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그동안 카페에서 넙죽넙죽 받아먹은게 6~7년은 된거 같네요. 활동은 거의 유령수준이지만 이렇게 넙죽넙죽 받아먹으면 양심이 찔려왔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제가 그동안 전공에서 배운 과정들 중에서 회원 여러분들께 간단한 지식들을 제공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미숙하고 오류가 많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때는 리플로 토론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다루어 볼 주제는 고대 게르만인들의 법과 사회제도입니다. 이 자료 내용의 대부분은 최종고 교수의 '서양 법제사'의 발췌이고,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 쓴 정도에 불과합니다.(뭔가 대단한걸 쓰기엔 제 내공이 한없이 딸립니다.. 오늘날 대학과 대학원의 법학과정이 대부분 법제사나 법철학이 아니라 법도그마틱[법률해석학]이라는 점에서도 한계가 있구요..ㅠ.ㅠ)
1편은 고대 게르만인의 정치조직과 게르만 법의 성격에 대해서 알아보고, 2편에서는 게르만의 사私적 관계(즉, 신분제도, 토지제도, 재산제도, 가족및 상속제도와 법)를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3편에서는 게르만의 사법(事法 : 즉 재판제도)에 대해서 검토해 볼 예정입니다.

<그림 1> 100~400년 경의 고대 게르만 전사들의 모습들
I. 서설 : 고대 게르만 인
1. 이 글의 방향과 목적
고대 게르만인 혹은 게르만 족에 대해서는 로마나 그리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날 한국 웹이나 서적자료에 의해 ‘어느정도’는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인터넷이나 서적자료들은 고대 게르만인에 관한 자료들은 역사 중에서도 대부분 정치사나 4세기의 민족대이동과 관련된 민족사 정도만이 언급될 뿐, 그들의 사회모습이나 정치제도와 같은 측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과감하게 고대 게르만인의 정치사나 민족사적인 측면(로마와의 항쟁, 부족들, 민족대이동과 부족왕국 건립)은 생략하도록 하고 고대 게르만인의 사회와 법제도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대 게르만인이란, 이들이 카이사르(Julius Caesar)와 타키투스(Tacitus)의 문헌에서 나타나는 시기부터 프랑크왕국이 성립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합니다.
2. 고대 게르만인의 법제사적 분류
게르만인은 인도-유럽어족으로서 서인도유럽어족(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켈트인, 게르만인)에 속하는 분파입니다. 이들은 인류학상으로는 북방인종에 속하며, 남방인종에 비하여 키가 크고 금발에 파란눈이 특징입니다. 원주지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남부에서 유틀란트반도와 북독일에 걸치는 지역이었으나, BC 2세기~BC 1세기에 이동을 개시하여 동남쪽으로는 멀리 흑해(黑海) 연안에, 서남쪽으로는 라인강(江) 유역까지 퍼져 나가서 북(北)게르만(덴마크인, ·노르만인 등)·서(西)게르만(앵글인, ·알라만인, ·색슨인, ·프랑크인 등)·동(東)게르만(동고트인, ·서고트인, ·반달인, ·부르군트인 등)의 세 그룹으로 갈라졌다고 보는게 오늘날 통설의 견해입니다. 단 게르만인들이 혈통적으로 동질한 집단이었느냐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부분의 민족연구에서 보여지듯 부정되는 견해가 많습니다만, 그러나 어쨌든 이들은 공통의 언어(방언)와 공통된 신화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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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민족대이동 시기 이전의 게르만 부족의 분포
게르만인은 법제사적 기준으로 볼때에는 크게 동게르만인과 서게르만인으로 나뉘어지고 양자가 긴밀한 원시적 친근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어느정도 확실성을 갖지고 주장됩니다.
동게르만인에는 반달인(Vandals, Wandalen), 부르군트인(Brugunts, Burgunder), 고트인(Goths, Goten)이 이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들 부족들은 모두 북방계 부족이기 때문에 이들의 법은 스칸디나비아법에 편입할 수 있습니다. 즉, 동게르만법은 북게르만(노르만)법에 편입된다고 봅니다. 스칸디나비아법은 12세기이후에 비로소 기록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고대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동게르만 부족들은 아주 멀리까지 이동하여 지배자의 권력을 비교적 강하게 형성했다는 것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동게르만(고트)법은 스페인에서 출발하여 오늘날에는 라틴아메리카에도 그 요소들이 남아있습니다.
