 남부 웨일

즈에서 시작되었고,  그당시 '플레처'가문으로 부터 오늘날 플레처 성씨를 가진사람들의 기반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영국 왕 노르망디 윌리엄의 배치명령에 따라 플레처 사람들이 잉글랜드에서 웨일즈로 건너가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이 필요한

곳으로 가기 위해, 잉글랜드와 웨일즈 사이의 국경을 수없이 횡단했다. 왕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성을 지키기 위해 영국의 궁수들이 웨

일즈로 이주하는 것을 권장했고, 그중에는 화살을 만드는 장인 가문이였던 '플레처'인들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이 잉글랜드 본토에서 이

주해온 이주민이라는 사실은 웨일즈의 언어상, 직업상의 이름은 성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수있다. 이 장인들이 웨일즈의 지

역사회로 이전했던 사실은 국제적인 결합의 시초라고 할수 있다.

 

 

출처 : http://cafe.naver.com/booheong.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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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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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유틸라이넨 | 작성시간 06.09.30 엑박 뜨는뎁쇼~~
  • 작성자청4대황제강희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09.30 으흠 액박이 뜨신다면 원본 -> http://cafe.naver.com/booheong/4419
  • 작성자게르만 | 작성시간 06.10.01 엑박 ....
  • 답댓글 작성자청4대황제강희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10.02 엑박이 뜨신다면 이리루 http://cafe.naver.com/booheong/4419
  • 작성자shaind | 작성시간 06.10.09 카페 멤버에게만 공개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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