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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비잔틴 제국]비잔티움 제국에 대하여 -5- [동방의 로마 콘스탄티노플]

작성자[RTW]ROME|작성시간07.07.23|조회수579 목록 댓글 3
비잔티움(Byzantium)에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그리고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뀔 때마다 역사에서 서로 다른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던 이 도시는 지난날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였으며, 현대사에서나 종교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다. 예로부터 아시아와 유럽의 경제와 문화의 가교는 물론,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가 교차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수많은 건축물과 미술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에게 해로 이어지는 마르마라 해와 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자리잡고 있는 이스탄불은,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항구 도시이다.



콘스탄티누스



의 도시
새로운 로마의



도시계획
메갈로폴리스



로의 발전

제2의



전성기
오스만 제국



의 수도
제국 수도의



장려한 건축물

그리스 정교회



의 총본산
아름다운



모스크
현재의



이스탄불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이스탄불은 B.C 7세기 초에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였던 메가라의 비자스가 세운 도시로, 그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자스는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서 받은 신탁에 따라, 골든혼과 마르마라 해 사이의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내민 곶의 동쪽 끝, 지금의 토프카피 궁전이 있는 언덕에 식민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비잔티움은 B.C 512년 다리우스 1세에게 점령되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의 도시동맹에 가입하였으나 B.C 5세기에 그리스의 2대 도시 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이 도시의 영유권을 놓고 싸움을 벌이면서 이반(離反)을 거듭했다. 어업이 성하고 또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비잔티움은 아테네로부터 보스포루스 해협 통과세의 징수권을 부여받았고, 통상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번영하였다. B.C 4세기 후반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 B.C 336-B.C 323)이 이 도시를 정복했으며, 그가 죽은 후인 B.C 270년경 그리스 여러 도시와 화폐동맹을 체결하였고, 그 후 동방으로 영토를 넓혀 가던 로마가 지배했다. 로마 공화정 치하에서는 자유도시였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기간(69-79) 동안에는 로마의 직접통치를 받았다. 로마 제국 때에도 해협세가 징수되었으며, 그 뒤 로마는 비잔티움의 독립을 인정하고 동맹을 맺였지만, 비잔티움이 비동맹국인 니겔을 돕자,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는 196년에 비잔티움을 공격해 파괴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로마 제국의 통상무역에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곧 부흥되었다. 비잔티움을 손에 넣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시가지를 지금의 갈라타 다리 근처까지 서쪽으로 확장하고, 새롭게 성벽을 쌓았으며, 그 후에는 당시의 왕조 명에 따라 '안토니니아'라 호칭되어졌다.

그 뒤 324년에 로마 제국의 동쪽을 지배하던 황제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고 제국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가 330년에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이 곳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폴리스(영어명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2년과 323년에 리키니우스 황제와 전쟁을 치를 때 이미,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입지 조건 덕분에 메가라의 식민 도시로서 견고한 방비를 자랑하던 이 곳에 군사 기지를 두고 있었다. 이 같은 전략은 군사적으로 불안한 정세에 놓여있던 발칸 반도 남부에서 큰 효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군사상의 필요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은 그 뒤 오랫동안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가 되었다.

정치적.군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새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교역의 확장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다 주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 있으며, 또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해상 교역로의 요충지로 동서 교역로가 교차하는 콘스탄티노플은, 물자를 유통하는 데 있어 로마보다 더 적합한 도시였다. 교역으로 부를 쌓은 콘스탄티노플은 옛 수도 로마보다 화려한 '새로운 로마'로 변모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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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로마'의 도시계획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세운 성벽 바깥쪽에 새로운 성벽을 쌓는 한편, 토프카피 궁전이 세워진 동쪽에 새 궁전을 지었다. 그리고 그 남쪽에는 아우구스티누스 포룸(광장), 원로원, 신전 등을 잇달아 건설했다. 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의 전차 경기장도 확장해, 330년 5월에 이 곳에서 수도 이전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졌다.

313년에 발포한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이 지역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그리스 신들의 상징물인 조각상이나 신전 등이 그리스도교의 상징물인 조각상이나 성당 등과 빠른 속도로 융합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도시로 완성시켜 갔다.

