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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이슬람 예술에 대한 간략한 안내-건축(2)

작성자hyhn217|작성시간07.11.17|조회수895 목록 댓글 0



 압바스조 칼리프들은 자신들의 궁전을 가지고 싶어했다. 그들은 일단 우마이야 왕조의 궁전을 눈에 뵈는 대로 몽땅 때려부수었고, 이미 죽어버린 우마이야 칼리프들도 죄다 끌어내서 매질을 해버렸다. 한술더떠 그들은 자신의 전임자의 궁전들도 신나게 때려부수다가 결국에는 몽골군에 의해서 박살이 나고 말았다.

궁전뿐만 아니라 이들은 도시도 자기것만을 가지고 싶어했고, 그렇게 해서 지어진 것이 메디나트 알 살람-평화의 도시(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또는 바그다드(하늘이 준 곳)이다. 높이가 무려 '40m'라는 두겹성벽에 네 개의 대문이 감싸던 원형도시로, 원의 중심에는 대모스크가 있었고 모스크의 키블라 방향에 두 개의 돔으로 된 궁전이 있었다. 구조가 이런지라 사람들이 모스크를 가기 위해서는 궁전을 지나야 했는데, 이게 못마땅했던 칼리프들은 궁전을 티그리스 강 연안으로 옮겨버린다. 이렇게 바그다드의 시가지는 둘로 나뉘게 된다. 궁전이 원체 큰지라 4000명의 백인내시, 7000명의 흑인내시, 4000명의 백인노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수행원만 15000명이다. 물론 현실주의적인 면을 중시하는 이븐 할둔이 이 글을 봤다면 '낚이는 놈이 ㅄ' 이라고 했겠지만 말이다.

칼리프들이 편집증 환자마냥 연신 궁전을 때려부수어도 원체 지은게 많은지라 포화상태에 빠지고는 했다. 11세기 바그다드를 통치한 셀주크의 술탄 투그릴 벡은 자신의 궁전을 짓기 위해 강 연안의 궁전 '170개'를 철거하라고 명했다. 물론 저 170개의 궁전이 자금성이나 경복궁같은 궁전 생각하면 곤란하다. 917년 칼리프 알 무크타디르를 방문한 비잔티움 사절은 칼리프 한 사람 만나자고 궁전을 23개를 통과하고 3만 8천장의 카펫과 2만 2천장의 커튼을 지나쳐야만 했다. 게다가 인공 연못에 기계로 된 새들까지 있었다나. 이런 상황에서 둘의 관계가 좋아질리가 없다. 칼리프는 기다리느라 지치고, 사절단은 걷느라 지치고.

자신들이 끌어온 노예들이 자신에게 칼끝을 돌리자 그제야 자신들의 멍청함을 깨달은 칼리프들은 바그다드를 버리고 근처의 사마라로 도망가버렸다. 거기서도 엄청난 수의 궁전과 도시를 건설했다. 현재 이 도시는 완전히 폐허만 남은 유령의 도시가 되어버렸지만, 30개의 궁전, 6314개의 건물 폐허는 바그다드의 칼리프들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맘먹고 돈을 처들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었다.


<사마라의 알 무타와킬 모스크>

칼리프들은 사마라에도 모스크를 지었다. 넓이는 무려 3만 8000제곱미터. 건축물 자체는 우마이야 왕조의 양식으로, 회랑이 안뜰을 감싸고 있고 미나렛이 회랑 바깥쪽 입구 가까이 있는 형태이다. 세계제국 압바스조 답게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내부장식,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이슬람식 자기, 인도의 영향을 받은 창문 아치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죄다 박살이 나버려서 비전문가인 나로써는 흙더미밖에 안보인다.)그러나 주목할 만한것은 바로 저 미나렛이다.



<사마라 모스크의 미나렛>

나선형으로 빙빙 올라간 형태가 돋보이는 이 탑은 꽤나 높이가 높다. 거의 높이가 50m 가량 된다. 문제는 이 위에 사람이 올라가야 한다는 것. 걸어서 올라갔다가는 한세월 걸리니 말을 타고 올라갔다고 한다.

