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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일제 시베리아 침략사 5. 하라 테루유키(原暉之)가 주장하는 연해주 '4월 참변'의 시작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10.17|조회수75 목록 댓글 2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36) 하라테루 유키(原暉之)가 주장하는 연해주 '4월 참변'의 시작

 

참고자료

(1)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1942년생~) 『시베리아출병(シベリア出兵):革命と干渉1917–1922』1989年 東京 (Хара Тэруюки. “Сибэриа сюппэй. Какумэй то кансё”|”Сибирская экспедиция - революция и интервенция”. Токио, 1989)

(2) Hosoya, Chihiro(1920년 생~2011년 사망). “ORIGIN OF THE SIBERIAN INTERVENTION, 1917—1918.” / The Annals of the Hitotsubashi Academy, vol. 9, no. 1, 1958, pp. 91–108. // JSTOR. (дата обращения 21.03.21)

(3) (미국 시베리아 파견군 장령)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일제의 시베리아에서의 만행을 기술하며 최소 수십만 민간인 학살 참여를 주장)

(4)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악질 친일파 ‘시묘노프’의 활약상을 기술한) Борисов Б.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атаман Г. М. Семенов и его борьба за освобождение России от большевиков. — Вена, 1921. — 62 с.

 

 

1920년 4월 일본군이 도발한 연해주 '4월 참변'

하라테루유키(原暉之, Хара Тэруюки)가 쓴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를 요약해 보면

 

(......하라 테루유키의 책에서......)

미군 등 다른 시베리아 간섭군이 모두 철군한 후, 일본군에 의한 ‘4월 참변’이 발생하였다.

시베리아 간섭국들의 군대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Хара Тэруюки)의 책은 날짜가 틀리는 경우가 많다)

1920년 4월 1일경 미국 간섭군(사령관은 윌리엄 S 그레이브스)의 철병이 완료된다.

 

미군의 철수를 계기로, 일본군 지휘부는 혁명군에게 (기울어져 가는 시베리아 간섭을 뒤집기 위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다.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Хара Тэруюки)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반병률의 주장에 따르면, 트리피츤과 박일리야가 주도한 니항사건 때문에 일본군이 보복 공격에 나선 것이며,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도 니항사건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반병률(주로 A.Y.구트만과 하라테루유키의 주장을 인용)과 유사한 주장을 하는 러시아와 일본의 자료를 찾는 것은 힘든 일이다.)

 

1920년 4월 4일 밤, 일본군은 혁명군에 대해,

하바로프스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등 우수리 철도 연선을 중심으로 연해주 일대의 모든 일본군 주둔 지점에서 총공격을 개시한다.

 

4월 5일 ~ 6일, 스파스카(오늘날의 스파스크-달리니)지역에서는 8일까지 이어졌다.

 

하라 테루유키가 주장하는 양측의 전사자 수

일본군 측은 하바로프스크, 우수리스크, 스파스카(스파스크) 지역에서 대략 약 5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적 사상자는 적어도 2,450여명으로 간주해야 한다.

 

(※번역자의 의견 : 하라테루 유키의 책에 의한 것이며, 오늘날 러시아에서 4월참변 기간동안 일본군이 2천명밖에 안죽였다고 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노보시비르스크의 테플랴코프?의 책을 검토해보면 일제의 주장을 복사한 것일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동청철도의 백파잔당) 하르바트 옹립계획은 하르바트의 사임으로 실패

일본군 지휘부는 동시베리아 혁명파를 무장 해제하고 방치한 뒤에, 시묘노프(Семёнов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혹은 셰묘노프)나 하르바트(Хорват, Дмитрий Леонидович. 1858~1937)를 불러 연해주에서 정권을 잡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르바트는 이 무렵까지 중동철도(동청철도) 부속지의 러시아인 노동자·시민으로부터의 강고한 파면 요구와 볼셰비키의 카라한 선언(ноты Карахана) 등으로 인해 중동로철도 장관직을 사임하였고,

4월 5일경에 중동철도의 거점인 하르빈을 떠나 베이징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하라테루유키의 책은 일본 참모본부 자료와 A.Y.구트만의 책 등을 짜깁기 한 수준이기 때문에 날짜가 틀리는 경우가 많다.)