콘스탄티노플은 전형적인 로마의 도시계획에 따라 직선으로 뻗은 대로, 이와 직각으로 교차하는 도로, 그리고 두 도로의 교차점에 만들어진 포룸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건설되었다. 길이가 5km에 이르는 당시의 대로는 오늘날의 디완로, 예니체리렐로, 오르두로와 같이 구역에 따라 그 이름이 달랐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 시대의 도로나 건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옛 시가지 중앙에 있는 2개의 언덕을 잇는 발렌스 황제(재위 364-378) 때의 수도교(水道橋)가,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공사를 통해 로마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발렌스 황제의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390년 무렵에, 이 도시 서쪽 끝에 개선문인 '황금문'을 건설했다. 조각으로 장식된 이 개선문은 당시에는 이름 그대로 황금빛으로 빛났다고 한다. 그 무렵 전차 경기장에는, 스피나라고 하는 중앙 구분대 중심에 지난날 이집트에서 운반해 온 오벨리스크가 놓여 있었다. 오늘날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라고 알려진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이집트 영토를 최대로 넓혔던 투트모세 3세(재위 B.C 1490 경-B.C 1436 경)가 카르나크 신전에 세웠던 것이다. 오벨리스크의 대리석 받침대 4면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전차경기를 구경하는 모습과 승리자에게 관을 씌워 주는 모습 등이 부조로 장식되었다. 또 시가지 중앙에는 테오도시우스 포룸이 만들어지고, 황제의 조각상으로 장식한 원주도 세워졌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제국을 둘로 나누어 두 아들에게 물려줌으로써,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이 때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된 사람이 아르카디우스 황제(재위 395-408)였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포룸 남서쪽에 아르카디우스 포룸을 새롭게 건설했다. 또 그의 아내 에우독시아는 새 궁전과 몇 개의 욕장을 만들었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8-450)는 대학을 세우고, 시가지를 서쪽으로 더욱 넓혀 새로운 성벽을 쌓았다. 그러나 413년에 완성된 성벽은 447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마침 당시는 중앙 유럽을 지배하던 훈족의 아틸라 대왕이 발칸반도로 침입해 콘스탄티노플을 노리고 있던 때라, 테오도시우스 2세는 급히 무너진 성벽을 보강·수리하는 한편, 바깥쪽에 또 하나의 성벽을, 그리고 다시 그 바깥쪽에 성벽과 해자(垓字)를 건설함으로써 1년 만에 견고한 삼중 방위 시설이 완성되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총길이 6.65km의 이 성벽은 오늘날 서서히 붕괴되고 있지만, 아틸라 대왕의 공격을 물리치고, 15세기 오스만 제국에게 공략당하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적의 공격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보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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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로폴리스로의 발전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의 치세 때인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은 황금시대를 맞았다. 당시 인구가 50만에 이르렀던 콘스탄티노플은, 황제의 보호와 원조를 받으며 학자와 예술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덕분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제국의 수도로서 그 위치를 굳혔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지난날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대제국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그에 걸맞은 도시로 발전시킴으로써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이 시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건축과 미술 분야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탄생되었고, 그 방법과 양식은 제국 전체에 퍼졌다. 특히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비잔티움 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532년에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1주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무정부 상태에 빠뜨린 '니카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反)황제파의 원로원 의원까지 휘말려든 대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하기아 소피아와 하기아 이레네 등 이때 파괴된 성당을 복구하고 개축하는 한편, 시가지를 서쪽으로 더욱 확장했다. 이 때 호화로운 새 궁전도 지어졌지만, 지금은 일부 유적만이 가까스로 남아있을 뿐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은 지중해 서쪽 연안 일대와 북아프리카까지 그 세력을 뻗쳤다. 그러나 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의 핵심지역에서는 민족적인 반항이 뿌리 깊게 남아있어, 제국의 지배에 대한 이들 민족의 적개심도 점점 깊어져 갔다. 그러다가 636년 야르무크의 싸움에서 참패한 이후 이슬람 세력에게 이들 지역을 모두 상실하였고, 드디어 674-678년에는 이슬람 군이 콘스탄티노플 부근까지 쳐들어왔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계승자인 아브 아이유브 안사리가 이끄는 군대에게 포위당했던 콘스탄티노플은, 신병기인 '그리스의 불' 덕분에 이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기간 중에 죽은 안사리의 무덤은 골든혼 옆에 마련되었는데, 15세기 중반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모스크가 세워졌다. 이 곳은 지금도 이슬람교도의 순례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8세기에 일어난 성상파괴논쟁(아이코노클레즘)은 비잔티움 제국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발전했다. 성상이나 성유물에 대한 신앙을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성상 금지론자들은 모든 성상 표현을 꺼렸다. 성상파괴논쟁은 제국 영토 내의 카톨릭교도를 그리스 정교회로 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726년 황제 레오 3세(재위 717-741)가 성상숭배금지를 주장하자, 그 뒤 100년이 넘도록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성화,성상 등 많은 작품들이 파괴되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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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전성기



