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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32) 일제 시베리아 침략사 1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8.10|조회수128 목록 댓글 2

참고자료:

(1) 일본측 시베리아출병 http://www.kaizenww1.com/700siberia3.html

(2) (일본 홋카이도 출생으로 근래 일본에서 자주 인용되는) 하라테루 유키(原暉之),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

(3) (친일파시스트) A.Y.구트만(ГУТМАН А. Я), 『니콜라예프스크에서의 죽음(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영문도서명은 ‘니콜라예프스크의 파괴’)』

(4) (이르쿠츠크파 문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1922년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 送付에 관한 件)

(5)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일제의 시베리아에서의 만행을 기술)

(6)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1985 (※일본군 북사할린섬 점령선언을 1920년 7월로 기재. 북사할린섬 공격은 1920년 4월부터 시작되었고 파르티잔 토벌후 1920년 7월 점령을 선언한 것임. 점령선언과 공격은 다른 것임)

(7) 김홍일,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니항사건을 일제의 터무니 없는 생떼라고 주장)

(8) 아무르 주(州) 마자나바 군(郡), 고쉬 전투(Гошский бой)

http://history.milportal.ru/goshskij-boj-partizan/?print=print

https://proza.ru/2015/04/30/205

일본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하는 '하라테루 유키'의 '시베리아 출병'

 

일본의 대륙진출 몽상

일본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 등 대륙진출을 모색하였고, 서력 1592년에는 명나라와 만주로 간다는 핑계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54년경 서구열강을 상대로 개항후 꾸준히 중국, 만주, 한반도 진출을 모색하던 중,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승리하였고 만주와 시베리아에 대한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일본 본토 북부의 홋카이도, 사할린섬, 쿠릴열도에 대한 분쟁은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날 일본의 북방 영토에 관한 주장에 대해서는 일본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는 남한의 도서가 상당하다.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나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틈탄 것만은 아님이 명백하다.

 

극동지방의 아무르강 하류인 니콜라예프스크(니항)에도 1896년경 이미 시마다(島田元太郎)상회가 설립되어 일본과 무역, 매춘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참고인물 : 시마다모토타로, 島田元太郎, Симада(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일본인.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조선 출생 등을 앞세워 유곽 운영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니항의 이시다(石田領事) 영사 부부, 일본군 간부와 사진촬영한 시마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에도 대륙진출을 꿈꾸는 사람들이 수두룩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러시아 내전을 틈탄 만주, 몽골, 동청철도(중동로) 일대 장악 시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일본은 1918년 1월경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함대를 파견하였고, 몽골과 만주 일대로 패퇴한 백파군대를 지원하여 극동지방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고 만주의 동청철도(중동로철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니항사건 일본군 충혼탑. 약 20미터 높이로 보여진다.

 

일제의 목적은 만주, 연해주 일대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 몰살,

동시베리아 만주 몽골 일대에 괴뢰국가 수립,

우랄산맥 혹은 바이칼호 일대까지 영토 확장,

몽골과 만주의 장악,

중국내 일본지 식민지 확충과 친일세력 양성이었으나

 

겉으로 내세운 시베리아 침략 이유는

동양평화 유지,

제정 러시아에 포로가 되었던 체코군단의 안전한 귀국 보장,

러시아내 백파들의 요청에 따른 구원(일본 용어로는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의 요청),

시베리아 거주 일본인들 및 친일 조선인의 안전 확보와 재산권 보호,

공산주의 확산 방지,

1차 세계대전 동맹국인 중국·미국·영국 등의 요청 등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해주를 침략해 괴뢰정부까지 세웠던 중국·미국·영국 등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포로가 되었던 체코군단의 귀국이 완료되자 1920년 1월경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은 볼셰비키에 대한 간섭전쟁과 봉쇄를 중단하였고,

곧 이어 미국도 시베리아 간섭전쟁에서 철군하였다.

 

(※참고자료 : 미국 시베리아 간섭군 사령관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저,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1920년 초 러시아 내전이 볼셰비키에게 유리하게 되기 전까지 일제는 치열하게 시베리아 주민 학살과 파르티잔 토벌, 영토 확장, 자원 확보, 조선인 독립운동세력 몰살에 열중하였다.

