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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22)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항사건) 1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6.19|조회수98 목록 댓글 2

목차

동료에 대한 기억들

мяти товарища--------------------------------------------------------------------------- 3

아버지에 대한 한마디

Слово об отце ------------------------------------------------------------------------------- 4

서문

Вместо предисловия ----------------------------------------------------------------------- 5

피로 덮인 최후

Кровавый финал ---------------------------------------------------------------------------18

아나스타시요프카 마을 회의

Анастасьев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24

야코프 이바나비치 트리피츤

Яков Иванович Тряпицын -------------------------------------------------------------25

니나 미하일로브나 레비제바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Лебедева ----------------------------------------------------------25

볼셰비키 운동 또는 혁명의 구성 요소

Партизанское движение, или составные части революционности --------------27

아무르강 하류에서의 혁명운동

Поход в низовьях Амура-----------------------------------------------------------------30

시간 순서

Связь времен -------------------------------------------------------------------------------33

스파스크 폭풍우의 밤, 니콜라예프스크의 날들

«Штурмовые ночи Спасска, Николаевские дни» -----------------------------------34

해방된 도시

Освобожденный город -------------------------------------------------------------------40

니항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43 (현위치)

니항 코뮌

Николаевская коммуна-------------------------------------------------------------------50

트리피츤의 완충국가 건설 반대

Антибуферная политика Тряпицына --------------------------------------------------57

트리피츤에 대한 음모

Заговор против Тряпицына--------------------------------------------------------------62

니콜라예프스크 코뮌의 마지막 날

Последние дни «Николаевской коммуны»-------------------------------------------69

불타버린 니항시(니콜라예프스크 시)

Сожженный город-------------------------------------------------------------------------73

트리피츤의 체포

Арест Тряпицына--------------------------------------------------------------------------87

피에는 피, 죽음에는 죽음

Кровь за кровь, смерть за смерть ------------------------------------------------------92

결론

Заключение ---------------------------------------------------------------------------------98

오자수정
압치니코프 에서 -> '압친니코프' (일본으로 도주한 니항사건의 일제밀정)
셰르쇼프 에서 -> '셰르셰프' (자유시 참변 당시 볼셰비키 군대 2군단장)
치니르라흐 에서 -> '츠니르라흐' (니콜라예프스크 인근의 제정러시아 시대 해안 포대)
니콜라옙스크 에서 -> '니콜라예프스크' (오늘날의 하바로프스크 주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의 예전 명칭)
뜨랴피친, 트리아피친, 뜨래피친 에서 -> '트리피츤' (Тряпицын의 일본식 발음을 러시아 발음으로 변경)

로 변경합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항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일본 신문 <오사카 마이니치>의 보도 등

(일본) 정부는 현재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관한 문제에 대한 추가 대책을 서둘러 논의하고 있다.

최근 이 문제는 단순한 외교적 사건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발전했습니다.

<일본 신문 오사카 마이니치>

니항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가 세웠던 니항 충혼비는 파괴되었다.

일본에서 오늘날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선전된 1920년 니항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의 추가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포인트는 1920년 3월 12일 예정되었던 사할린주 소비에트 의회 전날의

일본 수비대와 파르티잔의 관계입니다.

 

 

일본군의 기만술

그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 중 한 명인 부진비치(Д. С. Бузин(Бич))는 회고록에서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니항의 일본군 장교들

니항의 일본군 수비대장

(......부진비치 회고록 중에서......)

일본 장교들과 군인들의 군복과 외투에 빨간색 장식을 두른 것은 우리 선동의 성공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심지어 "우리도 볼셰비키다"라는 문구와 함께 일본 군복의 어깨장식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트리피츤이 붉은 군대와 함께 하바로스프크로 갈 때 일본군이 그들과 함께 갈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습니다. (......중략......)

 

내가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나는 항상 그곳에 일본 군인들과 장교를 보았다.

 

츠카모토 중위는 우리 파르티잔 본부의 특별 단골이 되었고,

풍성한 잔치를 마친 후 파르티잔 본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우모프 참모장의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츠카모토는 진심으로 나에게 선물을 주었고

무의식적으로 그에 대한 특별한 믿음을 가져왔습니다.

 

파르티잔들은 일본의 친절한 몸짓에 같은 방식으로 응답하였습니다.

(......부진비치 회고록 하략......)

니항의 파르티잔 간부. 가운데 안경쓴 사람이 부진비치

 

 

간빠이~ 일본군과 볼셰비키와의 평화

사령부 연회장에서뿐 아니라 파르티잔 병사들 사이에서도 '간빠이(건배, かんぱい)' 소리가 들렸다.

