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서양사

[스크랩] [칼럼16] 그리스인의 우주관 변화 (퍼옴)

작성자fdsa|작성시간12.06.06|조회수619 목록 댓글 0

우주관의 변화

-케플러까지

이글은 박성래 역, 과학의 역사(까치글방)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최초의 과학은 천문학이었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각 시대의 천재들은 천체가 놓여진 모습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써 왔다. 그런데 그들이 내놓은 이론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지구는 특별한 존재이며 하늘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지구상의 현상과는 관계가 없다고 가정했다는 사실이다. 즉, 우주란 수많은 항성과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영원히 맴도는 것이며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 예를 들어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일 같은 것은 우주의 운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바빌로니아인은 위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달에 한몫을 했다. 바빌로니아 천문학자들은 하늘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아주 정확하게 관측했다. 그들은 우주의 위치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정확하게 관측하여 신뢰성있는 천문학 자료를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확한 예측을 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스인도 하늘에 관해 정확하게 알려고는 했지만, 바빌로니아인의 관측 자료를 개선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의 천문학에 공헌한 바가 있다면, 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점이다. 그들은 하늘이야말로 완전성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여겼다. 완전성이 하늘의 본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늘에 나타나는 현상은 하늘의 고유한 본성인 완전성과 불변성을 기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태양과 달, 별 등의 일주 운동이 원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였다. 원은 완전한 도형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두 가지 형태의 모델을 사용했는데, 지구중심모델과 태양중심모델이 그것이다. 지구중심모델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움직이지 않는다. 태양중심모델에서는 다른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지구는 태양주위를 돌며 자전도 한다. 대체적으로 그리스인들은 태양중심모델보다는 지구중심모델을 선호하였던 같다.

그리스, 로마 등의 고대사회에서의 과학의 위치는 오늘날과는 아주 달랐다. 과학의 교육이나 연구를 담당하는 제도나 기관이 없었고 구에 따라 과학자라고 부를 만큼 과학을 주로 하거나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 속에서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떤 동기에서 였고 어떤 외적 요인들이 이들을 과학에 종사하도록 하였을까.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에 일어났던 과학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사물의 본질과 진리에 대한 이해와 명상을 목적으로 했다. 그것은 불멸의 자연이 갖는 영원한 질서에 관해 명상하는데서 유래한다.

그리스 천문학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AD 39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거의 훼손 혹은 소멸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 초기 천문학적인 사고발전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관점들만 알아보기로 한다. 사모스에 살았던 피타고라스(BC 580 - 500)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최초로 인정한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다. 피타고라스학파에 따르면 우주는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고귀하고 완전함을 더해 가는 차례대로 열거하면, 지구와 달 표면 아래의 우라노스(Uranos), 항성천구로 경계지어진 움직이는 천구들인 코스모스, 신들의 거주지인 올림푸스이다. 지구와 천체와 우주전체는 구형이다. 왜냐하면 구형은 기하학적인 입체 가운데서 가장 완전하기 때문이다. 우주 속의 갖가지 천체는 똑같은 원운동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은 천체의 지위가 신성하면 할수록 더 느리게 나타난다. 천체의 운동은 한결같고 원형이 아니면 안 된다는 공리는 근대에까지도 천문학을 지배한 원리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로서는 태양과 달리 여러 행성들이 하늘의 주위를 서에서 동으로 제각기 독자적인 주기로 운행하고 게다가 24시간 마다 1회전씩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는 것은 심미적 감각에서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이 난점을 극복하고 또한 낮은 등급의 천체는 고귀한 천체보다 빨리 운행한다는 원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로라오스(Philolaos, BC 5세기 중엽)는 우주 중심에 큰 불덩어리가 있고 그 둘레에 10개의 자전하는 천체들이 배열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 10개의 천체들은 반지구(counterearth), 지구, 달, 태양, 5개의 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그리고 항성계 등이다. 그는 지구가 큰 불덩어리 뒤쪽으로 돌기 때문에 항상 지구는 자전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고, 반지구는 그 불덩어리와 지구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지구도 중심불 주위를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지구중심의 사상을 버리고 태양중심의 사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천체와 동등하게 보았다. 이런 사상은 태양중심설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같은 시기의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속이 비어있는 큰 공 안에 보다 작은 공들이 들어있는 공동중심의 수많은 공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모델로 생각했다. 중심불 주위를 지구가 날마다 회전한다고 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가정은 지구 주위에 있는 천공의 외관상의 일주운동을 설명했고 또한 움직이는 우주의 모든 천체는 중심불 주위를 일제히 서에서 동으로 향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회전주기는 고귀한 천체일수록 불어났다. 우주의 가장 낮은 등급인 지구는 중심불 주위를 하루에 1회전하고 달은 1개월, 태양은 1년, 행성은 훨씬 더 오래 걸렸지만, 항성구는 정지하고 있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지구는 날마다 일정한 길을 지나감으로 항성은 지구로부터 무한히 떨어져 있지 않는 한 해질 무렵과 새벽 사이에는 서로 상대적인 외관상의 위치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여러 천체와 중심불과의 거리는 음계의 음정과 같은 비율로 되어 있는, 즉 별은 지구로부터 어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존재한다는 관계를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별의 시차 다시 말해, 별의 상대적인 외관상의 위치의 변화는 관측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최초의 우주관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별의 시차가 없다는 것은 중심불 주위에 있는 지구의 날마다의 궤도가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던 것보다 훨씬 작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시사에 따라 피타고라스 학파인 시라크사 출신의 히케타스와 에크판토스는 땅덩어리는 우주에 중심에 위치하고 날마다 지축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가정하였다. 이 견해는 별의 시차가 왜 없는가도 설명되고 또 피타고라스 학파의 우주관의 골격도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최초의 자연철학자인 밀레투스의 탈레스(BC 625 - 545, 이오니아학파)는 상인으로서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기하학의 지식을 몸에 익혔고,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며 천문학 연구도 했다. 또 일식을 예언했다고 했는데, 이 시대에 그러한 예언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원은 지름에 의해 2등분된다는, 실제로는 훨씬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던 명제를 증명한 것도 그였다고 한다. 그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빌로니아인과 이집트의 천지창조신화 - 둘 다 물이 원초의 혼돈이었다고 적혀있는 -에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태초에 만물은 물에서 생겨났다고 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또 대지는 원주 혹은 원반이며 위아래에 물이 있어 아래의 물 위에 대지가 떠 있고, 위의 물로부터는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다.

