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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지난번에도 관련 글을 쓰면서 언급한 바이지만, 서양 근대사의 여러 중요한 사건들 중에서 30년 전쟁만큼 일반적인 인식이 학계 논의와 크게 동떨어진 사건도 드물다. 특히 근래 인터넷 상의 담론들을 둘러보면서 30년 전쟁은 그 기원, 발단, 전개, 결말, 의의 모든 면에 크게 잘못 이해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써 꽤 오래전 글이 되었지만, 이미 30년 전쟁의 기원(위에 링크 걸어놨습니다)과 대표적인 인물 하나에 대한 최근 연구동향을 다룬바 있으니, 이번에는 전쟁의 결과와 의의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30년 전쟁에 대한 그 어떤 학술적 담론도 2009년에 Peter H. Wilson 선생이 발표한 기념비적인 저작을 빼놓고는 논의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방대한 저서가 국내에 소개가 안된 탓이 크겠지만, 30년 전쟁에 대해서 오가는 대부분의 논의는 수십년 전의 '신구교 대립' 담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교가 이겼고 제국은 몰락했다'는 최근 논의와 동떨어진 결론도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현실과는 상당히 맞지 않는 결론이다.
'신구교 대립' 담론의 문제
30년 전쟁과 관련해서 꽤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담론은 이 전쟁이 '신구교 대립'이었으며, '프로테스탄티즘이 가톨릭주의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새 시대를 열었다'는 해석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신성로마제국은 껍데기만 남아서 나중에 나폴레옹이 폐지할때까지 숨만 쉬고 살았다는 식의 이야기도 아직까지도 웹상에서 참 끈질기게 돌아다닌다.(이상하게도, 17세기에 이미 껍데기만 남았다던 제국이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19세기까지 그 살벌한 유럽 국제정치판에서 어떻게 버텼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보지 못한듯 하다)
이러한 해석은 19세기에 유행하던, 역사를 진보와 반동의 이분법으로 보면서 '개신교=진보, 근대 vs 가톨릭=보수, 중세'로 나누어보던 해석의 영향이다. 필자가 예전에 소개했던 영국의 휘그 사관은 그 대표적인 예이고, 비슷한 시기 대륙에서 막스 베버를 위시한 사회학자들이 개신교를 진보와 근대화의 동력으로 해석한것에서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물론 둘 다 현재 학계 내에서는 축출된지 오래지만, 대중적 담론에서는 여전히 그 영향력이 강하다.
문제는 최근 학자들이 지적하듯, 이런 깔끔한 이분법적 담론이 17세기의 복잡한 상황과는 들어맞지 않는다는데 있다. 이 전쟁이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개신교의 승리였다는 주장은, 이 전쟁이 '가톨릭vs개신교'라는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우선 30년 전쟁을 소위 '신구교 대립'으로 해석한 담론부터 보자. 필자가 예전에 30년 전쟁의 기원과 관련한 글에서 설명했듯이, 당시 제국의 상황은 두 종파의 대립으로 깨끗하게 나누어지지 않았다. 일단 종종 간과되는 개신교도들 간의 분열상이 있다. 루터파와 칼뱅파는 종종 서로를 가톨릭보다 더 싫어했다. 게다가 같은 종파 내에서도 온건파과 강경파가 항상 치열하게 대립했다. 전쟁은 필연적이지 않았으며, 여러 우발적인 변수들로 인해 본래 소수였던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높아져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점은 지난번 글에서 설명한 바 있다.
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마찬가지다. 프랑스가 개신교 세력을 지원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신구교 대립 내에서 예외' 정도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예외가 아니었다. 일단 독일 루터파 제후들의 충성대상은 정세에 따라 오락가락했지만, 많은 경우 의외로 많은 수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편을 들었다. 앞서 말했듯, 이들에게는 가톨릭보다 칼뱅파가 더 경계대상이었다. 흔히 '신교군', '구교군'이라는 표현을 남발하지만, 소위 '구교군'이라고 불리는 제국군 내에는 개신교 병사들이 대단히 많았다. 특히 발렌슈타인 같은 경우 능력과 충성심이 확인되면 종파를 가리지 않고 부하로 뽑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소위 '신교군' 내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쟁 목적의 문제
두번째로, 승자가 누구인지 따져보기 위해서는 양쪽이 뭘 노리고 싸웠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전쟁의 진영이 '신구교'라인으로 명확하게 갈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전쟁 목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전쟁 이전의 긴장 악화에는 양측 강경파의 프로파간다와 양측이 서로에게 품었던 음모론적 두려움이 상호작용하여 점차 온건론을 밀어낸 것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상대 종파를 말살하자는 식의 극단주의적 강경론이 정책의 주도권을 쥔 사례는 거의 없었다. 전쟁은 현실이고, 강경론은 목소리는 크지만 최대한 내 편을 만들어야 하는 전쟁 수행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좀더 현실적이고, 가장 직접적인 전쟁의 도화선에는 제국 통치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이것은 특히 옛 교회령을 둘러싼 갈등으로 터져나왔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에도 개신교 제후들은 여전히 제국 교회의 행정에 간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다수를 이룬 지역에서 가톨릭 주교가 사망할 때마다 자신들이 미는 개신교 후보를 후임으로 선출하는 방식을 통해 가톨릭 교회령을 조금씩 개신교화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교회토지의 소유권 문제는 17세기에 중요한 갈등 요소로 떠올랐고, 이 토지들의 장악은 30년 전쟁 내내 중요한 전쟁 목표였다.