서게르만인에는 본래의 독일부족들 즉 프랑크인(Franks, Franken), 작센인(Saxons, Sachsen), 슈바벤(수에비)인(Suebii, Schwaben), 바이에른(바바리)인(Bavarii, Bayern) 그리고 이들보다 후기에 이동한 랑고바르드(롬바르드)인(Lombardii, Langobarden)과 앵글로색슨인(Anglo-saxons, Angelsachsen)들이 이에 속합니다. 서게르만법의 요소들은 영국에서 출발하여 여러 국가들에게도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프랑크·프랑스 법은 나폴레옹 입법을 통하여 19세기에도 넓은 세력권을 획득하였고 오늘날에는 이른바 대륙법계라고 불리며 오늘날 세계법계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3.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의 방법
게르만 인들은 기원전 2세기 이후, 그들의 정주지역을 남쪽 및 서쪽으로 옮겨 중부 산악지대와 라인강·도나우강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라인강·도나우강 및 리메스(Limes)1)가 로마제국의 방벽으로 되고, 민족대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기원 후 수세기 사이의 비교적 정치적 정세가 안정된 시대부터 게르만법 연구는 시작됩니다.

<그림 3> 리메스(Limes)의 모습 - 만리장성 로마ver.
어쨌든 게르만인들은 혈통적으론 아니었더라고 하더라도 문화적으로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이며, 이러한 측면에서도 공통적인 게르만 사회 혹은 공통적인 게르만 법을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대의 저작가, 특히 카이사르(Julius Caesar)와 타키투스(Tacitus)가 이용되고, 또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게르만계 부족법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특색에서 출발하여 비교적 방법에 의하여 역추적하는 방식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즉, 후대에 나타나는 각종 게르만 부족법들(고트법, 프랑크법, 롬바르드 법과 같은)을 비교하여 그중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 올라가면 고대의 공통게르만법이 나온다고 하는 것인데, 이러한 상정은 후대의 부족법들이 진정한 게르만법을 재현하고 있다는 전제 한에서만 성립하는 사고방식이긴 합니다. 이러한 방법론적 문제는, 나중에 다시 제가 글을 올리게 될지 모르겠지만 게르만법사의 연속성 문제와 직결됩니다.2)
II. 게르만 인의 정치조직
1. 키비타스(Civitas)
고대 게르만인들은 근대적인 의미-혹은 중앙집권적 의미의 '국가'를 이루지 못한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국가의 정의를 "민족을 바탕으로 하는 인적 결합체로서 국가적·정치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법적 공동체"라고 한다면, 게르만인들은 국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게르마니아(Germania)」에서 이러한 게르만인의 국가를 키비타스(Civitas)라고 부르며, 부족의 일부분으로 구성된 독립된 공동체로서 여러개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키비타스의 목적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어 많은 임무를 부족(집뻬; Sippe)과 같은 부분단체의 자치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키비타스는 부분단체가 가지는 특수한 권리를 존중하고 있었으므로 법치적이었으며, 여기서 오늘날의 자치행정의 싹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림 4> 오늘날 독일공화국 연방지도 - 독일인들의 연방제의 유구한 전통은 고대시절부터 올라가는 뿌리깊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가 미약한 이유는 이러한 민족적 경험의 차이가 큽니다.(우리나라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유교적 법가적 질서에 의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해왔죠)
키비타스 안에는 가우(Gau, pagus)와 훈데라트샤프트(Hundertschaft, bun tari)라는 정치적 구획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큰 키비타스 안에는 몇 개의 가우가 있어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가지고 활동하였으므로 키비타스의 내부구조에서 연방제의 기초를 엿볼 수 있습니다. 훈데라트샤프트는 어느 키비타스에 있어서나 처음에는 군사적 단체였던 것이 나중에는 중재재판권을 담당하게 되고, 또 여러 부족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지배영역으로 되어 중세(여기서 말하는 중세는 암흑시대-프랑크 제국 시기)에는 지역단체화 하게 됩니다.
