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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니항사건 (30) 북양정부와 청산리 전투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7.16|조회수223 목록 댓글 2

볼셰비키를 동조했던 한 아나키스트의 죽음. 무적 황군(皇軍)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30) 니항사건 무렵의 중화민국 북양정부와 청산리 전투

(원제 : 메즈도우소비차(МЕЖДОУСОБИЦА, 국제전).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저자 : 스말야크 (В. Г. Смоляк, 1937-2008))

목차

동료에 대한 기억들

мяти товарища--------------------------------------------------------------------------- 3

아버지에 대한 한마디

Слово об отце ------------------------------------------------------------------------------- 4

서문

Вместо предисловия ----------------------------------------------------------------------- 5

피로 덮인 최후

Кровавый финал ---------------------------------------------------------------------------18

아나스타시요프카 마을 회의

Анастасьев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24

야코프 이바나비치 트리피츤

Яков Иванович Тряпицын -------------------------------------------------------------25

니나 미하일로브나 레비제바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Лебедева ----------------------------------------------------------25

볼셰비키 운동 또는 혁명의 구성 요소

Партизанское движение, или составные части революционности --------------27

아무르강 하류에서의 혁명운동

Поход в низовьях Амура-----------------------------------------------------------------30

시간 순서

Связь времен -------------------------------------------------------------------------------33

스파스크 폭풍우의 밤, 니콜라예프스크의 날들

«Штурмовые ночи Спасска, Николаевские дни» -----------------------------------34

해방된 도시

Освобожденный город -------------------------------------------------------------------40

니항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43

니항 코뮌

Николаевская коммуна-------------------------------------------------------------------50

트리피츤의 완충국가 건설 반대

Антибуферная политика Тряпицына ------------------------------------------------57

트리피츤에 대한 음모

Заговор против Тряпицына-----------------------------------------------------------62 (현위치)

니콜라예프스크 코뮌의 마지막 날

Последние дни «Николаевской коммуны»-------------------------------------------69

불타버린 니항시(니콜라예프스크 시)

Сожженный город-------------------------------------------------------------------------73

트리피츤의 체포

Арест Тряпицына--------------------------------------------------------------------------87

피에는 피, 죽음에는 죽음

Кровь за кровь, смерть за смерть ------------------------------------------------------92

결론

Заключение ---------------------------------------------------------------------------------98

오자수정
압치니코프 에서 -> '압친니코프' (일본으로 도주한 니항사건의 일제밀정)
셰르쇼프 에서 -> '셰르셰프' (자유시 참변 당시 볼셰비키 군대 2군단장)
치니르라흐 에서 -> '츠니르라흐' (니콜라예프스크 인근의 제정러시아 시대 해안 포대)
니콜라옙스크 에서 -> '니콜라예프스크' (오늘날의 하바로프스크 주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의 예전 명칭)
뜨랴피친, 트리아피친, 뜨래피친 에서 -> '트리피츤' (Тряпицын의 일본식 발음을 러시아 발음으로 변경)

로 변경합니다.

니항(니콜라예프스크) 지역 볼셰비키(공산주의자)의 계획

볼셰비키(공산주의자) 그룹이 파르티잔 부대의 지휘관(주로 트리피츤)에 대한 음모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니콜라예프스크(니항, 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에는 조직적으로 공식화된 볼셰비키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룹> 정도임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프리지프(Призыв : 전화)> 신문에 발표된 정보에 의해 입증되었습니다.

 

......신문보도 내용......

“5월 5일에 니항에 공산당(볼셰비키)이 조직되었습니다.

동지 5명으로 구성된 당 위원회가 선출되었다.

아우셈(Ауссем), 쿠즈네초프(Кузнецов), 쉬무이로비치(Шмуйлович), 프라예르만(Фраерман) 및 게트만(Гетман).

아우셈

가입을 원하는 사람은 서면으로 신청서를 제출해야 하며, 당원 2인의 추천으로 가입할 수 있다.

 

같은 날 좌익 사회주의자, 혁명가-국제주의자, 맥시멀리트(과격주의자, максималистов)의 당이 조직되었다.

 

정당의 가입은 같은 순서로 이루어집니다.

