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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고대 중동][펌] 로마에 맞선 유대인 반란의 지도자, 시몬 바르 코크바

작성자워라|작성시간22.01.12|조회수226 목록 댓글 2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hba ?~서기 135년)는 서기 132년부터 135년까지 로마 제국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의 군사 지도자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거의 200여 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아왔으나, 독립 정신이 매우 투철하여 기회만 생기면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몰아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렇게 해서 시몬은 먼저 유대인들의 성스러운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켜 로마 수비대를 신속히 제압했다. 

 

 

                                                            (시몬 바르 코크바의 초상화)

 

당시 예루살렘에는 로마군 제 10군단 프렌텐시스(Fretensis)가 주둔하고 있었으나, 시몬이 이끈 유대 반란군의 기습을 받고 큰 사상자를 냈다. 예루살렘 근처의 이즈라엘(Yizrael) 계곡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 제 6군단 펠라타(Ferrata)가 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급히 출동했으나, 유대 반란군의 기세가 워낙 거세에 도저히 제압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유대 지방 인근의 로마군 주둔 병력들인 로마군 제 3군단 갈리카(Gallica)와 로마군 제 3군단 키레나이카(Cyrenaica) 및 로마군 제 22군단 데이오타리아나(Deiotariana)와 로마군 제 2군단 트라이아나 포르티스(Traiana Fortis)가 예루살렘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로마군 제 22군단 데이오타리아나는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에 유대 반란군의 매복에 걸려 부대가 해체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부상을 당한 로마군 병사를 묘사한 부조)

 

잇따른 승리에 기고만장해진 시몬은 유대인 사회에서 존경을 받던 랍비(Rabbi 율법학자)인 아키바(Akiva)로부터 ‘별의 아들’을 뜻하는 말인 “바르 코크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곧 시몬이 ‘유대인들을 구해낼 구세주’라는 뜻이었다. 

 

또한 시몬은 스스로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왕자’라는 뜻인 나시 이스라엘(Nasi Israel)이라고 불렀고, 바르 코크바라는 글자가 새겨진 동전까지 발행할 만큼 거의 한 나라의 국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바르 코크바가 발행한 동전들의 사진)

 

그리고 바르 코크바가 로마를 몰아내고 유대의 독립을 가져다 줄 구세주라고 믿고 반란군에 합류한 유대인들의 수도 무려 4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벌어졌던 유대 지방의 지도)

 

그러자 로마군은 유대 반란군이 머문 도시들을 포위하고 그들의 식량과 물자 보급을 끊어버려 고립시키는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또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섹스투스 줄리우스 세베루스(Sextus Julius Sever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 제 10군단 게미나(Gemina)와 제 9군단 히스파니아(Hispana) 및 제 5군단 마케도니카(Macedonica)의 3개 군단과 50개의 보조군까지 동원하여 대규모 증원군을 유대로 보냈다. 당시 로마 제국 전체 군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무려 12만 명이 바르 코크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현재 이스라엘 북부 베트 셰안 계곡의 텔 샤움(Tel Shalem)에서 유대 반란의 흐름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로마군이 세운 승리의 아치(건물)가 발견되어 로마군이 승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바르 코크바와 그의 남은 군대는 베탈(Betar) 요새에 갇혔다가 135년 여름, 포위 공격을 당했다. 이 공격에 로마군 제 5군단 마케도니카와 로마군 제 11군단 클라우디아(Claudia)가 참가했다. 

 

 

바르 코크바는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요새는 함락 당했고, 이때 로마군 병사들은 “말들의 콧구멍이 피에 잠길 때까지 학살을 했다.”고 알려졌다.

 

바르 코크바 본인은 자살했다거나 뱀에게 물려 죽었다고도 하며, 그의 머리는 잘려져 하드리아누스 황제한테 바쳐졌다고 알려졌다. 

 

바르 코크바를 도와 반란에 가담했다가 로마군에게 붙잡힌 유대인 랍비들인 아키바는 쇠로 만든 빗으로 몸의 피부가 벗겨지고, 이쉬마엘(Ishmael)은 머리의 피부가 천천히 벗겨졌으며, 하나니아(Hanania)는 토라(유대교의 율법서) 두루마기와 함께 젖은 양털에 감싸진 채 불에 태워지는 식으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살아남은 반란군의 일부 세력들은 136년까지 저항을 했지만, 결국 로마군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다.

 

이 바르 코크바의 반란으로 58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었고, 1035개의 마을들이 파괴되었으며, 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로마군에게 끌려가 노예로 팔려나갔다.

 

당시의 정황을 묘사한 기록들에서 바르 코크바는 무척이나 오만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탈무드(Talmud)에서는 바르 코크바가 저항군에 가담한 유대인 젊은이들한테 각자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서 용맹함을 증명하라고 강요하였고,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신이여, 당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으니 우리를 방해하지만 마십시오!”라고 기도를 하여 랍비들로부터 불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연대기에 의하면 바르 코크바는 자신의 반란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모든 유대인들을 죽여 버렸으며, 아울러 로마인들과 싸우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을 처형하거나 예루살렘 밖으로 쫓아냈다.

 

반란이 실패하자, 탈무드에서는 바르 코크바를 가리켜 ‘거짓의 아들’이라는 뜻인 “벤 쿠시바(Ben-Kusiba)”라고 불렀는데, ‘거짓된 구세주’라는 경멸적인 호칭이었다./

 

출처: <중동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112~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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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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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1.12 반란의 주동자인 바르코크바가 상당히 잔인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워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1.13 네, 그리고 이 반란보다 약 15년 전에 벌어졌던 유대인들의 또 다른 반란인 키토스 전쟁에서도 유대인들이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을 학살하고 그 피부를 벗기고 피를 몸에 발랐다는 식의 풍문이 돌만큼 잔인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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