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대공국의 육성
스뱌토슬라프 대공의 정복 사업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슬라브족을 통합하여 단일 국가의 기반을 조성하는데 기여하였다. 980년에서 1054년까지 키예프 대공국은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된 성 블라디미르 대공과 현자라는 명칭을 받은 야로슬라프 대공과 같은 걸출한 통치자들을 배출하여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1015년까지 통치했던 성 블라디미르 대공은 앞서 통치하던 유능한 대공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영토를 넓히면서 영토 안의 안녕과 질서를 향상시켰다. 특히 외적인 페체네그족의 침입에 대비한 군사적 억제력을 강화하여 그들이 대공국을 함부로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국경선을 따라 요새와 소도시들을 세웠고 국경 지역으로 이주자들을 끌어 들였으며 키예프로부터 국경선까지의 거리를 하루 거리가 아닌 이틀 거리로 확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통치자로서 성 블라디미르의 불후의 명성은 동방 정교를 받아 들여 러시아를 정교화 하도록 결정하고 추진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러시아의 국교 선택과 관련하여 전해 지는 이야기는, 이슬람교는 술을 금지하여 거부되었고 유다교는 국가가 없는 패배한 민족의 종교라서 제외되었으며, 동방 정교는 비잔티움 제국의 장엄한 교회 건축과 신비스럽고 근엄한 종교 의식으로 대공국의 대표들을 감동시켜 국교로 받아 들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이 갖는, 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의미는 문화적 교차로에 위치한 러시아가 이미 다른 어떤 문명들보다 비잔틴 문명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정교를 국교로 결정한 결과로 러시아는 이슬람 문화 혹은 유다 문화를 위한 유럽 내의 고립된 전진 기지 노릇을 하기 보다는 범 그리스도교 문화의 동쪽 날개로서 당당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정교를 국교로 삼은 후, 이미 상당한 기간 동안 영향을 미쳐 왔던 고도로 발달된 비잔티움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키예프-러시아의 문학, 예술, 법률, 풍속, 관습 등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정교가 대내적으로는 민족 통합을 지속시키는 강력한 이념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고, 대외적으로는 비잔티움 제국 및 범 그리스도교 세계와 유대를 강화시켜 주는 촉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정교로의 세례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만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비잔틴 교회에 대한 변함 없는 추종은 역으로 설명하면 러시아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외부에 머물러 있으면서, 가톨릭 문명권인 서유럽의 문화적 발전으로부터 유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유럽의 르네상스 문화는 가톨릭권에 속하였던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에는 영향을 주었지만, 정교를 고집한 러시아로부터는 차단되었고, 그 결과로 러시아는 르네상스를 뛰어 넘게 되어 근대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와 폴란드는 범 슬라브족에 속하면서도 이후 양 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종교적 갈등이 원인이 된 적대와 대립을 계속하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다.
1015년 성 블라디미르 대공의 사후에 또 다시 형제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스뱌토폴크가 동생들인 스뱌토슬라프, 보리스, 글레브를 살해하여 제거하고 키예프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노브고로드에 세력을 가진 형제 야로슬라프가 스웨덴 용병을 고용하여 전력을 강화한 다음, 폴란드와 페체네그의 후원을 받던 스뱌토폴크를 패퇴시키고 대공이 되었다. 역사 속에서 현자로 알려진 야로슬라프 대공은 국내 정치와 국외 정치 양 면에서 키예프-러시아를 발전과 성공의 정점으로 이끌었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대공국의 영토는 발트 해에서 흑해에까지, 오카 강에서 카르바스키 산맥에까지 확장되어 동유럽 평원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또한 1037년 대공국을 침범하여 들어 온 페체네그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함으로서, 또 다른 유목 민족 폴로베츠족이 밀려 올 때까지 사반 세기 동안의 귀중한 평화의 시기를 러시아 평원에 가져다 줄 수 있었다.