결국 성상파괴논쟁은 843년에 미카일 3세(재위 842-867)의 모후인 테오도라가 성상부활을 선언함으로써 성상비호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9세기 후반에 바실리우스 1세(재위 867-886)가 왕위에 올라 마케도니아 왕조를 열자, 제국의 영토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최대로 확대되었다. 이 때 제국의 수도가 재정비되는 한편, 평면이 십자가인 작은 성당이 많이 지어졌다. 이러한 양식은 발칸반도 전체로 퍼져, 새로 짓는 건축물들의 모델이 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바실리우스 1세가 거느리던 기술자들에 의해 모자이크로 새롭게 장식되었다.

1054년에 성상파괴논쟁을 계기로 대립의 골이 깊어졌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가 결정적으로 분리되어, 서쪽의 로마교회는 카톨릭을,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의 여러 교회는 정교를 신봉하며 독자적인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뒤 이탈리아의 도시 상인들인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이 지중해 무역에 진출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상업과 재정은 그들의 지배를 받아 상업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과 분리되어 있던 이 도시에서 교역상 갖가지 특권을 누리는 등 콘스탄티노플의 정치력은 시간이 갈수록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사회구조도 변화되는 등 도시의 모습이 베네치아 풍으로 바뀌었다. 1203년 6월 제4차 십자군이 종교적인 사명을 망각한 채, 콘스탄티노플의 부를 빼앗기 위해 몰려와 이미 쇠퇴한 이 도시를 포위했다. 10개월 뒤인 1204년 4월 12일 이 곳을 점령한 십자군은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한 뒤, 플랑드르의 백작 보두앵을 황제로 추대해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제국을 세우고 약 60년 동안 지배했다.

일찍이 절대권력을 자랑하며 번영했던 비잔티움 제국은 서서히 군소국가로 해체되었고, 이 과정에서 교역으로 다졌던 경제 주도권을 잃었다. 수도에서 쫓겨난 뒤, 콘스탄티노플의 탈환을 노리던 니케아의 미카일 8세는 1259년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를 열었다. 2년 뒤 미카일 8세는 라틴제국군의 허를 찔러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았다. 수도를 되찾음과 동시에 콘스탄티노플에는 새로운 예술양식이 발전해,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계상랑(階上廊)의 모자이크와 코라 수도원의 벽화가 그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특히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남쪽의 계상랑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데이시스'(請願)는 비잔티움 미술의 최고 걸작이다. 제4차 십자군에 점령당하기 전후의 작품으로 짐작되는 이 모자이크에는, 심판자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에 모든 인류를 대신해 하느님에게 용서를 비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서서히 다가오는 멸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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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수도



15세기에 접어들자, 새로운 세력이 힘을 뻗치기 시작했다. 일찍이 비잔티움령이었던 아나톨리아(소아시아)를 비롯해, 발칸지역 일대를 정복한 투르크족의 오스만 제국이 바로 그들이다. 오스만 제국은 2개월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해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이 격렬한 공방전을 지휘한 사람은 메메드 2세(재위 1451-1481)로, 그는 이를 계기로 '파티(정복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메메드 2세는 곧바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가서, 메카 방향을 향해 예배를 올렸다. 이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으며, 그리스어로 '도시로'를 뜻하는 '이스틴폴린'에서 유래한 이스탄불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1000년이 넘도록 번영했던 옛 모습을 이미 잃어버린 이 도시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되살아나, 이슬람교도인 투르크인에 의해 독자적인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지난날 포룸과 대로를 중심으로 계획되었던 시내의 도로는 짐을 운반하는 동물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졌고,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나 포룸 주변에는 위층이 1층 외벽보다 튀어나온 독특한 외관을 지닌 투르크의 목조가옥이 지어졌다. 이 유적은 20세기 말에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술탄이라 불리는 오스만 제국의 수장 메메드 2세는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 뒤에도 이스탄불에 남아있던 시민들에게 그들의 신앙과 법을 지킬 수 있도록 허가하는 한편, 제국 각지에서 이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 마니피코(비호자)'라고 불리는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때인 16세기에 새로운 도시의 건축활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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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수도의 장려한 건축물



