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의 상아 손궤에 묘사되어 있는 아르메니아인 보병. 대부분의 제국 군대의 귀족들은 아르메니아인 출신이거나 그들을 조상으로 두고 있었으며 9-10세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은 제국 군대의 25% 혹은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10세기 초의 스쿠타토스. 큰 방패로 ‘방패벽’을 펼치고 있다. 망토로 몸을 감싸고 있는 자는 관료며, 병사들이 들고 다니는 것은 반돈의 깃발이다.
스쿠타토스의 장비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다. 프테루게스가 달린 코르슬릿과 가슴과 어깨에 매는 띠를 볼 수 있고, 투구의 목보호대는 유연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아마 가죽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자료에 나오는 제복은 보통 빨강색이었지만, 가끔 파랑색 계통도 있었다.
타그마 톤 바랑곤이 중무장한 모습에 관한 희귀한 그림이다. 이 장면은 대립 황제의 처형에 대한 것이며, 열여덟 개의 유명한 도끼가 이들이 바랑기란 증거다. 창과 일반적인 모습 또한 그러하며, 원형 방패와 카이트 실드가 모두 사용되는 것에 주목하라.
비잔티움인들은 그때가 되어서야 셀주크인 보조 부대의 존재와, 그들이 이미 그 지역까지 진군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8월 16일 아침, 순다크는 비잔티움의 대군과 조우하여 이들을 격파했다.
로마누스는 즉시 그의 장군 중 한 명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훗날의 디라키움 둑스며, 미카일 7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바로 그 인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에게 군대를 주어 순다크를 처리하도록 했지만 그는 패배했고, 테오도시오폴리스 테마의 스트라티고스 바실라키스가 이끄는 지원군을 기다려야 했다.
어쨌든 적의 병력을 알아차린 순다크는,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후퇴했다. 이 후퇴가 거짓 퇴각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비잔티움의 부대들은 신중함을 잃고 이를 추격했다가 갑작스러운 반격을 받아 패배했다. 바실라키스는 사로잡혔으며 브렌니우스도 부상당했다.
당시 순다크와의 교전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던, 타르카니오테스와 루셀 드 바이욀이 이끌던 부대는 알프 아르슬란이 대군을 이끌고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클라트에서 탈출하여 멀리 멜리테네까지 퇴각했다.(혹자는, 이들이 짜고 퇴각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때 로마누스는 순다크의 군대를 맞아 그의 부대를 정렬 중에 있었다. 순다크의 지휘아래에서 진정한 셀주크의 전투 방식이 발휘되었고, 비잔티움 부대들은 이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결국 비잔티움 군대는 만지케르트로 후퇴했다.(만지케르트에서 징집한 “고귀한” 시민들은 달아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알프 아르슬란과 주력부대가 합류한 셀주크의 부대는 그날 밤 내내 비잔티움군을 괴롭혔으며, 비잔티움군에게서 단지 4.8km 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캠프를 차렸다. 로마누스의 정찰병은 그때까지도 술탄의 부대가 접근한 것을 통보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술탄의 부대는 비잔티움의 군대보다는 숫적으로 부족했다.
기록 중 최소치는 12,000이며 이븐 알 아시르는 15,000이라 언급했고, 더 많은 숫자는 30,000-40,000명이었는데 아마도 이쪽이 더 믿을만한 기록 같다. 하지만 비잔티움 군대는 처음 전투에 나섰을 때 보다는 훨씬 더 줄어 있었다.
후퇴한 루셀과 타르카니오테스의 군대는 아직 복귀하지 않았고 순다크가 이끄는 부대는 끊임없는 스커미쉬 공격을 퍼부었으며, 로마누스는 대군의 보급을 위해 많은 부대를 보내어-심지어 그루지야까지-식량을 보충해야 했다. 당시 비잔티움의 부대는 100,000명 수준까지 줄어있었고, 그 중 대부분은 비전투원이었다.
다음날 알프 아르슬란은 평화 사절을 보내어 협정을 요청했지만 즉시 거절당했다. 로마누스는 재정적 상황 탓에 그런 대규모 부대를다시 모으기가 어려웠고,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할 수도 없었다. 결국 로마누스가 선택할만한 여지는 별로 없었으며, 게다가 그는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규모에 자신감이 있었다.
비록 질이 낮더라도 그의 군대와 그의 재능은 승리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더 나아가, 술탄이 이제야 비잔티움군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알아차리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지연 전술을 펼치는 것이라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런 지연 전술은 비잔티움 쪽에 유리했다. 타르카니오티스와 루셀이 이끄는 부대와 최소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출진한 부대가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전술의 채택은 그의 군대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었고, 불만에 가득 찬 아르메니아인과 투르크인 부대를 다루는 일도 힘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비훈련된 부대는 사기가 훨씬 빨리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이미 많은 용병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탈주하고 있었다. 결국 전투가 지연될수록 비잔티움측은 숫자는 늘겠지만 사기는 형편없이 하락했을 테고, 투르크인은 숫자는 물론 자신감도 얻을 것이었다. 로마누스는 즉시 전투를 결정했다. 이로써 주사위는 던져졌다.
