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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콘스탄티노플에 가해진 역대 공성작전들

작성자Τιταυιζ|작성시간07.07.14|조회수3,029 목록 댓글 7

물론 개개의 공성전들에 대해선 훨씬 상세한 자료가 지천으로 널려있습니다만...

그래도 한번 쭉 정리해 보는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미천한 지식을 바탕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고수분들의 관대한 지적 부탁드립니다.

 

오스프리 출판사의 "콘스탄티노플 성벽" 을 바탕으로 몇몇 서적들을 참고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거대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도시를 점령하려는 여러 적들의 기념비적인 공
성작전에 의해 그 디자인과 방비, 수비군에 대한 신의 가호, 그리고 방어전술을 시험받았습니다. 대부분
의 공격은 지상에서 가해진 것이었으나 바다역시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본격적인 공성전 외에,
게르만 용병대의 묵인하에 도시로 진입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대립황제들의
공격에 의해 도시의 주인이 바뀐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전부 공성작전에 의한것이 아닌,
기회주의와 배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 아바르족과 페르시아의 의한 포위. 서기 626년.

 

4세기 훈족의 공격 때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그 존재 자체로 아틸라의 진출을 막는 억제력을 보였습니
다. 따라서 626년의 아바르족과페르시아의 공격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겪은 첫 실전으로 역사에 기록됩
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충돌 중 하나로 꼽힐 것입니다. 페르시아 군대는 근동의 로마 영토를
통과해서 이제는 발칸지방에 눌러앉고 있는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아바르족의 군대는 아바르 족,
훈, 게피다이, 불가르, 스키타이, 슬라브 등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아바르족이 공성전을
준비하는 동안 콘스탄티노플은 성벽의 보수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아바르족의 공성무기중에는 중국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이는 최신형 견인식 트레뷰셋이 포함되어 있었

는데, 이 무기는 유럽에서는 20년전의 테살로니카 공성전에 처음 선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Medival

"sows" 라고 불린 이동식 셸터와 후에 방화처리가 추가된 공성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셸터는 아바르

족이 성벽에 도착한 7월29일경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7월 31일, 첫번째 공격이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가해졌는데 그 주공은 비교적 높이가 낮은 메스타키오스 문 주변에 집중되었습니다. Paschale의 연대

기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 날이면 날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성무기들이 계속 공격받은 지역으로 집중되었으며 따라서 이러
한 상황 속에서 도시 안에서도 수많은 공성무기가 배치되었다. 매일같이 보병들간의 전투가 계속되었으
나 전능하신 신의 가호로, 우리의 유능한 병사들은 적들을 먼거리에서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의 투석기들을 집결시키고 그것들의 외부를 가죽으로 둘렀다. Polyadrion성문에서 성 로마누스 성문에
이르는 지역에 그는 12개의 높다란 공성탑을 준비시켰으며 가죽으로 만든 보호막 아래에서 병사들이  
그것들을 전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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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르족과 페르시아인들은 곧 접촉하였으나, 비잔티움함대의 노력은 페르시아인들로 하여금 공성전이
실패로 끝날때 까지 단지 구경꾼으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육지쪽 성벽에서가 아닌,
골든 혼쪽의 바다에서의 상륙작전이 요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육군을 상륙시키려던 수송선들과
뗏목들이 그리스불에 의해 모조리 불탔으며 제국 함대의 계략에 속아 출격한 아바르족의 함대또한 같은
운명을 나눴습니다. 승리는 동정녀 마리아의 가호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그녀에게 바쳐진 블라케르나이의
종교지역에서 중요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엿으나 기적적으로 성당은 무사했습니다.
8월7 ~ 8일간의 밤에 마침내 아바르족은 자신들의 공성무기들을 불태우고 후퇴했습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첫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한 것입니다.

 

2. 아랍인에 의한 공성전.서기 674 ~ 678년.

