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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군사혁명론 논쟁의 현재

작성자松永久秀|작성시간22.08.13|조회수237 목록 댓글 0

Ⅱ. 군사혁명론 논쟁의 현재-의의와 한계

 

로버츠가 주장한 군사혁명론의 근본적인 명제는 ‘1660년경 근대적 전쟁의 탄생이 완성되었다’라고 볼 수 있다. 로버츠는 이 ‘근대 전쟁’의 핵심을 국가의 통제를 받는 규율 잡힌 대규모 군대로 보았으며, 이러한 군대는 17세기 초반에 있었던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마우리츠와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제개혁을 통해 태어났다고 주장하였다. 로버츠는 그 마우리츠와 구스타프 이전의 군대를 에스파냐군의 거대한 보 병방진으로 대표되는 백병전 중심의 군대로 보았다. 로버츠는 에스파냐 군 역시도 화기를 도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중점은 보병의 장창 방진에 있었기 때문에, 화기의 사용이 효율적이지 못했고 유연하지 못 했다고 보았다. 반면에 마우리츠와 구스타프는 보병의 화기 사용을 늘 렸고, 그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대열을 얇고 긴 횡대로 바꾸었으며, 군 보병에 의한 효율적인 화력 투사에 초점을 둔 이 전술개혁이 모든 혁신의 출발점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후 로버츠의 이론을 수정한 제프리 파커는 네덜란드와 스웨덴뿐 아니라 동시대 에스파냐군 역시도 혁신적인 군대였으며, 화기 사용에 적극적이었을뿐 아니라 그 대형은 전혀 둔중하지 않았다고 반박하였다. 파커는 또한 유럽의 군사혁명을 촉발한 진정한 출발점은 마우리츠나 구 스타프의 개혁보다 앞서 16세기에 이미 등장한 ‘이탈리아식 성채(Trace Italienne)’였다고 주장하였다.7) 그의 이러한 주장은 네덜란드와 스웨덴 군을 혁신적인 근대 군대로, 에스파냐군을 시대에 뒤떨어진 군대로 보던 종래의 이분법을 극복하였다는 의의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로버츠 테제의 연장이었다.

 

파커는 로버츠와 마찬가지로 화약을 군사상의 혁명 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주된 요인으로 보았다.8) 파커에 의해서 화약으로 대표되는 기술상의 혁신은 곧 군사혁명의 원인으로 재확인되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이후 군사사 및 근대 초 유럽사 서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로 이후 출간된 근대 초기 시대사를 다루는 많은 저작 들에서 ‘화약의 전래는 군사혁명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었다’는 서술 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9)

 

이는 비유럽권의 군사사 연구에도 상당부분 적용되었다. 가령 피터 로지는 아시아에서 먼저 화약혁명과 군사혁명이 일어났다고 역설하였 다.10) 이와 비슷하게 토니오 안드레이드는 16-17세기에 세계에서 화약 기술 선도국은 중국이었으며, ‘군사적 대분기(great military divergence)’ 는 18세기에 와서야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11) 그러나 이러한 저작들은 유럽의 군사혁명이라는 테제는 부정하였으나, 화약과 같은 기술혁신이 곧 군사혁명이라는 도식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일련의 연구들은 유럽중심주의 극복이라는 대명제에 과도하게 몰두한 나머지, 단지 아시아에서 먼저 화약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만 집중한 면이 있다. 

 

 

