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의 시대>

- 알렉세이 1세를 묘사한 그림 -
1645년. 미하일이 죽고, 그의 맏아들인 16세의 알렉세이가 차르로 즉위했다. 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스승인 모로조프와 장인 밀로슬라브스키가 실권자로써 정치를 통제했다. 모로조프는 나름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미하일의 치세에도 해결이 안 됬던 재정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교회가 반대했던 담배를 판매하고, 소금세를 인상하는 바람에 시민들과 교회의 원성을 샀다. 더군다나 모로조프나 밀로슬라브스키 모두 자신들과 그 측근들, 친인척들을 노골적으로 챙기는 등 전형적인 부패관리이기도 했다. 이러니 불만이 안 쌓이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 "못 살겠다! 갈아엎자!" -
1648년 5월. 일부 시민들이 알렉세이에게 소금세 인상을 취소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이를 거부했고, 경호원들은 오히려 청원자들을 밀어냈다. 그러자 시민들이 분노했다.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은 급료를 지불받지 못한 일부 스트렐치들과 하급 드보랴닌까지 가세하며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됬다. 모스크바 곳곳에서 화재가 일어났고, 모로조프와 그의 측근들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다. 결국 차르는 굴복하여 모로조프를 쫓아냈다.(1) 하지만 6~7월 경에는 모스크바의 소식을 들은 인근 도시들에서도 소요가 일어났다.
<울로제니예>
이듬해인 1649년. 알렉세이는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하고 새로운 법전을 제정했다. 이 법전이 바로 '울로제니예'였다. 1835년에 와서야 다른 법전으로 대체되며, 오랫동안 러시아 법의 기틀이 됬던 이 법전은 성직자들의 세습 영지 획득을 금지하고 농민들의 이동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이전까지 러시아의 농민들은 점점 이동권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빚이 없다는 전제하에 성 유리의 날을 전후한 2주 동안은 주인을 떠나 새로운 땅을 찾을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권리는 없었다. 농민들은 땅과 지주에게 예속되었다. 이들은 완전한 농노가 되었다.
이 법전은 부유한 시민들이나 드보랴닌들에게는 지지받았다. 그러나 성직자, 농민, 서민들은 이 법전에 분개하였다. 당시 영향력 있는 성직자였던 니콘은 차르 주변의 간신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전이 통과되도록 사주했다며 길길이 날뛰었을 정도다.(2) 더군다나 1650년 스웨덴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곡식 등을 스웨덴으로 반출하기로 결정하자, 이런 불만에 민족감정까지 합세하였다. 바로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시민들이 봉기하였다. 이런 봉기는 북서부 지역으로 확대될려고 하는 기미를 보였고, 특히 프스코프는 사태가 심각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젬스키 소보르가 따로 개최될 정도였다.
그러나 불만은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들었고, 젬스키 소보르도 1653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집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 민중들의 봉기가 끝났던 것은 아니었다.
1650년대 말 러시아는 폴란드,스웨덴과의 전쟁에 휘말렸다. 그러면서 동란의 시대의 충격에서 겨우 벗어났던 러시아 정부의 재정은 다시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러시아 정부는 재정 위기를 해결할 목적으로 1662년에 1/5세를 부활시키고, 그 동안 유통됬던 은화 대신 동전을 유통시키기로 했다. 동전으로 가치를 평가절하하여 통화량을 증가시키려던 것이었다. 이것이 화의 근원이 되었다.