 

674년에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진격해 들어온 첫번째 적군을 맞이했습니다.
문헌들에 의해 이 서사시적인 전투에서 그리스의 불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주공은
역시나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시는 끈질기게 버티었으며 모든 공격이 실패하자
아랍인들은 일단 물러나서 보스포러스의 양안을 약탈한 후 도시를 계속 포위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자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아랍인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으며 보급수송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약 80마일 떨어진 섬으로 일단 물러난 후 그 섬을 본거지로 하여 6년 간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도시는 끝내 버티었으며 무슬림 전사자중에는 마호메트의 마지막 동료였던 아이유프까지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 이스탄불의 가장 신성한 무슬림지역에 묻혀 있습니다.

 

3. 크룸이 이끄는 불가르족에 의한 공격. 서기 8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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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811년에 니케포루스 1세는 불가르족의 지도자 크롬과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크룸은 황제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모욕을 가했습니다.) 2년 후, 그는 골든혼에 나타났으며 수비대의 시야에서 학살을 벌임으로서
그들을 위협했습니다. 크룸 역시 이 거대한 성벽이 주는 위압감에 압도되었는지 즉각적인 공격을 보류하고
괴이한 이교적 의식으로 성 안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에 심각한
공성작전은 벌어지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레오 5세가 크롬과 협상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헤라클리우스
성벽의 북쪽 끝에서 회담을 가졌는데, 무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레오는 몰래 궁수들을 매복시켰습니다.
하지만 황제측 사절단원 중 한명인 헥사볼리오스의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말미암아 크롬은 적시에 경고를 받고
탈출했습니다. 그는 하찮은 상처를 입었지만, 복수를 맹세하며 불가리아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맹세는 새로운 출정직전 신께서 거역못할 명(죽음)을 내림으로서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4. 러시아인들에 의한 공격. 서기 8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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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함선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된 골든 혼의 쇠사슬>

 

이 공격의 목격자인 포티우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860년에 있었던 러시아인들의 공격은 매우 신속했으며,
미쳐 대비할 수 없는 "말벌무리" 와 같았다고 합니다. 러시아인들은 공격시기를 잘 골랐는데, 당시 황제와 그의
병사들은 소아시아에서 아랍인들과 전쟁중이었으며 그의 함대또한 에게해와 지중해에서 노르만인과 아랍인들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두 이점, 특히 함대의 부재 중 가해진 공격은 아마 러시아인들이 모종의
정보를 제공받았으리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지상의 방어또한 황제가 도성의 병력 대부분을 아랍인들과의 싸움에 투입했기에 약했습니다. 흑해의 해안에서부터
보스포러스, 마라마라해와 그 부속섬들이 러시아인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인들의 위협은 또다시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 구원받았습니다. 황제는 급히 도성으로 돌아온 후, 블라케르나이의 성당에 모셔진 그녀의
로브를 상징적으로 바다에 담갔습니다. 그러자 그 즉시 강풍이 몰아쳐서 "신을 믿지않는" 러시아인들의 함대를
박살냈습니다..-_-?

 

5. 제 1차 십자군에 의한 공격과 뒤이은 공성전. 서기 10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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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성벽의 통로>


( 이 부분은 자료가 적어서.. 오스프리 출판사의 설명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기이하게도 떼를 지어 통과하려는 제 1차 십자군에 참여한 병사들의 떼거리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십자군과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와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십자군 사절들은 황궁

의 특별한 의식에 초대받았는데 이 행사가 너무 오래 걸렸기에 십자군들은 황제가 이들을 상대로 뭔가

음모나 배신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결국 이들 사절들을 구하기 위해

십자군들은 야영지에서 나와 도시로 돌입하려는 과정에서 블라케르나이문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 장면은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드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 황제께서 백작들을 감옥에 가두었다는 해괴한 소문이 야만인들의 귀에 들어갔다. 그 즉시 다수의 부대들이
비잔티움으로 이동했으며 소위 "은의 호수" 라 불린 곳 근처의 황궁을 파괴했다. 그들은 비잔티움의 성벽 또한
공격했으나 아무런 공성무기가 없었기에 성벽에는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많은 떼거리들은
감히 가장 위대한 성직자이시자 성인이신 성 니콜라스를 기리기 위해 옛 황제께서 오래전에 세우신 성당 근처에
있는 궁전 근처의 성문에 불을 지르는 데에는 성공했다.

