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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14) 레비제바 와의 만남. 조작의 시작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5.27|조회수106 목록 댓글 2

니나 미하일로브나 레비제바(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Лебедева, 1895~1920)

그녀는 아마 1895년 펜자 지방(모스크바 남동쪽에 위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중등학교까지 공부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당시 여성이 이정도 교육을 받으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레비제바는 어린 시절부터 혁명가들의 정치단체와 연결되었습니다.

1914년 펜자 지방 주지사 암살 시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였으며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니나 레비제바

 

시베리아 네르친스크 유배 형벌로 유명한, 아카투이 여성노동교도소(Акатуйская каторжная тюрьма )로, 좌파 사회주의 혁명당의 당수인 마리아 스피리도노바(Спиридонова,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훗날 1918년 8월 레닌을 살해하려고 시도하게 되는 파니 카플란(Фани Каплан)과 함께 추방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니나 레비제바는 과격주의자들(맥시멀리스트, 최대주의자)의 치타 연합(итинского союза максималистов) 조직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노동자 대표들의 시의회 서기(секретарь)였습니다.

 

그녀는 시묘노프(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емёнов, 만주와 시베리아의 악명 높은 친일파, A.Y.구트만의 동료, 독립군을 탄압함) 갱단의 공격을 피해 시베리아 아무르주의 블라가베셴스크로 피신한 후, 다시 하바로프스크로 피신하였고,

지하 조직의 서기가 되었고, 파르티잔들과 연락을 유지했습니다.

 

역사 문헌들에서 보아카-파블라프(Демьян Иванович Бойко-Павлов)는 회의의 이데올로기적 영감을 주는 조직자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무르 지역에서 파르티잔 운동을 조직하는 데 그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불법으로 보입니다.

동시에 그를 "극동 내전의 영웅"으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시베리아의 볼셰비키 간부

보아카-파블라프(Демьян Иванович Бойко-Павлов)

 

그 행사의 참가자들은 파르티잔 운동에서 보아카-파블라프(Демьян Иванович Бойко-Павлов)의 역할에 대해 결코 모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래의 이러한 가정은 스말야크의 책 이전에 결코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남한 역사학계에는 전혀 알려진 적이 없었습니다.

 

 

비소노프의 회상

내(작가 스말야크)가 언급한 비소노프(И. Бессонов)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보아카-파블라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기사들을 읽었을 때,

 

나는 살면서 그런 거짓말쟁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고 확신했습니다.

나는 이전에 그를 너무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순진한 나는 그가 나를 우연히 쐈다고 믿었고,

그리하여 그를 큰 위기에서 구해주었습니다.

 

40주년을 앞둔 보아카-파블라프의 행동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가 속지만 않았다면 그는 1919년 11월 초에 위원들의 의장으로 선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위원 7명 중 4명은 그의 선출에 반대했었습니다.”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 하바롭스크 지하조직의 일원이었던 스라비나(Б.Г. Славина)는 1966년 ‘태평양의 별’ 신문의 편집자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내전 간섭국 군대와 칼미크 갱단(калмыковской бандой)이 도시를 점령한 후 하바로프스크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현지인과 새로 온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지하 노동자들도 알고 있었지만

나와 만났던 다른 지하 노동자들은 보아카-파블라프가 지하운동에 관여했다는 정보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트리피츤과 레비제바의 아나스타시요프카 마을 회의 참석

위에서 언급했듯이 야코프 트리피츤은 소규모 파르티잔 부대의 사령관으로 아니스타시요프카 마을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오늘날의 아나스타시요프카 마을

 

당시 연해주 수찬지역에서는 세간의 이목을 끄는 파르티잔의 승리가 없었고,

트리피츤의 이름은 파르티잔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스타시요프카 마을 대회에 참가한 니나 레비제바와 달리 트리피츤은 대회에서 선출된 혁명본부 위원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아나스타시요프카 마을 회의에서 트리피츤과 보아카-파블라프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논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19~1920년 겨울의 군사작전을 위한 식량 기지를 어디에 둘 것인가?

트리피츤은 보아카-파블라프가 제안한 크냐제-발콘키(Князе-Волконки) 마을을 반대했으며 하바로프스크에서 멀리 떨어진 말므즈(Малмыж) 마을에 기지를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연애관계로 인한 의문점

그러나 갈등의 원인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여자를 찾으세요(шерше ля фам)"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아나스타시요프카 마을 회의에서 니나 레비제바는 유일한 여성이었고, 게다가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습니다.

 

당연히 지휘관들은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지원자 중에는 미래의 혁명 부대의 간부인 할로지로프(Холодилов)와 보아카-파블라프가 있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레비제바는 야코프 트리피츤에 이르러 그녀의 선택을 중단했습니다.

트리피츤을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가 놀랍도록 잘 생긴 청년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역사 문헌들에서는 트리피츤이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를 향한 출발은 다른 방식들로 알려져 왔습니다.