통치자로서 야로슬라프 대공은 국내 정치에서 더욱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인상적인 종교 부흥과 대공국의 법률, 교육, 건축, 예술 등의 큰 발전이 그의 치세 기간 중에 이루어졌다. 그의 통치 시기 안에 포함되어 있는 1037년 이후 몇 해 동안에 걸쳐서 세워진 키예프의 성 소피아 대성당은 현존하고 있는 키예프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념비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또 교회 조직을 강화시키고 유능하고 교양있는 힐라리온을 최초의 러시아인 대주교로 봉직하게 하였다. 힐라리온 대주교의 <율법과 은총>은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은총을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를 비교하며 설명했고 이어서 러시아의 정교화와 성 블라디미르 대공을 찬양하고 있다. 그는 많은 성당들과 수도원들을 세우고 지원함으로서 초기 정교 도입 이후 러시아의 그리스도교를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부흥시키는 데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야로슬라프 대공은 키예프-러시아의 법률 체계를 정리하여 확립시킨 입법자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러시아의 최초 법전이며 이후 5세기 동안 러시아 법률 체계의 규범으로 적용되었던 <러시아 법전(Russkaja Pravda)>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이 법전은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계속 발전과 조문 수정을 계속한 후에 완성되었는데, 그 시작은 야로슬라프의 통치 시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법전의 내요은 바랴그와 동슬라브의 관습법을 기본으로 하되, 정교화 후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반영하여 처벌 내용을 완화시킨 것이었다. 그는 또한 성직자들과 교회 종사자들을 재판하던 교회 법정의 권한과 적용 범위도 조문화 하여 규제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키예프에 큰 학교와 도서관을 설립하는 조치를 취하여 키예프-러시아의 교뮥과 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성 블라디미르와 현자 야로슬라프의 통치는 러시아의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유산들을 남겼다. 첫 번째 유산은 정교 신앙이고, 두 번째 유산은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에 대한 러시아 사회의 기대와 희망이다. 성 블라디미르가 받아 들이고 현재 야로슬라프가 꽃 피웠던 정교는 단순히 종교적 신앙의 범위를 초월하여 러시아를 하나로 단결시키면서 외부와 구별시키는 전 국민적 이데올로기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최근의 예로 구 소련의 이데올로기가 붕괴되고 난 이후 러시아에서 강렬하게 부흥하고 있는 정교에 대한 믿음과 열기는 단순히 신앙의 부활이라는 추측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오히려 러시아인들은 그들의 민족적 동질성의 원천을 정교 신앙을 통하여 발견하고 싶어 한다는 설명이 적어도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더욱 설득력을 갖고 있다.
두 번째 유산도 러시아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보여 준다. 러시아의 지정학적 위치는 동쪽, 서쪽 및 남쪽으로부터 외적이 쉽게 침입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면서 러시아 내부의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려면 유능하고 강력한 통치자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는 본보기를 두 통치자가 보여 준 것이다. 성 블라디미르와 현자 야로슬라프가 이룩한 키예프-러시아의 전성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신뢰는 강력한 권력을 장악한 유능한 통치자에 대한 믿음으로 굳어졌다. 통치권과 통치자를 보는 러시아 사회의 이러한 믿음이 그 후 러시아 민족사의 고비마다 절대 군주제와 중앙 집권적 정부 형태에 대한 지지로 구체화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정치ㆍ사회적 유산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러시아가 완전히 극복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기는 어려운, 좀 더 지켜 봐야 할 민족적 과제로 남아 있다.
키예프 대공국의 쇠락
야로슬라프 대공은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영지를 각각 분할하여 위탁하였다.
첫째인 이쟈슬라프에게는 키예프와 노브고로드를, 둘째인 스뱌토슬라프에게는 체르니고프를, 셋째인 프세볼로드에게는 페레야슬라프를, 넷째인 뱌체슬라프에게는 스몰렌스크를, 다섯째인 이고리에게는 볼리냐의 블라디미르를 각각 그 주변 영토와 함께 딸려 상속하였다.
야로슬라프의 구상은 아들들이 서로 협력할 것이며 키예프-러시아가 하나로 단결할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만일 공석이 생기면 그들은 한 단계씩 승진하여 영지를 바꾸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계승 체계는 동슬라브족의 씨족 사회적 관습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서 윤번 승계 제도(Rota System)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옛날의 씨족적 개념이 거대한 영토의 민족 국가의 체계와 부합되지 않음으로서, 이 윤번 승계 제도는 키예프-러시아의 국력 약화를 가져 온 골육상쟁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제도는 어느 한 공후 가문과 일정한 지역 사이의 특별한 유대 관계를 무시했다는 결점과 아울러서, 통치자의 사후 장자 승계 대신에 삼촌들 중 하나가 공후의 자리를 승계하도록 만드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자손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어 윤번 승계의 적임자를 산출하는 작업 자체가 어렵게 되고, 늘어간 공후 가문의 친척 사이에서도 각각 경제적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가열되면서 이 제도의 문제점이 뚜렷하게 부각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공후들의 회합이 1097년에 이루어졌고, 그 회합에서 공후들은 부자 계승의 원칙에 합의하였다. 다만 이 합의에서 대공의 자리는 예외로 남겨졌기 때문에 최고 통치자의 승계를 둘러싼 삼촌과 조카 사이의, 또는 형과 동생 사이의 골육상쟁이 대공이 죽을 때마다 반복되었고, 이것이 바로 키에프 대공국을 쇠락하게 만들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야로슬라프 대공이 페체네그족을 제압한 후 사반 세기 동안 잠잠했던 유목민들이 골육상쟁으로 약화된 대공국의 국경선을 향하여 다시 침입하기 시작했다. 새로 등장한 키예프의 적수는 폴로베츠족이었다. 이 새로운 침략자들은 아시아로부터 온 터키계 유목 민족으로서, 먼저 기존의 페체네그족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러시아 평원의 동남부를 차지하였다. 