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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9) 니항사건 관련 기록의 보존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5.17|조회수97 목록 댓글 5

1920년경 사할린주 지도. 당시 니항의 직할면적도 경기도 보다 넓었다.

 

아무르 강 하류에서 혈통이 시작된 유명한 정치인 이리나 하카마다(Ирина Хакамада)는 가족의 전설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족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리피츤 부대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볼셰비키 파르티잔 사령관이라고 칭했지만 실은 도적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아이디어는 강도질이었습니다.

그는 도시를 공포에 떨게 하였고, 모두를 죽였습니다.

갱단이 도시에서 쫓겨나기 시작했을 때,

트리피츤은 사할린으로 떠나기로 결정하고 많은 주민들을 인질로 데려갔습니다.

 

사람들을 붙잡아 누가 무엇을 입었던지,

억지로 배에 싣고 끌고 갔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트리피츤이 사할린섬으로 떠난 것이 아니고, 안드레예브가 자유시에 갔다가 일본군이 점령한 사할린섬으로 떠났다.

1920년 당시 한국의 신문 등도 트리피츤을 살해하고 사할린섬으로 도망친 안드레예브와 혼동하였다.

 

독립유공자 이지택의 ‘트리피츤은 니항의 포병장교였고, 레비제바는 총독의 양딸이다.’ 등등의 허위 진술도 한 몫하였다.

 

니항사건을 제1차 니항사건, 제2차 니항사건으로 나누는 것은 당시 일본신문이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新)報)에서 하던 방식이며,

2000년대 이전 한국의 역사학자중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1980년대까지 니항사건은 독립군의 3대 승리중 하나로 꼽는 사람이 많았다.)

 

 

 

​​사할린 주립 대학의 역사 사회학 및 경영 연구소 소장 미하일 볼코프(Михаил Волков)는 북사할린섬이 일본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지 75주년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이 씁니다.

"1920년 초에 파르티잔들이 니콜라예프스크에 접근했으며

무정부주의자 야코프 트리피츤(Яков Тряпицын)이 파르티잔 부대의 수령이었습니다.

그는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에서 잔혹한 유혈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의 명령에 따라 파르티잔들은 이전 정권과 연결되었거나, 의심스럽게 생각된 많은 사람들, 그리고 부르주아 전체와 어떻게든 연결된 모든 사람을 근절했습니다.

볼셰비키 공산당원도 총에 맞았습니다 ... "

 

나우모바 거리

오늘날 니항의 나우모바 거리 (나우모프의 이름을 땀)

니항 기념공원

1920년 파르티잔의 진군로

 

니항(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의 동료이자 존경받는 예술가이자 탁월한 홍보 담당자인 알렉산드르 리피투힌(Александр Лепетухин)은 <태평양의 별>이라는 신문에서 미하일 볼코프의 주장을 반복합니다.

“모든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과 고위 관리들, 상인들이 총에 맞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의 가족과 친척이 총에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처형에 만족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지지자들을 무장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니항사건 기록의 보존

하바로프스크, 톰스크, 모스크바의 기록 보관소에는 그 사건과 사람들에 대한 원본 문서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할린 지역의 노동자, 농민 및 볼셰비키 군대 대의원들의 소비에트 회의록(1920년 3월)은 연구원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1920년 4월부터 5월까지 사할린 지역 집행 위원회의 일부 회의록 원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의 파르티잔 부대 사령관의 원래 명령,

니콜라예프스크 군사 본부와 볼셰비키 상급 당국과의 전신 교환 내용,

중앙 당국의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 대한 지시 사항입니다.

 

잡지 <아무르강 어귀>,

니콜라예프스크(니항) 지구의 볼셰비키 군대 본부와 관련된 기관간의 전보 내역들,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의 군사 혁명 본부와 (하바로프스크)공산주의자 사이의 <붉은 전화>

 

등등과,

당시 신문에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1919년에서 1920년 아무르강 하류에서의 소비에트의 혁명 투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필요한 출처의 선택적인 인용이 아니라

모든 역사적 증거에 기초해서만 제공될 수 있습니다.

 

이 무렵, 니항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新)報). 1920년대 3대 독립군 승리의 시작으로 알려지게 된다.

일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新)報)가 제1차 니항사건, 제2차 니항사건으로 구분하였고, 오늘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도 사실이라고 주구장창 우겨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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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5.17 볼셰비키 파르티잔으로 칭했지만 도적이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5.18 그것은 러시아에서 공산당이 설치던 시대에 그랬고, 요즘은 그냥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라고 많이 보고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5.18 신룡기2 ㅇㅇ 그렇군요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22.05.18 매번 수고가 많으십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5.18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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