중세의 철옹성으로 널리 알려졌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마르마라 해에서 골든혼까지는 1겹으로 이루어졌지만, 육지인 서쪽은 3겹으로 이루어져 총길이가 6.65km나 되었다. 비잔티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서쪽 성벽의 내벽과 외벽에는 각각 96기의 탑과 크고 작은 문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는 이 도시를 점령한 뒤,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고 몇몇 성문을 벽으로 막아, 오늘날 이에디클레, 곧 '7기의 탑'이라고 불리는 남쪽 끝 부분을 완성시켰다. 메메드 2세는 테오도시우스 2세 때 지어진 성벽 안쪽에 북쪽탑, 남쪽탑, 동쪽탑을 세우고, 각 탑과 성벽을 연결하는 오각형 성채를 건설했다. 이에디클레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 감옥이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가 건설한 개선문인 황금문도 이 이에디클레의 일부분으로 편입되었다. 성벽북쪽에 있는 에디르네 문은, 유럽으로 진출한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략하는 근거지로 삼았던 수도 에디르네로 통하는 에디르네 가도의 출발점이다. 이 문은 또한 메메드 2세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곳이기도 하다.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내벽과 외벽 사이에 지어진 콘스탄티누스 궁전(텍푸르 궁전,콘스탄티누스 대제 사후 1,000년경 건립)이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제국 시대의 궁전 건축물이다. 3층 벽 정면에 각각 디자인이 다른 아치를 설치하고, 붉은 벽돌과 다채로운 색깔의 대리석으로 표현한 기하학 무늬로 외벽을 장식하는 비잔티움 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중세 이후, 이슬람교도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뒤에도 이 곳에는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교 성당이 남아있다. 이 건축물들은 오리엔트 그리스도교 건축과 미술의 발전과정을 나타내는 유적들이다. 에디르네 문 근처에 있는 카리에 자미 모스크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카리에 자미 모스크의 원형(原形)은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설한 코라 수도원으로, 몇 차례에 걸쳐 재건과 복원이 이루어졌다. 그 사이에 내부는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14세기에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이 건물은, 16세기 초인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2세(재위 1481-1512) 때 모스크로 바뀌었다. 토프카피 궁전 부지 내에 위용을 자랑하고 서 있는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4세기에 건립되어 '니카의 반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다시 지은 것이다. 360년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 완성되기 전까지 주교좌가 놓인 대성당이었으나,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뒤로는 오스만 군대의 병기고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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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2년에 일어난 '니카의 반란'으로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함께 불에 타버린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터에 모든 자재를 동원해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건설했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였다. 재건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축성식은 537년에 거행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자마자,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상징이자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군림한 이 대성당을 콘스탄티노플 최초의 모스크로 바꾸었다. 모스크로 개조된 대성당에는 미나레트와 마드라사가 설치되었다. 또 내부의 둥근 천장이나 벽면을 뒤덮었던 황금빛 모자이크 일부가 하얗게 덧칠되어 [코란]의 문구가 씌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자신을 신이 지상의 군주로 인정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의 신앙심으로 탄생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 오스만 제국의 점령과 함께 가장 먼저 모스크로 바뀐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터키의 술탄제를 폐지한 케말 아타튀르크는 1934년에 아야 소피아 모스크를 종교와는 관계없는 박물관으로 만들었지만, 오늘날 이슬람교도 사이에는 다시 모스크로 되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A.D 324년
콘스탄티노플 건설 시작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

A.D 330년
콘스탄티노플 완공

A.D 343년
고트 족 울필라스가 주교에 임명됨. 고트 족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 족들이 그리스도교 화됨(아리우스 파)

A.D 378년
고트 족이 아드리아노플에서 로마 군대를 전멸시킴(발렌스 황제 전사)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제국을 분할함. 아르카디우스가 동쪽을 얻고, 호노리우스가 서쪽을 얻음

A.D 425년
콘스탄티노플 대학 창립

A.D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

A.D 438년
[테오도시우스 법전] 발간

A.D 451년
칼케돈 공의회

A.D 457년
레오 1세가 총대주교의 손으로 대관한 최초의 황제가 됨

A.D 482년
제논의 [헤노티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30년 간의 분열(시스마)이 시작됨

