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기 로마 기병. 러멜러 흉갑과 두터운 패드 처리된 이란식 바지를 입고 있다.
4세기 후반의 침공은 제국의 지휘 체계에 심각한 피해를 끼쳤으며,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은 서유럽의 관리 및 운영을 산산조각냈다.
제국은 호노리우스(394~423) 아래에서 황제의 고트족 용병들과 소수 토착민 부대들을 써서 상당한 회복을 이뤄냈지만, 호노리우스는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곤 하지 않았으며 브리타니아를 수복하려는 시도는 아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빈약한 자원은 그의 재위 후에는 찬탈자들을 진압하는 데 자주 충당되었다.
고고학은 급여를 받지 못한 변경 리미타네이의 대량 탈영에도 불구하고, 그 군인들이 당시 그들의 가족을 요새 안으로 데려오고 있었음을 보인다. 장교단의 질은 분명히 하락하고 있었으며 일부 인원은 반복적으로 부하들의 급여를 횡령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444년도에, 납세자들이 지쳤고 그의 부대원들에게 급여로 줄 돈이 없음을 인정했다. 많은 로마인들이 아틸라의 떠오르고 있는 듯 보이는 제국에 합류하기 위해 그에게 투항했으며, 훈족은 똑같이 위험한 서고트족의 도움으로만이 물리칠 수 있었고 최후의 로마군은 간단히 시들어 버렸다.
서로마 황제가 마침내 그의 게르만족 포이데라티에게 폐위당했던 때인 476년도까지, 도나우 강 변경 지역의 리미타네이 부대들로부터 급여를 요청하는 최후의 애처로운 구걸이 왔었음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후계자들
5세기 말 즈음의 로마군은 상당히 기강이 문란해져 있었고, 때문에 황제들은 군대의 소집이 불온 사태로 이어질 때가 잦았던 이유로, 전쟁하러 나가길 두려워했다. 사실 5~6세기는 군사 반란이 최악을 이룰 때였으며, 지휘 구조에의 많은 변경 조치는 그런 말썽을 피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동방 제국은 뇌물로 이이제이하는 수단에 자주 의존했으며 때문에 그 쪼그라든 변경 지역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527 ~565년)는 동방 혹은 이제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를 수 있을 군대를 재조직했고, 서방 제국이었던 많은 부분을 수복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기 즈음 제국의 부활한 경제 상황은, 규모가 작지만 고도로 훈련을 받았으며 장비도 잘 된 군대를 키우는 걸 가능하게 했다.
당시의 포이데라티 부대들은 부족 집단으로 병적부에 오른 야만족들이 아니라, 야만족 자원자들과 토박이 로마인 부대들을 포함했다.
하지만 그 군대는, 고대 로마군의 근간을 이룬 옛 시민 계층이 거의 사라졌던 탓에 실질적으로는 용병이었다.
이 당시의 로마군은 여전히 주둔지 수비 병력과 야전군으로 구분되었다. 지역 부대들은 트리부누스 아래 있는 200~400명의 누메루스들(혹은 누메리)로 구성되었으며, 각 속주 마을에 한둘씩이 기반을 두었다.
기동 용병 야전 부대들은 경기병 포이데라티와 중기병 카타프락토이로 구성되었다. 히포-톡소타이로 불린 마상 궁사들은 엘리트 전투병이었으며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그 파괴력을 입증했다. 엄선되어 고도로 훈련을 받았고 중무장한 카타프락토이는 새로운 존재는 아니었지만, 다시 유효성을 입증했다-좀 비싸긴 했지만.
한편 당시의 제국에는 좋은 말 산지가 많진 않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카파도키아를 큰 기병 군마를 육종하는 지역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새로운 군사 조직의 중심은 코미타투스( ‘Personal Army')였다. 3세기에 게르만족 왕들이 로마에서 배워간 이것은,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장군들인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에 의해 역수입되었다. 이들은 국가가 아니라 자기네들을 모집한 자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때문에 당연히 황제에겐 위협으로 비쳐졌다.
이런 프로페셔널들은 부정의 여지없이 장기적으로 병적에 있었으며, 그 중심으로 보다 큰 군대를 건설할 수 있을, 핵심을 형성했다. 코미타투스의 핵심은 부켈라리(‘Pe rsonal Guards’)였지만 폭동을 일으키기 십상이었으며, 그들의 성공은 거의 전적으로 그 고용주의 재산, 영향력 혹은 지도력에 달려 있었다.
