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트레비존드 전사들의 복장은 트레비존드의 아야 소피아에 있는 15세기의 묘소에서 묘사된 것이며, 비잔티움인들과 라즈족 중에 만연했던 투르크의 영향을 보인다. 위의 말을 탄 인물들은 하얀 모자, 녹색 장화 그리고 붉은 코트(한 사람은 하얀 무늬가 있지만)를 착용한 반면, 서 있는 사람은 하얀 코트와 노란 튜닉을 착용한 상태다.
트레비존드는 1,204년에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서 실질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흑해 남동부 연안의 이 아주 작은 ‘제국’은 안드로니쿠스 황제(1,183~1,185)의 손자들인 알렉시오스와 다비드 형제(단, 후자는 직후에 짧은 시기 동안 파플라고니아의 독립 통치자가 되었지만)가, 부친의 외사촌누이인 그루지야 여왕 타마르가 제공한 군대의 도움으로 건국하였으며, 트레비존드의 황제는 메가스 콤니노스로 알려졌다.
그 생존은 때문에 군사력보다는 그 위치한 험난한 폰토스 지역의 지형과 외교에 의존했으며, 셀주크족이 1,214년에 그 서부 절반을 침략해서 압도한 후(이 과정에서 그 변경은 니카이아 제국과 분리되었다.)에 특히 더 그랬다.
‘제국’은 이로 인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약소국으로 전락했으며, 안드로니코스 기돈의 재위(1,222~1,235)끝무렵 셀주크의 종주권이 인정되어 그의 후계자들은 요청받을 때면 셀주크 군대에 200명을 제공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이는 니카이아 황제에 의해 제공된 400명과 비교된다.)
종주권은 1,243년에 셀주크가 쾨세다 전투에서 몽골에게 대패한 결과 대칸에게로 이전되었고, 아마 모든 개연성으로 봤을 때 이는 결국 일칸들에 대한 것이며 여전히 훗날에도 티무르에게 이어졌을 공산이 크다.(그는 트레비존드인들에게 1,402년 오스만에 대해 쓸 갤리선 20척을 제공하도록 요구했다. 단,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강요받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결코 많지 않았던 트레비존드의 군사력은 강력한 지방 귀족층과 왕당파 사이의 일련의 내전에 의해 1,330~1,355년에 불구가 되었다.
트레비존드의 야전군은, 15세기의 외국인들에 의한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치가 15,000~25,000에 달하긴 하지만, 가장 많은 수효로 기록된 게 이웃의 백양조 아미르를 압박하려고 1,366년도에 모집한 겨우 이천 명에 불과했으며 이것이 현실이었다.
다른 증거들은 트레비존드의 군대가 늘상 작았음을 확인하며, 여기에는 그 군대가 ‘수효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장비도 불충분하다고’서술한, 1,350년경의 한 이슬람 교도의 언급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1,355년에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거의 사백 명을 잃은 것은 주요한 재앙으로 여겨졌던 반면, 1,380년에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던 군대의 절반은 겨우 보병 600명으로 이뤄졌다.(다른 절반은 기병과, 또 다른 매우 큰 보병 무리'였다.) 때문에 14세기 중반에 트레비존드가 강력한 투르크 이웃들과 결혼 동맹을 통한 외교-특히 여러 세대 종안 이 수단으로 백양조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를 선호하면서, 군사적인 맞상대를 크게 단념했던 것은 약간 놀라운 성취다.
트레비존드 제국의 변경 방어는 비잔티움인과 토박이 사이의 혼혈 후손인 지역 군벌들(주로 짜니)의 손에 있었고, 이들은 그들의 토지를 프로니에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그들의 요새들과 주둔지들을 유지했다.
그들은 안전한 통행과 호송을 대가로 터무니없는 금액을 강탈했기에, 여행자들에겐 그야말로 강도보다 나을 게 없었다. 트레비존드 제국의 대부분은 스트라티기, 스타티오테 그리고 카스트로필라케스 같은 전통적인 비잔티움의 군사적 용어로 알려졌던, 소규모 자작농들의 여러 영역 단위들로 조직되어 국방을 그 자체 방어에 의존했다. 이들은 요청 받을 때면 군역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매우 소규모인 중앙군도 존재했던 것 같다. 이것은 아마 1,370년에 군사 행동에 나선 알렉시오스 3세(1,349~1,390)와 동행했던 기병 100명과, 마누일 3세(1,390~1,417)가 1,404년에 에스파니아의 사절인 루이 곤잘레스 데 클라비호를 호송하기 위해 할당했던 140명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그런 왕실 부대들은 아마 용병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며, 이 시기 내내 이따금씩의 언급들에서 등장한다. 그런 용병들 일부는 그루지야인이었지만, 대부분은 투르크이었고 이들 중 다수가 기병이었던 것은 놀라울 일이 아니다. 소수의 라틴인들이 이 먼 동쪽까지 진로를 찾았을지 모른다-특히 파플라고니아의 다비드는, 1,208년 경 라틴인 300명을 고용해서 소유했다. 아마 이들은 이탈리아인이었을 것이며, 이유는 베네치아와 특히 더욱, 제노바가 트레비존드에 식민지를 유지했던 데 있다.
트레비존드 황제의 투르크 그리고 그루지야 이웃들에 의한 동맹 분견대들도 때때로 가용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약속은 되었다. 이들 다수는 황실과 결혼 동맹 관계였고, 예를 들면 1,404년 4월에는 마누일 3세의 주요 동맹 넷 중 둘은 그런 모계적 유대 관계의 결과였다.(그의 조카인 림니아의 알타무르, 그리고 매제인 칼리비아의 술레이만)
비슷한 경우로, 요안네스 4세(1,429~1,458)는 1,457년에 오스만에 대항하는 연합을 계획했고, 그 주요한 구성원은 그의 매제인 그루지야 왕과, 이중의 결혼 동맹으로 인해 그의 조카인 동시에 사위도 되는 백양조 아미르 우준 하산이었다.
오스만은 1,442년이 되어서야 트레비존드에 대한 첫 공격에 착수했다. 비록 도시 성벽은 이 포위와 1,456년의 또 다른 포위를 견뎌내긴 했지만, 트레비존드 제국은 두 번째 공격 후에는 상당한 공납을 질 의무를 졌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60,000마리의 말, 보병 80,000명 그리고 선박 100~300척이었던, 압도적인 오스만의 군세가 도시에 엄습하여 1,461년에 도시에 세 번째이자 최후의 공격을 가하게 촉발했던 건, 바로 요안네스 4세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다비드(1,458~1,461)가 메메드 2세에게 한 공납 면제 요구였다.
요안네스 4세와 다비드가 매우 힘들여 성립시킨 동맹 관계들은 즉시 해체되면서 트레비존드를 고립시켰으며, 도시는 겨우 몇 주 동안의 포위 후 8월에 항복했다. 메가스 콤니노스 다비드는 처음에는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두 해 후에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