이 외에도 개신교 세력의 새로운 맹주를 꿈꾼 구스타프 아돌프의 스웨덴, 합스부르크 약화를 목표로 한 프랑스 등등이 각각의 목표를 가지고 복잡하게 얽혀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를 논하려면 이 모든 맥락을 따져봐야만 한다.

그래서 누가 이겼나?
이쯤 되면, 30년 전쟁을 '신구교 대립과 개신교의 승리, 신성로마제국의 몰락'으로 단순하게 정리하는게 왜 불가능한지는 대략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누가 승자였을까? 이 전쟁에서 그런게 존재하긴 했을까?
일단 전쟁이 끝났을 때의 상황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전쟁을 끝맺은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정은 '1624년 1월 1일의 상황으로의 복귀'였다. 그 결과 가톨릭 제후들은 1624년 이후에 정복한 지역들을 개신교 측에 반환했다. 개신교 측도 그 이후에 정복한 지역들을 가톨릭 측에 반환했다. 본래 중요한 전쟁 목표였던 가톨릭 교회령 문제에 있어서, 가톨릭 측은 분쟁 대상이던 영토들은 다는 아니지만 상당부분 돌려받았다. 또한 몇몇 조항에서 가톨릭 제후들은 협상에서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대표적으로 전쟁의 도화선이었던 팔츠 선제후령의 경우, 오버팔츠를 바이에른에 내줘야 했다. 대표적인 칼뱅파 강경파였던 팔츠는 이후 예전과 같은 정치적 중요성을 두번 다시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칼뱅파는 제국 내의 공식 종파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걸 두고 '개신교의 승리'라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이다. 일단 이 결정은 황제 측이나 가톨릭 제후들보다도(바이에른 정도를 제외하면) 오히려 루터파 제후들이 더 강하게 반발했다. 지난번 글에도 썼지만, 제국 내의 칼뱅파들은 대부분 가톨릭이 아니라 루터파에서 개종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입장에서는 별로 손해볼 것도 없었다. 동시에 더이상 소수파 급진세력이 아니라 공식적인 종파로 인정을 받으면서 독일의 칼뱅파는 예전보다 '얌전'해졌다. 공적인 지위는 얻었지만, 적어도 독일에서는 이들이 예전처럼 여론을 주도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정국의 변수로 작용하던 시기는 마침내 지나갔다.
스웨덴은 구스타프의 전사로 인해 유럽 개신교 세력의 맹주가 되겠다는 꿈을 버려야 했다. 전쟁 중에 점령한 일부 영토는 계속 가질 수 있게 되었으나, 스웨덴의 체급으로는 넓은 영토를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제국이 되는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곧 명확해졌다. 이후 스웨덴은 신성로마제국 내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제국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어 그 체제에 의존해야 했다.
프랑스는 알자스와 라인강 일대의 영토를 얻었으나, 이들과 신성로마제국 간의 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더 이상 제국의 정치에 내정간섭을 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과는 따로 또 11년이나 더 소모적인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특별히 가시적인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합스부르크는 어떠했을까? 일단 1624년으로의 복귀에서, 합스부르크의 세습영지는 예외가 되었다. 다른 참전국들과 비교했을때, 합스부르크가 양보한 영토는 변경지역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토 문제가 전부가 아니다. 30년 전쟁 직전을 살펴보면, 합스부르크의 위기감은 명확했다. 오스트리아의 심장부와 보헤미아까지 개신교가 깊숙이 들어와서 오래된 교회령들을 장악해나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보헤미아의 반란 사건도 이러한 상황을 배경에 깔고 있었다.
그러나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이 지역은 빠르게 다시 가톨릭화되었다. 개신교 세력의 맹주를 자처하던 이들이 모두 패배하고, 프랑스는 더이상 제국 내정에 개입할 힘이 없는 상황에서, 전쟁 이후 이 지역의 개신교 귀족들이 줄지어 가톨릭으로 개종한 때문이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 왕가의 내실은 전쟁 이전보다 더 튼튼해졌다.
제국의 권위 면에서 봤을때, 합스부르크는 여전히 막대한 자원과 황제의 권위를 보유한 유일한 세력이었다. 더욱이 독일 소국들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황제에게 기댈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앞서 보았듯, 스웨덴도 황제 지지로 돌아섰고 전쟁 이후 제국 정부는 독일 제후들 대부분의 지지를 회복했다.