(1) 가우(Gau) 혹은 파구스(pagus)
가우란 말 그대로 지역 등을 매개로 나뉘어지는 정치적 구획을 말합니다.
(2) 훈데르트샤프트(Hundertschaft)
훈데르트샤프트란 게르만 고대에 있어서 키비타스의 하부조직으로, 소위 백인조를 말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개의 집뻬(Sippe:씨족)로써 구성되는 인적단체 또는 병제상 단위였으나, 민족대이동 이후 정주시대에는 배상사건을 취급하는 백인조재판소의 관할구역을 의미하였고, 프랑크 시대에는 지방의 伯영의 하급 행정구역을 가리키게 됩니다.
2. 민회(Thing, 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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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게르만 민회의 모습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ucus Aurelius)의 개선기둥에 부조된 모습을 그림으로 옮긴 것.
키비타스의 중심기관은 키비타스 의회(concilum civitatis), 즉 민회(Ding, Landesgemeinde) 였는데, 여기에서 키비타스의 의사를 형성하였습니다.
민회는 일정한 주기, 대개는 초하루와 보름의 달모양이 변하는 때에 모이는 정기집회(echtes Ding)와 긴급한 경우에 모이는 임시집회(gebotens Ding)가 있었고, 집회의 주재는 귀족이 하였습니다. 귀족들은 일종의 수장회의를 구상하여 모든 문제를 예심하고, 작은 문제는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큰 문제는 총회에 제출하였습니다. 인민은 제안에 대하여 찬부의 의사를 자유로이 표시할 수 있으며, 찬성의 의사는 무기를 서로 부딪침으로써 표시하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복종의 의무를 지게 됩니다. 결의는 전원일치의 방법으로 햇습니다.
의결기관으로서의 민회가 담당하는 기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군사적 집회로서 무장하고 모일 의무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종교적 집회로서 성역으로 정한 원 내에서 수장인 사제의 벌령권(Bann)에 복종하는 것으로써, 이는 성대한 의식으로 행하여졌습니다. 셋째로 정치적 집회로서 선전의 결정, 왕 기타 관직의 선거, 노예의 해방, 인민에 대한 무장능력의 부여 등을 행하였습니다. 넷째로 재판집회로서 수장이 법관으로 되어 재판을 지휘하였으며, 법관이 판결을 물으면 이에 대하여 재판집회인들이 판결을 제안할 의무를 졌습니다-이에 대하여는 3편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3. 집행기관
민회의 결의를 집행하는 것은 수장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것처럼 수장이 인민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자신들의 대변자인 수장을 통하여 스스로를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귀족과 평민 사이의 대립은 해소되고, 귀족제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민주적 성격이 유지되게 되는 것입니다. 인민이 민회를 통하여 모든 문제의 결의에 참여하고, 또 수장을 통하여 자기 통치를 하였다는 점에서 키비타스는 인민국가(Volksstaat)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왕 · 장군 · 종사
동게르만의 키비타스에는 일찍부터 왕제(Konigtum)가 확립되어 국왕 밑에 수장이 있었으나, 서게르만에서는 수장만 두다가 게르만시대 말기에 왕제가 생기게 됩니다. 다만, 끝끝내 수장제를 견지한 부족들도 있었는데 바로 작센인(Saxons)들이었습니다.
국왕은 으뜸가는 귀족이며, 국왕과 인민 사이에는 쌍무적 관계가 있어서 국왕의 권력은 중세처럼 신에게 위임받거나 신이나 영적 존재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법과 인민의 의사에 근원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근원에 배반하는 국왕에 대하여는 인민의 반항권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 국왕은 지배자라기보다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민족이동기 시대에는 전쟁을 지휘할 필요에서 장군제(Herzogtum)를 두게 됩니다. 장군은 전쟁이 계속되는 기간중에만 임명되는 군사지휘관이었으며, 문벌보다는 공적에 따라 임명되었습니다. 장군의 권한은 예외적인 것이어서 민회의 결의에 구속받지 않았고, 씨족 사이의 결투(Fehde)도 동원중의 군대에서는 정지되었습니다. 나중에 장군제는 고정화되어 국왕 겸 장군의 군사벌령권(Heerbann)이 형성됨으로써 후대의 비대한 왕권의 발단이 되게 됩니다.