수복된 서방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의 행정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다. 리비아에서 모로코까지 뻗은 이 속주는, 6세기 후반 즈음에는 독자적인 참모단과, 마기스테르 밀리툼 아프리카이 휘하의 독자적인 자기 군대와 함께 거의 독립적인 엑사쿠스의 아래 있었다.
그 군대는 보병보다 기병이 더 많았고, 지휘관의 엘리트 호위대, 기동군 부대인 밀리테스 코미타텐세스 그리고 지역 리미타네이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잔티움 당국은 수복된 이탈리아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를 마주쳤다. 야만 동고트족은 타도되었을지 몰라도, 더 큰 위협이 당시에 중대한 양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568년도에 지금의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알프스 너머로 쏟아져 들어온 롬바르드족이었다.
비잔티움은 라벤나 남쪽의 구릉 지역-여전히 일 마르체로 알려진다-에 국경 지대를 형성하기 위하여 오늘날의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를 버렸다. 이탈리아의 엑사쿠스에겐 야전군 하나와 여러 주둔지들이 있었지만, 전자는 롬바르드족을 막기엔 너무 작았다. 때문에 제국은 그 주둔지들을 줄이고 네 명의 지역 파트리키우스들 밑에 두어, 그 지방을 공유하는 데 동의했다.
시칠리아의 파트리키우스는 내륙의 일에는 거의 엮이지 않았던 반면, 다른 셋은 그들의 본부를 라벤나, 로마 그리고 나폴리에 두었다. 둑스가 지휘하는 보다 작은 다섯 번째 군대는 아드리아 해 해안에 면한 리미니에 본부를 두었던 반면, 아드리아 해의 북쪽 끝 멀리에 위치한 또 다른 마기스테르 밀리툼은 베네치아 주변에 있는 비잔티움의 남은 발판 및 이스트리아를 지키기 위해 몇 개의 부대를 보유했다.
롬바르드족이 남쪽을 가로질러 균열을 만들긴 했지만, 멀리 떨어진 두 둑스 관할구인 스팔라토와 베네벤토는 북이탈리아에서 로마와 라벤나 사이의 좁은 비잔티움 영역에 의해, 롬바르드 왕국에서 분리되었다. 이 추가적인 지역 분할 구도는, 다음 1,400년 동안 이탈리아의 분열사에서 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나폴리에 있는 비잔티움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의 역할은 지역 둑스의 그것과 합쳐졌으며, 로마 남쪽의 캄파니아의 이런 현상은 아마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에서도 일어났을 것이다. 비잔티움의 그 외 지배 지역은 가이타, 아말피, 나폴리 같은 고립된 바닷가 도시들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 도시들은 훗날 이탈리아의 중세 지중해의 수상 지배권을 향해 나아가는 몹시 중요한 첫 단계가 된다.
일부는 새로운 정착자들에게서 모집되었던 도시 민병대는, 도회 생활이 지속되었던-단, 활력이 쇠퇴하긴 했지만-이탈리아의 도시 성벽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었다. 로마에 있던, 테오도시아키로 알려진 전문 용병대는 다른 비잔티움 군대가 592년도에 후퇴한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교황은 이미 로마의 실질적인 통치자였고, 심지어는 발칸 반도에서 소환된 군인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여겨진다. 비잔티움령 이탈리아의 다른 곳의 군부대들의 명칭은 현지 및 외래 모집을 시사한다. 예를 들면 베로넨시움은, 베로나 출신의 롬바르드인들 아니면 그 북방 도시 출신의 이탈리아인 피난민들이었을지 모른다.
엑세르키투스 로마누스, 엑세르키투스 이탈리아이, 엑세르키투스 라벤나이에서는, 비록 이런 전문 군인 부대들은 여전히 지역 민병대와 별개였지만 곧 현지 모집병들의 수효가 동방에서 온 사람들보다 많아졌다.
비잔티움령 안의 수도원들과 지주들에 의해 모집된 민병대들도 있었으며, 일부 옛 로마 황실 가문들은 서방 제국의 몰락에서도 살아남아 여전히 대규모 장원을 보유하고 있었다-당시 그들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존엄, 칭호 그리고 군사적인 역할을 되찾고 있었다.
이 고대의 귀족들이 어느 정도 비잔티움화되는 한편, 비잔티움의 통치자들에 의해 이탈리아에 이식된 새로운 엘리트층은 점진적으로 이탈리아화되었다.
ps. 로마인 이야기 15권의 거짓말을 또 다시 발견.....
시오노 나나미는 가짜 로마인 비잔틴 놈들 때문에 토착 이탈리아의 경제와
군사 행정이 다 붕괴한 것마냥 써놨고 때문에 저도 혹시 그런가? 하고
속았는데 역시 과장된 소리였네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