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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중세 유럽]6세기 프랑크: 선물

작성자헤 센|작성시간21.08.31|조회수208 목록 댓글 1

메로빙조 프랑크 왕국은 전쟁을 통해 드넓은 강역을 가진 왕국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너무나도 많은 세력이 왕국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클로비스 1세가 갈리아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성공했을 때, 이미 프랑크인 군사 집단부터 현지 토호, 주교 등 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힘을 가진 수많은 이들이 새로운 지배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왕국은 사실상 수많은 세력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연합이었다. 그리고 이 연합의 우두머리는 국왕과 그의 왕실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수많은 이들이 국왕으로부터 자신들의 상황과 권리를 적절히 조정하며 이익을 챙겨주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국왕은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실상 가진 힘은 오직 수많은 집단과 세력에서 부여한 권한만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이론적인 이야기고 그 권한과 왕실의 자체적인 권위만으로도 국왕과 평범한 유력자의 차이가 크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 국왕이 누군가를 잡아오기를 원한다면 수많은 이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어 잡아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를 잡아온 이들은 국왕에게 협력의 `대가`를 바랬다는 것이 문제였다. 즉, 프랑크 왕국은 국왕이 수많은 유력자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권한을 통해 왕국을 다스린 것이다. 그리고 힘을 더 필요로 한다면, 유력자와 협상하여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어주고 힘을 받는 협력을 구해야 했다.

다만 대가나 협력의 이야기는 이익만을 추구해서 계약되는 사무적인 분위기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잡담과 술판이 난무하는 연회나 공적인 집회에서 이뤄졌다. 국왕은 이런 모임을 통해 유력자나 가신과 '사회적 관계'를 맺고 유지했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한 상태에서 그들과 협상하여 협력을 구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국왕과 유력자가 사회적 관계의 연결점이자 협상 도구로 사용한 것이 바로 '선물'이었다. 국왕은 상당한 양의 왕실 보물을 이 선물을 통해 충당할 수 있었다. 유력자가 주는 선물은 대체로 귀하고 값진 물건들이었고 국왕과 유력자 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선물은 이렇듯 의미가 깊은 경우가 잦았던 탓에 국왕은 왕실 보물을 오로지 공적인 상황에서 합당하다 여겨지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다른 유력자나 가신에게 분배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래서 국왕이라 할지라도 왕실 보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차라리 왕국의 자산이라 하는 것이 옳을 정도로.

때로는 유력자나 국왕이 상황에 따라 은밀하게 선물을 주고받고 싶을 때가 존재했는데 그 경우 선물은 뇌물이 되었다. 사실 이 두 형태의 증여는 경계선이 매우 희미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언제든 변화할 수 있었다.

비록 국왕은 마음대로 왕실 보물을 처분할 수 없었지만 막대한 규모의 왕실 보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국에서 그 보물을 노리고서 기꺼이 협력하려 드는 유력자를 쉽게 모을 수 있었다. 이러다보니 왕국에는 언제나 머물며 왕의 호의를 사 보물을 얻거나 보물을 내고서 각종 권리나 관직을 얻으려는 이들로 북적거렸다. 유력자 입장에서 이 선물을 주든 받든 간에 그 양질과 규모에서 그 유력자의 위신이 나타나는 것이었기고 상황에 따라 관계가 정립되거나 무너질 수 있는 표시로도 여겨졌다. 결국 그들에게 선물은 어떻게든 중요한 것이었다.

다만 이 선물이 언제나 협력과 합의 아래서 주고받아진 건 아니었다. 국왕은 때로 골치아픈 문제나 분란이 발생하면 이를 폭력으로 해결하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공물이나 전리품을 받아낼 일이 생기면 해당 유력자로부터 '선물'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즉, 선물은 때에 따라서는 대화의 수단이 아니라 위신을 얼추 유지하는 방식에서 뜯을 수 있는 세금이 아닌 방식의 세금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물을 통한 이런 부의 순환은 무한순환의 고리가 아니었다. 한 유력자가 자금을 필요로 하여 얻은 선물을 다른 방식(대게 군역)으로 지불했다면 그는 더 이상 왕실 금고에 선물을 줄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이런 경우와 마찬가지의 이유들 때문에 선물을 통한 부의 순환은 자연적으로 감소세를 탈 수밖에 없었다. 왕실은 당연하게도 부족분을 언제나 국왕의 사유재산에서 충당해야만 했다. 충당분은 대체로 세금이나 전리품이 주였다. 확실히 세금이 가장 유용한 보충분이었다. 하지만 세금은 전통과 상황에 따라 수급이 불확실하고 그리 크지만은 않았다. 이러다보니 전리품이 가장 귀중한 보충분이었다. 비록 일시적인 수입이지만 그 양은 상당했다. 심지어 즉석에서 재분배를 해야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전쟁을 매번 나아가 얻어내지 못하면 얻을 수 없는 분이었다. 그나마 6세기 프랑크 왕국은 분할 상속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전쟁과 원정을 이어나간 덕분에 상당한 양의 전리품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6세기 말엽에 이를수록 프랑크를 중심으로 한 패권이 형성되어 전쟁이나 원정의 빈도가 크게 줄면서 전리품의 양도 줄어들고 말았다.

여기서 요점은 프랑크 왕국의 번영과 쇠퇴와 전리품 공급의 연관성을 너무 잡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전리품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수입이고 경제적인 부분보다는 정치적인 부분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 물론 전리품을 받은 군인과 유력자가 이를 경제적으로 사용했다면 분명 긍정적인 변화가 존재했겠지만, 프랑크 왕국의 경제가 그 요소 하나만으로 성장하고 감소할 정도로 척박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프랑크 왕국과 전리품의 관계는 정치적 부분에서의 이야기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보면 매우 큰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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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8.31 프랑크 왕국의 번영과 쇠퇴는 전리품 공급과의 연관성을 너무 잡을 필요는 없겠군요 반면에 정치적으로 보면 매우 큰 문제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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