국왕, 장군 및 귀족은 종사(Gefolgsmann)를 거느릴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에 의하여 종사는 군사훈련을 받고 무장을 하였으며, 귀족의 힘의 지주가 되었습니다. 종사는 주군에 대하여 생사를 건 성실선서(Treuid)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종사단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후대에 한 주군에 속하는 봉신들의 레엔회의(Lehnshof)를 형성하게 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종사제(Gefolgschaft)는 후일의 봉건제(Lehnswesen)의 전 단계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림 6> 서기 1세기의 게르만 수장(족장)의 모습 - 장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http://www.gettyimages.com/detail/news-photo/circa-100-ad-a-german-chieftain-with-a-winged-helmet-a-news-photo/51240698 참조하세요.
III. 게르만 법의 성격
게르만인의 가장 오래된 법은 인민법(Volksrecht)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제정법이지 신적 또는 인적 입법자의 작품이 아니며, 자율적 질서이지 타율적 질서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각 개인의 양심과 모든 사람의 확신 가운데 살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정신(Volksgeist)에서 유출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인민법 개념은 게르만인의 세계관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의 세계는 법의 세계이고, 법에 대하여는 신들도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실로 세계의 존립은 법의 유지에 있다고 생각된 것입니다.
게르만의 최고법은 사물의 이성적인 질서, 객관적인 진리이며, 사람들은 그것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법 발견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 것일까요? 법 발견은 재판소에서 이루어지며, 법은 거기서 잠재의식 속에서 창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게르만인에게 있어서 법은 ‘판고법(判告法, Spruchrecht)이며, 판결은 단순한 법의 적용이 아니라 일반적 구속력을 가진 법의 인식이었습니다. 법을 의미하는 게르만인의 공통된 말은 lagh(바른상태라는 뜻; 영어 law, 라틴어 legs 참조)·ewa(라틴어의 aevus 참조; 오늘날의 Ehe라는 말)·bilida(billing, Unbilde, Weichbild, 영어의 bill 참조), 오늘날의 법이라는 뜻의 독일어 Recht(고트어 Raihts)라는 말은 모두 주관적 권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고대 게르만의 법은 ‘관습법(Gewohnheitsrecht)’ 이었다 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적당한 표현은 아닙니다. 관습은 결코 법원(법의 근원요소)이 아니며, 그 배후에 서 있는 확언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법은 원시시대의 문화가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불문법이었습니다. 그것은 구두로 전승되었습니다. 북구(norse)에서는 laghsaga에 의하여, 즉 ‘법을 말하는 자(Gesetzsprecher)'가 법의 교시를 함으로써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법규는 후대의 문서 사료에 있어서도 종종 보여지는 바와 같이 단순한 정형적·인상적 문체(einfache, formelhafte, einpragsame Fassung)를 취하게 됩니다. 중세에 와서도 두운법(頭韻法, Stabreim)에 의한 법격언이 기억을 돕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3) 일절의 개개의 법적 행위가 듣고 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요구는 법의 사소한 요식문언(plastische Formensprache)로 나타납니다. 이 요식문언 속에는 이 민족의 조형의욕이 예술에서처럼 분명히 나타납니다. 법은 형식 속에 살고 형식과 내용은 합치 되는 것이었습니다. 법률행위가 철저히 법식에 의하여 제약되었고, 그러면서도 이 법률행위가 증인의 면전 또는 집회에서 상징물(이것은 사상내용을 눈에 보이는듯한 형태로 표현하는 목적을 가집니다)을 써서 ‘공연한 것(offentliche Vornahme)'이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요구에서 유래합니다.4)