미나렛의 원래 목적은 예배 시간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미나렛의 높이가 대책없어지면 아름답고 높은 목소리로 예배 시간을 알려야 할 무아진은 아잔이 아니라 공포로 인해 질려버린 목소리로 절규했음에 틀림없다. 결국 나중에 갈수록 미나렛이 대책없어짐에 따라 아잔은 다른 곳에서 하게 이르렀다.

무아진의 공포에 질린 절규마냥 압바스조는 결국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내렸다. 몽골군의 채찍이 닥치기 전에 이미 압바스조의 영향력은 무너저버렸고, 지방의 군주들은 각자의 세력을 획득했다.

가장 대표적인 세력은 저 멀리 이베리아 반도의 후우마이야 왕조이다. 우마이야 가문의 생존자 하나가 건너가 세운 이 왕조는 압바스조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이 왕조의 수도인 코르도바는 바그다드에 비할 정도로 크고 부유한 도시였고, 건축물 역시 바그다드 못지 않았다.



<코르도바의 대모스크>

후우마이야 왕조의 건국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에 의해 최초로 건설된 이 모스크는 왕조가 끝장날때까지 계속 개조, 확장이 이루어졌고, 아예 레콩키스타가 끝난 이후에도 개조(모스크를 교회로 바꾸었다)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아치를 말굽 양식이라고 부르는데, 무슬림 치하 이베리아 반도의 특색이다. 위쪽의 아치를 이루는 기둥과 아래쪽의 아치를 버티는 기둥의 재질이 서로 다른것은 서고트족과 로마시대의 짧은 기둥을 재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좋게 보면 자원재활용, 나쁘게 보면 문화재 파괴다. 문화재를 파괴해서 문화재를 지었으니 무죄라고도 볼 수 있으려나.



<코르도바의 대모스크. 내부>
현재의 넓이는 23400제곱미터, 기둥들이 19줄 쭉 늘어져있으며, 1523년 카를 5세의 명에 의해 안쪽에 있는 기둥 63개가 치워지고 성당이 들어섰다. 카를 5세는 지어진 성당을 보고 '전에는 특색 있었는데 이제는 그 특색이 사라져버렸다'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당시 유행에 따라 모스크 주위에 미나렛을 지었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이 사람은 후우마이야조의 전성기를 이끈 칼리프이고, 화려한 건물도 엄청 지었건만 현재까지 남은게 별로 없다.


<미흐랍>

미흐랍은 그야말로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어서 지었다. 칼리프 알 하캄 2세는 비잔티움의 황제에게서 받은 유리와 금 1만 6000kg을 녹여서 높이가 7.85m에 달하는 미흐랍을 지었다. 다만 문제라면 겉모습에 너무 중시한 나머지 미흐랍의 최대 목적-예배 방향을 인도-를 수행하지 못했다. 기술자들이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의 모스크에 집착한 나머지 키블라를 다마스쿠스와 똑같이 남쪽으로 잡아버린 것이다. 당연히 시리아와 스페인에서의 키블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후우마이야 왕조의 화려한 통치가 끝나고, 한참의 혼란기를 겪은 뒤 이베리아 반도는 베르베르족 출신의 알모라비드나 알모하드 왕조가 들어섰다. 이 왕조들은 혜성같이 등장해서 운석같이 추락하고 말았고, 그 뒤를 마지막 이베리아의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가 들어섰다. 이 왕조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 친구들은 이베리아에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을 하나 남기고 사라진다.


<알함브라 궁전>

나스르 왕조의 창시자 무함마드 1세부터 시작, 후대의 유수프 1세, 무함마드 5세에 들어서야 비로소 완공되는 이 건물은 겉모습은 그냥 그저 그렇다. 그냥 언덕 위의 불그스름한 성채이다. 뭐, 성채 면에서 보자면 충분히 두터운 벽에 22개의 탑들로 튼튼하게 방어가 되어 있으니 훌륭한 성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알함브라의 진면목은 내부에 있다.