 

6. 4차 십자군의 공격. 서기 12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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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랑기안 친위대의 유일한 흔적. 소피아 대성당에 룬 문자로 씌여있는 Halvdan이라는 병사의 이름>

 

약 한세기 후 많은 십자군 전사들이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몰려왔을때 도시에 비극이 닥쳤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공격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에 의해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유일하게 성벽이
넘어간 예일 것입니다. 원래 4차 십자군은 약소한 성과만을 가져온 3차 십자군의 실패 후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결성되었습니다. 1198년 교황 이노센트 3세에 의해 소집된 이 십자군은 교황권에 의해 직접 결성된
마지막 주요 십자군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십자군들은 개개의 군주들의 의도에 따라 결성되었으며
사실 이번 4차 십자군 역시 교황의 입지는 금방 축출당했습니다.

 

서기 1201년, 십자군들이 베네치아에 집결하였습니다. 베네치아인들과 십자군들은 이집트로의운임으로 8만 5천
쾰른 마르크를 지불하고 대신 베네치아는 1년분의 식량과 기사 4천 5백명, 그들의 말, 9천여명의 종자들,
그리고 2만 여명의 보병을 실을 수송선을 제공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인
십자군들은 너무 적었습니다. 3차 십자군때의 리쳐드와 같이 집결지를 강제할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십자군들이 각자의 수단으로 레반트로 건너가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들이 합의된
운임전액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결코 수송해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사실 그들로서도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던 것이, 함대를 준비하느라 공화국의 재정이 말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기후가 험해지는 10월까지는
십자군에게서 어떻게든 운임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베네치아의 도제 단돌로는 달마티아 지방의 예전의 베네치아 영토였던 자라를 공격해 준다면
운임 부족분의 지급을 연기해 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십자군 병사들 중에는 이러한 사실에 아연실색하여,
차라리 자력으로 목적지까지 가거나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많았지만 지휘관들로서는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라의 통치자인 헝가리왕 자신이 십자군의 명목상 참가자 중
한명이었으며 자라시도 시벽에 십자가를 걸어놓아 교황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명백한 의사를 보였지만 아무
소용없었으며 도시는 함락되었습니다. 분노한 교황이 십자군과 베네치아인들을 파문하였으나 프랑크인들
에 대한 파문은 곧 해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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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즈음 최근 폐위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 알렉시우스 앙겔로스로부터 왕좌를 되찾는데
도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사키오스 2세는 동생 (알렉시우스 3세) 의 배반으로 시력을 박탈당하고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 역시 감금당해 있었는데 결국 탈출에 성공하여 슈바벤의 필리프의 보호아래 있었습니다.
비록 많은  도덕적 갈등이 있었지만.. 알렉시우스가 "동방교회를 로마교회의 권위에 복속" 시키고, 1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직접 십자군에 참여할 것이며, 500명의 기사들을 성지에 상주시키고 무엇보다도 은화 20만 마르크를
약속하자 양심도 편안해진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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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키오스 2세>

 

사실 이때까지도 많은 십자군 전사들이 같은 기독교도 형제들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광신적인 성직자들은 정교도를 믿으며 자신들의 황제를 폐위시키는 불한당들의 도시를 공격하는
것이 무슬림을 공격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그들을 납득시켰습니다. 결국 십자군들은 알렉시우스를
힘으로 옥좌에 앉히기로 결심했으며 이에 육해양면의 공격이 1203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알렉시우스 3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탈출했으며 알렉시우스 앙겔로스가 알렉시오스 4세로 등극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의 인기를 과대평가했는데 실제로 적지않은 백성들은 그를 경멸스런 라틴인들의 친구로 여겼으며..
그가 십자군에게 약속한 금액을 지불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것도 모자라 옛 황제들의 무덤의 장식까지
떼어내는 것을 보고 민심은 기울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를 틈타 명문 귀족이며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노회한 인물인 무르추플루스가 궁정쿠테타를 성공시켰으며 알렉시오스 5세로 등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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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세우스 5세>