8월 18일 양쪽 군대 모두 다가올 교전 준비에 들어갔다. 셀주크는 다음날인 금요일에 공격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사바스는 그때 로마누스의 많은 분견대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근접 중이었다-타미스의 지휘를 받는 우쩨족 용병들은 17일 혹은 18일에 셀주크에 투항했다.
아마도 이는 셀주크가 그들과 같은 투르크족이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 급여가 한 달 이상 연체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들은 즉시 셀주크인에 참가했고, 아클라트와 만지케르트에서 또 다른 지원군이 도착했다.
반면에 타르카니오테스와 루셀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비잔티움의 부대들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그날 비잔티움의 궁수들은 요새화된 숙영지에서 나와 알프 아르슬란의 스커미쉬 부대에게 큰 손실을 입혀 쫓아냈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자세한 진행과정은 불명확하며 때로는 전혀 반대다. 목격자가 서술한 단 하나의 자료(아탈리아티스의 히스토리아)에 따르면 19일 아침 로마누스가 그의 군대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두 열로 정돈시킨 것은 확실하다.
첫 번째는 세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우익은 카파도키아와 아르메니아, 카시아논과 우쩨족 용병들이 알리아테스-카파도키아 테마의 스트라티고스-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중앙은 로마누스가 직접 동방의 테마들과 타그마들을 거느리고 자리 잡았고, 좌익은 서방의 테마들과 페쩨네그인 그리고 다른 보조 부대들이 니케포루스 브리엔네스의 지휘 하에 대기 중이었다.
두 번째 열 혹은 예비병들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맡았다. 그는 전 황제의 조카였고, 결코 로마누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그 사실은 곧 밝혀질 것이었다. 이 부대는 게르만인 및 노르만인 중기병과, 동쪽 접경 지역 출신의 귀족부대(아콘테스-귀족과 그 수행원으로 구성되었다.)그리고 대부분의 근위대가 배치되었다. 숙영지에는 어떤 부대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셀주크의 숙영지가 있는 만지케르트로 진군했다. 셀주크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측면에 대해 몇 차례 스커미쉬 공격이 퍼부어졌고, 비잔티움의 장군들은 타미스의 우쩨족의 부대가 이끄는 탈주병을 향해 투르크인 용병들이 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중하게 행동했다. 어쨌든 셀주크의 부대는 조금씩 철수했고, 비잔티움군은 오후 늦게, 혹은 저녁 무렵에 셀주크의 숙영지에 도착했다.
이때 로마누스는 더 진군하고 싶어 했지만, 셀주크가 비잔티움의 숙영지를 습격할 것을 우려했다. 숙영지에는 별다른 방어 부대가 없었고, 그는 후퇴를 명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명령을 오해했다. 중앙의 부대는 즉시 물러났지만 양익은 망설였고 혼란에 빠졌다. 병사들 사이로 루머가 퍼져나갔다. 이는 두카스가 퍼트린 것으로, 황제가 전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셀주크인들은 비잔티움의 부대가 극히 혼란상태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고 그들이 기다려왔던 기회가 왔음을 감지했다. 당시 비잔티움의 1열은 중앙과 양익이 흐트러져 틈을 보였고, 알프 아르슬란은 만명에 달하는 원기왕성한 셀주크 기병에게 돌격을 명했다.
즉시 비잔티움의 부대는 공황 상태에 빠졌으며 아르메니아인 혹은 투르크인 지원 부대가배신했다고 오인했다. 사실 아르메니아인들은 가장 먼저 달아나 뿔뿔이 흩어졌으나, 반면 대다수의 우쩨족과 페쩨네그족은 끝까지 전장에 남았다.
곧 비잔티움 우익은 카파도키아인의 지속적인 탈주로 약화되었고, 남은 자들은 중앙과 분리되어 측면과 배후가 급습당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두카스는 그런 상황에서 필요한 예비대를 이끌고 일찌감치 철수해버렸다. 또 다른 비잔티움의 역사가인 브리엔니오스는, ‘후위 부대는 즉시 철수했다’고 단호히 언급한다.
단지 중앙의 부대만 전열을 유지하고 있었고 로마누스는 전투에 나섰다. 그는 부상을 입었고 말은 화살에 맞아 쓰러졌으며 그 또한 낙마했다. 그의 복장을 알아본 바랑기가 황제를 둘러쌌지만, 결국 셀주크의 노예 병사들에게 사로잡혔다. 이는 비잔티움의 황제가 무슬림에게 사로잡힌 전례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비잔티움의 군대는 비탄에 잠겨 무너졌고, 투르크인들은 흩어진 군대를 그날 밤 내내 추격해서 살육했다.
한 황제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군대는 몸이 머리의 명령을 받는 것과 같아야 한다.’ 그 몸은 이제 머리를 잃었고, 위대한 비잔티움 군대는 이렇게 끝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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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격카이사르 작성시간 14.01.02 손발이 안맞으면 대군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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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블템포컴빌리 작성시간 14.01.04 저거 한방때문에 700년 이상을 잘도 잘도 버티던 비잔틴이 한 방에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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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2Pac 작성시간 14.01.06 으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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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격카이사르 작성시간 14.01.07 저렇게 박살나기도 힘든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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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바실리우스 2세 작성시간 14.01.10 있자나요..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을지문덕에게 수나라 정예군 몰살) 대운하만 하면 괜찮은데. 고구려 침공으로 수나라는 몰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