 

어떤 이는 트리피츤이 혁명 본부의 결정에 따라 파견되었다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스스로 떠났다고 합니다.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관점은 보존된 문서들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간접적인 사실에 따르면 트리피츤은 보아카-파블라프의 개인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르 강 하류로 떠났고, 보아카-파블라프는 여성관계에 있어서 라이벌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나는 이 버전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소노프의 회고록

회의 참가자인 비소노프(Бессонов)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할로지로프(Холодилов)가 레비제바에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모욕을 던졌을 때,

바이코-파프로프(Бойко-Павлов)와 나는 그에게 인상 쓰며 퇴짜를 놓았고,

이제 할로지로프(Холодилов)는 그녀를 "창녀"라고 부릅니다.”

 

 

 

냉전시대 친일 반공 노선에 따라 조작된 글들

남한에서 과거 1920년 니항사건에 다룬 글들이 다수 있었다.

일단 ‘1차 니항사건’, ‘2차 니항사건’으로 나누는 것은 오늘날까지 일본만이 주장하는 일방적인 기록이고, 한국에서 2000년대 이전에는 인정된 적이 전혀 없었다.

 

남한의 인터넷 등에서 사실인 양 인용되는 자료의 거의 대부분에서~100%가 친일파시스트 A.Y.구트만과 하나테루유키, 이오키료조의 글만을 편집해 인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 기록과 대조해보면 명백한 조작이다.

이러한 글들의 공통점은 니항에서 앞잡이, 일본 밀정, 친일파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증언만을 모았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상당수는 독립유공자 혹은 소련시대 공산당원증을 받았다고 한다.

 

(1) 김00 : (일명 김 이노겐찌 이바노비치, 동명이인 다수임), 독립유공자, 1920년 니항사건과 1921년 자유시참변에 참여하였으며, 상대방을 ‘무정부주의 강도’, ‘악마’로 몰아 기습공격을 주도함.

중대급 부대를 지휘한 적 있고, 당시 한국에 있던 독립유공자 000과는 1918년경 니항에서 독립운동단체까지 조직했다고 한다.

회고록에서 각종 허위 주장을 하였으나, 1920년 7월경 께르비에서 트리피츤을 기습하기 직전 러시아 공산당 간부, 박병길, 안드레예브(일제 밀정)와 사전 모의한 것을 분명히 기록하였다.

자유시 참변이후에는 최호림과 마찬가지로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은 자신들이 주도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1928년 이르쿠츠크파 숙청시에도 처벌되지 않았다.

 

(2) 000 : 독립유공자,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였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음. 1920년 니항에 있었던 것은 맞음. 박병길과 함께 니항사건의 중요 증인이라고 A.Y.구트만과 하나테루유키가 자주 인용함.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관여해 징역형을 받음.

이르쿠츠크파에서 화요파로 변신해 활동하다가 다시 공산당의 정체를 밝히는 데 앞장섬

 

(3) 박병길(1898년경 출생~1921) :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등에서, 니항에서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했다고 하여 독립유공자로 표창되었으나,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어떤 기록에도 그런 내용이 없고, 영사관 협력단체를 조직한 것은 일본측 기록에도 분명히 나타남.

니항 조선인회 서기였던 것이 명백함.

러시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보기 드물게 정체가 전혀 파악되지 않는 자로 한국에 물어보는 실정임.

언젠가 북한의 자료까지 공개되면, 밀정 및 친일파들의 행동도 상당히 밝혀질 것임.

 

대표적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허위 자료를 아래와 같이 살펴 보면.....

 

 

---이00 진술,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1~322---

「하바로프스크와 니콜라예프스크 중간쯤 지점에 쏘피아라는 조그마한 어촌에서는 단념 22세의 뜨래삐진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살빛이 약간 갈황색이어서 얼른 보기에는 길기스 아니면 우즈베크종인듯한 청년, 코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날카롭게 생간 콧날은 그의 강직을 말하고 움푹 패인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는듯, 머리는 흑각색, 나이는 30세안팎이나 되어 보이는 청년, 그가 바로 한때 흑룡강물을 거슬려 올린다는 소문까지 퍼뜨린 괴웅이다.…

뜨래삐진은 제1차 대전시에 그의 조국을 위하여 종군하였다가 종전후에 귀향하여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고향에 돌아와 보니 들리는 소식은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멀리 일크쯔끄까지 점령하리라는 소식이다. 아무리 자기 조국이 패전국이라 할지라도 원숭이 같은 일군에게 점령을 당한대서야 참을 수 없는 분통이 터지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애인 레나에게 자기의 심정을 토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애인 레나는 자기 고향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자기네들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5인이 동지를 구하자가 돌연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그들은 촌락을 기습하고 청장년을 모집하고 동시에 부유한 집에서는 무기와 식량을 징발하였다.