탈레스 등의 이오니아 계통 그리스인의 철학에서는 자연은 청동기 시대의 우주관보다 더 비인격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계에서 여러 신들을 제거하려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천체는 실질이 있는 물체이지 힘이 있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과 같은 시대의 헤브라인인 아모스, 페르시아인인 조로아스터, 인도인인 석가는 그들의 신을 자연계에서 떼어 냈다. 이들 종교 개혁자들은 청동기 시대의 문명속에서 여러 신들에게 맡겨졌던 역할, 말하자면 비를 내리게 하거나 수확을 불어나게 하는 역할을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신들은 원래가 인간의 마음의 행복에 관계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리하여 그리스인의 세계가 한층 더 비인격적, 물질적이 되었던 것처럼 옛날의 여러 신들도 한층 더 추상적, 정신적이 되었다.

바빌로니아인과 이집트인은 세계의 첫 번째 구성요소로서 물을 생각하고, 다음에 공기와 흙을 생각했다. 밀레투스의 두번째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BC 611 - 547)는 여기에 제4원소로서 불을 덧붙혔으며, 이들 원소 이전에 존재하는 실체를 생각했다. 네 원소는 실체에서 형성된 후 흙, 물, 공기, 불 순서로 층을 이루어 나눠진다. 불은 물을 증발시켜 건조한 토지를 만들고, 수증기는 위로 올라가 안개의 원통이 되어 불을 둘러쌌다. 또한 천체라 여겨지는 것은 이들 통에 있는 구멍이며, 이 구멍으로 우리들은 내부의 불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태양을 넣은 통의 지름은 지구 지름의 27배, 달의 통의 18배이다. 지구 자체는 원주모양, 그 높이는 폭의 3배, 천종은 지구의 주위를 나무껍질처럼 둘러싸고 있고 지구는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모든 것으로부터 등거리에 있으므로 균형이 잡혀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물체는 원초적인 수분에서 생겨났고, 고등동물은 하등동물에서 발달했다고 믿었다. 생물은 질척한 성분이 태양에 의해 증발할 때 생겼다. 인간은 애당초 다른 동물, 말하자면 물고기와 같은 것이었다.

밀레투스의 세번째 철학자인 아낙시메스(BC 550 - 475)는 제1의 실체로 안개 또는 공기를 들고, 그것에서 여러 원소를 이끌어 냈다. 안개가 희박해 지면 불이 되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입을 크게 벌려 공기를 내뱉으면 공기는 따뜻하지만, 입을 모무리고 매뱉으면 차갑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개를 농축해가면 처음에는 물이 되고 이어 흙이 된다. 그러므로 원소들간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기 때문에 원소들은 갖가지로 농축되기도 하고 희박해지기도 하는 안개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아테네는 이오니아나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속령의 도시들에 비해 훨씬 늦게 변영했다. 그러나 그 문화는 한층 더 안정되어 영속적이었다.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는 BC 530년에 페르시아에게 정복되고 그로부터 수년 후 밀레투스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그리스 여러 도시의 지도권을 장악하여 페르시아와 싸웠는데 육상에서는 BC 490년에 마라톤에서 그들을 무찔렀고, 해상에서는 그로부터 10년 후에 격파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승리하고부터 눈부신 번영의 시시로 접어 들었다. 페리클레스는 밀레투스 최후의 철학자 아낙시메네스의 문하생인 아낙사고라스(BC500 - 428)를 아테네로 데려와 이 도시의 문화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전형적인 이오니아학파의 철학자로서 지구는 피타고라스 학파가 믿었던 그런 구형이 아니라 원주형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천체는 지구와 거의 비슷한 성질의 것이며, 피타고라스 학파가 생각했던 신성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던 점에서도 이오니아학파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태양은 빨간 돌덩어리이고, 그리스보다 그다지 크지 않은 편이며, 달도 행성도 지구와 비슷하며, 달에는 산도 있고 주민도 있다고 했다. 달이 반사광으로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최초로 제언한 것도 그였고, 지상에 비친 달그림자와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로써 일식과 월식을 설명한 것도 그가 최초였다. 이처럼 천체의 신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아낙사고라스는 불경죄로 기소되었으나, 페리클레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소크라테스(BC 470 - 399)는 천문학을 시간 낭비하고 하였다. 그의 생존시기에 아테네는 불행한 시대를 맞아 BC 432 - 404년에 펠로폰네스 전쟁에서 아테네인은 스파르타인에게 패배 당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철학자가 해야 할 첫 번째 작업은 인간과 인간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이었으며, 자연계를 이해하거나 지배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철학은 제쳐 놓고 윤리적, 정치적 성격을 띤 문제들과 씨름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작업은 그의 문하생 플라톤(BC 428 - 347)에 의해 계속 되었다. 플라톤은 철학이 보편성을 요구하는 이상, 철학 속에 우주의 본질에 관한 이론을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체는 신성하고도 고귀한 존재이며, 그 운동은 완전히 한결같고 원형이라고 주장한 피타고라스 학파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우주는 전체로 볼 때 구형이다. 우주는 살아있으므로 그 공간의 구석구석까지 넋이 있음며, 살아 있기 때문에 운동한다. 우주가 회전 운동을 하는 것은 원운동이 가장 완전한 운동으로서 이러한 원운동에는 손도 발도 필로 없기 때문이다.