신청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교육위원회에 동지의 이름으로 제출할 수 있습니다.

 

하리토노프(Харитонов)와 신문 <프리지프(Призыв : 전화)>의 편집실에 동지의 이름으로.

8시에서 12시까지

수다코프(Судаков).”

......<프리지프(Призыв : 전화)> 신문 내용 하략......

일제의 만주, 시베리아 침략로

 

볼셰비키인 부드린의 체포

4월 23일과 27일에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수비대 회의가 열렸다.

그 이유는 4월 14일 광산 연대의 전 사령관이며, 광산 산업 위원인 볼셰비키 부드린(И. Будрин)이 체포된 것입니다.

그는 파르티잔들 사이에서 큰 명성을 누렸다.

그의 연대는 1920년 3월 12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패배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체포는 파르티잔들 사이에서 노골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4월 23일 인민의 집에서 열린 수비대 합동회의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파르티잔 붉은 군대 참모장인 맥시멀리스트(과격주의자 : максималистка) 니나 레비제바(Н.Лебедева)는 부드린(И. Будрин)의 체포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니나 레비제바의 보고 내용......

“불행히도 부드린도 관련되어 있는 조직이 도시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조직은 오래 전에 발견되었고 감시되었습니다.

 

이 영사는 우리가 시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니항에 있던 중국 군함의 총기류를 일본군에게 주었지만,

당시 우리는 이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부드린(И. Будрин)은 중국 영사의 영향 하에 있던 중국인들로부터 부대를 조직했습니다.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며 부드린(И. Будрин)은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니나 레비제바의 보고내용 하략......

 

 

니항 중국 영사의 오락가락 행적

음모의 본질은 동조한 부대가 중국인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직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반(反)소비에트 조직의 마지막 모임에서 중국인들에게 며칠 안에 무기를 제공받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소비에트의 열렬한 반대자인 중국 영사도 이 조직에 참여했다.

 

(※번역자의 의견 : 당시 니항에 설치되어 있던 중국 영사관의 영사는 자신들의 시베리아 간섭 연합국인 일본군과 밀접한 관계였으며, 파르티잔과는 같은 편이 아니었다.

 

당시 니항에 머무르던 북양정부 강방함대의 소총과 무기류를 백파와 일본군에게 제공한 것은 사실로 보여진다.

그러나 트리피츤 부대가 니항 주민과 중국인, 조선인 등의 지지를 받아 니항을 평화롭게 해방시키고, 1920. 3. 12. 일본군이 기습 공격을 하자 강방함대는 파르티잔 편을 들었다.)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시베리아 간섭 상황 (별첨)

중국민국 북양정부는 1919년경부터 육군(陸軍) 연대장(團長) 송환장(宋煥章), 대대장(營長) 소병문(蘇炳文) 등을 중심으로 2,000여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하여, 해삼(海參崴 :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伯力) 등지에서 간섭하였다.

시베리아의 중국 간섭군

營長 蘇炳文 소병문 장군

북양군벌(북양정부, 북경정부)의 해군은 임건장(林建章) 등이 군함 해용호(海容號) 등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고,

흑룡강(혹은 아무르강) 입구의 니콜라예프스크(廟街 : 니항)에는 진계량(陳季良, 혹은 陳世英) 등이 니항사건 무렵 도착해 있었다.

林建章 임건장

북양정부의 시베리아 간섭은 일본, 미국 등 1차 세계대전 승전국과 같은 조건으로 병력을 시베리아에도 파견하여,

볼셰비키를 포위 공격하여 섬멸하고 중·러국경 정리, 과거 불평등 조약 등을 개선하고, 평화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동시베리아(극동)에서 일본,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군의 개입은 주로 도회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 니콜라예프스크(니항), 하바로프스크, 블라가베셴스크, 이르쿠츠크, 우수리스크 등을 점령하고, 시베리아와 우랄 등지에서 체코군단 구원, 콜차크군 등의 백파 군대들을 위한 철도 교통을 확보하고, 바다를 확보하여 연합군이 직접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중국영토 점령을 위한 발악

그런데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일본 용어로는 ‘시베리아 출병군’)은 연합군의 출병 목적과 별 관계도 없는

중국령 만주의 ‘동청철도(중동로) 일대 점령’, 아무르강 하류의 ‘니항 점령과 괴뢰 정권 수립’,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지대 장악’, ‘만주와 연해주의 한국 독립운동가 몰살’ 등 미국, 영국, 중국 북양군벌의 이권에까지 손을 뻗쳤다.

