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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일제 시베리아 침략사 2. 공산당과 일본제국주의의 동상이몽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9.28|조회수199 목록 댓글 2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33)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사 2.

 

1920년 동시베리아 부르조아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대한 볼셰비키와 일제의 동상이몽

 

볼셰비키의 허수아비 국가인 극동공화국(완충국가) 건국 계획

1920년경 모스크바의 레닌과 볼셰비키(일본의 용어로는 ‘과격파’) 지도층은 동시베리아에서 공산당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서두르지 않고,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완충국(일명 ‘극동공화국(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 респу́блика (ДВР))’) 건국을 결정한다.

 

문제는 일제가 바라던 일본의 지휘를 받는 만주, 몽골, 연해주, 사할린 일대의 괴뢰국가와 레닌의 볼셰비키가 바라던 동시베리아의 ‘완충국가’ 모델이 좀 다르다는 것이다.

 

동시베리아 지역에 ‘극동공화국(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 респу́блика (ДВР))’이라고 불려지는 완충국가의 건설은, 장기간의 전쟁과 극심한 식량난 등으로 러시아 전역이 기근에 고통 받던 시기,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었던 모양이었다.

 

따라서 레닌 정부는 러시아 서부 지역에서의 승리가 확실해진 이상,

일본군만이 주둔하고 있는 극동에서의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서두르지 않았고, 전세계를 상대로 유연한 노선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동시베리아의 백파 잔당인 콜차크가 1920년 2월 7일경 처형되었다.

비록 연해주, 만주, 북사할린섬 등에 시묘노프(Семёнов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혹은 셰묘노프), 메르쿨로프(Мерку́лов Спиридо́н Диони́сьевич, 1870~1957) 등등 일제의 앞잡이들과 백파 잔당들로 구성된 괴뢰정권이 있었으나

러시아 내전에서의 승리가 확실해진 이상 미국, 영국, 일본 등과의 추후 관계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완충국가 건설에 다른 의견을 제시했던 트리피츤 부대가 잠들어 있는 '니항의 반일열사묘'

독립군 장례식이 거행되었던 니항의 학교 건물

니항사건에서 사망한 '반일열사들의 묘'

니항 사건에서 사망한 '반일열사들의 묘'

1920년 3월 일본 정부의 침략 지속 결정

1920년 3월경 일본 정부는 '축소하여 러시아 출병 계속'을 결정한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중국 등 시베리아 간섭국들의 철군과 일본 역시 철군하라는 압력이 팽배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 출병 계속을 결정하였다.

 

 

일본 군부는 추가 출병을 요구

영국‧미국·중국이 러시아 내전 간섭전쟁에서 완전 철군하였고,

단독으로는 볼셰비키를 타도하고 만주, 사할린섬, 캄차트카, 시베리아를 영유할 수 없게 된 일본 군부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엄청난 병력의 추가 출병을 요구하였으나

일본 내부 온건파의 철병안과 대립하다가 결국 일본 정부는 어지중간하게 양자의 중간 쯤을 선택한 것이다.

 

 

일제는 1920년 3월경 결국 시베리아 침략(일제의 용어로는 ‘시베리아 출병’) 규모를 축소하고, 출병을 계속하기로 한다.

이러한 국제적 사정 등으로 일본에서도 마침내 러시아 간섭전쟁 철병 여론의 고조된다.

동양 경제 신보(東洋経済新報), 중앙 공론(中央公論), 오사카 아사히(大阪朝日) 신문 등은 비정상적인 군사비 팽창이 나라의 재정을 압박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한 개 사단에서도 1억엔 필요하지만 1억엔의 돈을 던져 얻는 곳은 아무것도 없다.”

 

3월 2일의 내각회의(閣議),

3월 5일의 외교 조사회(外交調査会)에서 결정된 일제의 방침은 침략군의 수비 지역을 축소하고 병력을 교통로와 중요 도시에 중점 배치하며,

자바이칼주와 아무르주에서는 철수하지만 연해주 남부, 중동철도 연선, 니콜라예프스크(니항), 북사할린섬, 캄차트카 등에서는 철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 육군으로서는, 앞잡이였던 백파 잔당 콜차크는 죽었지만

아직 극동과 만주에는 아직 일제의 앞잡이들인 장작림(張作霖), 장종창(張宗昌), 하르바트(Хорват, Дмитрий Леонидович. 1858~1937)나 시묘노프(Семёнов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혹은 셰묘노프. 1890~1946)가 있었고, 영국이나 미국이 없어지면 오히려 일본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1920년도의 일본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6년간 지속된 경제 호황이 멈추었고,

일본 국민 총생산이 전년도인 1919년보다 감소한 해였다.