법의 문, 일곱 하늘의 문, 철의 문, 무기의 문 네 개의 정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궁전이 나온다. 내부는 왕을 상징하는 황금색, 힘을 상징하는 붉은색, 천국을 상징하는 녹색, 천국에 들어가고픈 마음을 표현한 푸른색으로 채색되었으며, 소위 무카르나스라고 불리는 양식으로 지붕을 장식했다.

 



<아벤세라헤스의 방. 소위 종유석 양식>

무카르나스란 아래쪽으로부터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 뒤, 위쪽에서 남은 부분을 또 파고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결국 맨 위에서 만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원추를 반으로 잘라놓고 안쪽을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파낸 것같은 효과를 보게 된다.



<사자의 궁. 정원에 있는 12사자가 새겨진 분수>

알함브라는 안과 밖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안뜰에 있는 분수에서 흘러나온 물이 실내로 흐르며, 안뜰에 들어온 햇빛이 실내를 비춘다. 또한 시리아나 북아프리카 등지와는 달리 목재가 풍부했기에, 도자기 타일로 내부를 치장하는 대신 나무 조각으로 내부나 천장등을 장식했으며, 상아를 같이 사용하기도 했다.

이집트에는 파티마 왕조가 들어섰다. 파티마 왕조는 이전의 푸스타트 근처에 새로이 '승리의 도시'-우리는 이를 카이로라고 부른다-를 지었다. 이 카이로에 최초로 지은 건축물이 바로 알 아즈하르 모스크이다.




<알 아즈하르 모스크. 우리가 아는 알 아즈하르 대학과 이어져있다>

이슬람 세계에서 모스크는 단순히 예배만 하는 그런 장소가 아니다.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또한 오만가지 출처불명의 소문이 퍼져나가기도 하며, 공부도 하는 곳이다. 다만 싸움질은 금지다. 알 아즈하르 모스크는 그러한 예를 보여준다. 모스크에 대학(옛날에는 마드라사-신학교)가 붙어있는 것이다. 모스크의 양식 자체는 우리가 위에서 보아왔던 형태와 비슷하다.

파티마조의 뒤를 이은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는 십자군하고 싸우느라 바뻐서,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뻐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는 맘루크들한테 학살당하느라 바뻐서 이렇다할 건축물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 눈에 띄는 건물은 이 시대를 건너 뛰어 엄격한 군사문화가 지배한 맘루크조에서 재등장한다.

맘루크조의 술탄은 세습이라기보다는 실력의 의한 선출이었다. 듣기에는 매우 좋아보인다. 실력이 있는 사람이 지배자가 된다. 이 매우 합리적인 방식이다. 근데 누가 실력이 있는 사람인가?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칼싸움을 잘하는 사람? 샤리아에 능한 사람? 아니면 그냥 돈많은 사람? 서로가 술탄을 하겠다고 싸움질을 해대는 판이니 술탄의 권위가 약해질 수 밖에 없고, 게다가 죄다 시작은 노예인지라(맘루크조의 지배계층은 주로 노예출신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맘루크(노예병사)이고)술탄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 따위가 있을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술탄은 자신의 권위를 어떻게든 세워야했고, 또한 자신은 끝끝내 인정하려 들지 않았겠지만얼마안가 수의에 싸여 실려나갈 몸이니 무덤이 필요했다. 이런 목적에서 세워진 맘루크조의 건물중 가장 인상 깊은 건축물이 바로 술탄 하산의 모스크이다.



<술탄 하산의 모스크. 사진 중앙에 있는 탑 하나짜리 모스크다>

맘루크조의 수도 카이로는(이전에는 푸스타트) 일찍부터 도시화가 빨리 진행되었고, 인구도 많이 살았다. 이런 도시에 푸른색 타일로 건물을 덮었다가는 확 튀어버릴 수 있었지만 맘루크 건축가들은 확 튀는 대신 주위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석회암으로 건물의 외벽을 덮었다.


<술탄 하산 모스크의 입구에 있는 무카르나스. 옆에 있는 건 술탄 카이트베이 모스크의 미나렛이다>

우리가 알함브라에서 봤던 무카르나스는 여기에서도 사용되었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이슬람 세계는 폐쇄적인 세계가 아니었기에, 어느 한쪽에서 훌륭한 건축기법, 화법이 나타나면 바로 우르르 달려가 베껴오거나 모방하거나 심할때는 납치해오는 경우가 많았다. 무카르나스는 스페인, 이집트, 그리고 페르시아등지에서도 나타난다.