이제 십자군과 비잔티움간의 연약한 연대마저 깨어졌으며 십자군의 성직자들은 공격을 망설이는 전사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겨우 20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제국의 초라한 함대는 금새 괴멸되었으며, 옛부터 배들의
진입을 통제하기 위해 골든혼에 설치된 쇠사슬 역시 파쇄되었습니다. 공성작전은 블라케르나이 구역이
보이는 지역에서 행하여졌는데 공성작전에 골든혼에서 해체된 배로 만든 투석기와 공성사다리가
투입되었습니다.

 

: 베네치아의 도제는 자신의 배를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배들을 일렬로 전투배치한 후 약 3번의 석궁
일제사격을 가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그 지역의 성벽과 탑들이 늘어선 밑으로 다가갔다. 이제 그대들은
그들의 갑판에서 망고넬이 발사되는 모습과, 석궁이 바다를 건너오는 모습과, 궁수들이 그들이 만든
화살비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는 모습을 상상 할 수 있으리라. 배의 많은 사다리들이 성벽의
여러곳에 놓여지면서 창과 칼이 서로 부딪혔으며 그리스인들은 흉벽의 꼭대기에서 무시무시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전장의 소리가 너무나 커서 육지와 바다 모두 조각조각 박살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갤리선들이 감히 육지에 접근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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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다리를 통해 돌진하는 십자군 병사들> 

 

십자군들은 그 다음해에도 공격을 계속하였으며 다시 바다에서 공격이 재개되었습니다.

 

: 그래서 (1204년 4월 8일에) 수많은 공성용 사다리와 많은 공성 무기들이 준비된 적들의 가장 큰 배들이
저울의 접시처럼 뒤뚱거리면서 서로간에 충분한 간격을 유지한 채 성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Evergetes
수도원에서 블라케르나이 궁전에 이르는 지역을 점거했으며 그 지역은 곧 불길에 휩싸여 땅끝까지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이 모든 아름다운 광경들이 사라졌다.

 

마침내 십자군들은 몇명의 기사들이 동시에 기어갈만한 구멍을 네는데 성공했습니다.
베네치아인들 역시 바랑기안 친위대들의 극도로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배에서 성벽으로 사다리를
놓는데 성공했습니다.

 

: 황제가 있는 반대쪽에 있는 petria 성문 가장 근처에 엄청난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려진 사다리에 있던,
그들이 목표로 삼은 탑들로 뛰어드는데 성공한 두 사람이 그들 전우들의 행운을 확신시켰다. 그들은
경계하고 있던 로마인 보조병들을 몰아냈으며 손을 흔들어 기쁨과 용기의 사인을 보냄으로써 그들 동향인들을
고무시켰다. 그들이 성문으로 뛰어드는 동안 피에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한 기사가 그곳의 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키가 8패덤(54피트)에 달할 정도로 컷으며 최신유행의 헬멧을 쓰고 있었기에 패주하는 부대들을 몰아내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로 생각되는 그런 자였다.

 

기록에 의하면 아미앵의 피에르가 이끄는 열명 가량의 기사들과 60여명의 하사관들이 치열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성벽일부를 허물어뜨려 기어갈 만한 작은틈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벽안에는
많은 수비군들이 있었기 때문에 돌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때 클라리의 알룀 (Alleumes of
Clari) 이라는 무장 사제가 전우들과 심지어 형제의 만류도 뿌리치고 구멍을 기어서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칼을빼어 용감하게-_- 돌진하자 사기가 낮고, 지방민들로 구성된 그 구역 수비병들이 도망쳐 버렸습니다.