(1) 유독소스(Eudoxus: BC 408 - 355, 그리스의 천문학자, 수학자, 물리학자)의 우주 플라톤의 철학은 영향력이 아주 컸지만 그의 주요한 후계자들은 그의 견해를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에서 멀어져 갔다. 특히 유독소스는 천체를 기하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과정으로 천체를 관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수량적인 천문학과 사변적인 우주론을 통일하고 우주 천체의 위치를 결정할 때에 관측에다 중심을 둔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필로라오스의 우주관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전시켜 소위 공동중심 다중구를 제시하였다. 공동중심 다중구의 이론은 모든 시간에 있어서 천체 위치를 수학적인 방법으로 기술하면서 행성들의 운동을 설명하고자 기도한 고대의 우주론이다. 망원경 없이 고대인들이 하늘을 바라다 보았을 때, 그들은 다만 태양, 달 및 별들만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별들이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내었다. 항성들은 해가 바뀌어도 위치가 변하지 않는 별들로서 북극성, 북두칠성 등이다. 배회하는 별들을 행성이라 하는데 일주일 혹은 일년 간격으로 항성들 사이를 운동하고 있다. 그들의 행로는 매우 복잡하고 그들의 속도도 다양하다. 시간에 따라서 역행운동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떤 시간에 항성 사이를 운동하고 있던 행성이 잠깐 정지하였다가 본래 운동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이전에 일정한 시간 동안 반대방향으로 운동하는 상태이다.

그는 천체의 모든 운동은 원궤도이고 균일하다고 하는 피타고라스의 개념을 받아들여 구 위에서 일어나는 원둔동에 입각하여 천체운동의 모든 특수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예들 들어 행성은 자전하는 구의 적도에 붙어 있다고 가정하고 그 구의 중심에 지구의 중심이 있고 정지해 있다고 가정하였다. 구의 자전축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며, 그 축은 역시 자전하는 지구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결과적으로 행성의 운동은 다른 구들과 상대적인 각속도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사와 각속도의 두 변수가 예측과 행성의 실제운동 사이에 만족할 만한 일치를 주는데 정당화할 수 없다면 두 번째 구가 그 자신의 자전축을 가진 세 번째 구 안으로 놓일 수 있다는 등의 실제 운동과 예측의 일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구를 바꾸는 조정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항성의 일주와 연주, 시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각각에 대해 3개의 구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의 5개의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각기 4개씩의 구를 필요로 하여 모두 27개의 구를 사용하였다. 즉, 그는 자신의 이론이 행성 및 다른 천체들의 위치를 설명했던 것으로도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의 문하생인 칼리포스(BC 325년경)는 각 천체에 여분의 천구를 하나씩 더하여 총계 34천구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위에 22천구를 더 덧붙혔다. 그러나 이 동심천구설은 피할 수 없는 곤란을 처음부터 수반하고 있었다. 이 설에 따르면 천체는 언제나 지구로부터 똑같은 거리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금성이나 화성은 외관상의 밝기를 바꾼다는 것은 훨씬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이다. 그것은 이들 행성이 지구와 상대적으로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식은 때에 따라 개기일식과 금환일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관측되었다. 이 또한 지구로부터의 태양과 달의 상대적 거리가 변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유독소스의 체계의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결같은 속도로 원운동한다는 선입견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려고 폰티코스의 헤라클레이데스(BC 373년 경)는 한가지 시도를 하였다. 수성과 금성의 두 행성은 결코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운행하지 않는 것이 관측되어 있으므로 그는 이 두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원궤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들 행성의 밝기의 변화를 설명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 학파인 히케타스와 에크판토스의 견해도 채용하여 지구는 날마다 그 축 주위를 자전한다고 하여 하늘의 외관상의 일주운동을 설명했다. 또한 우주는 무한이며 본래 개개의 별은 지구와 기타의 천체로부터 이루어진 세계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플라톤의 제자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도 모두 에우독소스 체계를 채용하고 있었다.