알 아즈하르처럼 이 모스크도 모스크 기능만 한게 아니다. 자신을 위한 영묘, 숙박시설, 물배급시설, 병원, 초급학교 등등의 복합건물이 같이 딸려 들어왔다. 이러한 시설의 운영비는 국고에서 대거나, 국가 소유 사업장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충당했다. 입구로 들어가면 네 개의 이완이 있는 안마당이 나온다. 키블라가 방을 제외한 다른 방은 수니파의 네 학파 모두에게 제공되었다.

이완이란 전통 페르시아의 양식이다. 문 위에 커다란 아치형이 그려진 공간을 말하는데, 밑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마드라사에는 506명의 학생들, 120명의 쿠란 암송자들이 있었다. 다만 이 모스크를 건설하던 중 미나렛 한 개가 완공 직후 무너져 내려 근처 고아원을 덮치는 바람에 300여명이 죽고 말았다. 몇달 뒤 술탄은 폐위당했고, 그의 시체는 정작 이곳에 묻히지 못했다. 그의 어린 자식들만 묻히고 말았다.

맘루크 귀족들도 화려한 저택에서 살았다. 1330년대 술탄 안 나시르 무함마드 밑의 고위 아미르인 바슈타크의 저택은 5층짜리였고, 1층은 상가로 빌려주었다.



<다양한 미나렛>

미나렛도 역시 모양이 변화해왔다. 처음 다마스쿠스나 카이라완에서 보이는 직사각형의 미나렛에서 사마라의 원통형 미나렛으로 변화했다. 가면 갈수록 사람이 올라가는 일이 적어짐에 따라 미나렛은 날렵해졌고, 정작 사람이 올라갈 일이 드물어진 꼭대기의 발코니 장식도 화려해졌다. 오스만의 경우 날렵하게 뻗은 미나렛에 지붕이 없는 발코니가 붙었지만, 페르시아에서는 탑 끝에 지붕이 있는 발코니가 붙었으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인도도 그러했다.

압바스조의 힘이 약해지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사만조라는 왕조가 일어났다. 사만조는 투르크의 이슬람화에 크게 공헌한 왕조인데 여기서는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원래 이슬람교에서는 성자에 대한 숭배, 그 성자의 무덤에 대한 숭배는 금지했다. 인간은 직접 신을 만나야 하므로, 그 중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숭배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 정작 그렇게 계시한 무함마드의 무덤도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무함마드의 무덤이 이꼴이 났는데, 그렇다면 술탄이나 왕들의 무덤은 오죽할까?


 

<사만조의 영묘. 부하라에 있다>

사만조는 자신들의 가족 영묘를 지었다. 정육면체에 건물에 전 이슬람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돔을 얹었고, 벽돌 장식을 교묘하게 새김으로써 그림자가 내는 효과를 강조했다.

그러나 사만조의 정갈한 무덤도 이 무덤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군바디 카부스. 이거 무덤이다>

지야르 왕조는 이란 지역의 흔해빠진 별볼일 없는 왕조였다. 그 수많은 잡다한 왕조 중 지야르 왕조의 군주 카부스 이븐 우슘기르는 이런 독특한 무덤을 지음으로써 그와 그의 왕조의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들었다. 무함마드가 성자의 무덤에 대한 숭배를 금지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수많은 군주들이 어떻게든 그 계시를 어겨보려고 갖가지 수를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덤(이라고 불러야 할지 자꾸 헷갈린다) 자체의 높이는 52m로 꽤 높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쟁이 아저씨 카부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언덕을 10m 더 높임으로써 자신의 무덤을 더 높게 보이게 만들었다. 이 놀라운 창의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마이야 왕조 시절 무슬림은 이미 인도의 신드(파키스탄)지역까지 도달했다. 11세기 이후 투르크인이 이슬람화됨에 따라 가즈나왕조나 구르왕조등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들이 인도로 몰려들었고, 거기 있는 불교 사원이나 힌두교 사원을 보이는대로 몽땅 때려부수고 있는대로 털어가지고 나왔다. 그 후, 구르왕조의 노예병사였던 쿠트브 앗 딘 아이바크가 인도에서 노예왕조를 세웠다. 이후 이어진 힐지, 투글루크, 사이이드, 로디 등의 왕조를 델리 술탄 왕조라고 부르는데, 이름은 그럴듯해도 별볼일 없는 왕조들이었다.