십자군들은 블라케르나이 지역을 점령하고 도시 나머지 지역을 공격할 본거지로 삼았지만 성벽을 불길로부터
그들자신을 보호하는 와중에 그들이 통제한 지역 이상을 불태웠습니다. 마침내 비잔티움 지도부가 항복하고
십자군들이 승리하였으며 십자군들은 무시무시하고 가혹한 약탈을 3일 동안 자행하였는데 이 와중에 무수를
헤아리는 고대의 걸작들이 파괴되거나 도둑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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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황금문에 도달한 후 그들은 그곳의 새로운 벽을 무너뜨리고 앞으로 달려와서 흩어졌으며 당연히
파멸과 완전한 파괴를 가져왔다. 이제 아무도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적들은 성 곳곳으로 흩어졌고
주민들을 나이와 성별을 분문하고 칼질을 해댔다. 그 다음에 도달한 적군역시 시종일관 전투대열을 형성하지도
않고 도시로 흩어졌으며 모든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했다.

 

7. 오스만인들에 의한 공격. 서기 1396년, 1422년, 그리고 14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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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하면 오스만인들에 의한 첫 공격은 1396년에 바예지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두번째인 1422년의
공성기간동안 요하네스가 남긴 감동적인 증언에 의하면 성벽은 제 구실을 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다음 공격은 1453년에 있었는데 메메드 2세의 주의깊고 작은곳까지도 잘 고려된 계획에 힘입어 이번 공격은
그 어느때 보다도 철저히 준비되었습니다. 그의 기본전략인 도시의 고립화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때까지
비잔티움의 소유로 남아있던 흑해의 모든 영토가 메메드에게 넘어갔습니다. 1444년 바르나 전선에서 터키군대가
제노바함대의 도움을 받은것처럼 지난1422년의 공성때 콘스탄티노플은 바다로부터 보급을 받았습니다.
이제 오스만인들이 행할 조치는 이러한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 예정이었습니다.

 

보스포러스의 아시아쪽 해안에는 아나돌루 히사르라는 요새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제 메메드 2세는 반대쪽
유럽쪽 해안에도 요새를 새로 세웠습니다. 이 요새는 처음에는 "해협을 자르는 단도" 혹은 "목을 자르는 단도"
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간단히 루멜리 히사르 (유럽쪽의 성채) 로 불렸는데 이 요새는 1452년 8월에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에는 불가능했던), 오스만 포병대가 흑해로 통하는 해상교통을 통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이 요새의 축성은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으며 어떠한 군사적, 외교적 노력도 메메드2세
에게는 효과가 없었습니다. 1452년 11월의 어느날.. 마침내 해협을 통과하려던 배네치아 갤리 한척이 루멜리
히사르에서 발사된 포탄을 맞고 격침되었습니다. 이로써 바다로 구원군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은 막혀 버렸습니다.

1453년 3월, 투르크 육군이 트라키아에서 소집되는 동안 오스만함대는 갈리폴리를 출발해서 마르마라해로
위풍당당하게 항해했습니다. 이미 콘스탄티노플 성벽주위의 부락에서는 오스만 육군에 의한 테러공격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초전에 덧붙여 마침내 우르반의 거포가 육중한 소리르 내며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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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르반의 거포>


4월 20일..방어측에는 약간의 행운이 있는 날이었는데, 한척의 비잔티움 선박과 2척의 제노바 선박으로 구성된
보급대는 죽음을 무릅쓰고 터키 해군의 봉쇄를 풀고 골든혼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골든혼은
엄청나게 굻은 쇠사를로 가로막혀 있는, 비잔티움이 통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바다였습니다. 하지만 단지 이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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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지를 통해 배를 이동시키는 메메드의 병사들 >

이런 자그마한 희망은 메메드2가 그의 공병대를 이용해 이룩한 업적에 의해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보스포러스 해안에서 골든혼으로 통하는 개울까지 엄청난 노동력에 의해 나무판자 길이 깔렸으며 엄폐의 일환으로
쏘아대는 대포소리 아래 약 80여척의 투르크 함선이 골든혼으로 진입했습니다. 이제 더욱 가까운 곳에서
해상공격이 계속됩니다.. 두카스는 성벽 수비대의 최종배치에 대해 나음과 같은 묘사를 남기고 있습니다.

