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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24) 니항 코뮌의 시작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6.29|조회수103 목록 댓글 2

(원제 : 메즈도우소비차(МЕЖДОУСОБИЦА, 국제전).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저자 : 스말야크 (В. Г. Смоляк, 1937-2008))

니콜라예프스크 코뮌(혹은 카문)

볼셰비키들의 니항 코뮌 주도

1920년 3월 15일,

일본군의 공격이 끝난 후 연기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을 때, 사할린 주 지역 소비에트 회의가 주도(州都)였던 니콜라예프스크(니항)에서 열렸습니다.

대회는 볼셰비키가 주도했다.

부닌(С. Бунин)이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례호프(П. Лехов)와 젤레진(Ф. Железин)이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의회에서 채택된 첫 번째 결의안은 아래와 같습니다.

니항의 파르티잔 간부들

사할린주 회의의 결의안

“니콜라예프스크 지역과 사할린 섬의 노동자, 농민, 볼셰비키 군대 대의원 대회는,

그 온갖 피와 공포와 함께 했던 부르주아 군사 독재라는 광란의 1년 반이 지나고 나서야,

 

극동의 변두리에 노동자 인민의 소비에트 권력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에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강력한 공화국의 이질적인 부분들이 단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기치 아래 다시 통일될 엄숙한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믿습니다.

 

대회는 모든 노동 인민들, 큰 고통과 비할 데 없는 고난으로 소비에트의 힘을 얻은 모든 인민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국경에서 아직 모든 외국 군대가 철수한 것은 아니며

일본의 배신적 공격의 위험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비에트 정부의, 극동지방의 특히 동쪽은 여전히 ​​매우 어려운 시련에 직면해 있습니다.”

(......사할린 주 회의 결의안 하략......)

요즘도 어업권과 자원, 제정러시아 시대의 광산 유전 어장 쿠릴열도 등의 소유권 등등의 문제로 국제적 다툼이 있는 사할린 주 일대,

한국 기업도 진출하였다. 국제적 분쟁지역에 대해 미국의 저명 교수 '존 J 스테판'의 책을 사실이라고 인용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대회에서는 지역 경제 발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920년 사할린 주 관할 지역의 일본과 어업권 문제

의회 대표들의 초점은 어업 문제였습니다.

 

1907년, 짜르 정부는 일본과 어업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약이 12년 동안 체결되었고, 1919년에 만료되었음을 고려하여 소비에트 회의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습니다.

 

“일본과의 협약의 존속은 이 지역의 어업을 근본적으로 훼손하고

모든 자본주의 산업을 러시아 노동자 인민의 관할로 이전하는 것을 막고,

 

또한 제국주의 일본이 극동에서 추구하는 배신적 정책을 감안하여,

사할린 지역 노동자 총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일본과의 어업 협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앙 소비에트 정부에 이를 무효화하는 적절한 법령을 긴급히 발행하도록 요청한다.”

(......어업 문제에 대한 사할린주 의회의 결정 하략......)

세계 최대의 어장중 하나인 사할린 섬 일대

 

(※번역자의 의견 : 러시아어인 ‘소비에트’를 의회, 회의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지역의 경제 건설을 위해서는 일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소비에트 의회는 나이 든 파르티잔들을 붉은 군대에서 동원 해제하기로 결정했으며, 동시에 "......또한 전투에서 전사한 볼셰비키군대 파르티잔의 가족을 급히 부양하기 위해, 먼저 군대에 소집된 가족의 자선 단체를 조직할 필요성을 인식하였습니다...... "

 

오늘날 니항에 있는 반일열사들의 묘, 한국 독립군 '리흥진'선생도 여기 묻혀 있다.

트리피츤이 지휘하던 유격대 사령부터에 설치된 니항사건 추모비

사할린주의 여러 민족 및 인구 구성과 토착민은 러시아인으로 간주

사할린 지역의 다국적, 다민족 인구의 경우 러시아인과 원주민의 권리 평등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의회는

“... 지역 토착민을 적합한 러시아 시민으로 간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약한 길리야크(гиляцк) 민족을 조심스럽게 다루십시오.”

