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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12) 비극을 지지할 때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5.23|조회수53 목록 댓글 2

하바로프스크의 대학 연구소에는 훌륭한 교수, 특히 역사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랴보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ябов)와 니나 알렉산드라브나 아브졔예바(Ни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вдеев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르강 하류지역 러시아 내전의 역사에 대한 나의 관심을 지지했습니다.

1920년경 사할린주의 위치

 

나는 이 문제에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고,

하바로프스크 지역의 공산당 기록 보관소에서 일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수록 더 많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보관된 문서들은 한 가지를 말하지만, 책은 다른 방향을 말하고 있습니까?

 

많은 것들이 불분명했지만 한 가지를 확실히 배웠습니다.

 

보관된 문서철의 문서들에서만 쿠쿠쉬키나 할머니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 우리 파르티잔이 나의 사령관 야샤 트리피츤과 그의 아내 니나 레비제바를 쏘았습니까? ......"

 

 

연구소 생활이 끝난 후 나는 캄소몰(комсомол)에 있는 하바로프스크 지역위원회에서 일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나는 한때 다소 이상한 상황에서, 이 주제로 돌아 왔지만 과학적인 연구를 잊어야만 했습니다.

 

 

부진-비치 부대에서 활동한 파르티잔의 증언

어느날 캄소몰(комсомол)의 지역위원회에 있던 나를 한 노인이 찾아와, 아무르 강 하류의 내전 참가자라면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불행히도 나는 그의 성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가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부진-비치 부대의 파르티잔이었다. (отряде Бузина (Бича))

 

일본인들의 기습 공격 도중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나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고,

1920년 5월말에 파르티잔들의 병원이 있는 니즈녜예 탐보프스카예(Нижнее-Тамбовское) 마을로 보내졌습니다.

 

떠나기 전,

사할린 주의 집행 위원회 위원장인 표트르 젤레진(Федор Железин)이 나를 방문하여 방수 종이로 싸인 큰 묶음을 건네주었습니다.

나는 이 묶음을 양동이에 넣고 기름종이를 한 겹 더 감아 숨겼다.

그것은 제가 한 일입니다.”

 

스말야크(В. Г. Смоляк)의 질문 :

"그리고 어디다 숨겼습니까?

왜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고 물었다.

 

부진-비치 부대에 참가한 파르티잔 답변 내용 :

“장소를 잘 기억합니다.

마을의 랜드마크 주변 가장자리에 있는 우물에 숨겼습니다.”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두려웠다.

결국 젤레진은 트리피츤과 함께 총에 맞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제공하려고 합니까?”

 

“당신이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저를 니즈녜예 탐보프스카예(Нижнее-Тамбовское)로 데려가시면 그것이 묻힌 곳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펼칠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2002년은 러시아 내전 종식 8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 날짜는 매우 무표정하게 축하 되었습니다.

아마도 동족간 내전이 있었던 나라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생각에 이러한 태도는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승자와 패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도 기인합니다.

 

같은 운명으로,

그들은 여전히 볼셰비키와 반볼셰비, 붉은 군대와 백군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러시아 땅이라는 공통의 무덤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부의 머리에는 기념물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무덤은 땅에서 쓸려나가고 잡초가 무성합니다.

 

도시, 거리, 기업, 행정관청, 농장 및 공장은 "볼셰비키의 빨간색"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기억 속의 “백파”는 저주, 모호함 및 망각으로 남아 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남한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남한에서는 1945년 분단이후, 반공정권이 들어서면서 김좌진 등과 사할린의용대 출신 독립군의 활약상이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부터,

아무르강 하류의 니항사건은 일제 침략군이 전멸한 1920년대 “3대 독립군 승리의 시작”으로 알려져 왔었다.

물론 전직 광복군 출신중에는 김홍일 등이 너무 심하게 뻥친 것이라는 의견도 분명 있다.

 

그러나 2000년이 들어서자,

백파출신 A.Y.구트만, 이지택, 김낙현, John j stephan, 하나테루유키, 이오키료조 등의 책이 갑자기 남한의 독립기념관과 주요 백과사전에 사실인양 기록되면서부터 니항사건은 독립군의 학살극으로 조작되기 시작하였다.)