A.D 493년
동고트 족의 테오도리쿠스가 이탈리아의 왕이 됨

A.D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공포. 아테네의 아카데미아 폐쇄

A.D 53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니카의 폭동 발발. 진압 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재건 시작

A.D 533년
[학설휘찬(판텍타이)] 발간

A.D 533-534년
북아프리카에서 반달 왕국 멸망

A.D 535-555년
이탈리아에서 동고트 왕국 멸망

A.D 56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호스로 1세의 평화협정

A.D 582년 이후
아바르 족과 슬라브족이 발칸반도에 침입함.(펠로폰네소스까지)




A.D 611-619년
페르시아가 서 아시아의 대부분(614년 예루살렘)과 이집트를 정복함

A.D 626년
아바르 족과 페르시아 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아바르 족이 승리함

A.D 627년
헤라클리우스가 니네베 근처에서 페르시아에 승리함. 옛 비잔티움 영토를 전부 반환받음

A.D 636년
아랍 인들이 야르무크 강에서 비잔티움에 승리함

A.D 638년
칼리프 우마르가 예루살렘을 정복함

A.D 640년
아랍 인들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정복을 시작함

A.D 655년
아랍 인들과 비잔티움인들 사이에 최초의 해전이 벌어짐(아랍인들이 승리함)

A.D 678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아랍 함대의 최초의 공격이 실패함('그리스의 불')

A.D 680년
불가르 족이 비잔티움에 승리한 후 도나우 강 하류의 남쪽 지역으로 이주함

A.D 697년
아랍 인들이 비잔티움으로부터 카르타고를 빼앗음

A.D 718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아랍 함대의 두번째 공격이 실패함

A.D 730년
성상 파괴 시작

A.D 751년
롬바르드 족이 비잔티움의 라벤나 총독부를 정복함

A.D 787년
니케아 공의회. 성상 적대 운동에 유죄판결을 내림

A.D 805년
파트라스 부근에서 슬라브 족에게 승리함. 펠로폰네소스에서 비잔티움의 세력이 재건됨

A.D 811년
불가리아의 왕 크룸이 승리하고 니케포루스 1세를 살해함

A.D 826년
아랍 인들이 비잔티움으로부터 크레타를 빼앗음

A.D 827년 이후
아랍 인들이 비잔티움령 시칠리아를 정복함

A.D 843년
성상 숭배가 엄숙하게 재 수립됨. 성상 논쟁이 최종적으로 종결됨

A.D 860년 이후
비잔티움과 러시아 사이에 최초의 외교관계가 수립됨

A.D 863년
'슬라브 족의 사도' 콘스탄티누스-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가 모라비아에서 선교함

A.D 864년
불가리아의 그리스도교 화

A.D 867년
총대주교 포티우스가 교황 니콜라우스 1세를 파문함

A.D 896년
불가리아의 왕 시메온이 불가로피콘에서 비잔티움에 승리함

A.D 902년
아랍 인들이 시칠리아의 마지막 비잔티움 거점인 타오르니미나를 정복함

A.D 904년
아랍 인들이 테살로니카를 약탈함

A.D 944년
비잔티움이 아랍 인들로부터 에데사를 탈환함

A.D 961년
비잔티움이 크레타를 재 정복함

A.D 968년
니케포루스 2세 포카스가 시리아를 정복함

A.D 975년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가 팔레스티나까지 진격함

A.D 988년
키예프 공국의 그리스도교 화

A.D 1014년
'불가르 족의 학살자' 바실리우스 2세가 차르 사무엘(1010년 사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킴

A.D 1054년
동방과 서방의 교회분열

A.D 1071년
셀주크 투르크 인들이 만지케르트에서 로마누스 4세를 격퇴함

로베스 기스카르가 바리를 정복함. 비잔티움이 남부 이탈리아 전체를 상실함

A.D 1077년
셀주크 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함

A.D 1080년
쉴레이만 1세가 룸 술탄국(수도 이코니온)을 창건함

A.D 1081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함. 디라키온을 정복하고 마케도니아와 테살로니카까지 진격함

A.D 1082년
비잔티움과 베네치아의 통상조약. 동방에서 베네치아의 상업세력이 흥기하기 시작함

A.D 1091년
비잔티움과 쿠마나족이 레부니움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의 군대를 절멸시킴

