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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베리아 침략사 6. 일제가 선택한 최악의 악수(惡手) 「연해주 4월 참변」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10.23|조회수143 목록 댓글 2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37) 일제 시베리아 침략사 6. 일제가 선택한 최악의 악수(惡手) 「연해주 4월 참변」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의 전개과정

1918년경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일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이탈리아 등 제1차 세계대전 동맹국들과 연합해, 함께 시베리아를 간섭하기로 해놓고서는,

 

약속을 어기고,

시베리아 방면에만 7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1918년 극동의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강 하류에 위치한 교통요충지 니항, (만주의 친일파 장작림과 러시아 백파잔당을 지원하며) 흑룡강 건너편인 러시아령 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목적은 ‘영토확장, 만주•몽골•시베리아•사할린섬•캄차트카 일대에 일제의 지도를 받는 괴뢰국가 건설’이 분명했고,

다른 시베리아 간섭국들이 간섭이유로 내세웠던 ‘체코군단 구원’과는 관련성을 찾을 수 없었다.

니항에서 전사한 독립군 장례식

 

‘뺏고 빼앗기는 파르티잔 유격전’ 속에 발생한 러시아 대기근

1917년 2월과 10월 혁명이후, 볼셰비키가 한 때 장악했던 동시베리아 일대의 소비에트들은 일제에 의해 무너지고, 주민학살과 약탈에 맞서

일제에 대항하는 ‘뺏고 빼앗기는 파르티잔 유격전’이 시작되었다.

 

1920년 초, 러시아의 백파잔당 콜차크는 처형되었고, 일제가 입으로만 「러시아 내전에서의 중립」을 선언하자,

파르티잔 부대는 일본군이 점령한 동시베리아의 니항, 자유시, 블라가베셴스크,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 진입한다.

 

이 어려운 시기에 (러시아 내전은 서부 유럽에서도 계속중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 등은 법적으로만 주권국가이며,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완충국가를 극동에 만들고, (실제로는 허수아비 국가)

동쪽에서의 소비에트 건설을 연기하기로 결정한다.

 

이 아이디어는 동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 있던 멘셰비키 등이 볼셰비키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러시아 내전 승리를 위한 레닌정권의 어려움

레닌은 1920년 1월 21일경 전보에서 이 계획을 승인했다.

볼셰비키에게 급한 것은 모스크바 등 주요 거점이 있는 유럽쪽이었고, 유럽쪽이 정리되고, 대기근 등이 해소될 때까지 동쪽과 아시아에서 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극동 공화국(ДВР)의 형태로 완충국가를 만들게 된 상황...

우리는 일본과 전쟁을 할 수 없고, 일본과의 전쟁을 연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라고 레닌이 썼다.

 

모든 사람이 레닌의 방법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연해주의 유명 파르티잔 세르게이 라조(Лазо,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도 극동공화국(ДВР) 건국에 반대하였고 연해주 일대 소비에트의 즉각적인 회복를 주장했다.

니항을 해방시킨 트리피츤도 반대하였다.

 

그러나 곧 연해주의 볼셰비키는 모스크바 볼셰비키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극동의 소비에트화에 대해 이미 내렸던 결정을 취소해야 했다.

극동공화국의 대략적인 위치

 

4월 참변 무렵 완충국가인 「극동공화국(ДВР)」 건설이 확정됨

완충 국가(ДВР)에 대한 아이디어는 1920년 4월 4일에서~5일의 ‘일본 공격’ 이후에 더욱 가능성이 높아졌고, 심지어 소비에트의 이익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극동공화국은 결국 1920년 4월 6일경 베르흐네우진스크(현재의 울란우데)에서 건국 선포되었다.

극동공화국 건국시 실제 행정력이 미치는 곳은 베르흐네우진스크, 치타 일대의 바이칼호 부근이었고, 아무르주와 연해주 일대에는 셰묘노프(시묘노프), 메르쿨로프 등등의 백파잔당이 일제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있었다.

 

다만 일본과 볼셰비키(레닌정부)의 수년간 계속되었던 평화협상이 일제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도 있다.

 

1920년 4월 4일에서~5일 밤,

휴전과 중립선언을 위반한 일본군은 극동의 볼셰비키와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조선인)들을 공격했다.

 

 

일제의 조선인 학살 자행

미국 개입군의 사령관인 윌리엄 그레이브스(William S. Graves, Уильям Сидней Грейвс)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적대적으로 점령하고 거리에서 무분별한 총격을 가해 인명을 앗아간 것”이라고 증언했다.