트리피츤 부대의 파르티잔 간부

니항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가 세운 니항사건 충혼탑 (파괴되었다.)

 

일본의 1920년 4월 사할린섬(화태도) 점령작전 목적

1920년 4월경부터 시작된 일제의 니항 재공격 작전. 일본 민간인과 포로구출이 목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1920년 4월 일제의 북사할린섬 공격 이후에서야, 니항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가 처형되었다.

일제가 1920년 7월에서야 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사할린 섬 북부를 공격했다는 주장은 친일파시스트들이나 하는 허위 주장이다. 오늘날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이렇게 까지 조작을 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계이치즌(И. Гейцижн)의 의견

1920년에 극동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계이치즌(И. Гейцижн)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게 문제야. 누구 탓이야?

역사가 질문에 답하도록 하십시오.

한편, 당신이 어떤 사람들을 위해 비극을 지지할 때,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십시오.

 

인간의 피와 생명이 같은 가치가 없다면 어차피 세상은 필연적으로 멸망할 것이기에...”

 

 

소련시대 볼셰비키 위주의 연구 방법

소련 시대에 연구자들은 1917년 10월 혁명과 그에 뒤따른 내전의 역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연구의 독특한 특징은 동족간 학살이 볼셰비키와 반볼셰비키의 두 가지 색상 비전만 있었으며,

역사적 사건 연구에 대한 접근 방식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전에 프로그래밍된 방법뿐이었습니다.

 

아무르 강 하류(1919~1920)에서 발생한 내전의 가장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페이지 중 하나인 "아무르강 하류의 비극"에 대한 저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러시아 혁명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 혁명처럼 운명의 신호 아래에 서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창조 행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혁명에서 자유는 흥미롭지 않고 저항세력에게는 필요하지 않으며, 대중은 그들 자유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는 나의 오래된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작가 베르쟈예프(Н. Бердяев)-

1909년경 아무르강을 운행하던 여객선

이르쿠츠크에 근래 세워진 백파 콜차크의 동상 ??, 한국 독립군과는 적대적인 세력이었다.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 자식들까지 죽인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관련인물

작가 베르쟈예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рдя́ев, 1874~1948) : 러시아의 유명 작가, 사상가, 한 때 볼셰비키에 가담하였으나 볼셰비키 혁명이후 서구로 망명하였다.​

스말야크(В. Г. Смоляк, 1937~2008)은 교사, 과학자, 기업가, 언론인 등 매우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는 주로 역사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말년까지 그는 "극동 내전"이라는 주제로 작업했습니다.

그는 이 주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종종 지역 및 전체 러시아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그는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니항, 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시에서 비-극이 일어난 원인과 야코프 트리피츤(Яков Тряпицын)이 도시를 불태운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들이 "아무르 하류의 비극"이라고 불렀던,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서 일어났던 러시아 내전의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페이지입니다.

 

오자수정
압치니코프 에서 -> '압친니코프' (일본으로 도주한 니항사건의 일제밀정)
셰르쇼프 에서 -> '셰르셰프' (자유시 참변 당시 볼셰비키 군대 2군단장)
치니르라흐 에서 -> '츠니르라흐' (니콜라예프스크 인근의 제정러시아 시대 해안 포대)
니콜라옙스크 에서 -> '니콜라예프스크' (오늘날의 하바로프스크 주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의 예전 명칭)
뜨랴피친 에서 -> '트리피츤' (Тряпицын의 일본식 발음을 러시아 발음으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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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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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5.24 니항 사건이 반공정권이 들어서면서 3대 독립군 승리의 시작으로 알려졌으나 2000년대에 백파 출신의 책이 기록되면서 니항사건은 독립군의 학살극으로 조작되기 시작하였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5.24 예.. 십여년 전까지 독립군의 승리로 보는 책외에는 없었는데..
    2007년경부터 일본쪽 자료를 인용하기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학살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본쪽과 연관된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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