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16) 아무르 하류로의 행군, 비치 대령과의 만남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6.01|조회수92 목록 댓글 2

아무르 하류로의 행군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서 야코프 트리피츤은 소규모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다양한 기록 등에 따르면 10명에서 20여명 정도였으며,

니콜라예프스크로 가는 길도 없었고

아무르강의 얼어 붙은 얼음덩어리 사이로 800km 이상을 가야만 했습니다.

트리피츤과 파르티잔 간부

 

이 기간 동안 개별 정착지들에는 소규모 카작(казаков) 부대를 제외하고는 백파 군대나 일본 수비대는 없었습니다.

 

말므즈(Малмыж ) 마을에서 이 소규모 부대는 미진( Г.С. Мизин)이 지휘하는 <모르스키 부대(морским отрядом)>와 통합되었습니다.

 

미진은 그의 이름으로 몇 가지 상당히 큰 군사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1919년 여름, 하바로프스크에서 40km 떨어진 아무르 강 좌안에서,

미진이 지휘하던 파르티잔들은 백파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어업에 종사하고 있던 하바로프스크 생도 학교의 수장인 그로스세비치(Гроссевич) 대령을 체포했습니다.

 

미진의 소규모 부대는 1919년 8월에

트로이츠코예 마을 아래에서 식량을 담은 바지선을 포획하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나중에 이 바지선은 증기선 <바론 코르프(Барон Корф)>에 의해 니콜라예프스크로 예인되었습니다.

 

왜 두 개의 소규모 부대가 통합 된 후, 더 알려졌던 미진이 아니라,

야코프 트리피츤이 사령관이 되었는지 아래와 같이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일부 정보에 따르면

이러한 제안은 하바로프스크 군사 본부의 공식 대표 파프코(М.Е. Попко)가 총회에서 제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르강 하류 주민들의 환영

아무르 하류 지역에서 파르티잔들의 소규모 부대 진격은 성공적이었다.

농민들은 파르티잔들을 해방자로 맞이하고 집회와 회의 후에 대열에 합류했다.

 

촌락과 촌락에 농촌혁명위원회를 꾸려 파르티잔 부대를 지원하고,

숙식과 식량을 제공하고,

다음 정착촌으로 이동할 마차들에 쓸 말을 제공했다.

 

1919년 12월 20일,

백파 군대의 대규모 공격 부대가 니콜라예프스크(니항, 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에서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침미르마노프카(Циммермановка)마을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부진비치(Д. С. Бузин)가 부대를 지휘하여 백파군과 싸우기로 하였습니다.

그 당시 트리피츤은 소수의 파르티잔들과 함께 리무린스크(Лимуринск)와 우딜스크(Удыльск)지역의 광산을 통해 원형의 회피 진군을 하였습니다.

 

파르티잔들은 침미르마노프카(Циммермановкой)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훌륭하게 승리했으며

백파인 토카례프(Токарев) 중위의 부대는 패배했습니다.

 

130명의 백파 중대 중 43명만이 후퇴했고, 나머지는 사망하거나 부상당했습니다.

파르티잔 손실 : 3명 사망 및 4명 부상.

 

부상당한 파르티잔과 백파 병사들은 니즈네-탐보프스키(Нижне-Тамбовском) 마을의 파르티잔 병원에 함께 수용되었습니다.

 

 

비츠 대령 부대와의 조우

1920년 1월 초반에,

파르티잔들이 사피스크(Софийск)에 접근했는데, 그곳에는 파르티잔이 도시(사할린주의 주도인 니항)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온 비츠 대령(полковника Виц)이 지휘하는 백파 군대(대대병력 규모이상)가 있었다.

 

부진-비치가 이끄는 파르티잔들이 사피스크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트리피츤은 1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다시 원형의 우회 기동을 하여

아무르강 인근의 바가로드츠코바(Богородского) 마을 근처로 갔습니다.