그런 다음 폴로베츠의 군대는 1061년에 처음으로 국경을 침범한 이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대공국을 위협하였다. 오직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대공이 강력하고 유능한 지도자로 부상하여 골육상쟁을 잠재우면서 폴로베츠의 침입을 억제하고 난 이후에야 스체피 평원은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키예프의 대공으로 즉위하기에 앞서 대다수의 공후들로부터 지도자로서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조정하기 위한 1097년과 1100년의 공후들의 회합과 스체피 평원의 공동 방어를 위한 1103년의 회합 등을 성공적으로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폴로베츠족과의 전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특히 1111년 살니차의 전투에서 대승하여 대공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1113년에서부터 1125년에 죽을 때까지 줄곧 여러 전쟁터에서 싸워야만 되었다. 그는 리보니아, 핀란드, 볼가 불가르인들의 땅, 다뉴브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고 폴란드와 헝가리를 격퇴시켰다. 그는 후세에 남긴 자신의 작품 <유언(Pouchenie)>에서 총 83회에 걸친 폴로베츠족에 대항하였던 전투들과 또한 그들의 지도자 200명을 죽인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능력 있고 지칠 줄 모르는 통치자였는데, 예를 들면 2세대 후에 대공국의 수도로 발전하게 될 블라디미르라는 도시를 클라즈마 강 동북쪽에 건설하였고,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사회 복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사후에 유능하고 정렬적인 그의 아들 므스치슬라프가 1125년에서 1132년까지, 또 다른 블라디미르의 아들인 야로폴크가 1132년에서 1139년까지 골육상쟁을 피하면서 키예프 대공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대공좌는 극심한 경쟁의 대상으로 변해 버렸고, 혈연 사이의 골육상쟁이 이 목표를 실현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남용되었다. 이런 가운데 키예프가 전 러시아의 정치 권력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가는 한편, 동북부 러시아가 새로운 권력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대변혁이 일어났던 배경에는 동슬라브족이 외적의 침입과 공후들 간의 내분이 그치지 않던 서남부에서 동북주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식민 활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동북부 러시아의 권력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로스토프 공국과 수즈달 공국의 지배자였던 안드레이 보고륩스키 공작은 1169년에 키예프 시를 기습하여 파괴시킨 다음 동슬라브족 전체의 수도를 자신의 영지 안에 있던 블라디미르 시로 옮겨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키예프 대공이 아니라 블라디미르 대공의 칭호가 러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칭호가 되었다.
이처럼 키예프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배경은 드네프르 강가에 위치하여 흑해와 발트 해를 연결하던 무역로를 지배하면서 발전하였던 키예프가 십자군 원정 기간 중에 지중해를 통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새로운 무역로를 장악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에게 상권을 빼앗겨 쇠퇴하기 시작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대신 동슬라브인들은 삼림과 늪 지대로 보호되어 유목민들의 접근이 곤란하였던 동북부로 이주하여 농업에 바탕을 둔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도시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영지 관리에 성공한 귀족 가문에 본거지였던 모스크바가 새로운 권력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른바 모스크바 대공국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키예프는 그 후에도 명맥만은 유지할 수 있었으나, 1240년에 몽고족이 침입하여 완전히 파괴시킨 다음에는 오랫동안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키예프의 몰락의 원인들
키예프-러시아의 쇠락과 몰락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원인들이 제시되어 왔지만, 그러한 요인들의 정확한 본질에 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비에트 역사가들과 다른 몇몇 학자들은 키예프 대공국의 허술한 제도와 권력의 지방 분권적 경향 등이 그 원인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키예프 대공국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근대 국가와는 확연하게 다른, 즉 제한된 기간 동안만 유별나게 유능한 통치자들에 의해서 하나로 결합될 수 있었던 수많은 지방 정부들의 연합체적 특징을 가진 국가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각 지역의 중심지들 사이에 존재하던 거대한 지리적 간격들과 빈약한 연락 수단들은 키예프-러시아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기 보다는, 여러 지역들로 권력의 중심이 분산되어 병존하는 추세로 나아가도록 부추기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비교적 허약했던 일체화의 유대들이 풀어지게 되면서 러시아에는 10개 혹은 12개의 지역적 권력 중심지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권력의 중심이 흩어지면서 키예프는 외적의 침입에 대항할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소비에트 역사가들과 더불어 다른 몇몇 전문가들은 키예프의 몰락의 한 요인으로 사회적 갈등을 들고 있다. 그들은 특히 지주들에 의한 농민들의 점진적 지배 강화와 도시 빈민들의 지위 악화를 지적하고 있다. 키예프가 더 앞서 존재하였던 국가로부터 물려 받은 노예 제도 역시 약점의 한 요소로 거론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갈등들이 키예프의 국가 체제에 대한 신뢰도를 약화시키면서 동북부 산림 지대로의 이주를 재촉하였고, 그 결과고 동북부 러시아는 융성하기 시작한 반면 키예프-러시아는 눈에 띄게 쇠약해져서 몽고군에 의한 전면적 파괴가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안드레이 보고륩스키 같은 동북부 출신의 강자에 의하여 키예프의 정복 및 약탈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회적 갈등이 점차 증폭되면서 백성들이 탈출하고 이것이 새로운 세력권의 형성으로 연결되는 현상은 훗날 러시아 역사에서 카자크(도망친 농노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자유인 공동체)의 형성 과정에서도 재현된다.