 

: 성벽 안에서도 전투대열에 따라 수비대가 정렬했다. 황제는 지오반니 주스티아니와 함께 포위된 지역에서
이미 요새 바깥쪽이 돌파된 성벽에서 라틴인과 로마인 (비잔티움인) 약 3000명을 지휘하였고, 대공은 약 5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황문을 지켰다. 성벽은...(중략) ...약 500여개의 공성기와 궁수들에 의해 수비되었다.
미의 문에서 황금문에 이르는 원형구간의 탑에 무장한 궁수나, 공성기 조작수 혹은 투석병들이 배치되었다.

 

헝가리에서 구원군이 온다는 헛소문과 병사들의 사기하락 조짐에 자극받은 메메드 2세는 5월29일 이른 시각에

수륙양면의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황제는 외성벽과 내성벽의 모든 병력을 모아 더 이상의 후퇴가 용납되지 않는 내성벽의 성문들이
있는 곳을 지켰습니다. 첫번째로 터키의 비정규군이 돌격해왔으나 격퇴당했고.. 이어서 아나톨리아의 정규군이
들이닥쳤습니다. 마침내 1453년 5월29일 아침,리쿠스 계곡의 비교적 낮은 지역인 메소타키온성벽에 터키군이
성벽에 도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산이라고 알려진 한 거대한 예니체리 병사가 외성벽의 탑을 향한 마지막
돌격을 이끌었습니다. 하산은 결국 혼전 중에 죽었지만 그의 전우들은 peribolos구역을 돌파하여 마침내
내성벽을 넘어 도시안으로 침투하였으며 이로써 콘스탄티노플은 투르크에게넘어갔습니다.


예니체리들과의 치열한 접전도중 주스티아니는 심한 부상을 입고 자리를 사수하라는 황제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철수했는데, (비겁하게) 후퇴했다는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투르크 군대가 계속 돌입하면서
성안에서의 저항이 그치기 시작했으며 황제는 제국이 사라지는 와중 용감하게 반격을 시도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실로 오랫동안 버티었던 성벽이 마침내 정복된 것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온갖 전쟁과 모략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결국 로마인들은 세상의 중심이 되는 도시로 돌아왔노라......

                                                                ......미디블1에서 비잔티움으로 승리하면 나오는 말이죠;; )


(1차대전 직전 제 1차 발칸전쟁때 발칸국가 연합군이 이스탄불 근처까지 진격하면서콘스탄티노플 성벽

이 잠시나마 요새로서의 기능을 강요당한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은 기회가 되면 다음에 한번 올려 보겠습니다.)

 

출처 : Walls of Constantinople (오스프리 출판사의 켐페인시리즈 25번.) 을 바탕으로 하여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방대한 로망스 ,토머스 F. 매든

         (여러가지로 욕먹는 책이긴 한데.. 참고할건 많더군요.)
         비잔티움 연대기, 존 노리치 (솔직히 사놓고 거의 처음 읽어봤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사(물론 별쇄판),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기타 등등...서적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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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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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Albrecht Wenzel von Wallenstein | 작성시간 07.07.14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의 경우 한정된 자원으로 그정도로 오래동안 버틸수 있었던 것을 보면, 콘스탄티노스11세와 제노바, 베네치아인들의 능력이 경탄스럽지요. 주스티아니의 경우 마지막에 오명을 남기고 목에 화살박혀 죽지만
  • 답댓글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7.15 사소한 건데 주스티아니에게 중상을 입힌것이 화살인지 아군의 캘버린 포탄인지 서적마다 다르더군요. 개인적으로는 화살에 한표입니다만..
  • 답댓글 작성자yskwww | 작성시간 07.07.15 목이 아니라 눈에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가 며칠 후에 죽은거 아닌가욤..??
  • 답댓글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07.07.16 캘버린의 유탄에 옆구리를 다치고 후송되어 실려갔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이후 선상에서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알고있습니다만(..)
  • 작성자라파예트 후작 | 작성시간 07.10.29 좋은 글이군요. 덕분에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그럼 좀 담아갈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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