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교도들을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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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초상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1220년 페레야슬라브에서 블라디미르 대공 야로슬라프 2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28년 잠깐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공작이 되었지만 이듬해 쫓겨났는데 어찌어찌하여 1236년 노브고로드 공으로 다시 선출될 수 있었다.
당시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스웨덴, 튜튼 기사단 세력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특히 핀란드를 두고 대립 중이던 스웨덴은 역시 핀란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적대시하였고, 노브고로드를 정복할 야망도 품고 있었다. 스웨덴 군대는 1240년 노브고로드에 대한 원정에 돌입했다. 네프스키는 이를 막기 위해 출정하였고, 1240년 7월 15일 네바강에서 스웨덴 군을 공격, 스웨덴 군 지휘관들 및 주교 다수를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 이젠 너는 필요없어 JPG -
그러나 아직 젊었던 그는 노브고로드 공의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했고, 유력자들과 곧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노브고로드 공의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했던 수많은 공들이 맞았던 결과, 즉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1) 원정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해 9월, 튜튼 기사단과 덴마크 군, 그리고 도르팟 주교가 이끄는 상당수의 십자군이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공격하게 된다. 이들은 우선 이즈보르크 요새를 점령한 후 노브고로드 공화국 제 2의 도시 프스코프를 공격했다. 프스코프는 항복하였고 튜튼기사단은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갔다. 이후 이들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북서쪽에 거주하던 핀-우구르 계열의 보드족을 공격, 제압하고 코포례라는 성을 쌓고, 테소프를 점령한 후 주변지역을 약탈했다. 이 와중에 일부 부대는 노브고로드 근교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삽시간에 노브고로드시의 서쪽과 북쪽이 점령당한 것이다.

- "내 아들을 쫓아낼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
겁에 질린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저들을 격파할 지휘관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네바강에서 스웨덴 군을 격파했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기억해냈다. 이 20살 짜리 젊은이를 추방시킨건 그들 자신이었지만 지금 한시가 급한 만큼 싹싹 빌고 다시 모셔오기로 한 것이었다. 이들은 서둘러 블라디미르 공국으로 달려가 야로슬라프에게 사정한 끝에(2) 네프스키를 다시 데려올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백성들을 징집하고, 몽골로부터 도망쳐온 쿠만족들도 확보하며, 블라디미르 공국의 지원도 받아냈다. 더군다나 그가 이끌던 귀족 전사들, 드루지나들까지 합치면서 대략 5천명이 넘는 군대를 확보하였다. 마침 십자군은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의 사망과 그에 따른 내분, 튜튼기사단 본부의 애매한 태도(3) 와에스토니아에서 마침 발발한 반란덕에 십자군의 상태가 악화되자, 네프스키는 군사적 행동을 보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1241년 말 코포례를 탈환, 독일인들을 포로로 붙잡고 보드족들은 참수해버린 후, 잠시 후퇴했다가 1242년 3월 프스코프를 탈환했다. 이후 그는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페이푸스 호수를 건너, 도르팟 주교구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도르팟 주교는 다시 십자군을 소집했고, 그들 병력에 의해 정찰대가 모스테라는 마을에서 전멸하자, 네프스키는 페이푸스 호수를 건너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전설이 되다.>

- 격전지가 된 페이푸스 호수의 모습 -
이 소식을 들은 십자군 측도 바로 네프스키의 군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이푸스 호수, 러시아에서는 추드 호수라고 불리는 호수에서 4월 5일 이들을 따라잡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네프스키는 이를 이미 예상하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당시 얼음은 아직 녹지 않아 중무장한 병사들이 활동하는데 큰 제약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후가 따뜻해질락말락 한 때라 얼음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십자군은 중무장 기사들을 전면에 내세우소 후방에 에스토니아인 보병들을 세워두었으며, 노브고로드 공화국 군대는 중앙에 민병대를 배치한 후 민병대 뒤에 네프스키와 친위 드루지나 전사들을 두었으며, 양익으로 기병대를 배치하였다. 특히 우익에는 궁기병들을 비롯, 강력한 기병대가 배치되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십자군은 기사들을 앞세워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탄하지 않고 가시처럼 삐죽 튀어나오기도 한 얼음들이 돌격을 방해했다. 더군다나 우익의 궁기병들이 화살을 쏘는 바람에 기사들이 당황했지만, 어찌어찌 민병대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민병대들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아 상황은 난전으로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브고로드의 좌,우익 기병대가 기사들을 덮쳐버렸다.