(2) 아리스토텔레스(BC 384 - 322)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공개념은 그의 시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에게는 지배적이었다. 그의 이론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전체 우주는 크기가 다른 7개의 속이 빈 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구가 이들의 공통 중심이다. 달, 태양, 그리고 여러 행성 및 별 등은 잇달아 각기 다른 구각에 점점이 박혀 있고, 이들은 모두 완전한 원운동을 한다. 오늘날 이와 같은 우주모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시대가 자랑하는 과학 지식을 가지고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반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관점만으로 어제를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2천여 년 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공과 같이 생겼다고 주장하면서 우주에 관한 통합된 설명을 가감히 시도해 보았다고 상상해 보라. 지구는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거북등 위의 평평한 물체와 같다고 여기던 고대의 관념에 비추어 보면, 이것만으로도 인간 지식의 발전에 있어서 진일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시대의 전통적인 개념에 따르면, 만약 지구가 둥글게 생겨서 우리와 정반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끝없는 공간으로 떨어져 버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볼 때, 지구가 둥글다는 개념이 마침내 제자리를 잡게 될 때까지 그 당시 극복하여야만 했던 편견과 심적인 거부감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시간 및 공간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위와 아래를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 밑에 있다고 생각할 때, 그들 역시 우리가 자기들 밑에 있다고는 환상에서 비롯된 우월감에 젖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생각은 단지 공간의 등방성을 지적할 따름이다. 즉 모든 가능한 방향 중에 그 어느 것도 나머지 것보다 더 위쪽의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공간에서의 상대성으로 이해한 개념은 시간 및 공간의 과학적인 이해를 위하여 인류가 내디딘 중요한 한걸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는 공간에서 물체의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공간에서의 위치는 절대적이며, 지구의 중심이 곧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다. 모든 물체는 각기 자연이 할당한 고유의 위치(자연적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장애물이 없으면 물체는 그 위치에 도달하려 할 것이다. 물체가 운동을 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아직 자연적 위치에 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공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달 위 부분과 달 아래 부분이다. 태양, 달, 그리고 별과 같은 천체물의 자연적 위치는 천구의 각기 다른 층에 고정되어 있고, 천구가 원운동을 함에 따라 이들도 함께 원운동을 하게 된다. 지표면 근처에서의 모든 물체의 자연적 위치는 지구 중심이고, 이것이 물체가 지면을 향해 떨어지려는 경향을 설명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공간 개념에 의하면, 어떤 위치(예를 들면, 지구의 중심)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물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모든 자연법칙의 영역에서는 공간 내의 그러한 특정 위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어진다. 공간의 이러한 특성을 우리는 공간에서의 위치의 절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현대 용어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공간이 모든 방향으로 동등하긴 하지만 그러나 균일하지는 않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공간에서의 각각의 위치는 각기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공간 개념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축적해 놓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발전되었으며, 실제로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지식과 일치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서 새로운 지식이 낡은 것들을 대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시공간에 관한 낡은 개념도 새로운 것으로 발전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성들을 포함하는 구가 실존한다고 생각하고 유독소스가 제안했던 구들 사이의 완충작용 혹은 반작용을 하는 구를 도입하였다. 그래서 그 구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반작용구를 도입한 목적은 다른 부분에 문제가 되는 효과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토성의 운동을 설명하였던 4개의 구안에 3개의 구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바깥쪽에 있는 마지막 3개의 구의 작용을 조정하고 목성을 운행하는 구에 대한 기반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독소스의 모델을 수정해서 만든 모델의 구의 수는 55개 생겨나게 되는데 이 모델의 가치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BC 270년 경 이후 아테네에는 과학적으로 중요한 작업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스 과학은 다른 곳, 특히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진 것이다. 원지론은 사모스의 에피쿠로스(BC 342 - 270)에 의해 아테네에서 부활되었는데 그는 이 이론을 주로 종교와 맞서기 위해 사용했다. 그의 주장으로는 달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마찬가지로 달도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스토아 학파 가운데서도 특히 제논과 클레안테스(BC 300 - 225)는 천체의 신성을 역설하여 하늘이 지상의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스토아 학파는 인간은 대우주를 본 뜬 소우주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작은 세계도 큰 세계도 모두가 어떤 절대적인 힘의 지배 아래 있다고 가정했다. 우주의 지배력은 태양이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믿었던 바와 같이 종동천이 아니다. 그것은 태양이야말로 소우주의 지배력인 심장에 해당하는 대우주의 기관이기 때문에이다. 이러한 견해는 메소포타미아의 전제정치에서 유래한 것으로 애당초에는 그리스인, 이어 로마인의 새로운 제국시대에 꽤 많은 공감을 불러 일어킨 것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그리스 과학의 중심지는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졌다. 아테네인은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흔히 미신에 물들거나 조소적으로 되었다. 그들은 BC 404년 스파르타인에게 패배했고, BC 338년에는 마케도니아의 필립에게 격파당해 이전의 활기를 잃었다. 그들의 최후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인이었으며, 그의 제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은 아버지 필립의 정복정책을 계승했다. BC 334년 그는 소아시아를 횡단하여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다음 이집트로 들어가 이곳에 BC 332년에 알렉산드리아시를 세웠다. 알렉산더 대왕은 출정 때 언제나 공학자, 지리학자, 측량기사를 거느리고 갔다. 그들은 정복한 땅의 지도를 만들고 자원을 기록해두었으므로 박물학이나 지리에 관한 막대한 양의 자료를 모으게 되었다. 이리하여 알렉산더 군대에 의해 모아진 보고는 그리스과학을 사변에서 벗어나 경험주의로 전환시키는 수단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극도 주었다. 게다가 이러한 전환은 아리스토텔레스 생존 중에 일어났던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BC 323년에 죽고, 그의 제국은 분열되어 무너졌다. 이집트는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 한 사람이며 알렉산더 대왕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하에서 배운 톨레미(Ptolemy 혹은 Ptolemaios Ⅰ Sotar, BC 367 - 283)가 접수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연구와 교수를 겸하도록한 무제이온을 창설하여 그 후 600년간 지속되었다.

