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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15)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의 식량난, 경제위기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5.29|조회수400 목록 댓글 2

아무르강 하류의 파르티잔 운동 또는 혁명의 구성 요소

소련 시대(1922~1991) 역사 문헌들에서 아무르강 하류의 파르티잔 운동은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마흐노프쉬니(махновщины, 우크라이나 일대의 아나키스트 마흐노(1888~1934)의 추종자)"의 극동 버전인 "트리피츤쉬나(тряпицынщина)"라고 불렸습니다.

 

이러한 비교는 얼마나 적절합니까?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경우 모두, 지도자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고, 가난한 농민들의 전쟁이었습니다.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은 붉은 군대와는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공통의 적이 있었습니다.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의 공통점

이념적 의미에서 그들은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 단결되었습니다.

투쟁의 전술과 관련하여 볼셰비키를 포함한 내전의 모든 당사자는 증오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테러를 사용했습니다.

 

아무르강 하류에서의 파르티잔 운동은 우리의 역사 문헌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무르 하류에는 볼셰비키가 거의 없었지만,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는 데 있어 그들의 역할을 경시하거나 심지어 부정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서의 혁명 운동의 주요 동기 원인은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을 위한 볼셰비키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1919년에서~1920년 겨울 사이, 아무르강 하류 지역들의 경제적 문제였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의 사할린주 지역의 경제적 곤란과 식량위기

혁명 이전 러시아 극동 지역, 특히 아무르강 하류 지역은 산업 및 식품을 수입과 외부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헤럴드 오브 아시아(Вестник Азии)>라는 잡지는

“러시아 극동지방은 물품들의 이동 거리가 멀고 동시에

(석유, 석탄, 철도, 삼림, 자원, 어장 등) 큰 가치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수입되는 저렴한 외국 상품과의 경쟁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풍부하고 광범위한 시장을 외국 경쟁자에게 거의 완전히 양도해야 합니다.”

 

라고 썼습니다.

 

극동지방은 특히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와 거리상으로 가까워 외국 자본가, 제국주의자, 국제시장의 경쟁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 등으로 러시아 본토에 식량난과 물자난 등이 발생하자,

손쉽게 극동의 시장과 자원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러시아 혁명과 뒤이은 내전은 이 메커니즘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미국, 영국의 간섭을 불러오게 된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과 내전 발생에 따른 식량부족 사태

1919년 겨울 아무르강 하류 지역의 주민들에게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황이 심화되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의 식량난

 

콜차크(колчак) 정부는 극단적으로 백파와 외국 간섭주의자들을 지원했고,

1918년 9월경에 일본 간섭주의자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아무르강 하류에 4개월 동안 존재했던 지방 소비에트 정권을 전복시켜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사할린주 지방의 관리자는 백파 콜차크 정부에,

사할린 지역의 경제 상황에 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지난 달에 가격이 또 심각한 수준으로 올랐으며,

돈의 가치가 폭락하고, 투기가 일반인을 질식시키고 있으며,

외국, 중국과 일본 시장에 의존하기 때문에, 시장을 안정시킬 수 없습니다.

정부에 대한 비난과 투덜거림을 가장 자주 듣습니다.”

 

콜차크 백파 정권에 대한 아무르강 하류 지역의 불만의 또 다른 경제적 요소는 어업 분야 정책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세계 최대의 어장중 하나인 사할린섬 일대

 

아시다시피 아무르강 하류의 지역의 주요 경제 문제는 양식업과 원근해 어업에 따라 운명에 달려 있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이후 수립되었던 지역 혁명 정권인 니항(니콜라예프스크, 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지역 집행위원회는 대규모 어업을 국유화하고 자본가와 제국주의자의 사유화를 차단했습니다.

 

백파인 콜차크의 새로운 정부는 이 결정을 취소하고 이전 소유자에게 반환했습니다.

자원의 보고였던 시베리아의 농토, 사할린섬 유전과 석탄광산, 삼림, 어장 등을 놓고는 제국주의 국가간 다툼이 심각하였다.

 

아무르강 하류가

콜차크 정권에 대해 크게 불만을 품은 또 다른 이유는 침략자인 일본 간섭군과의 협력이었습니다.

 

 

사할린주 지역을 침략한 일본 간섭군의 압제와 친일파의 등장

러시아 백파 및 친일파와 일본 간섭군과의 협력은 시베리아 땅의 진정한 소유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을 환영하는 러시아인

 

사할린 지역의 일본군 사령관인 코지마 장군(генерал Козима)은 다음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점령 지역을 관리하기 위한 규칙을 발표했다.

1) 영토는 일본 제국의 법률에 따른다.

2) 러시아 사람은 시민권에서 일본 국민과 동일시되지 않지만 정복된 국가의 인구로 간주된다.

3) 지역의 관리는, 지역 주민에 관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일본군 당국으로 이전된다.

 

따라서 아무르 강 하류에서 소비에트 권력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의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일본 간섭군은 시베리아 침략시 러시아인보다 시베리아 거주 중국인을 더 멸시하였고, 중국인 보다는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조선인들을 가장 압제하였다.