길야츠크 민족의 썰매

 

(※번역자의 의견 : 1920년 무렵 행정구역상 니항 직할지역의 전년도 등록 인구수는 약 1만 2천여명이었으며,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중국인은 약 2천여명, 조선인들도 약 수백여명에서~1천여명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살았고, 니항사건 이후 일본군이 공격해오자 배를 타거나 혹은 걷거나 기차를 통해, 중국령이나 아무르주, 연해주 일대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니항의 1919년경 인구조사는 러시아국적을 미취득한 자를 제외한 자료로 보여지며, 중국인 2천여명의 상당수는 러시아 민족들보다 먼저 니항 일대에 거주하였고,

길야츠크 민족을 비롯한 다양한 시베리아 민족은 단군왕검 때도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인들과도 생김새가 유사하다.)

 

사할린주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혁명적 합법성을 위반한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지역 인민법원, 사법수사위원회, 인민혁명재판소, 인권운동가 단체가 구성되었습니다.

이 사법 기관의 의장은 지역 집행 위원회의 위원이었습니다.

 

볼셰비키인 젤레진(Ф. Железин)은 사할린 주 집행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볼셰비키인 아우셈(О. Ауссем)은 부의장이자 동시에 산업 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주요 위원들 또한 대부분 볼셰비키가 이끌었습니다.

광업 – 부드린( Будрин)

공공 교육 – 부진비치(Д. Бузин (Бич))

사회 보장 – 이바넨카(П. Иваненко),

경찰 – 안드레예브(Т. Андреев)

군사 위원은 파르티잔 볼셰비키 부대 사령관, 아나키스트인 야코프 트리피츤(Я. Тряпицын)이었습니다.

지역 집행위원회에는 맥시멀리스트(과격파)인 니나 레비제바(Н. Лебедева)가 일원이 되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종래 한국 독립운동사에 사할린주 일대, 아무르주 주도 블라가베셴스크와 자유시 일대에서 공산주의 혁명가로 알려진 안드레예브(Т. Андреев) 가 이 무렵부터 등장한다.

안드레예브가 백파 군대에 있다가 니항 조선인회 서기였던 박병길과 마찬가지로 니항이 트리피츤에 의해 무혈 해방되자, 이 무렵 볼셰비키로 넘어온 것으로 보여진다.

즉 박병길처럼 일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백파에서 볼셰비키가 되었고,

1921년 6월의 자유시참변 이후에는 일제로 도주하자 다시 소련 공산당에 의해 철저히 숨겨져 온 것으로 보여진다.)

자유시 참변 등에서 볼셰비키 2군단장 셰르셰프 장군 등과 함께 한국계 독립군을 처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공산주의 혁명가 '안드레예브', 오늘날 러시아 역사가들이 연구한 결과 아무르주 일대에서 경찰국장과 경찰서장을 한 것은 허위이며, 자유시에서 포병 부대장을 한 것은 맞다고 한다.

오자수정

압치니코프 에서 -> '압친니코프' (일본으로 도주한 니항사건의 일제밀정)

셰르쇼프 에서 -> '셰르셰프' (자유시 참변 당시 볼셰비키 군대 2군단장)

치니르라흐 에서 -> '츠니르라흐' (니콜라예프스크 인근의 제정러시아 시대 해안 포대)

니콜라옙스크 에서 -> '니콜라예프스크' (오늘날의 하바로프스크 주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의 예전 명칭)

뜨랴피친, 트리아피친, 뜨래피친 에서 -> '트리피츤' (Тряпицын의 일본식 발음을 러시아 발음으로 변경)

아우스셈 을 -> ‘아우셈’(О. Ауссем) 로

로 변경합니다.

니항 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일본어: 尼港事件, 중국어 : 廟街事件,
Николаевск Инцидент памятник на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Николаевске-на-Амуре Скорбящая мать 희생자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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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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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6.29 세계 최대 어장중 하나인 사할린에서 짜르 정부에 체결했던 어업 조약이 1919년에 만료되었고 소비에트 정부는 일본과의 어업 협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정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6.30 예, 그렇습니다.
    나중인 1922년 말 수립된 소련은
    1925년 극동에서 일본군의 완전 철군을 조건으로 북사할린섬 유전, 광산, 산림, 오호츠크해 일대 어업권 등의 권한을 상당기간 양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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