 

결국 일제의 과도한

중국영내 식민지 확충과 시베리아와 사할린섬 북부 점령 등은 1919년 5.4운동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니항사건 당시 북양정부의 강방함대. 영대장은 진계량 장군 (진세영 장군)

니항사건 당시 북양정부의 강방함대. 영대장은 진계량 장군(진세영 장군)

니항사건에서 일본군 격퇴에 일조한 진계량 (진세영) 중국명 : 첸지량 장군

陈季良, 혹은 陳世英

 

중국 시베리아 간섭군은 볼셰비키와 충돌 없음

러시아령 시베리아에 도착한 중국군 2,000여명 이상은 볼셰비키와는 큰 충돌은 없었다.

 

중국의 시베리아 간섭의 기본 목적은 러시아 내전기를 맞아, 유리한 편과 협상해 과거의 불평등 조약을 개선하고,

몽골, 연해주, 시베리아 일대의 이권 확보를 위한 것이었으며

일제와 같이 7만에서 ~ 13만여명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해 만주 동청철도 일대와 남만주 철도 일대, 러시아-중국 국경지역, 시베리아를 영구 점령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국 내부의 이권도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 국가가 나눠가지고 있던 상황으로

볼셰비키와 대결할 만한 실력도 없었다.

 

중국군의 시베리아 간섭 기간중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의 친일 조선인 단체 조직

일제는 또 수년간의 만주, 시베리아 간섭 전쟁에서

친일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일본 영사관 설치지역 등에서는 ‘니항 조선인회(한인회)’, ‘니항 조선인 민회’와 같은 친일단체를 조직하였으나

수천여명의 친일단체 가입자들은 일본군이 철군하자 다수 처형되기도 하였다.

 

 

북양정부 시베리아 간섭 참가자의 청산리 전투 기록

서력 1920년 니항 사건이 발생하던 해에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들은 중국령 만주에서 발생하였다.

 

따라서,

중국 역시 증언과 기록을 남겼는데

일본측의 주장이나 한국 독립군측의 주장보다는 자신들의 관점으로 본 ‘연해주 전투’, ‘니항사건’,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에 대한 기록들을 남겼다.

 

2010년 이후에서야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발간된 몇몇 자료에 따르면

일본측과 같이 축소되지도 않았고, 한국의 몇몇 독립유공자처럼 과장하지도 않았다.

 

 

......러시아도 전과에 대한 과장을 많이 함......

일제의 시베리아 간섭 전쟁 무렵

일본군은 대략 최소 3,500명에서 부터 ~ 5,000여명 이상 전사 혹은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러시아 볼셰비키 측 기록에 등장하는

 

일본군 수백여명에서 ~ 수천여명을 사살했다는 전투 기록은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니항 사건’임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동의한다.

 

다만 남한에서는 과거

한국 독립군도 관련된 1920년 ‘니항사건’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선전을

‘일제의 터무니 없는 생떼’로만 간주하였으나(김홍일, 김승학, 박은식, 신채호, 안재홍, 오광선, 채세윤, 당시 신문보도 내용 등)

 

오늘날 연구한 바,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훈춘사건, 니항사건 등에 대해 과거 남한 역사학자의 자료도 틀리는 게 많다고 하며

 

2009년 무렵부터는 국가 등의 지원을 받아 ‘한국 독립군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극’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상당하다.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자료는 조금만 살펴보면

반공 독립유공자, 일본 앞잡이, 친일파시스트들의 주장만을 골라 모았으며, 오늘날 일본 역사학자들조차 동의하지 않는 허위 주장들을 남발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지원으로 활동한 미국의 존 J. stephan과 같은 부류를 헛소리 하는 사람쯤으로 간주하여 인용한다.

한마디로는 ‘신경도 안쓴다.’