(3) 아리스타쿠스 (Aristarchus, BC 320 - 250, BC 3세기 경) 사모스 지방에 살았던 그는 고대 천문학에 있어서 두가지 공헌을 하였다. 그 첫 번째는 태양과 달의 반경과 지구로부터의 거리를 지구 지름 단위로서 측정한 것이다. 그의 측정은 대단히 부정확한 것이었으나 그 당시 그러한 측정을 하였다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항성들과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원궤도를 따라 공전하고 있다는 우주의 모델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더욱기 그는 항성들이 박혀있는 구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원궤도는 한 점에 비유할 정도로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항성을 운행하는 구가 대단히 크다고 가정한 것은 아마 별의 연주시차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별의 연주시차는 관측자의 운동 때문에 나타나는 먼 천체의 시운동이다.

행성들은 원을 그리며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데 지구는 1년에 1회공전하고 하루에 1회자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이처럼 대담한 이론을 제출하게 된 것은 행성의 광도에 변화가 있다는 점과 태양에 비해 극히 작은 지구가 그 커다란 물체를 회전시킨다는 것이 극히 부적당하다는 역학적 이유에서 였다. 그러나 신성하게 생각되던 천체가 지구와 동격으로 격하된다는 이유 때문에 혁신적이었던 고대 태양중심설은 당시 대중의 종교적 감정과 사상적 압박으로 반발당했다. 그리고 이단의 죄목으로 고발당함으로서 고대에 있어서 태양중심설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리스타쿠스가 제안한 태양중심설은 유독소스의 우주체계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의 견해가 인정 받지 못한 것은 그리스인이 지구와 하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구성요소에 있어서나 둘이 따르는 법칙에 있어서나 완연히 다르다는 관념을 버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에는 등급이 낮은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보다 완전한 천체는 한층 더 순수한 상부에서 한결같이 원운동을 반복한다는 견해가 뒤따르고 있었다. 아리스타쿠스 이후 유독소스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그리스인의 모든 노력에는 이 견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리스타쿠스는 코페르니쿠스보다 1800년이나 앞서 태양중심설을 제창하였다. 그는 천체의 운동을 강조하면서 우주중심에 큰 불덩어리가 있다는 지구중심설을 비난하였나 그의 업적은 그 시대에는 아무런 효과도 보여주지 못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아리스타쿠스의 태양중심설을 거론하였다. 그리스의 우주론자들은 아리스타쿠스 이후 500년동안 우주의 지구 중심설을 가다듬어갔다.

아폴리니우스(BC 190 - 120)는 하나의 기하학적 구도를 제안하여 이것에 의해 지구에서 행성까지의 거리의 다양함을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만일 하나의 행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유도체 위에 중심을 둔 하나의 원, 곧 주전원(epicycle) 위를 운행한다면 그 행성의 거리는 다양할 것이며, 이 두 원을 적당히 선택하면 행성의 운동을 양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구조는 여러 천체는 지구에 대해서 이심원(혹은 편심원)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그것들의 궤도 중심은 지구에서 떨어져 있다는 제안이었다.

주전원과 이심원이라는 두 가지 구조를 이용한 것은 로도스에서 살면서 일했던 히파르쿠스(BC 190 - 120)였다. 그는 태양의 운동을 지구에 대해 이심적인 고정된 원궤도에 의해 설명하고 달의 운동은 움직이는 이심적인 궤도에 의해 설명하였다. 또한 행성의 운동을 주전원으로 설명했다.

그리스인이 로마인에게 정복당했을 때 그들은 냉소적이거나 종교적으로 되기가 쉬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경향은 그리스인의 과학에 반영되었지만, 결국 종교적 경향이 더 강하게 반영되었다. 천문학 분야에서 게미노스(BC 70년 경)는 우주에 관한 천문학적 체계는 물리적인 실재의 표시이기보다는 수학상의 편의라고 하는 꽤 회의적인 견해를 품고 있었다. 이 시대의 이러한 견해는 천체의 운동은 원형이고 한결같다고 하는 물리적인 공리 즉 천공의 물질 쪽이 지상의 여러 원소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공리를 암암리에 승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후, 천문학은 신학적인 요구에 따라 변형되어 갔다.

(4) 톨레미 혹은 플톨레마이오스 (Claudius Ptolemy 혹은 Ptolemaios, 85 - 165)의 우주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그는 알마게스트(Almagest,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뜻)라는 책에서 그리스의 천문학자들의 업적과 자신의 우주 모델을 소개하였다. 서방 세계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이러한 톨레미의 우주관을 믿어왔다. 그는 다음과 같은 5가지 가정에 따라 우주모델을 설정하였다.



제1가정 - 하늘은 구이고 그 구는 자전한다.

제2가정 - 지구는 구형이다제3가정 -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위치한다.

제4가정 - 항성들은 멀리 있기 때문에 점으로 보인다.