A.D 1096-99년
1차 십자군 원정. 니케아 점령(1097년), 안티오키아 점령(1098년), 예루살렘 점령(1099년)

A.D 1122년
페체네그 족의 종말

A.D 1147-49년
제2차 십자군 원정. 소아시아에서 실패함

A.D 1185년
테살로니카가 노르만족의 손에 떨어지고 약탈당함. 모시노폴리스에서 패배한 노르만족이 비잔티움에서 철수함

A.D 1186년
불가리아가 비잔티움에서 떨어져 나감. 발칸에서 비잔티움의 우세가 영원히 사라짐

A.D 1187년
술탄 살라후-앗-딘이 하틴(갈릴리 소재)에서 라틴인 병력에 승리함

A.D 1189-92년
제3차 십자군 원정. 성과는 없음. 비잔티움은 뤼지낭 가문에게 키프로스를 상실함

A.D 1195년
비잔티움이 독일 황제 하인리히 6세(1197년 사망)에게 조공을 지불함

A.D 120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1204년 콘스탄티노플 점령. 라틴 제국 건설




A.D 1205년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이 아드리아노플에서 라틴 인들에게 승리함. 수도를 니케아로 하는 새로운 비잔티움 제국이 탄생함

A.D 1224년
에피루스의 테오도루스 앙겔루스가 테살로니카의 라틴 왕국을 정복함

A.D 1225년
니케아의 요한네스 바티체스가 라틴인들로부터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획득함

A.D 1261년
미카엘 8세와 제노바 사이에 님파히온 조약이 체결됨. 동방에서 제노바 세력이 건설됨

미카엘 8세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함. 라틴 제국의 종말

기욤 2세 빌라르두앵이 미스트라를 비롯하여 펠로폰네소스의 요새들을 미카일 8세에게 넘겨주고 떠남

A.D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학살사건으로 앙주 가의 카를로스의 비잔티움 공격이 수포로 돌아감

A.D 1300년 무렵
소아시아의 대부분이 오스만 투르크 인들에게 함락됨. 1326년 부르사가 그 수도가 됨

A.D 1311년
카탈루냐 동지회가 프랑스 기사들에게 케피소스(보이오티아)에서 승리함. 아테네가 70년 동안 카탈루냐 인들에게 할양됨

A.D 1330년
세르비아가 벨부지드에서 불가리아에게 승리함. 세르비아의 우세가 시작됨(1331-55년 스테판 두샨)

A.D 1352년
오스만 인들이 유럽지역을 침략함

A.D 1365년
아드리아노플이 오스만 인들의 수도가 됨

A.D 1371년
마리차 강 전투에서 오스만 인들이 승리함

A.D 1387년
오스만 인들이 테살로니카를 정복함

A.D 1389년
코소보 폴례 전투. 세르비아가 오스만 인들에게 패배함

A.D 1393년
오스만 인들이 불가리아를 항복시킴

A.D 1396년
오스만 인들이 니코폴리스에서 그리스도 교도 군대를 섬멸함

A.D 1402년
앙카라 전투. 티무르가 바예지드에게 승리함

A.D 1430년
테살로니카가 궁극적으로 정복당함

A.D 1432년
라틴계 아카이아 공국의 종말. 펠로폰네소스의 대부분이 다시 비잔티움 지배하에 들어감

A.D 1439년
피렌체에서 로마 교회와 비잔티움 교회 사이에 통합이 포고됨

A.D 1444년
무라드 2세가 바르나에서 그리스도 교도 군대를 격퇴함

A.D 1448년
무라드 2세가 코소보 폴례에서 야노슈 코르비누스 후냐디에게 승리함

A.D 1453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 비잔티움 제국의 종말

A.D 1456년
아테네가 오스만 인들의 손에 함락됨

A.D 1460년
오스만 인들이 미스트라 시와 함께 펠로폰네소스를 점령함

A.D 1464년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잔존세력이었던 트레비존드 제국이 오스만 인들에게 정복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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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RTW]ROM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7.23 황제 연대기는 오전에 올릴꼐요.... 즐감하세요
  • 작성자아틸라 | 작성시간 07.07.23 잘 읽었습니다. ㅋ
  • 작성자서양사좋아함 | 작성시간 07.07.23 숙제로 조사하고 있었는데 도움이 되었내요 ㅋ;;ㄳ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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