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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1265년.불가리아에서 벌어졌던 몽골군과 비잔틴군의 전투 일지

작성자이선근|작성시간03.01.12|조회수3,765 목록 댓글 1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글 쓰는 이선근이라고 합니다.
이글은 책의 내용과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다녀서 쓴 허접글입니다.
재미있게 봐주시구요.. 잼없다 싶으시면 리플 달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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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5년, 불가리아에서 벌어졌던 몽골군과 비잔틴군의 전투...


1237년 칭기스칸의 손자 바투의 유럽 원정 이래, 남러시아 초원에 자리를 잡은 킵차크 한국은 1502년 내분으로 붕괴될때까지 약 250년간 맹위를 떨치며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을 복속시키고 있었습니다.

초대 칸인 바투가 죽고 난 후, 그 뒤를 이은 동생 베르케는 영명한 군주로 수많은 대외 원정을 감행해 킵차크 한국을 명실상부한 동유럽 세계의 패자로 발전시켰습니다. 우선 그는 자기의 사촌인 훌라구와 그가 세운 일칸국에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의 술탄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맺고, 북진해오는 훌라구의 군대를 1262년 11월 쿠라강 전투에서 격파하고 킵차크 한국을 방어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전, 러시아의 속국이 된 러시아에서 갈라씨아의 대공 다니엘은 몽골의 통치에 반발하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257년) 러시아인으로선 최초의 반몽골 활동이었지요. 그러나 베르케가 군사를 이끌고 갈 것도 없이 반란을 곧바로 진압되었습니다. 베르케의 명령에 따라 다니엘은 자신이 쌓은 요새를 자신의 손으로 허물어야 했습니다.

또 1259년 베르케는 소수의 몽골군 정예 병력과 러시아인 보조부대를 이끌고 다시 한번 서방 원정을 감행하였습니다. 우선 그는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여 미처 숲이나 늪지대로 피신할 틈이 없었던 주민들을 모조리 살륙하고 다음 폴란드로 쳐들어갔습니다.

베르케는 산도미레즈를 불태우고 크렘파성에 도달해 폴란드군의 사령관이었던 페테르를 유인해내 살해하고 크라코우로 진입해 역시 철저히 파괴하고 초토화시킵니다. 폴란드군은 미처 방어하지도 못한 채 이러한 몽골군의 만행을 지켜보아야만 했으며
국왕인 볼레슬라브는 헝가리로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몽골군은 옵펠른 지구의 비톰시까지 짓밟고 3개월 후 전리품을 가득 싣고서 그들의 본거지인 킵차크 한국의 수도 사라이로 귀환합니다.

이렇게 킵차크 한국의 맹위를 떨치는 군사활동을 보고 있던 불가르왕국의 군주 콘스탄틴 티취는 베르케에게 서신을 보내어 킵차크 칸국에 신속하겠으니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비잔틴 제국을 막아달라고 제안을 합니다. 이를 받아들인 베르케는 자신의 증손인 노가이를 보내어 최정예 몽골 기병 2만을 이끌고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 영토로 향하게 했습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은 4차 십자군들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세운 라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팔라이올로구스가문의 미카일 8세가 새 황제로 즉위해 한창 증흥의 기운을 뻗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비록 십자군과 셀주크 투르크와의 오랜 전쟁에서 쇠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천년 제국 로마의 계승자로서 아직까지 그 위세는 보존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비잔틴 황제 미카일 8세는 직접 비잔틴 군을 거느리고 노가이가 이끄는 몽골군과 대적하기 위해 불가리아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천년의 영광이 빛나는 노제국과 새롭게 발흥해 급격한 폭발력을 보이고 있는 신흥 제국간의 전투는 어찌된 일인지 몽골군의 압승으로 가볍게 끝났습니다. 1265년 여름의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파키메레스는 비잔틴군의 중추이던 그리스인들은 불가리아 국경에 도착해 몽골군들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정신없이 달아났고 몽골기병들은 그런 비잔틴 군을 추격하며 닥치는 대로 베어넘겨 학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전투의 과정을 축소했다는 느낌을 주는 서술입니다. 실재 전투는 결코 그런 양상을 띄우지 않았을 텐데요.

그 예로 1071년 소아시아에서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자인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은 투르크군을 보자마자 달아났다고 적고 있지만 실제 전투의 양상은 달랐습니다.

투르크 기마궁사들은 넓은 초승달 모양의 포진을 형성하면서 거짓으로 후퇴하며 화살을 날리는 파르티안 샷(패퇴전술)을 구사했습니다. 비잔틴 중기병대와 보병대는 무거운 중장갑으로 인해 날렵한 투르크 궁기병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비잔틴 황제 로마누스는 계속 추격을 명했지만 그것은 병사들을 피로해 탈진하게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후퇴(?)하는 투르크군과 그것을 땀을 뻘뻘 흘리며 쫓으려 달려가는 비잔틴 군의 양상은 밤이 올 무렵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고 어둠에 익숙치 못한 비잔틴 군은 로마누스의 명령으로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투르크군이 노린 시기였습니다. 투르크 군의 총사령관 알프 아르슬란은 높은 고지에서 비잔틴 군의 움직임을 낱낱이 살피고 있다 비잔틴군이 철수하자 그 틈을 타 대기하고 있던 기병대에게 일제히 돌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투르크 기병대의 돌격을 본 비잔틴 군은 겁을 먹으며 서로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으며 대오는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황제 로마누스는 끝까지 달아나지 않고 용전분투하다 결국엔 투르크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결국 이 전투에서 비잔틴군은 처참하게 무너졌으며 소아시아는 투르크족의 영토가 되고 말이죠. 광대한 곡창지대와 말산지를 잃은 비잔틴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고 맙니다만...

혹시 불가리아에서 벌어졌던 몽골-비잔틴군의 전투도 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승리한 몽골군이 트라키아를 짓밟고 초토화시키고 있는 사이에 미카일 8세는 제노아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황급히 도주합니다. 노가이는 이 원정중에서 비잔틴에 잡혀있던 전 셀주크 술탄 카이 카부스 2세를 구출해 냅니다. 그는 약탈물을 챙겨 사라이로 귀환하는 몽골인들의 뒤를 따라가 베르케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베르케는 그에게 크리미아의 주요 교역지인 수닥(솔다니아)를 속령으로 주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미카일은 몽골의 중요서을 인식했는지 황급히 화해를 원하는 사절을 베르케에게 보냅니다. 또 그는 이번 전투에서 몽골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노가이와 자신의 딸 유프로시네를 결혼시킬 것을 제안하였고 노가이는 그에 응했습니다. 일단 이것으로 동유럽에 평화가 지속되는 듯 싶었지만 그 뒤에 계속된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은 많은 영토를 잃고 여러 차례 타격을 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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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허접글은 여기까지 이구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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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분단극복 | 작성시간 15.05.06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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