- "다시는 노브고로드를 무시하자 마라! 이 튜튼 놈들아!" -
상황이 글러버린 걸 안 에스토니아인들은 도주해버렸고, 고립된 기사들은 도륙나고 말았다. 소수의 병력들만 겨우 빠져나갔다. 완벽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대승이었다.
이후 노브고로드와 십자군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십자군은 아직도 점령하던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들을 반환하고 프스코프의 어린이 인질들을 풀어주기로 했고, 노브고로드는 십자군 포로들을 풀어주기로 했다. 교역도 재개되었다. 네프스키는 이 때의 승리 덕에 다른 노브고로드 공들과는 다르게 10여년 간 노브고로드의 공작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튜튼기사단은 프로이센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7년간 고생 꽤나 해야 했다.
참고로 노브고로드와 튜튼기사단의 충돌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노브고로드는 이후로도 몇 번 튜튼 기사단이나 덴마크, 스웨덴 등과 충돌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후의 충돌에서 노브고로드는 이 때만큼의 위협을 받지는 않았고, 러시아는 자신들의 종교를 지킬 수 있었다.
<몽골은 건드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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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의 사절단을 만나고 있는 네프스키 -
네프스키는 이후 노브고로드 공으로 있으면서, 노르웨이와 접촉, 국경지역을 확정하고, 스웨덴군과 계속 싸웠다. 로마 교황청이 그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한편 그의 아버지 야로슬라프가 1246년 구유크 칸을 만나러 카라코룸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사인은 독살이었고 범인은 구유크 칸의 어머니 토르게네였다. 바투에게 충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꼽게 여기고 벌인 짓이었다.

- "그러니까 나보고 결정해달라 이거지? 내 맘대로 한다." -
이후 블라디미르 공 자리를 두고 네프스키와 그의 동생 안드레이가 다투기 시작했다. 이들은 바투에게 찾아가 누가 대공인지 가리게 해달라고 했지만, 바투도 골치아프다고 판단했는지 그들을 카라코룸으로 보냈다. 구유크칸은 안드레이를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하고 네프스키를 키예프 공(4)으로 임명했다. 이는 네프스키가 바투의 아들 사르탁과 친구를 맺는 등 네프스키가 친 바투 성향이었기에, 바투를 싫어하던 구유크칸이 그렇게 조치한 것이었다. 이 때 그들의 동생 미하일이 블라디미르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는 몇달 안 가 리투아니아군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곧 몽골군을 몰아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는 갈리치아-볼히니아 공인 다닐로의 딸과 결혼, 동맹을 맺고, 서방을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정보가 네프스키에게 새어나갔고, 네프스키는 이를 친구인 사르탁에게 고발했다. 사르탁은 아버지 바투에게 이를 알렸고, 바투는 군대를 보내 블라디미르를 공격, 안드레이를 스웨덴으로 쫓아버리고,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앉혔다. 1252년의 일이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아들 바실리를 노브고로드 공으로 앉히고 블라디미르 대공이 되었다.