 

야코프 트리피츤은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 수비대 사령관 이시카와 소령(소좌)에 대해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본군은 교활함이 없지 않았다.

 

2월 28일 체결된 평화조약에 따르면,

아무르강 얼음이 녹아 항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800명 이상의 무장한 일본군과

2,000명의 강력한 파르티잔 볼셰비키 군대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번역자의 의견 : 최대 5,000명으로 알려진 트리피츤 부대원중 니콜라예프스크 시내에 주둔한 병력은 약 2,000명 정도로 보여지며, 스말야크의 주장이 신뢰성이 높다. 파르티잔 중에는 상당수가 비무장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의 원인

우리 나라(러시아)와 해외에서 출판된 많은 저서들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일명 니항사건>의 원인을 밝히는 데 전념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1) 하나에 따르면, 니콜라예프스크(오늘날의 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의 일본 수비대가 평화 조약의 조건을 위반하여 파르티잔들을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2)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나키스트인 야코프 트리피츤이 일본 수비대를 도발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과거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니항사건을 독립군의 승리로 생각하였으나, 2009년경부터는 A.Y.구트만의 소설인 <니콜라예프스크에서의 죽음>을 그대로 인용하여, 1920년 3월 12일 밤중 일본군의 기습공격 원인은 트리피츤이 400여명을 살해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자도 있다.

이러한 자료는 국가의 상당한 지원을 받아 쓰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또 A.Y.구트만의 책을 제대로 베끼지 못했는지 A.Y.구트만은 5월 22일, 23일, 24일 3일동안 3,000여명의 무고한 니항 주민이 학살당했다고 썼는데 (최종 학살당한 사람은 1만여명 이상이라고 주장),

 

국내 니항사건 관련 도서들은 5월 24일~5월 25일 이틀간 니항주민 절반인 4,000여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였고,

그 이후인 7월경에서야 일본군이 배상을 받기 위해 북사할린섬을 점령했다고 쓰는 등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 등에서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일본 역사서에는 일본 수비대의 죽음을 초래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볼셰비키에 의한 희생자>로 나와 있다.

 

1987년에 일본의 소련 역사 연구원 협회는

일본 저널에 소련 역사를 게재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기사를 준비할 것을 나에게 요청했습니다.

 

같은 해

나의 글은 그 잡지의 №45 순서로 게재되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학자 후지모토 교수가 나중에 나에게 말했듯이,

일본의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대한 나의 평가를 비판하는 출판물은 없었다.

 

나(저자 스말야크)는 일본이 먼저 평화조약을 위반했다는 관점의 확고한 지지자입니다.

 

일본 수비대가 기습공격을 위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 자체가 증명하기 어렵다.

 

일본군 니항 수비대 대장, 이시카와 소령(소좌)과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 영사, 또는 극동의 주요 일본 사령부중 ?

누가 결정을 내렸습니까?

 

(저자 스말야크는) 일본인들의 집단적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수비대의 항복, 과격파, 폭도, 악마라고 부르던 파르티잔과 합의는

니항 일본군 수비대 대장인 이시카와 소좌에게는 개인적인 치욕이었다.

 

파르티잔을 무찌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는 일본 간섭군의 지휘 아래서, 말하자면 사무라이(무사)로서의 명예를 되찾았다.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파르티잔을 분쇄하려는 이시카와 소령(소좌)의 계획은

아마도 3월 9일에 니항 주둔 일본군과 하바롭스크에 있는 그들의 사령부 사이의 무선 전신 대화에서 승인되었습니다.

 

 

츠니르라흐(Чныррах) 요새 무선송수신 시설의 사용허가

놀랍게도,

그러나 실제로도,

트리피츤은 일본군과의 우정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츠니르라흐 요새의 라디오 방송국(무선송수신소)을 사용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본군이 러시아어로만 하바로프스크 일본군 사령부와 교신했지만,

3월 9일에 여러 전보는 암호화되었습니다(이 전보들은 톰스크 기록보관소에 있음).

불행히도 그것들은 해독되지 않았지만

내 생각에 하바로프스크의 일본군 사령부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승인 혹은 명령한 것이 그 자료들 안에 있습니다.

니항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언론보도 내용

 

 

 

일본군의 기습공격

3월 11일 저녁에,

다음날인 3월 12일 소비에트 사할린주 지역 대회 개막을 기념하며, 파르티잔 본부에서 또 다른 연회가 열렸다.