 

따라서

비츠(Виц) 대령은 포위망 함정에 빠진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비츠 대령은 사피스크를 떠나 마린스크(Мариинск)로 후퇴하여 파르티잔들과의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때, 모험으로 가득 찬 탐정 이야기에서와 같이 추가적인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바가로드츠코바 마을 근처에서 파르티잔들은

비치 대령의 부대를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 우편물, 탄약을 가지고 니콜라예프스크(니항)에서 오는 수송부대를 전투도 거의 없이 확보합니다.

 

트리피츤은 비츠 대령에게 전신으로 연락하여 개인간 회의를 제안했습니다.

 

비츠 대령은 동의하지만 트리피츤이 비무장 상태로 만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무기도 없이 혼자인 채로 트리피츤은 마린스크 마을로 갔습니다.

 

 

 

트리피츤과 비츠 대령과의 만남

트리피츤는 마린스크 마을 변두리에서 백파를 만나 본부가 있는 집으로 안내받았습니다.

23세의 파르티잔 사령관과 백발의 전직 짜르 군대 대령이 대면하여 이야기한 내용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트리피츤이 비범한 용기를 보여주었고

비츠 대령은 귀족과 장교의 명예를 보여주었습니다.

 

트리피츤은 마을 중앙에 주둔하였던 백파군대(대대병력 규모) 앞에서 연설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트리피츤의 연설은 짧았지만 감정적이었습니다.

 

목격자들이 말했듯이 트리피츤이 한 연설의 주요 주제는 일본이었습니다.

니항사건을 일본의 국가적 수치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도서들

 

 

“간섭주의자들이 우리 땅에 와서 주인처럼 행세하며,

러시아를 강탈하고 파멸시키고 있습니다.

 

파르티잔들의 목표는 러시아 땅에서 침략자를 몰아내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없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러시아 노동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트리피츤의 연설은 광장에 가깝게 줄지어 서 있었던, 백파군대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연설이 끝났을 때, 아무르 지역의 하층민들로 주로 구성된 백파 군대 병력 중에서 대부분은 파르티잔과 함께 일본과 싸울 각오를 하였고,

그러한 의사표시로 한 걸음 앞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장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백파부대 병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새로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하게 된 병력들이 모여서,

들은 것과 인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그리고 트리피츤을 통해서 전달받게 된 친척과 친구들이 보낸 편지를 읽는 동안, 백파 군대 본부의 장교들은 현재 상황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트리피츤은 다시 한 번 백파군대 장교에게 파르티잔의 편으로 오라고 제안했지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트리피츤은 백파 부대(대대병력 이상)의 장교들을 체포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츠 대령의 최후

그는 귀족 출신 비츠 대령의 고귀함에 응답하여,

비츠 대령이 식량과 개인 무기의 일부를 가지고 마린스크를 떠나도록 허용했습니다.

 

둘째 날, 비츠 대령은 그의 작은 부대를 거느리고 데카스트리(Де-Кастри) 만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 그룹의 사람들의 운명은 비극적이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기자, 에취(В. Эч)는 데카스티리 등대의 영역에서

모든 사건을 기록한 기록한 등대지기의 기록물과,

비츠 대령의 개인 일기를 발견하고,

그가 쓴 책 <사라진 도시, 니콜라예프스크의 비극(Исчезнувший город. Трагедия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Владивосток, 1920 г.)>에서 그 내용을 출판하였습니다.

사라진 도시, 니콜라예프스크의 비극(Исчезнувший город. Трагедия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Владивосток, 1920 г.)

 

(러시아 내전시기, 백파와 일본의 주장을 이해하기 쉬운 책으로는 A.Y.구트만의 책도 있다. 대략 100권 이상 니항사건을 다루는 도서가 출판되었으며, 근래 일본에서도 러시아측 입장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hwachan20/222588525351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6.01 비츠 대령이 트리피츤에게 연설하도록 허락하였군요 트리피츤의 연설에 호응한 백파 부대 병력이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했군요 비츠 대령이 합류하도록 선선히 허락했나보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6.01 예.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1920년 3월 12일 일본군이 기습공격을 하는 바람에 .. 백파장교들은 모두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비츠 대령은 그전에 자살했구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