게르만법은 신적 기원의 법은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종교적인 관념들에 의하여 관철되고 있었습니다. 게르만인의 민간종교는 귀신(Damon)의 신앙이었습니다. 자연력에 의한 영이 주술에 의하여 지배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으며, 이것은 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법은 가해주술(Schadenzauber)을 벌하고, 첨점(籤占, Los)에 루네문자 주술(Runenzauber)5)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게르만 재판의 선서(Eid)역시 그 성격은 주술적 행위였습니다. 망자는 데몬으로 계속 살아서 ‘유령(Wiederganger)'으로 된다고 믿었습니다. 망자는 희생(상속법의 기원!)과 복수를 요구하여 소송의 당사자가 될 수 있으며, 또한 망자가 살인범의 유죄를 입증할 수 도 있었습니다(관통재판 棺通재판 Bahrgericht).6)
이러한 원시적인 민간종교 위에 귀족들이 믿는 고등종교가 따로 존재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망자에 대한 공포(Furcht)는 외경(Ehrfurcht)으로 바뀌게 되었고, 조상의 묘소는 조상숭배(Ahnenkult)의 장소로 됩니다. 이제 보탄(Wotan; Odin)이 망자의 신으로 나타납니다. 종교적인 남성단체(Mannerbund)가 신성한 시기에 망자와의 신비한 합체의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의식이 바로 후대의 다수의 단체(길드:gilden, 쭌프트:Zunften, 한자:hansen 등)의 종교적 기원이 되었습니다. 씨족(Sippe)의 예배 외에 국가적 예배가 있으며, 수장의 선도 아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는 공동의 희생이 바쳐졌습니다. 수장(왕제의 국가들에서는 왕)은 동시에 또한 사제(priester)였습니다. 중세에도 왕위가 종교적 영위(靈威, sakrale Weihe)에 의하여 옷입혀져 있었던 것은 여기에서도 유래하며, 또 이 종교적 관념의 강도가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란데스헤르(Landesherr)의 교회통치권의 지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법과 주술적·종교적 관념의 밀접한 관련, 이것은 고대법을 이해하는 대에 열쇠가 됩니다. 이러한 관련은 그리스도교화된 중세에 들어서기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에 의하여 구속된 사고에서 새 시대의 합리적인 사고를 향해 서서히 이동되는 과정은 유럽민족의 법사에서 가장 긴장된 과정인 동시에 또한 인류사의 일편이라고 최종고 교수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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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게르만의 조상숭배와 관련된 유물들
각주
1) 로마인이 게르만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현재의 코블렌츠(Koblenz)와 레겐스부르크(Regensbrug)를 연결하여 설치한 방벽으로 기원 전 8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50년 경에 준공하였다.
2) 게르만 법의 연속성 문제는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로 고대(혹은 원시) 게르만 법의 연속성이 프랑크-중세를 걸쳐 계속 내려왔으며 독일법은 중세까지 게르만법적 특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근대가 들어오면서 로마법계수와 함께 변화가 생겼다는 견해. 두번째로 이를 부정하며 원시 게르만법이나 전체게르만법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로마법계수를 통해 독일법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견해.
3) 예를들면 Burgen soll man wurgen(보증인은 목을 졸라라). Was die Fackel zehrt, ist Fahrnis(장작불에 타는 것은 동산이다). Hand wahre Hand(손이 손을 지켜라).
4) 상징물로서는 예컨대 재판관이 가진 지팡이(Stab), 국왕의 권표(Insignien)는 권력의상징으로서 깃발(Fahne)와 모자(Hut), 가부의 인으로서 열쇠 등이 잇었고, 상직적 행위로서는 예컨대 지배자를 사다리 위에 올려 추대하는것, 페에데(Fehde;결투)에ㅔ서 장갑을 던지는 일 등이 있다.
5) 루네주술이란 주술력이 있는 문자(Rune)를 써서 옷에 지니거나 남에게 건네 주는 것으로 Tacitus의 Germania 제 10장에 기록되어 있을 뿐 다른 사료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6) 망자도 살인범을 입증할 수 있다는 민중의 주술적 신앙에 기초한 증거절차로 피의자는 보통 나체 혹은 내의만 입고 사체에다 손을 얹거나 상처에 입을댄다. 그가 진범이라면 사체는 상처에서 피를 흘린다는 것이다.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 제 1043~1045에서 이런 예가 보인다.
이번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는 게르만인의 사적 기초들, 즉 고대 게르만인들의 신분법(신분제도), 토지법과 재산법(재산제도), 그리고 가족법및 상속법(가족제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