그러나 최근 많은 군사사 연구자들이 지적하 듯이, 전쟁, 특히 전투행위는 인간의 모든 활동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현상 중 하나다.12) 이러한 복잡성을 간과하고 화약무기의 도입과 같은 단 하나의 결정적인 기술적 혁신을 잣대로 전쟁을 이해하려는 접근법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파커의 연구가 발표된 이후로 군사혁명론 테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소수나마 꾸준히 존재해왔다. 일례로, 제레미 블랙은 단일한 전환점으로서의 군사혁명이라는 개념을 비판하고,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3백 년 동안 세 차례의 ‘혁명적’인 변화의 시기가 존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일련의 혁명적인 변화들 역시도 각 지역별로 그 양상이 판이하게 달랐으며, 근본적으로 각 지역의 독특한 특성에 따른 적응의 과정이었다고 설명하였다.13) 그가 정의한 ‘세 차례의 혁명적 인 변화의 시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게 있지만, 화약혁명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 대신 각 지역의 특수성에 대한 적응이라는 개념은, 모든 군대가 마땅히 따라야 할 모델로서 군사혁명이라는 관념을 비판할 근거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다른 예를 보면, 중세전쟁사 연구자인 존 프란스는 화약무기의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서 전투의 매커니즘은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고대에서 중세, 근대 초기를 거치는 시기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며, 19세기 말 이전까지는 군사에서 ‘혁명’이라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고 단언하였다.14) 근대 초 독일 군사사를 연구한 피터 윌슨 역시도 군사혁명이란 19세기 말에 등장한 근대화 개념에 짜맞춘 도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 였다. 윌슨은 로버츠가 근대 군대의 선구자라 평한 구스타프 아돌프의 스웨덴군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군과 맞붙은 뤼첸 전투(1632)를 상세히 분석하면서, 이 전투의 실상은 근대적인 군대와 시대착오적인 중세적 군대와의 대립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입증해보임으로서 로버츠의 테제에 효과적인 공격을 가했다.15) 또한 비교적 최근에 공동 저작을 펴낸 제이콥 프랑크와 길마르 비소니-알론소는 군사혁명이란 없었으며, 근대 초기의 군사적 변화는 장기간에 걸친 진화의 과정이었다고 단언하였다.16) 근래의 이러한 흐름은 군사혁명론 테제의 위상이 예전만 같지 못 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군사혁명론은 폐기되었는가? 위와 같은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화약혁명을 핵심으로 하는 군사혁명론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고하다. 앞서 언급한 몇몇 동양 군사사 연구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또한 존 프란스와 피터 윌슨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군사혁명론에 비판적인 경향의 연구들에서도 화약을 근대 초기 군사적 변화의 핵심으로 본다는 면에서는 기존 테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 심지어 군사혁명 자체를 부정한 프랑크와 비소니-알론조차도 그 저 서에서 화약무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 전투들에 대해서 ‘예외적으로 근대적’이었다고 평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17) 급격한 혁명 모델에 대한 대체제로 제시된 ‘일련의 혁명들’ 모델과 ‘점진적 진화’ 모델에도 아쉬움은 있다. 이 대체 모델들 역시도 근본적으로 일직선적인 발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나친 단순화라는 비판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6) Rogers, ed.,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pp. 13-15.

7) Geoffrey Parker, “The ‘Military Revolution, 1560-1660’-A Myth?,” Rogers, ed.,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pp. 37-54. 8) Geoffrey Parker, The Military Revolution: Military Innovation and the rise of the West, 1500–1800 (Cambridge, 1996), pp. 9-10.

9) Armstrong Starkey, War in the Age of Enlightenment, 1700–1789 (Westport, Conn, 2003), p. 35.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펴는 다른 저작들로는 Russel F. Weigley, The Age of Battles: The Quest for Decisive Warfare from Breitenfeld to Waterloo (Bloomington, 1991), xi., Dennis E. Showalter and William J. Astore, Soldiers’ Lives Through History: The Early Modern World (Westport, Conn, 2007), pp. 61–63 등을 참고.

10) Peter A. Lorge,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 From Gunpowder to the Bomb (Cambridge, 2008), pp. 10–21.

11) Tonio Andrade, The Gunpowder Age: China, Military Innovation, and the Rise of the West in World History (Princeton, NJ, 2016), pp. 297–298.

12) Earl J. Hess, The Rifle Musket in Civil War Combat: Realities and Myth (Lawrence, 2008), p. 119. 인간 행위로서 전투의 복잡성에 대한 비슷한 연구로는 Christopher H. Hamner, Enduring Battle: American Soldiers in Three Wars, 1776–1945 (Lawrence, KS, 2011), Anthony King, The Combat Soldier: Infantry Tactics and Cohesion in the Twentieth and Twenty-First Centuries (Oxford, 2013). 참고.

13) Jeremy Black, “A Military Revolution?”, Rogers, eds.,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pp. 95–114.

14) John France, “Close Order and Close Quarter: The Culture of Combat in the West,”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27 (2005), 498–517 15) Peter H. Wilson, Lützen (Oxford, 2018), p. 113. 16) Frank Jacob and Gilmar Visioni-Alonze, The Military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A Revision (London, 2016), p. 1. 17) Ibid., pp. 35-36.

 

http://westernhistory.or.kr/html/sub03_04.asp

 

화약무기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못해도

마우리츠나 구스타프에 대한 평가 등 군사혁명론하에서 과대평가된 부분들이 많이 걷혀가는 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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