 

다만 니항지역의 급격한 인구감소로 주민확보 등을 위해

니항(니콜라예프스크) 지역에서 ‘니항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부드린 체포에 대한 반박

지역 집행 위원회 위원 이바녠카(И. Иваненко)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드린(И. Будрин)을 열렬한 소비에트 노동자이자 군사 지도자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일제의 간섭 기간중 금광 산업에서 함께 일했던 그가,

반 볼셰비키, 반 소비에트로 변절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부드린(И. Будрин)의 의심스러운 중국인 부대 조직 및 소비에트 니항 파르티잔들에 대해 다가오는 간섭군에 대한 대비는

 

지역의 권력 투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백파 군대 행동은 아닙니다.”

 

 

체포된 적이 있었던 공산주의자 미진(Г. Мизин)의 주장

미진(Г. Мизин)의 말 :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된 나의 개인적인 체포에 따르면

부드린의 체포가 옳았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나와 부드린은,

우리는 소비에트의 노련한 투사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할린 주 집행위원회 의장 젤레진의 주장

사할린 주 지역(Сахалинского облисполкома) 집행 위원회 의장 볼셰비키 젤레진(Ф. Железин) :

 

“부드린 동지의 체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은 집행위원회와 위원장인 저입니다.

집행위원회는 사법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했습니다.

 

위원회는 조사를 감독하고 있습니다.

집행위원회는 부드린의 경우, 제출된 조사 자료를 검토하고

부드린의 임시적 면직에 대한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파르티잔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체포로 인한 흥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동지들이여,

복잡하게 얽매이지 말고,

더욱더 무기를 들기를 촉구합니다.”

......젤레진의 주장 하략......

 

 

오랜 토론 끝에 회의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동지를 체포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 지역의 수비대에 의한 부드린 체포 자체의 동기를 고려하여,

 

공동 회의는 조사위원회가 조사 속도를 높이고,

지체 없이,

언론에 수집된 모든 자료들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보도할 것을 제안합니다 ,

 

그래서 동지의 재판.

부드린의 재판은 공개적으로 열렸습니다.”

 

 

 

4월 27일 수비대 집회, 미진(Г. Мизин)과의 불화가 지속됨

4월 27일에도 수비대 집회는 계속되었다.

의제에는 군사 규율 위반 문제가 포함되었습니다.

니나 레비제바(Н. Лебедева)가 발표했습니다.

 

위반자 중에는 미진(Г. Мизин)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 지역 군사 혁명 재판소의 의장인 들진(Б. Дылдин)은 미진(Мизин)을 초대하여

 

그가 사령관(트리피츤)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한 이유를 설명하도록 요청했습니다.

 

27 апреля гарнизонное собрание продолжило свою работу. В повестке стоял вопрос о нарушении воинской дисциплины. С сообщением выступила Н. Лебедева.

 

В числе нарушителей она назвала фамилию Г. Мизина.

 

Председательствующий, а им был Б. Дылдин — председатель Николаевского окружного военно-революционного трибунала, предложил Мизину объяснить, почему он отказался выполнять приказ командующего.

 

사할린 의용대 대장.  박일리야 (박윤천) 장군이 소학교 교사를 하던 마가 마을

1923년 일제가 물러난 후 귀향한 파르티잔들

니항 사건 추모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추모비)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Памятник борцам за победу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на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Скорбящая мать

니항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추모공원

오늘날 남아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Памятник борцам за победу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на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Скорбящая мать

니항 사건 추모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추모비)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Памятник борцам за победу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на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Скорбящая мать

니항 사건 추모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추모비). 일제에 학살당한 사람들의 추모비다.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Памятник борцам за победу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на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Скорбящая мать

니항사건 과 러시아의 유명작가 루빔 프라예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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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7.16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군은 5.4운동으로대표되는 중국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군요
    반면에 북양정부의 시베리아 간섭군은 볼셰비키와 큰 충돌이 없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7.16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당시 연합군의 간섭 이유는

    중국땅을 장악하자는 것이 아니었는데.. 일본이 만주 등지를 강탈하는 바람에
    중국, 미국 등의 반발까지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당시 중국은 내부혼란으로 볼셰비키와 싸울만한 여력이 부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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