제5가정 - 지구는 어떠한 운동도 하지 않는다

주전원을 이용한 우주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수성, 금성, 목성 및 토성 등 행성들은 지구둘레의 원궤도를 각기 그리면서 각 원궤도 상에 중심을 둔 작은 원 즉 주전원(epicycle) 운동을 한다. 이 주전원은 행성의 역행운동을 설명하는 도구가 되었다. 톨레미 이전의 천문학자와 그에 의해서 주어진 행성의 운동에 대한 설명은 행성들의 원궤도 운동과 주전원운동을 생각하였다. 목성의 주전원을 설명하기 위해 톨레미는 주전원의 중심이 큰 원궤도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목성이 주전원 주위에서 11회 회전한다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예측과 관측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4개의 물리량 즉, 지구로부터 행성의 원궤도 반경, 주전원의 반경, 지구를 중심으로 한 원궤도의 속도 및 주전원의 궤도속도 등을 규정 제시하였던 것이다.

참고그림



정지상태에서 행성의 궤도(점선)는 원이지만, 지구를 중심으로 행성이 돈다고 하면 실제 궤도(실선)는 원궤도가 아니라 epicycle이다.



밑에 있는 원 두 개가 이심원(원은 원이되, 회전 중심이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의 연금술사들이 살았던 1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시대는 로마제국이 쇠망해 감에 따라 첨차 지적인 수준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292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연금술사들의 서적을 불태웠고 389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기독교도의 폭동으로 파괴되었다. 기독교의 출현과 함께 지구는 평평하여 아래쪽이 물로 받쳐져 있고 위쪽이 둥근 천장의 바깥에 있는 물로 감싸여 있다는, 청동기 시대의 설이 부활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우주의 모양은 대체로 둥근 천막교회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초기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설을 가장 강력히 지지한 것은 시리아 교회였는데 특히 예루살렘의 시릴(360년경)과 타르수스의 주교 디오도로스(? - 394)가 그러했다. 디오도로스는 그리스인의 세계관은 무신론적이라고까지 단정하고 있다.

둥근 천막설은 서방교회에서도 지지를 받았지만, 일반적으로 그리스인의 생각, 특히 구형의 지구와 구형의 천공이라는 생각은 유지되었다. 그리스 우주관의 자세한 내용은 서방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잊혀졌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톨레미의 천문설이 기독교 신학으로 치장하게 된 것은 동방의 기독교권에서 였다.

비잔티움의 최후의 주목할만한 이교도 철학자 프로클로스(412 - 485)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톨레미의 수학적인 천문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적인 우주론을 통합한 우주관이 그 무렵까지는 발전하고 있었다. 천공은 아홉 개의 동심구의 껍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첫째 껍질은 달을, 둘째 껍질은 수성을 운반하며, 위쪽의 여덟 번째껍질은 항성을 운반하며, 아홉번째 껍질은 종동천이라고 가정되었다. 개개의 껍질은 톨레미의 주전원설을 허용할 정도로 두꺼우며, 서로 이웃하고 있는 꺼비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정하였던 것과 같이 서로 인접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천체가 근접하는 최단거리와 같다. 다시 말해서 달이 후퇴하는 최대거리는 수성이 근접하는 최단거리와 같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천체를 운반하는 껍질의 두께와 그들 천체의 지구로부터의 평균거리는 계산이 가능하며, 이것들은 우주의 크기를 보여 주는 절대값으로 여겨졌다.

이들 아홉 개의 구에는 기동자가 필요했는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이들 기동자는 피동의 천체보다도 더 한층 고귀하고 정신적이 아니면 안되었다. 플라톤은 천공에는 정신의 위계질서가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또한 프로클로스의 제자의 한사람으로 보이며 신플라톤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이는 디오니시오스는 이러한 정신을 성서에 열거되어 있는 여러 천사와 동일시하였다. 그는 천사를 아홉 가지의 위계로 정리하고, 이것들을 다시 세가지로 크게 나누었다. 그리하여 이 각 등급의 천사들이 아홉개의 천구의 기동자라고 해석되었다. 모든 천사의 아래에 있는 지구에는 온갖 피조물이 있는데 첫째로 인간, 다음이 동물, 식물, 마지막에는 우주에 찌꺼기에 해당하는 것의 순서로 배치되었다.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그것은 마치 이 세상에 교회의 대주교, 주교 등 일정한 등급이 있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므로, 우주는 우주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하나님을 비롯하여 지구의 중심에 있는 지옥의 최하급의 미물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인 생물의 연쇄를 이루고 있다. 어느 계급의 최고의 것은 그 윗계급의 최저의 것에 곧바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우주관의 물리적 측면에 관하여 6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저작가이며 교회로부터 이단자로 찍힌 필로포노스는 반대하고 나섰다. 필로포노스는 천사가 천체를 움직인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애초에 신은 천체에다 기동력(impetus)을 주었다. 이것은 천체 자체의 동력이므로 시간이 경과된다 해서 줄어 들지 않는다. 그것은 신이 마치 무것운 것은 지상으로 낙하하는 성질을 부여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지상과 천상의 물체는 이런 점에서 비슷하며, 본질적으로는 이질의 것이 아니다. 필로포노스는 일반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기동자와 항상 물리적으로 접촉하고 있지 않아도 된다고 제언했다. 왜냐하면 어떤 힘이 물체에다 기동력을 공급하면 그 물체의 운동을 유지하는 것은 이 기동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동력설에 따르면 물리적인 접촉에 의해 작용을 전달하기 위한 물질적인 연속을 필요로 하지 않고, 진공이 존재해도 좋다. 게다가 화살도 그 자체의 기동력에 의해 이 진공 속을 날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정한 바와 같이 화살의 뒷쪽에 공기의 끊임없는 압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3세기 중엽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의해서 용인되는 유일한 천상의 움직임은 동심원들의 등속원운동인데 천문학자들은 현상들을 단지 편심궤도(偏心軌道, eccentric)와 주전원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것들은 원래 태양중심의 부속타원운동을 하는 행성들의 운동을 지구중심의 등속운동으로 기술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기하학적 도구들이다. eccentric은 원의 중심이 아닌 다른 점을 주위로 등속운동을 하게 함으로서 비등속운동을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이고, epicycle은 타원운동을 나타내기 위해 원주 위에 중심을 둔 작은 원상에 행성을 돌도록 한 것이다.