실질적인 군사력에서 보면, 전쟁 초기 황제가 직접 행사할수 있는 군사력은 미약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실질적 힘은 스페인에 비하면 미약했다. '황제군'이라고는 하지만 잡다한 세력의 연합체로 황제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군대가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1619년에 보헤미아 귀족들이 황제의 방까지 쳐들어와서 황제를 협박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면서 철저히 합스부르크 왕가 수호에 헌신하는 진짜 '황제군'이 태어났다. 전쟁 이후 몇 가지 개혁을 더 거치면서 이 군대는 진정 강력한 제국의 상비군이 되어 17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의 놀라운 팽창을 이끌었다. 이들은 동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군을 연파하고, 서쪽으로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영국과 연합하여 루이 14세의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아류가 아닌 진정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시대의 막을 열게 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했을때, 합스부르크와 그로 대표되는 신성로마제국은 30년 전쟁의 승자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패배자는 더욱 아니었으며, 전쟁 이후 제국이 권위를 상실하고 추락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이 전쟁을 개신교의 승리, 가톨릭의 패배로 볼 근거도 희박하다(물론 이건 전제부터 틀렸지만).
따지고보면, 30년 전쟁은 모든 참전 세력이 조금씩 얻고 조금씩 내주면서 종결되었다. '타협'으로 종결된 이상 그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19세기의 휘그 사관이나 막스 베버식 사관을 걷어내고 철저히 17세기의 상황에 집중해서 볼때, 베스트팔렌 조약은 어느 한쪽이 확고한 승자라고 불릴 수 있는 성질은 아니었다.
나오며
그렇다면, 30년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을까? 일견 그런 면도 있으나, 굳이 패배자를 지목하라면, 양측의 강경파 세력들을 들수 있을 것이다. 합스부르크를 비롯해서 모든 세력들이 조금씩 얻은 것도 있고, 양보한 것도 있으나, 강경파 세력들은 애초에 목적이 '타협 없는 승리'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목적을 전혀 이루지 못한 이들이 되었다.
사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예전 교과서가 종종 그랬듯이 '근대의 문을 열고~' 하는 식의 설명을 붙이기는 어렵다. 일부 수정안을 제외하면 조약은 대부분 전쟁 이전으로의 복귀였다. 신성로마제국은 다시 예전의 '합의의 정치' 체제로 돌아갔고, 교회령 안건과 종파갈등 문제도 양쪽이 조금씩 타협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제국 내의 종교 갈등은 무력이 아니라 제국 의회와 법원의 중재를 통해 해결해야 될 문제라는 공감대가 확고하게 이루어진 것은 분명한 성과였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은 유럽 그 어느 국가보다도 다종교가 비교적 원활하게 공존하는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모든 조항들은 엄청난 혁신이 아니라 사실 전쟁 이전부터 양측의 온건파들이 제국 내의 갈등 해결을 위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해오던 것들이었다. 양측이 서로에 대해 가졌던 공포심과 불신, 강경파의 프로파간다와 여론선동 때문에 채택이 안되었던것 뿐이다. 어쩌면, Wilson 선생이 지적했듯이, 30년 전쟁의 가장 큰 비극은 그 해결책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었다는 사실을 30년이나 피를 뿌리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사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에서 수두룩하게 반복되었지만, 아직도 제대로 배웠는지가 의심스러운 교훈이기도 하다.
참고
Martyn Rady, The Habsburg Empir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2017).
Peter H. Wilson, The Holy Roman Empire: A Thousand Years of Europe's HIstory (London, 2016).
Peter H. Wilson, Europe's Tragedy: A New History of the Thirty Years War (Cambridge, 2009).
Geoff Mortimer, The Origins of the Thirty Years War and the Revolt of Bohemia, 1618 (Basingstoke, 2015).
Richard Bassett, For God and Kaiser: The Imperial Austrian Army (New Haven, 2015).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배달민족 작성시간 19.07.18 예전에 대학에서 그냥 피상적으로 배울때 교수님이 ‘30년전쟁의의는 이제부터 종교가지고 유럽내에서 전쟁안하기 땅땅땅 한거여’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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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델카이저 작성시간 19.07.18 1. 훨씬 오래전에 웨지우드 선생도 합스부르크가 전쟁에서 패한 것이 아닌, 실질적으로 통제하는데 골머리를 앓던 독일 지역의 통제권을 일부 포기하고 헝가리 지역에 내실있는 체제로 재편되는 것을 택한 것이라고 설명하던 기억이 나네요. 뭐.. 막판에 황제군 전황이 좀 많이 안좋긴 했습니다만..
2. 어차피 협상으로 끝날일이고 끝났어야 하는 일이 30년에 걸친 끔찍하고 파괴적인 재앙이 되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에요. 칼을 뽑아 내리치긴 어렵지만 내리친 이후에 그걸 수습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인 듯.. -
답댓글 작성자mr.snow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9.07.18 강경파들은 앞뒤 재지 않고 일 벌려놓고, 뒷수습은 다른 사람들이 고생하면서 하고 뭐 흔한 패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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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heidegger 작성시간 19.07.18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