키예프의 몰락을 경제적 관점에서 설명한다면 교역로의 쇠퇴와 교역 그 자체의 파괴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중심지의 형성 및 발전에 있어서 바랴그인들로부터 헬라인들에게로 연결된 대 헬라 무역로의 개설과 호황이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11세기부터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상인들이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유럽의 서부 및 중앙부와 비잔티움 제국 및 소아시아를 지중해를 통하여 연결해 주는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는데 성공하여 대 헬라 교역로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키예프는 십자군 원정 및 1204년의 베네치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 바그다드의 칼리프 국가의 몰락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등장 등 일련의 국제적 상황의 급변으로 교역 환경이 악화되어 가면서 결정적인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스몰렌스크와 노브고로드 같은 서북부의 도시들이 유럽의 상업 판도 재편과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도시의 발달로부터 이득을 보아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위에서 언급한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위의 사회적ㆍ경제적 분석 외에 정치적 분석을 참조할 필요도 있다. 많은 역사가들은 키예프 정치 체제의 결함이 사회적ㆍ경제적 원인에 앞서는 몰락의 근본적 원인이었다고 보고 있다. 야로슬라프 대공이 도입한 윤번 승계 제도와 같은 씨족 사회적 전통을 반영한 승계 제도는 삼촌의 승계권이 장자의 승계권보다 더 우선시 되었고, 시대에 뒤쳐진 그와 같은 독소 조항들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골육상쟁은 끊임없이 되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하였던 러시아 역사학자 포고진의 추산에 의하면 키예프-러시아는 현자 야로슬라프의 죽음 이후 170년 중 80년 동안을 내란 속에서 보냈다. 이후 러시아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는 장자 상속과 알찬 국가 경영을 실현시킨 모스크바 공구과 도시민들이 민회(veche)를 통하여 군주권을 제한하면서 민의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였던 노브고로드 대공국이 키예프식 정치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융성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알아 봐야 할 몰락의 중요한 원인은 군사 안보적인 것이다. 키예프는 수많은 전선에서 싸워야만 되었고, 특히 남동부의 스체피 평원을 통하여 파도처럼 밀려 오던 유목민들과 계속적인 소모전을 감내하여야만 되었다. 하자르족을 격파한 후에 페체네그족이 밀려 왔고, 페체네그족에게 결정타를 날리고 나서 얼마 후에는 폴로베츠족이 밀려 들어 왔다. 키예프가 폴로베츠족과 녹초가 될 때까지 소모전을 치루고 난 후에는 몽고족이 휩쓸고 들어 와 키예프 자체를 결단내 버렸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파상 공격이야말로 키예프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직접적이며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앞에서 논한 북동부로의 이주, 즉 러시아인들이 남러시아 평원을 떠나 삼림과 늪 지대로 방호되던 북동부로 이주하여 새로운 권력의 중심지를 건설하도록 만든 원인도 외적의 위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후 러시아 민족사는 모스크바를 핵으로 한 민족 통일 국가의 형성과 발전을 거친 다음, 이전과는 정 반대로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팽창시켜 나가는 침략국의 역사로서 주변 민족들과 세계사에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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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fds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6.09 전평소 궁금한게 키예프공국이면 공작이 다스리는건데 누가 왕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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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작성시간 12.06.09 이반 4세가 '차르'라고 칭하기 전까지 없다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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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데미르 카라한 작성시간 12.06.09 쿠차,사마르칸트,부하라등 서역도시들과 비슷하게 바로 옆에 초원이 떡하니 있으니 강력한 군사력이 없는한 쇠할수 밖에 없는게 키예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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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fds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6.09 왜 왕을 안칭하고 공작에서 머물렀나요??왕이 없으면 나 왕임 이럼 되는거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