필로포노스가 제언한 기동력설은 13세기에 다시 부활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중세에 인정받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나 디오니시오스의 견해로부터 크게 발전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회교권을 통해 한층 더 복잡한 경로를 거쳐 전달되었는데, 12세기부터는 성서나 디오니시오스와 같은 신플라톤 학파 기독교도들의 저작과 함께 중세학문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206 - 80년경)와 토마스 아퀴나스(1225 - 74)에 의해 카톨릭신학에 통합되었다. 두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는 그 구석구석에까지 물질이 가득차 있는 구로서 진공은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운동은 움직이게 하는 힘과 움직여지는 물체 사이에 직접 또는 간접의 물리적인 접촉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성 토마스의 척째 증명은 천구의 운동은 제1 기동자 즉 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신의 활동은 천구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천체의 운동은 5세기의 디오니소스가 가정했던 여러 계급의 천사에 의해 조정되었다.

일부 대학에서는 이러한 세계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옥스퍼드의 오컴(1295 - 1349)은 신의 존재에 관한 성 토마스의 첫째 증명의 타당성을 부정했다. 움직이는 물체는 반드시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이를테면 자석의 경우, 철은 자석에 접촉하지 않아도 움직여 질 수가 있다. 따라서 물리적 효과를 전달하기 이해서는 공간에 물질이 가득차 있지 않아도 되므로 진공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컴은 회교도를 거쳐 중세 유럽에 전해졌던 필로포노스의 기동력설을 부활시켰다.

또한 1327년 파리대학의 학장이 된 부리당은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계속 움직이는 것은 진공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물체의 배후에 밀어젖혀진 공기가 달려 들어 오가 때문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 반대하여 두 가지 논의를 제출했다. 첫째로 팽이는 위치를 바꾸는 일없이 회전함으로 밀어젖혀진 공기에 의해 움직여질 리가 없다. 둘째, 뒤끝이 납작한 투창은 양쪽 끝이 납작한 투창보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익서은 공기가 추진체라고 한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부리당은 이 두 가지 예를 들어 모두가 기동력이 운동을 지속시켜주는 힘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동력설은 중세의 대학에서는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의 설은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기동력설은 16세기초에도 가르치고 있었으나 사상면에서 이 설을 부르짖는 학파는 15세기에 다소 쇠퇴하고 있었다.

학자와 장인은 근대과학의 발생에 각기 다른 점에서 공헌했다. 근대 초기의 과학 혁명의 두 가지 근본 요소로 첫째는 새로운 탐구방법의 발생 즉 과학적 방법이며, 둥째는 지적 전환 즉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성장이었다. 장인은 근대과학의 실험방법이라는 측면에서 공헌했고, 학자적 전통에 서 있던 학자는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통적 방법을 써서 지적 혁명에 더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과학혁명의 두 요소는 장인적 전통과 학자적 전통이 서로 만나 상호작용을 하는 가운데 크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뒷날 새로운 자연관으로 발전된 기계론적 사상은 원래는 기술에서 시작된 것이고 학자적 전통이 발전시킨 수학은 과학방법의 일부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관측천문학은 15세기에 항해와 관련하여 그리고 태양력과 맞지 않게 된 낡은 율리시주력의 개량과 관련하여 부활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우주체계는 태양을 중심에 두고 지구에 세가지 운동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날마다 자전과 태양주위를 도는 1년의 공전 및 세차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지축의 운동이 그것이었다. 1543년 그의 주저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공표하기에 이른다. 그의 이론에 살을 붙이기 위해 사용한 논법은 주로 수학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는 과학의 이론을 어떤 몇개인가의 가정 혹은 전제에서 끌어낸 사상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가정 혹은 전제는 다음의 두 가지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로 그것은 외관을 인정하는 것, 다시 말해 천체의 관측되는 운동을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천체의 운동은 원이며 한결 같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전제와 모순되어서는 안된다.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로는 관측과 엇갈리는 가정은 천체의 운동이 원이며 한결같다는 의견과 빗나간 가정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톨레미의 체계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밀히 말해 톨레미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의견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대인들이 우주의 중심에서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 모든 천체에 대해 지구의 세가지 운동을 부가했던 것으로 해석했다. 지구가 멎어 있다는 입장에서 천체의 외관상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의 기하학적 우주체계에서는 천체 하나하나에 대해서 세 가지 원 혹은 세가지 원체계가 부가되었다. 이러한 원은 그리스의 우주체계를 복잡하게 한 것이라  각하여 지구가 날마다 그 자체의 축을 돌고 1년 주기로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가정함으로써 세가지 원을 제거했다. 일하여 그는 천체의 외관상의 운동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원의 수를 톨레미가 사용한 80개 정도에서 48개로 줄였다.

