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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6) 프리빌로프의 복권 시도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5.11|조회수73 목록 댓글 2

프리빌로프의 복권 시도

위에서 썼듯이,

그 행사의 참가자들이었던 트리피츤의 옹호자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힐 기회가 없었다.

아무르강 하류 혁명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의 기억과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많은 작업들이 프리빌로프(Н. Прибылов)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는 그들과의 서신왕래를 위한 특별한 문서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불렸다.

"트리피츤 지지" 와 "트리피츤 반대".

그의 죽음 직전에 (그는 1971년 12월 17일에 사망했다), 니콜라이 니키티치(Николай Никитич)에게 문서들을 주었다.

 

프리빌로프가 만든 "일치되는 참조" 라는 문서철을 열어 봅니다.

 

“이 편지들 및 여기에 포함된 일부 기타 비공식 문서는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지역 역사에 대한 공식 연구가 종료되고, 하바로프스크의 기록 보관소 문서에 대한 접근 권한이 없는 연구자들의 개인적인 문제로만 선언되었을 때인 1957년경부터 1967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바로프스크 기록 보관소 문서에 대한 접근은 개인 연구자가 아닌 관련 기관의 요청에 의해서만 허용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수집된 개인 서신에서 발췌한 내용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참가자와 연구원 간의 비공식적인 의견 교환을 반영합니다.

편지들 중에서 일반적으로 관심이 가는 편지만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은 프리빌로프가 만든 문서철 내용중 일부일 뿐이다.

 

 

 

아기셰프(Р. Агишев)에서 비소노프(Бессонов)까지

 

(전 극동공화국(ДВР) 농무부 장관) 및 갈리온카(В.П. Голионко, 3개의 러시아 혁명 참가자). 1959년 4월 24일

 

“나는 톰스크 기록 보관소에서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개최된 제1차 소비에트 대회 의사록과 대회에서 선출된 집행 위원회 회의록 사본을 받았습니다.

 

이 문서들은 니콜라예프스크 지역 공산주의자에 대한 비난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 볼셰비키인 젤리진(Железин), 부진비치(Бич-Бузин, 혹은 Бузин-Бич), 아우스셈(Ауссем), 하바로프스크 및 기타 지역 사람들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영향력을 유지했음을 보여줍니다.

대회 후와 이어진 니항에서의 철수까지 니콜라예프스크의 모든 문제는 볼셰비키가 주도했습니다.

부진-비치

1900년대 초반 니항 도심의 지도. 오늘날보다 면적이 작다.

 

민간인 학살이 없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역사를 왜곡하려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시도하는 거짓말일 뿐입니다.”

 

Само собой разу-меется, что никакой расправы над мирным населением не было. Все это досу-жий вымысел, пытающихся во имя каких-то личных эгоистических мотивов, извратить историю

 

 

 

극동공화국의 군부 총사령관이었던 에이히(Г.Х. Эйхе, 1893~1968)가 프리빌로프에게 보낸 편지.

1963년 12월 23일

 

트리피츤의 "사례"는 그가 당시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의 볼셰비키 "지도자"에 의해 혼동되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 간부들이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생각없이 해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다른 동료들이 또 다른 편지를 쓴다면,

- 의문은 즉시 해결되며 또한 당신이 제안한 방법으로 해결됩니다.

 

“니콜라예프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항사건)은 당시 완충국가였던 극동공화국의 한계를 넘어선 심각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이유 때문에 트리피츤과 그의 행동에는 믿을 수 없을 많이 얽히고 모순되는 의견, 판단, 심지어 문서가 형성되어 이를 파악하는 데 여전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имел в то время серьезное значение, выходящее за пределы буферной ДВР. По целому ряду объективных и субъективных причин вокруг Тряпицына и его действий образовался такой невероятно запутанный, противоречивый клубок мнений, суждений и даже документов, что разобраться в нем надо еще много времени и много трудов»

 

 

 

파르티잔 사모이로프(И.И. Самойлов)와 파르티잔 지미도프(Н.С. Демидов)가 주고 받은 편지. 1960년 7월 29일.

 

"나는 당신의 편지를 받고 놀랐습니다.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가 일본의 밀정이라는 것을 정말로 모르십니까?

예, 나 자신과 많은 사할린섬 주민들이 안드레예브를 알아 보았습니다.”

 

“예, 트리피츤을 쏜 사람은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일본인에 의해 명예롭게 사할린섬 북부의 일본군 점령지인 알렉산드라프스크(Александровск)로 이주했고, 일본군 호위병이 지키는 백만장자 부자인 페트로프스키의 비호를 받고 살았습니다.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는 일본에서 국가 영웅과 같은 방식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할린섬 북부가 소련으로 반환되는 1925년 일본군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의 추가적인 운명은 나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번역자의 말 : 안드레예브는 1925년 쯤에 사할린섬 북부를 떠나 일본 등을 거쳐 중국 상해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무렵 아시아의 대표적인 국제도시였던 상해는 만주의 하르빈과 함께 러시아 백파 혹은 러시아계 파시스트의 거점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한국 임시정부도 상해에 있었다.

안드레예브가 아무르주 스바보드니(한국명 : 자유시)에서 1921년 자유시참변 무렵 포병부대 지휘관을 한 것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 그가 ‘진실된 공산 혁명가’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제편으로 도주한 사실은 소련시대에 비밀로 분류되어, 한국 독립군 사이에서도 일본으로의 도주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니항사건 기간중 일본군의 공격에 항복하거나 함께 국외로 도주한 러시아인들도 많다.)

«Письмо ваше получил и удивлен: неужели вы не знаете о том, что Ан-дреев был посланцем японцев?

Да я лично сам и многие сахалинцы знаем и видели Андреева. Да, это он расстрелял Тряпицына и после этого с почетом был привезен японцами в Александровск и жил во флигеле у миллионера Петровского под охраной японских штыков. Андреев почитался японцами так же, как их национальные герои. Был в 1925 году увезен японцами. Дальнейшая его судьба мне неиз-вестна»

일본군을 환영하는 러시아인

일제가 400여명이 처형되었고, 나중에는 3,000명이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처형되었다고 주장하는 니항감옥. 믿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요즘들어 이것을 믿는 사람은 드물다.

 

 

출처 및 참고문헌 등 :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동조했던 한 아나키스트의 죽음.

니항사건(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의

무적황군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 Y. I. 트리피츤 (Яков Иванович Тряпицын)

제목 : 메즈도우소비차(МЕЖДОУСОБИЦА, 국제전)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저자 : 스말야크 (В. Г. Смоляк)

 

박바리스 : 고려인 역사학자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Пак, 1931년 1월 4일 소련 블라디보스토크 출생. 2010년 12월 24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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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5.11 트리피츤을 쏜 안드레예브는 일본에서 국가 영웅과 같은 방식으로 존경을 받았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5.12 예. 당시 일본의 영웅이 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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