 

 

일본은 시베리아를 간섭한 연합국 사이에서도 고립

'4월 참변'으로 일본군은 도의적으로 완전히 권위가 실추된다.

각국 영사단이 개입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영사까지도 일본을 격렬하게 규탄하였다.

연해주 젬스트바(Земство) 참사회 의장(沿海州ゼムストヴォ参事会 議長) 메드베데프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는 부활되지 못했다.

 

백파 잔당인 콜차크 정권이 쓰러지고,

파르티잔 세력이 단번에 연해주까지도 장악한 것은, 혁명파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가 퍼졌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일본 육군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일본의 관점에서 보면 상황을 역전하려면 친일파 양성, 특히 중농층 이상을 대상으로 경제유도책을 도입하는 등등 등으로 혁명파 지지에서 전환시키는 것이 중요했지만 그러한 점이 미비했다.

 

(※번역자의 의견 :

이 무렵 일본은 시베리아와 만주에서도 친일파를 대대적으로 양성하였고, ‘니항 조선인 민회’와 같은 친일단체를 적극 활용하였다.

 

그러고 A.Y.구트만과 같은 친일파시스트를 일본 본국까지 불러들여 반볼셰비키 신문과 한국독립기념관이 사실이라고 인용하는 ‘니항의 죽음(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같은 책자를 대대적으로 발행했다.

 

그러나 이미 동시베리아 주민 대부분에게 ‘일본인과 앞잡이’는 ‘구세주’나 ‘해방자’가 아닌 ‘침략자’일 뿐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시 친일파를 내세워 합방을 주도케 하고, 그들에게 은사금과 귀족들의 권리를 광범위하게 보장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조선보다 더 국력이 강한 러시아라는 지역에서 과도한 주민 억압책을 실시하고, 잦은 주민학살과 민간인 학살, 강간, 약탈은

근대화에 뒤졌던 조선‧중국‧만주‧몽골‧대만과 러시아의 상황이 다르다는 인식이 부족했고,

 

청일전쟁, 의병전쟁, 사할린섬학살, 대만합병, 만주사변, 지나사변, 대동아전쟁에서나 쓰던 야습과 강경 학살책을 도입하고부터 더욱 반발이 커지자,

뒤늦게나마 메르쿨로프, 시묘노프, 하르바트, A.Y.구트만 등등의 친일파를 전면에 내세워 각종 선전을 일삼고,

‘00조선인회’와 같은 명칭의 일제 주구와 앞잡이 양성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라 테루유키(原暉之)가 쓴 「시베리아 출병」의 계속 요약입니다......)

A.Y. 구트만의 책 104쪽

남한에서 '민간인 학살'의 핵심 증거로 인용된다. 그러나 엉터리 번역과 날짜 오기 등이 엄청나다.

 

 

1920년 4월 동시베리아에 볼셰비키의 '완충국', 극동공화국의 성립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Хара Тэруюки)의 책은 날짜가 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1920년 4월 6일경, 동시베리아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에서 극동 공화국 성립이 선언된다

 

파르티잔 부대와 혁명 측으로 투항한 구 콜차크 군의 부대는 합체해 극동 공화국의 정규군으로 재편성되기 시작했다.

 

극동 공화국에는 뒤에는 모스크바의 레닌정부가 있음은 온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 하라테루유키의 책에 의하면, 7월 15일 일본군과 정전이 성립된다.

 

일본군 점령하의 연해주 정부는 굴욕적인 군사적 열위에 있었고 단지 지도를 받는 정권에 불과했다.

연해주의 우수리 철도 양측 30㎞ 이내에 어떠한 러시아 무장단체의 존재도 허용되지 않았다.)

일제가 주장하는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의 일본군 공격로

1920년 5월경의 일본군 공격로

백파 콜차크 군의 진로

1919년 아무르 주 지역의 내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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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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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10.17 일본이 시베리아를 간섭한 연합국사이에서도 고립되었군요 또한 친일파를 전면에 내세워 각종 선전을 일삼고 일제주구와 앞잡이를 양성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0.18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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