이렇게 흑룡강 하류로 내려가면서 동일한 방법으로 무기와 군인들을 마구 모집하였다. 당시 러시아 청년들은 대개개 출전하였던 군인출신이오,

시베라이 북극지대에서 기나긴 겨울의 주야를 농촌이나 어촌에서 보내는 것이 무료하던 차에 뜨래삐진 일파들의 애국적이고 모험적인 협객활동에 가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들도 뜨래삐찐과 마찬가지로 군대생활에서 또는 전선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사상, 무슨 주의는 모르지만 제정 러시아의 썩어빠진 탐관오리들의 횡포…일러전쟁 이후로 가장 멸시하는 일본군대까지 자기네 영토에서 우쭐대는 것을 보고는 숨이 막힐 정도로 저기압상태에 처해있는 그들에게 '이놈의 세상을 때려부시자!'하는 뜨래삐찐의 선둥구호에 공명하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자기 집에 있는 연발 총이나 엽총이나를 되는대로 들고 뜨래삐진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흑룡강변 부락에서 월동하던 우리나라 사람들도 백여명이 뜨래삐찐의 무장집단에 가담하였다.」

 

 

「그는 제1착으로 일본군 세력과 결탁한 유태계 자본가들과 악질적인 탐관오리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000 진술,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4쪽)

 

 

「뜨래삐찐」은 개선장군으로 입성함과 동시에 군대를 적소에 배치해 놓고 총사령부를 번화한 네거리 3층 건물에 좌정하고 제1호 포고령을 발하였는데 모든물자의 판매 이동을 금지하여 경제적 통제를 선포하고 당분가 군정의 실시를 포고하였다.

그 중에서 인상이 깊은 것은 군인이나 민간인을 막론하고 음주, 양조에 대한 절대의 금주령이다. 이 포고령에 위배하는 자는 무조건 총살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000 진술,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4쪽)

 

 

---000 진술, 군비단 관련자 진술. 니꼴라옙스크 사변,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112쪽---

「니꼴라예프스끄 전투에서 총지도자 뜨라비찐은 제정 로시아 시대에 니꼴라예프스끄 도시에서 포병대장으로 5~6년 동안을 복무하던 사람으로 1917년경에 제대하여서 빼젤르부르크에 있으면서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가을에 뻬젤부르크로 붙어 떠나서 자기가 그전에 복무하면서 낯익은 지대 니꼴라예프쓰크에 가서 혁명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서 동지 3명으로 작반하여서 발정하엿다.

 

혁명당시에 파괴된 철도 교통을 천신만고로 치따시에 도착하여서 몇을동안 류숙하면서 당시 치따 총독인 크냐세프의 양딸 레베지에파와 상교 - 결혼하여 가지고 려자와 동행하게 되엿다. 그 려자는 고등상식을 소유하엿으며 혁명적 학식과 사상이 풍부하엿으며 당시 치따에서 미인이란 칭호를 받던 여자이다.」

 

(※위에서 언급한 자료들은 오늘날 러시아 기록들과 대조하면, 대부분 허위이고, 언급할 가치가 없을 정도이다.

일본으로 도주해 니항사건과 관련된 책을 자주 출판한 A.Y.구트만의 글들과 당시 일제의 신문보도 등을 읽고 인용한 수준이다.

구트만과 하나테류유키의 작품들

 

오늘날 러시아에는 트리피츤이 고향이 시베리아 지역이며, 니항 포병대장으로 근무했다거나, 레비제바가 총독의 양딸이라는 등의 주장을 하는 사람 자체가 없다.

오직 일본과 관련된 앞잡이들이나 하는 소리이다.

 

1920년 니항사건 당시, 극동 시베리아의 일본 영사관 설치지역에서 친일 조선인단체를 조직해 활동한 조선인들은 최소 2천 5백여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군시 따라가지 못한 친일 조선인단체 회원 수십에서 수백여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일본 미국에서 자주출판되는 A.Y. 구트만의 니항사건 관련 도서. 이책을 그대로 인용하는 한국의 도서들이 꽤 있다.

A.Y.구트만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책자들

 

A.Y.구트만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한국의 책자들. 독립기념관 공식도서도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거대한 니항 일본군 충혼탑 (높이가 약 20미터 이상으로 보여진다.)
니항사건 당시 일본군에게 투항한 러시아계 주민들

 

니항사건 관련 일본의 주장들

니항의 일본군 장교와 이시다 영사의 딸. 니항에서 사망하였다.

일본에서 자주 출판되는 도서들과 사진들을 오늘날 러시아에서 잘못 인용하는 것이 많다. '니항사건'을 '일본의 수치'라면서 사할린섬 북부와  시베리아 침략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하바로프스크 건물을 니항의 건물이라고 소개하는 러시아 자료도 많다. 차차 수정될 것입니다.

 

러시아 내전 무렵의 아나키스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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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무렵 아무르 강 일대의 맥시멀리스트들

러시아 내전 무렵의 맥시멀리스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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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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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5.27 니나 레비제바도 보통이 아니네요 근데 폰으로 봐서 그런지 첨부한 사진 파일이 안보이네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5.27 오자 수정과정에서 이미지가 사라졌군요. 항상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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