쿠트브 앗 딘 아이바크는 인도를 정복한 기념으로 쿠와트 알 이슬람(이슬람의 권세)란 모스크를 짓고, 멋진 아치와 돔을 쌓으려 했다. 다만 인도의 기술자들이 아치 쌓는 기술은 없었기에 돔은 짓지 못했고, 흉내만 내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 흉내가 꽤나 멋드러졌기에 아이바크는 만족했다. 같은 투르크인인 룸셀주크인들이 아나톨리아에서 지은 모스크는 안마당을 모조리 들어내고 안으로 꽁꽁박혔던 반면에,푹푹 찌던 인도에서는 넓고 바람이 잘 통하게 건설했다.



<쿠트브 미나렛>

다만 모스크로는 자신의 권세를 세우기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쿠트브 앗 딘 아이바크는 엄청난 높이의 미나렛을 건설할것을 지시한다. 이렇게 세워진것이 쿠트브 미나렛. 높이 72.5m의 엄청난 높이다. 물론 이 위로 사람이 올라가서 아잔을 했을리는 없다. 말 그대로 과시용이다. 미나렛의 또 하나의 용도는 '여기 모스크가 있다' 라는 과시용이기도 했다. 물론 '난 이렇게 잘난 놈이다~' 란 과시도 포함된다. 후에 높이 145m 의 진짜 슈퍼 미나렛을 지으려는 시도도 했으나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인도는 부유한 지역이었다. 왕조 자체의 힘은 없어도 원체 땅덩어리가 잘살다 보니 부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산맥 건너 있는 놈이 그 망할 절름발이일줄이야. 그 절름발이는 절름발이가 아닌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와 델리를 박살내버리고 자랑스레 개선한다.

그는 자신의 제국의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정했다. 그리고 명색이 저 '티무르'의 제국의 수도인데, 비실비실한 건물만 있어서는 체면이 서지 않기에 그는 많은 양의 건물을 건설했다.



<비비 카눔 모스크>

급한 성질답게, 그는 이 모스크의 완공을 빨리 보고 싶어했다. 5년간 돈과 고깃덩어리를 들여 일꾼들을 독려하고(채찍질을 하고 손발을 자르지 않은게 다행이랄까) 인도에서 들여온 코끼리를 이용, 빠르게 건물을 완공시키는데 성공했다. 각지에서 끌려온 타일 제조공, 도공, 목공들이 일을 했고, 일꾼들이 원체 많은지라 근처에 일꾼들의 고향에 따른 촌락이 생길 정도였다. (촌락의 이름은 델리, 다마스쿠스, 바그다드였다) 다만 그 대가로 건물의 내구성을 희생, 부실공사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뭐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관광수입이 짭짤해서 수리비가 좀 들더라도 이런게 있는게 싫지는 않은 것 같다.



<구르 이 아미르. 왕의 무덤>

티무르의 무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티무르이기에 별별 전설이 전한다. 나디르 샤가 1740년에 도굴했으나 불운한 일이 자꾸 일어나자 무덤의 돌을 무덤으로 돌려보냈다는 말도 있다. 가장 유명한 전설이라면야 1941년 미하일 게레시모프의 고고학자들이 티무르 무덤 발굴한 뒤 얼마 안되어서 독일이 러시아 침공을 감행했다는 것이 있겠다. 무덤에는 ‘누구든지 왕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피할 수 없는 파괴와 절망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그러나 티무르의 제국은 그의 건물이 부실공사로 문제가 터졌듯 그의 사후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터져나왔고, 결국 갈가리 찢기고 말았다. 그 이후, 이슬람 세계는 세 개의 위대한 제국이 지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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