 

물론 조선인 중에서도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등 일본영사관 설치지역에서는

친일 조선인단체인 ‘00거류민회’, 00조선인회’, ‘00한인회’, ‘니항 조선인 민회’ 등의 명칭을 가진 조직을 결성하여 밀정활동, 일본군에게 식량공급, 위안부공급, 간첩활동, 테러,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의 방법으로 대일본제국의 시베리아 침략에 적극 협조한 자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곳이 니항이었으며, 조선출신 여성은 당시에도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매춘에 나선 창기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니항사건 당시 사망한 일본인 중 성명불상의 인원중에는 조선인중 일본국적으로 분류된 자도 있을 수 있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사할린섬 북부, 동청철도 점령 진로

 

그리고, 1921년 자유시참변에서 상대방을 ‘무정부주의 강도들의 폭동’ 혹은 ‘무정부주의 강도들의 기습공격’으로 주장한 최호림, 이지택, 김낙현의 일방적 주장은 반드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최호림, A.Y.구트만의 주장을 복사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책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일본과 A.Y.구트만의 주장을 복사해 4,000명 민간인 학살설을 주장하는 저자들의 책

 

필요한 것은 봉기의 화약을 폭발시킬 불심지 뿐이었습니다.

1919년의 아나스타시요프카 회의는 그러한 결정에 자극을 주었습니다.

 

 

부진-비치가 주장한 간섭군에 대한 저항 이유

다음은 주최자 중 한 명인 부진-비치(Д. С. Бузин-Бич)가 회고록에서 아무르 강 하류 지역에서 파르티잔 운동의 시작에 대해 쓴 내용입니다.

 

"지역 혁명가, 전직 적군 병사, 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 파르티잔 부대들이 지역 전체를 배회했습니다.

그들은 외국 간섭군이 자기 맘대로 하는 행동을 원하지 않았고, 지역주민을 위한 자유라는 이름 아래, 참을 수 없었던 모든 사람들이 점차 합류했습니다.

 

반동이 더 격렬해지고

일본이 더 많이 도와줄수록, 주로 농민 출신인 자유 반군 유격대의 규모가 더 빨리 성장하고 강화되었습니다.

 

간섭군과 백파의 만행으로

불타는 마을과 마을에서 조직된 반군은 <누구든지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반대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조직 슬로건을 도입했습니다."

 

 

아무르강 하류, 즉 사할린 주 지역 주민의 일제 침략군에 대한 저항 이유

파르티잔 부대의 구성은 참여 동기와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했습니다.

극동에서 소비에트 혁명 투쟁의 조직자 중 한 명인 파스트이셰프(П.П. Постышев)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일부는 소비에트 혁명을 위해 싸우러 갔고, 다른 일부는 <러시아를 위해> 일본에 대항했고, 다른 일부는 이익을 위해 참여했습니다.

 

아무르강 하류의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중국, 한국 등 다른 나라 국적의 사람들도 파르티잔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길야츠크(гиляцк) 주민들의 대표들 모임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사할린주 길야츠크 마을의 주민들

 

“우리는 일본군들에게 파르티잔 부대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달라고 초대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군의 모든 후원을 거부합니다.

일본군이 우리 마을을 앞으로 방문하지 말고 가능한 빨리 우리 땅을 떠나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초대하지 않은 외국 침입자와 앞잡이들에 맞서고 있으며 농민, 소규모 파르티잔 부대와 함께 무장 저항을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일본 범죄 조직을 우리 땅에서 몰아낼 때까지 생명, 자식, 재산을 보호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생명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잠들 것입니다.”

야코프 트리피츤과 니콜라예프스크 지역 파르티잔 간부들

1920년경 당시 행정구역상 사할린 주의 위치

관련인물

콜차크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 , 1874~1920. 2. 7. 이르쿠츠크에서 체코군단에 의해 체포된 후 처형됨) : 제정 러시아시대 해군 장령이었던 자로, 1917년 러시아 무산혁명이 발생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백파군대를 조직하여 반혁명 활동을 하였다.

나중에는 일본 등 간섭국 등에 협조해 한국 독립군을 탄압하였다. 근래 이르쿠츠크에 동상이 세워졌다.

최호림(崔虎林, 1896~1960, Цой Хорим) : 러시아에서 1921년경 오하묵, 유익정, 최고려, 김하석 등과 이르쿠츠크 파를 조직하여, 자유시 참변에 관계하였고, 이르쿠츠크파에게 일방적인 기록을 남겼다.

최호림 본인은 자유시 참변 이전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나 일본군과의 교전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 일대 독립군 부대 조직에 관계한 것은 사실이다.

남한에서 근래 자주 인용되고 있으나, 대립하였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기록들이나 러시아의 트리피츤 기록에는 대립하였던 독립군들을 ‘무정부주의자, 강도, 강간범, 아편중독자, 학살자’ 등으로 참무하고 살해한 ‘독립운동도 한 적이 없는 친일파’라고도 한 때 불려졌다.

최근 공개된 기록물에서 최호림은 1920년 니항사건을 주도한 트리피츤을 니항에서 포병부대 장교를 수년간 지낸 인물로 묘사하고 박병길이 니항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한 것으로 진술하여, 이지택, 김낙현, 최고려 등에 의해서 사실로 인정되었으나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그런 허위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이후 거센 반발에 결국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소련시대 결국 최고려 등과 수년에서 수십년간 투옥되었다고 한다. (한국 독립운동에 관계하다 투옥되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최근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최호림의 기록을 남한에서 인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본군과의 교전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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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5.29 식량 부족 사태가 심했군요 거기다가 콜차크정부는 극단적으로 백파와 외국간섭주의자들을 지원했군요 일본과 구트만의 주장을 복사해서 출판한 책 가운데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도 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5.29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일종족주의의 저자 가운데는 '한국현대사의 잘못된 것은 1919년 3.1운동 때문에 일어났다'는 등의 처음 들어보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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