- "이 놈의 정부는 사람 못 살게 만드는 데 도가 텄구나! ㅆㅂ. 못 살겠다!" -
통화량이 증가하면서, 물가가 엄청나게 오르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위조 화폐가 판을 치며 러시아의 경제는 막장으로 변해버렸다. 결국 동전폭동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폭동이 1662년 7월에 벌어졌다. 이 폭동은 천명의 사망자와 수천명의 추방자를 낸 채 진압되었지만, 하도 경제 상황이 막장으로 변해버린 터라 1663년 결국 동전들은 전부 회수, 폐기되었고 은화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민란의 끝은 아니었다.
<라스콜>
![]()
- "내 생각인데, 우리 전례가 엄청 잘못된 것 같아. 근데 얼마나 잘못됬는지 다 파악이 안 되잖아? 안 될거야. 아마." -
러시아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그리스를 통해서 전례가 들어왔었다. 그러나 이 때 전례를 번역하고 도입하는 과정에서 오역 등으로 인해 러시아의 전례에는 틀리거나 문제가 있는 것들이 많았다. 이런 문제에 대한 지적은 전례서가 최초로 만들어진 이반 뇌제 때부터 줄곧 지적되어왔는데 이반 뇌제 자신부터 전례에 문제가 많다는 언급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개정 노력은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동란의 시대로 인해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다는 정서가 생겨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1616년 경 디오니시라는 인물이 전례서를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살티코프들의 미움을 사 감금당하기도 했다.(3) 그러다 필라레트가 대주교가 되면서 전례를 조금씩 개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전례 개정 과정에서는 그리스 자료들은 참고되지 않았다.
그러다 1649년 동방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러시아의 전례에 수많은 이단적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바로 러시아 교회는 발칵 뒤집혔고, 전례 개정 논의도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
-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새로운 전례요. 모두 따르시오!" -
그러던 와중에 1652년 알렉세이의 친구이기도 했던 노브고로드 대주교 니콘이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되었다. 총대주교가 될 때 총대주교로써의 권력에 대한 보장을 받아내고, 필라레트의 뒤를 이어 '대군주' 칭호까지 받은 그는 전문가들을 그리스로 보내 그리스 전례들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1653~1655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전례를 수정하고, 1655년의 종교회의에서 전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개정안의 내용은 상당히 많은데 대략적으로 요약해도 성호를 두 손가락으로 긋던 것을 세 손가락으로 긋게 하고, 예수의 철자를 Ісусъ에서 Іисусъ로 바꾸고, 할렐루야를 그리스식으로 3번 외치게 하고, 단어들을 수정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동안은 전례 개정에 동의하고, 실제로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아바쿰 등의 경건파가 대대적으로 반발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통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식을 대대적으로 도입한 것에 반발한 것이었다. 니콘의 개정안에 강력하게 반발한 이들은 끝내 분리되었다. 이 아바쿰과 그의 추종자들을 구교도들이라고 부른다.

- "나 아바쿰이 이런 시련을 겪는다고 내 신념을 굽힐 것 같느냐!" -
당연하겠지만 이 구교도들은 엄청나게 탄압받았다. 특히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와 개인적으로 친했기 때문에 구교도들은 비빌 언덕도 없는 형국이었다. 그렇지만 알렉세이와 니콘은 곧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일단 표면적인 이유는 1658년 조지아의 왕자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한 보야르의 모욕적 행동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니콘은 교권이 황제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기에 교권과 황제권의 충돌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4) 문제가 있다면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 지역은 원래 군주의 힘이 교회의 권력보다 강했던 곳이기에, 찍히기 딱 좋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니콘과 알렉세이가 사이가 좋을 때도 니콘의 이런 태도 때문에 황족들과 몇몇 차르의 측근들은 그를 굉장히 미워했다.
이런 반감들과, 차르와 사이가 멀어진 것이 겹쳐 니콘은 총대주교직에서 1658년 물러났다. 다만 그의 영향력은 아직 강했다. 이 꼴을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했던 알렉세이 1세는 1666년 종교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공석이 된 모스크바 총대주교 자리에 새 인물을 앉히고, 군주의 권력이 교회보다 강하다는 것을 공인했다. 그리고 니콘은 추방되고, 유폐되었다.(5)
![]()
- 러시아의 화가 수리코프가 그린 '여귀족 모로조바'. 구교도인 모로조바 부인이 끌려가는 모습을 그렸다. 치켜든 두 손가락은 구교도가 옳다는 그녀의 신념을 보여준다. 모로조바 부인은 수도원에 유폐된 후 그 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
그러나 이게 전세 역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탄압은 지속되었다. 아바쿰은 한 때 시베리아로 유배보내졌다가 겨우 둘아왔지만, 1682년에 화형당했다. 구교도들이 중심이 된 한 수도원은 수년간 정부군의 포위 공격을 받기도 했고, 몇몇 구교도들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집단으로 분신자살을 하기도 했다. 1672~1691년까지 이런 구교도 공동체의 분신자살 건수는 알려진 것만 37건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이들의 권리는 인정받기 시작했고, 1차 러시아 혁명이 벌어진 1905년에 종교의 자유를 획득, 구교도들은 아직도 존재하며 그 수 역시 수백만명에 달한다.
(1) 하지만 그는 곧 은근슬쩍 복귀했다.
(2) 단 니콘의 불만은 성직자 문제에 한정된 것이었다.
(3) 디오니시는 1619년 필라레트가 귀환하자 복귀할 수 있었지만, 필라레트도 디오니시를 싫어한 건 마찬가지라 중용되지 않았다.
(4) 니콘은 교권을 태양에 비유하고 군주의 권력을 달에 비유했다. 13세기 교황청도 비슷한 입장을 보였던 적이 있다.
(5) 니콘은 알렉세이 사후인 1681년 사면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오다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