그의 체계는 톨레미의 그것보다 간단하면서 보다 섬세했다. 낡은 체계에서는 천체의 운동은 동에서 서로 향하고 있고 회전은 반대방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구와 그밖의 모든 행성은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와 함께 속도가 감소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같은 방향으로 도는데 중심에 있는 태양과 우주의 주변에 있는 항성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로써 행성이 지구와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주전원을 교묘하게 구성함으로서 달의 외관상 지름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지만, 톨레미가 가정한 주전원에는 달의 외관상 지름이 4배나 변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원운동의 수가 적어졌으므로 천문계산이 훨씬 쉬웠지만 행성의 위치, 기타의 예측에 관해서는 톨레미 체계보다 더 정확했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양쪽이 다 1%의 오차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해서 중요한 물리학적 반대가 있었다. 지구가 돌고 잇다면 언제나 동풍이 불 것 아니냐는 반대론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두가지로 답했는데 첫째는 중세식 설명으로 공기는 흙의 입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와 같은 성질을 띠고 있으므로 지구와 함께 회전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둘째의 설명은 보다 근대적인 것으로 공기는 끊임없이 돌고 있는 지구와 접촉하고 있으므로 저항 없이 돌 것이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반대론은 공중에 던져진 돌은 지구의 회전에 의해 늦어지므로 내던져진 지점보다 서쪽에 떨어질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중세식 답만을 했다. 즉, 무게에 의해 하강하는 물체는 주로 흙의 성질인 까닭에 부분이 전체와 같은 성질을 가지는 것은 틀림없음으로 지구와 함께 회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하나의 반대는 만일 지구가 회전하고 있다면 원심력으로 인해 흩날려 버릴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는 지구가 돌지 않는다면 항성의 거대한 구가 거대한 속도로 돌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면 원심력으로 인해 부서지는 것은 오히려 그 쪽 면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운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도 또 기동력 이론도 승인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동자들의 작용도 기동력의 작용도 모두 비자연적이고 인공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전과 등속 원운동은 지구나 천체 같은 완전한 구형이 자발적,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래서 천사의 서열을 부정했다. 천체로 하여금 그 궤도 위를 진행하도록 하기 위해 당시 승인되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톨레미 체계의 디오니시오스적인 수정에 의하면 보다 높은 서열의 천사가 보다 낮은 서열의 천사를 통솔하여 천체를 밀어 준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코페르니쿠스와 더불어 전혀 새로운 우주의 가치체계가 출현했다. 우주의 주변에 있는 제1기동자는 이제 중요성을 잃었으며 우주의 중심에 있는 태양이 하늘의 지배자가 되었다.

만약 코페르니쿠스가 보다 더 간단한 우주체계를 바라고 있었다면 티코 브라헤(1546 - 1601)가 채용한 그런 체계를 생각해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가치체계와 사고방식이 매우 새로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에서는 보수적이었으며 일생 동안 천체의 운동은 원이며 한결같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리스적 선입견을 버리지 안았다. 티코의 체계는 행성은 태양의 주위 궤도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천체로서의 태양과 행성은 우주의 중심에 붙박혀 있는 지구의 주위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체계는 수학적으로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동등하면서도 지구가 움직인다는 물리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우주의 낡은 가치 체계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고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태양중심의 체계를 세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근대 초기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관측 작업은 티코 브라헤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덴마크의 코펜하겐 해협의 흐벤 섬에서 많은 조수들과 함께 1576 - 1597년 사이에 다수의 정밀한 관측자료를 모았다. 그는 이론적인 우주체계의 도움없이는 관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구 중심의 체계를 수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첫째 관심은 관측에 있었다. 1599년 프라하로 가게 되었으며, 이듬해 독일의 젊은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 - 1630)가 그의 조수가 되었다. 1601년 티코가 죽자 관측자료 더미가 그에게 남겨졌다. 천체의 운동은 원이며 한결같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으나, 브라헤의 자료를 손에 넣었을 때 그의 생각은 변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나 톨레미, 브라헤의 체계를 지배하는 등속 원운동으로는 브라헤의 관측과 맞먹을 만큼 정확하게 예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등속 원운동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기하학적 도형을 찾았다. 그리하여 1609년 타원이야 말로 요구된 정확성을 예보하는 데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행성의 운동은 이제 원도 아니고 등속도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그가 1609년에 발표한 행성에 관한 두 가지 법칙은 첫째, 행성은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린다는 것, 둘째, 태양에서 행성에 그은 선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그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9년 후,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제3법칙을 발표하였다.

케플러에 의해 처음으로 태양계의 공간적 배치가 밝혀져 천체들의 여러 모습을 물리적인 힘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것은 근대 초기 과학의 위대한 성취였다. 그리스인은 주로 우주의 정적인 측면에 관심을 갖고 운동을 한결같이 반복하는 그들의 사고방식 때문에 복잡 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하나의 근본적인 생각을 팽개침으로써 코페르니쿠스는 한층 더 간단한 체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밖의 그리스적인 생각을 대부분 포기함으로써 케플러는 훨씬 더 간단한 체계를 얻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천체의 운동을 지상의 역학으로 설명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그것은 유력했던 그리스의 여러 학파의 경우 설령 그들이 역학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미처 생각할 수 없는 발전이었다. 또 그들은 역학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발견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합니까?


http://www.pusan-e.ac.kr/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