- 몽골 무당을 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
이후 그는 1255년, 노브고로드 시민들이 자기 아들을 쫓아내자 노브고로드를 침공해 자기 아들 바실리를 다시 노브고로드 공으로 복귀시켰다. 이후 그는 1259년 노브고로드에서 일어난 반몽골 봉기도 진압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가 그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벌인 것은 아니었다. 1263년, 킵차크 칸국 다루가치들 여럿이 살해되는 등 반 몽골 분위기가 확산되고, 몽골이 강경 진압을 벌일 낌새를 보이자 그는 사라이로 달려가, 베르케 칸을 설득, 강경진압을 하지 않고, 동시에 일칸국 원정에서 러시아인들을 징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고로데츠란 곳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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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매장 -
사실 네프스키의 행각이 매국노처럼 보일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인들은 그의 행위를 매국적 행동으로 보지 않았다. 애시당초 러시아 공들이 쿠만족과 제휴한 일이 너무 많아 무감각해진 것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이외에도 일단 당시 몽골족은 너무나도 강했고, 그들에게 반항하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거기에 당시 러시아인들은 몽골을 싫어하고 무서워하며,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튜튼기사단으로 상징될 서방 세력들도 마찬가지로 싫어했다. 특히나 서방은 그들의 종교에도 간섭하는 등 러시아의 정체성을 상실시킬 수 있는 짓들을 벌일 우려가 있다고 비추어진 반면(5), 몽골은 일단 세금만 잘 바치고 반항만 안 하면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네프스키는 이런 상황에서 서방을 견제하고, 몽골에게 미움받지 않으면서 러시아인들의 안전을 생각했다. 그 덕인지 14세기 후반부터 그는 몇몇지역에서 성인으로 모셔지더니 1541년 아예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구 소련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 -
그리고 구 소련 역시 그를 영웅시해 네프스키 훈장을 만드는 한편 2차대전 전에는 그의 활약을 다룬 영화를 찍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가 된 것이었다.
한편 네프스키가 죽은 후 블라디미르 공국은 분할되었다. 이 때 그의 막내 아들 다닐이 블라디미르 공국에 속하는 작은 도시를 받았는데 그 도시의 이름은 모스크바였다.
(1) 단 이 설도 이견이 있어서 비상시에 일단 강화됬던 공의 권력을 회수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로 추정하기도 한다.
(2) 이 때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야로슬라프의 아들 중 한 명을 공작으로 보내달라고 애둘러 말했다. 그러자 야로슬라프는 노브고로드를 골탕먹이려고 그랬는지 자신의 다른 아들 안드레이를 보내겠다고 대답했다. 경악한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대주교를 사절단으로 보내 이번엔 직접 네프스키를 언급하며 사정해야 했다.
(3) 튜튼기사단 본부는 아직까지 레반트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와 싸우고 있었거니와, 유럽 지역의 확장도 프로이센을 중요시하였지, 노브고로드 지역은 튜튼기사단 본부에게 관심 밖이었다. 노브고로드에 관심을 보였던 것은 과거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들로 구성된 튜튼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였다.
(4)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키예프 루스는 멸망했고 키예프 대공은 사라졌지만 키예프 공으로 존속하고 있었다.
(5)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사건 이후 정교회와 카톨릭의 사이는 최악으로 변해있었다. 더군다나 카톨릭의 공격적 확장은 정교회 입장에서 두려워할만 했다. 실제 당시 러시아의 교회들은 몽골보다도 오히려 서방, 그리고 서방과 동맹을 맺는 몇몇 러시아 제후들을 더 경계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작성시간 14.06.27 개인적으로 러시아의 멍에는 있을지언정 타타르의 멍에는 없었다고 봅니다ㅎㅎ 글 잘 읽엏습니다. 드디어 모슼바가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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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그레친 작성시간 14.06.27 같은 기독교임에도 불구하고 왜 저렇게 싸운건지 ㅡㅡ;;
것보다 킵자크 칸국은 기독교화가 안됬나봐요. 밑의 일칸국은 이슬람화가 되었던데 -
작성자배달민족 작성시간 14.06.27 저 시절 러시아 왕실이나 고려 왕실 모습이 비슷비슷하군요 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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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yuso 작성시간 14.06.30 세상에 카라코룸까지 갔단말이에요? 직접?
저시대 왕복만으로도 엄청난 고행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