1920년 초 러시아 내전이 사실상 볼셰비키의 승리로 기울어가자 갑자기 ‘중립’을 선언하고 어떻게든 시베리아 주둔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그 이전에는 일본 시베리아 침략군과 볼셰비키 간의 교전은 지속되었다.

미국 시베리아 파견군 사령관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 와 만주 연해주의 악명 높은 친일파 셰묘노프

 

고쉬스키 전투(Гошский бой. 일명 <고쉬 전투>)

※아무르주 마자나바 군(Амурская область, Мазановский район, с. Маргаритовка, Гожское опытное поле), 마르가리토프카 고스코예 지역에서 발생.

 

1919년 10월 3일경(※10월 5일 이라는 자료도 있다. 추모비에 적힌 날짜는 10월 3일이다.).

아무르 주 자유시 동쪽 마르가리토프카 마을 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고쉬지역 (자유시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75km지점)에서 일본군과 아무르 지역 파르티잔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고쉬 전투(Гошский бой)로 잘 알려진 이 전투는 아무르 지역에서 대표적인 파르티잔 승리로 알려져 왔으며 일본군 측 시베리아 출병 기록에도 등장한다.

 

과거 파르티잔 참가자들 중에서 일본군 4,000~5,000명이 공격에 나섰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실제로는 일본군 1개 대대병력 950여명 미만이 참가하였고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 병력은 500명 미만 추정)

파르티잔 측에서는 1,500여명에서~2,000여명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양측의 추정 전사자는

파르티잔 측이 33여명 이상 전사, 일본군과 백파측은 700여명에서~2,000여명 전사 등으로 알려져 왔으나,

일본군측 기록에는 일본군 42여명 전사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고쉬 전투의 날짜도 자료마다 다르나, 일본군과 백파측에서 최소 100여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러시아 내전기 일본군 점령지역. 아무르주에서 발생한 고쉬 전투가 일본군 측 기록에도 등장한다.

 

최근 공개되는 자료들을 살펴볼 때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측 승전 기록에 등장하는, 수백여명에서 수천여명 일본군과 백파 사살 주장들도 전적으로 믿을 수만은 없다.

물론 경미한 피해만 있었다는 일본군측 자료도 믿기 힘든다.

1919년 아무르주 마자나바 군 고쉬전투 추모비

1920년 2월까지 연해주 및 아무르주도 볼셰비키(일제의 용어로는 ‘과격파’)가 장악

일제는 1920년 1월 초까지 러시아 내전에서 철병을 결정한 미국‧영국과 달리 철병의 결정을 하지 않았고, 러시아 내전 간섭을 계속한다.

결국 연해주 각지까지 볼셰비키가 장악해 가고, 결과적으로 동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볼셰비키가 공존하는 상황이 생겨나게 된다.

 

1920년 2월 4일경 극동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에 있던 일본군 장성이 러시아 내전에서 중립을 선언 (일본 본국의 방침에 따른 것임)

무고한 주민학살을 일삼던 일본군은 상황이 불리하게 되자 멋대로 중립을 선언한 후 볼셰비키와 공존하겠다고 주장한다.

연해주와 아무르주 일대의 도시지역에서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던 백파와 일제의 앞잡이들은 이제 패퇴를 깨닫게 된 것이다.

 

1920년 2월경에 일제와 백파들의 패퇴가 명백해지자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일제는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의 연해주와 사할린섬 북부 등지에서 대규모 반격을 음모한다.

 

바로

1920년 니항사건과 4월 참변, 북사할린섬 공격이 바로 기울어져가던 러시아 내전을 뒤집고 우랄산맥 혹은 바이칼호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거나

그것이 안되면 연해주, 북사할린섬, 캄차트카 등이라도 장악하자는 일제의 발악에서 시작되었음은

 

오늘날 거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동의한다.

 

물론 남한의 일부 극우반공세력과 일본 야스쿠니 기념관 공식도서 등에는 다른 의견도 있다.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사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사건중 하나인 니항 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일본어: 尼港事件, 중국어 : 廟街事件, Николаевск Инцидент 방송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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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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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8.10 일본의 대륙진출 몽상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승리 이후 만주와 시베리아에 대한 진출이 본격화되었군요 분쟁지역인 일본의 북방영토에 관한 주장에 일본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는 남한의 도서가 상당하다니 문제가 크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8.10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설픈 지식으로는 일본과 러시아의 역덕들을 ... 상대하기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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