 

손님은 자정이 지난 후 떠났고,

새벽 3시에 도시는 폭발하는 수류탄과 빈번한 소총 및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깨어났습니다.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열린 워싱턴 회의에 극동공화국(ДВР) 대표단이 제출한 자료에 이 도발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3월 12일 새벽 3시경,

파르티잔과 체결한 평화조약의 내용과 달리

니콜라예프스크 시내에 주둔한 일본 군대가 갑자기 파르티잔 부대 본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동시에 모든 지점에 대해 발포했습니다.

일본군의 주요 공격은 트리피츤이 지휘하는 파르티잔 본부에 집중적으로 가해졌으며

본부 건물은 폭탄 폭발 등으로 인해 사방에서 불이 났습니다.

1920년경 니항 도심

파르티잔 본부의 위치. 오늘날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오늘날의 니콜라예프스크 항구

 

 

참모장 나우모프(Т. Наумов) 등의 전사

당시 본부 인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트리피츤 - 파르티잔 군대 사령관.

나오모프 – 참모장

그리고 자녀들, 다른 직원들

 

파르티잔 지휘관이 츠니르라흐(Чныррах) 요새와 중앙 군사 전화 교환소로

전화로 연락한 후 전선이 끊어졌습니다.

 

일분일초도 발포를 멈추지 않는 일본군에 둘러싸여 불타는 건물에서 탈출이 불가능했고,

건물 안의 사람들은 연기에 질식하기 시작했다.

 

나우모프 참모장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은 두 번 부상당했습니다.

건물에 머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건물을 빠져나와 재빨리 이웃집으로 달려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탈출했다.

탈출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극동공화국(ДВР)자료 하략......)

※번역자의 의견 : 파르티잔 측 전사자는 100명 이상이었으며, 부상자도 수백여명에 달했다. 의료기술이 부족하던 시기 부상을 당하면 결국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에 일본군은 도시의 서부와 니항(니콜라예프스크) 중심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파르티잔들은 니콜라예프스크 도심 외곽으로 밀려났다.

 

 

 

파르티잔들의 반격

기습공격으로 트리피츤 등의 지도력이 결여된 파르티잔들은 자발적으로 소그룹으로 결성하여,

스스로 재량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인한 혼란이 지나고

전투의 주도권은 파르티잔 사령관 례호프(П. Лехов), 카마로프(А.Комаров), 미진(Г. Мизин)이 주도했습니다.

 

 

 

사할린주 암군-께르비(Амгун-Керби) 주둔 파르티잔 부대의 도착

전환점은 부드린(И. А. Будрин)의 지휘하에 암군-께르비(Амгуно-Кербинского)지역 산악 파르티잔 연대가 니콜라예프스크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 연대는 나중에 사할린주의 임시 주도가 되는

께르비 일대 광산 등에서 조직되었으며

 

안드레이 폐트로프(Андрей Петров), 알렉셰이 크냐제프(Алексей Князев), 계오르기 우르타예프(Георгий Уртаев), 야코프 코나노프(Яков Кононов) 가 이끄는 4개 중대로 구성된 300여명 이상의 사람들로 조직되었습니다.

 

2월 26일 연대는 께르비(Керби)에서 니콜라예프스크로 이동하였고,

3월 12일 아침 리치(Личи)지역 교외 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도시의 거리에서의 전투는 치열하고 무자비했습니다.

평화로운 마음을 가진줄 알았던 일본인에게 그러한 배신이 예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고, 기습공격을 당하기 전에는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일어나고 있는 일에 특별한 감정의 색깔을 주었습니다.

1920년대 사할린 주의 주도였던 니콜라예프스크 지도

니콜라예프스크 인근 전투도

일제의 니항사건 초혼제.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오늘날 니항에 세워져 있는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추모비, 독립군 리흥진 선생이 잠들어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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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6.19 니콜라예프스키 사건의 원인에는 2가지 관점이 있군요 아무래도 일본이 먼저 평화조약을 위반했다는 관점이 와 닿네요 파르티잔의 피해가 막심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6.19 예, 일본인도 대략 700~850여명이 사망했습니다.

    과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러시아 민간인 4,000명에서 ~10,000여명을 파르티잔들이 학살했다는 소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박은식, 김승학, 신채호, 안재홍 선생 등도 이 사건을 언급은 하였습니다만 그런 소리한 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2009년부터 한국 인터넷에 그러한 소리가 있기에,
    반박하는 자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글을 번역해 올리고 있으며,

    일본군의 1918년경시베리아 침략시, 일본군은 3천에서~5천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러시아 민간인과 군인들의 전사자 수는

    최소 그 10배 이상은 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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