 

즉 일본 경제에 여유가 없어진 해였다.

또 평화를 바라는 전세계적인 군비 감축 움직임이 있었다.

일제가 막대한 공을 들이던, 중화민국에서는 1919년 5·4운동으로 대표되는 반일운동이 휩쓸고 있었고,

 

이틈을 노리고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던 국가에서는 여성들까지 맨주먹으로 ‘독립전쟁’에 나서는 마당이었다.

 

일본 내에서 국가적 지출이 큰 시베리아 침략(일제의 용어로는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반대가 강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제는 1919년 5월경에는, 「레닌 정부의 기초가 재정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확립되었고, 백파 콜차크 정권에 대한 농민의 반발이 강해 예단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판단이 이미 있었다.

 

일제가 예상한 대로 콜차크 정권은 곧 붕괴되었고,

일제의 거듭된 시베리아의 민간인과 주민 학살극에 연해주 각지에서는 박일리야, 이동휘, 한운용, 이용 등의 고려인들과 러시아 파르티잔 세력이 순식간에 백파와 일제에 넘어간 지역을 해방시켜 나가는 상황이었다.

 

일제가 주장하는 '니항 학살 사건 추모식'과 책임자

 

일제의 연해주, 만주, 사할린 일대 괴뢰국가 건국 계획

1920년 초는

일본에게도 러시아 볼셰비키가 제안한 극동공화국(완충국가)이라는 것을 나쁘게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볼셰비키가 주창한 ‘극동공화국’은 표면적으로 볼셰비키가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타협을 표방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1920년 초반 일제의 시베리아와 만주 침략 상황

 

시베리아 침략 지속의 어려움

이러한 전후 사정 때문에

일본내에서도 시베리아 침략(일제의 용어로는 ‘시베리아 출병’)의 계속은,

당시 평화와 제국주의 침략을 경계하는 전 세계적인 움직임과 일본의 악화되는 경제상황을 고려하고,

 

또 일제의 앞잡이들을 지배층으로 내세운 괴뢰국가(연해주, 만주, 몽골, 사할린, 캄차트카 일대의 완충국가 건국)수립과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목적의 실현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합리적이라고 판단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볼셰비키가 허수아비로 세웠던 '극동공화국'

 

※문제는 이 무렵 연해주, 사할린주, 아무르주, 만주 일대에는 일제의 만주, 시베리아 침략에 호응해 친일단체인 ‘00거류민회’, ‘니항 조선인 민회’와 ‘하바로프스크 조선인회’ 등의 명칭을 가진 친일단체를 조직해 침략에 앞잡이 노릇을 한 자들도 많았으며,

조선인 여성까지 위안부로 동원해 가며 협조한 ‘악질 친일파’까지 있었다고 한다.

니항사건에 대한 기록을 남긴 니항일본인회 회장 '시마다'와 이시다 영사 가족 등

 

 

전사한 독립군 Корейский партизан

 

참고자료

(1)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0

(2)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일제의 시베리아에서의 만행을 기술)

(3)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1985 (※일본군 북사할린섬 점령선언을 1920년 7월로 기재. 북사할린섬 공격은 1920년 4월부터 시작되었고 파르티잔 토벌후 1920년 7월 점령을 선언한 것임. 점령선언과 공격은 다른 것임)

(4) 김홍일,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니항사건을 일제의 터무니 없는 생떼라고 주장)

(5) 일본측 시베리아출병 http://www.kaizenww1.com/700siberia3.html

(6) (일본 홋카이도 출생으로 근래 일본에서 자주 인용되는)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

(7) (친일파시스트) A.Y.구트만(ГУТМАН А. Я), 『니콜라예프스크의 죽음(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영문도서명은 ‘니콜라예프스크의 파괴’)』

(8) (이르쿠츠크파 문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1922년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 送付에 관한 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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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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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9.28 일제가 바라던 만주,몽골,연해주,사할린 일대의 괴뢰국가와 레닌의 볼셰비키가 바라던 동시베리아의 완충 모델이 달랐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9.28 예..그렇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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