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A 4~9세기 로마군 (2) 4~5세기 로마군 변화 - 군 기율의 저하는 인구 감소 및 방어 수요 증가가 원인이었다
작성자마법의활작성시간13.06.14조회수547 목록 댓글 2
서머빌 보석에 있는, 4세기 로마 시절에 기독교인 황제의 개선식을 묘사한 광경. 제국과 기독교적 표식 모두가 쓰이고 있음에 주목하라.(출처: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니아 대학 미술관)
후기 로마군의 공식 병단들은 정치적인 야망이 자주 동기 부여가 되었던 반면, 제국의 핵심부가 비군사화되면서 부대원의 대부분이 당시 변경 지역-특히 게르마니아-에서 모집되었다.
면제자 목록이 제빵사에서 원로원에 까지 이르자 징집 문제가 점점 심각해져갔고, 사람들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불구가 되었으며 신병들에겐 탈영을 막기 위해 밤마다 족쇄가 채워져야만 했다.
급여는 감세 혜택, 버려진 토지의 할당, 작은 현금 수여에도 불구하고 불충분했으며, 베테랑들은 이전 세기보다 덜 받았다.
규율은 이론적으론 혹독했지만 실제론, 혹독한 처벌을 가하기엔 훈련된 군인이 너무 귀중했기에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한편 많은 시민들은, 제국이 그 군인들을 지나치게 응석받이로 만들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한다고 불평했다.
외곽 속주들을 잃으면서 징집은 중앙 부분-이탈리아를 포함하여-을 향해 돌아왔지만, 그곳의 사회적 긴장이 애국적 감정의 기반을 흔들었다.-Undermine. 하지만 징집은, 403년도까진 여전히 가능했다.
당국이 발견할 수 있는 어디에서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던 건 놀랄 일이 아니다. 러시아 스텝 지대에서 온 이란어를 말하는 사르마티아 유목 기병들이 브리타니아-한 부대가 북부 랭커셔의 파일드 지역에 주둔했었다-를 포함한 제국의 다양한 부분에 정착했다.
고트족은 더 널리 퍼졌고 심지어 일부는 아라비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378년도에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서고트에게 당한 재앙적인 패배에 따라, 일부 저질 주둔 군인들이 야전군으로 불러 모아졌지만 이들은 그 임무에 적합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토착 부대들은 그들의 지역에서 강도들과 성공적으로 싸웠다. 제국은 대신 이전처럼 개별적으로 모집하지 않고, 야만족들이 그들 자신의 지도자들 밑에서 싸우는 분견대인 포이데라티를 병적에 올렸다. 로마인들의 원한은 최소한 한 차례의 고트족 학살로 이어졌지만, 게르만족은 7세기 전까진 군대의 필수적 요소로 남았다.
후기 로마군은 이전 로마군과는 규모와 조직이 달랐다. 당시 리미타네이로 불리던 변경 부대들은 에퀴테스로 불리는 기병, 밀리테스로 불리는 보병 그리고 보조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부대들은 옛 변경 군단-Legio-들보다 작았으며 곧 지역 사회에 통합되었다. 야전군인 코미타텐세스는 보다 큰 도시에 주둔했던 반면, 스도코미타텐세스는 야전군을 강화하기 위해 변경 지역에서 뒤로 물린 부대들로 구성된 것 같다.
4세기 말에 작성되었으나 서부 속주들에 대한 내용은 430년 경에 최신화된 노티티아 디그니타툼에 따르면, 군대의 절반 바로 미만 정도가 제국 서부에 주둔했고 이것들 중 2/3가 변경 부대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4세기 끝 무렵의 군대의 1/6 정도는 전문 직종적인 역할을 했으며, 노티티아 디그니타툼은 그들이 주둔했던 지역만 보인다. 대규모의 기동군들은 서방에 기반을 두었지만 중무장한 기병인 클리바나리와 카타프락토이의 대다수는 동방에 있었다.
마상 궁사인 사기타리는 변경군 및 야전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발견되었던 반면, 보병 궁사는 여전히 야전군에서조차도 마상 궁사보다는 많았다. 창보병인 란키아리와 투석기 공병인 발리스타리는, 라인 강에 있는 한 부대 외에는 모두 동방에 있었다. 슬링수 한 부대가 동방에서 언급되며, 낙타를 탄 드로메다리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기반을 두었고 도나우 강을 끼고 벌어지는 강 전쟁에서 전문가였다. 엘리트 척후이자 '특공대원’인 엑스플로라토레스, 프라이벤토레스, 수페르벤토레스는 대부분 서방에 있었다.
지휘 구조
마기스테르 페디툼(보병 총감)과 마기스테르 에퀴툼(기병 총감)이란 새로운 상급 지위는 콘스탄티누스(324~337)가 아마 도입했던 것 같지만, 4세기의 끝 무렵 이 지위들은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통합되고 있었으며 이렇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제국 동방에선 그랬음이 확실하다. 실제로는 상당한 권한이 야전 지휘관인 코메스와 변경 지휘관인 둑스에게 위임되었으며, 4세기 끝에서도 스틸리코 같은 강력한 장군은 여전히 서방 군대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다.
테오도시우스(379~395)의 사후 제국은 공식적으로 동서 절반의 분할을 겪었고, 군대의 질은 급격히 낮아졌으며 방어는 점점 지역 수준으로 위임되었지만 군사 계급들의 수와 복합도는 증가되었다.
트리부누스들 대부분은 콘스탄티누스의 프라이토리아니 해체와 함께 사라져가고 있었고, 당시 여전히 잔존했던 높은 지위들로는 황실 마구간, 스콜라이 근위대, 몇몇 야전군들 그리고 참모단이 있었다.
참모단은 트리부누스 계급까지, 상급 연대 지휘 단위를 위해 훈련된 부사관층-NCOs-을 발달시켰다.
트리부누스 바로 아래는 프리미케리우스나 도메스티쿠스 계급인 경우가 잦았던 비카리우스가 있었으며, 프리미케리우스 계급 아래는 세나토르였다.
둑스는 아마도 세나토르와 켄테나리우스(혹은 켄투리오)-당시에는 다양한 계급이 있었고 그중 으뜸은 프린켑스라 불렸다-사이였던 것 같다.
황제 주변에는 옛 프라이토리아니를 대체한 근위대인 팔라티나이가 있었고, 가장 가까웠고 가장 강력했던 자는 참모 장교들을 지휘했던 코메스 도메스티코룸이었다.
프로텍토레스 도메스티키는 자주 참모 장교로 봉직했고, 19명의 젊은 남성들이 그 자리들에 직접 임관될 수 있었던 반면 나머지 자리는 여러 계급들을 거친 40살 정도인 자들이 채웠다.
제국 최후의 세기들 중에는, 황실 세력과 꽤 독립적인 다양한 개인 군대들이 나타났다. 부켈라리로 알려지는 많은 것들이 지역 실력자들에 의해 육성되었고, 이들은 지역 정부의 공식 부켈라리들과는 달리 정부 대신 고용주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