훗날 극동공화국 총리가 된 표트르 니키파라프(Пётр Никифоров)는 이렇게 회상했다.

“일본군은 특히 잔혹하게 조선인을 습격했다.”

 

세르게이 라조(연해주의 파르티잔)의 아내 올가(жена Сергея Лазо Ольга)는

“그들은 한국인 거주지를 포위했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불태웠다”고 회상했다.

(※이 지역 어딘가에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난 빅토르 최(러시아의 유명가수, 1962~1990)의 할아버지도 있었다)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은 일제의 러시아영토를 확보하자는 마지막 발악에서 시작됨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피살

요즘, 남한에서 니항사건 때문에 보복 살해되었다고 주장되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도 이 무렵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니항에는 최소 136명 이상의 일본군 포로와 사할린주 일대에서 ‘니항조선인 민회’등을 조직해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친일 조선인 포로들이 있었고, 이시다 영사와 니항 일본거류민들의 생사조차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전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야습을 감행한 것은, 니항사건과 이어지는 4월 참변은,

러시아내전이 일제에게 불리해져 철수 외에는 방법이 없게 되자,

러시아 영토를 확보하자는 마지막 발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러시아 역사 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이고, 남한의 몇 명을 제외하면 일본에서도 대부분 인정하는 내용이다.

 

연해주의 다른 도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대략 일본 주장 2천여명에서 ~ 러시아 추정 7,000여명의 볼셰비키측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일제는 라조(Лазо,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루츠키(Лу́цкий,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시비르쳬프(Сибирцев, Всеволод Михайлович)를 체포하고 볼셰비키 군사위원회의 지도력을 장악했다.

라조(Лазо,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등은 백파잔당 카쟈크에게 넘겨져 1920년 5월말(5월28일~29일경) 증기 기관차 화로에 산채로 던져져 살해되었다.

라조의 죽음

 

극동공화국 건국 무렵,

일본과의 평화 협상이 시작됨에 따라, 지방의 볼셰비키 당국은 ‘휴전’이라는 명목아래 일제 침략자의 통제하에 있는 일본 수비대 주둔지와 연해주 철도 일대에서의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볼셰비키 군대를 철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최악의 악수(惡手)가 된 4월 참변

오늘날

일제가 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4월 참변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자는 남한에서나 찾을 수 있고, 일본에서는 찾기가 힘든다.

오늘날 일본역사학계에서는 1920년 4월의 학살극은 일제 시베리아 침략 계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악수(惡手)가 되었음을 인정한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불타는 하바로프스크의 학교 건물

이후,

연해주에서 일제의 학살극을 경험한 사람들의 선택은 일제를 따라 만주나 일본 본토, 중국•미국•유럽•남아메리카•호주로 이주하거나 혹은 반볼셰비키 활동을 지속하거나,

 

아니면 파르티잔 부대에 협조해 일제를 타도하는 데 나서게 된 것이다.

연해주 4월 참변 당시 일본군의 공격로

동시베리아 주민들의 파르티잔 지원

즉, 시베리아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중립적인 자세를 지키던 대부분의 주민들이 파르티잔 편으로 돌아섰고,

 

일제는 국내외적인 사정으로 시베리아 등지에 대규모 병력 증파를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볼셰비키와 지속적인 평화 협상에 나서게 되었지만,

이미 대세는 볼셰비키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시베리아 주민들의 파르티잔 지원 원인은 일본군의 무모한 학살극 때문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니항에서 생포된 일본인 포로들이 처형된 것도 ‘4월참변’에 대한 보복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일제와 시베리아까지 따라와 친일단체를 조직했던 주구들은 일본까지 가서 ‘반볼셰비키 신문’, ‘니항의 죽음’ 같은 책을 출판하며 선전전을 했는데,

 

 

일본과 A.Y.구트만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은 00유공자

아무리 뒤져봐도 근래 00유공자로 서훈된 박병길, 김낙현, 이지택 선생께서는 일제 밀정 안드레예브(И. Т. Андреев) 등과는 니항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셨기에, (※1921년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독립군들이 ‘무정부의주의 강도떼, 악마, 마왕’로 몰려 죽을 때에도)

 

니항일본인회 회장 시마다(島田元太郎), 니항일본제국영사관 이시다(石田虎松) 영사, 친일파시스트인 A.Y.구트만(ГУТМАН А. Я), 근래 일본에서 관련 책을 출판한 「하라 테루유키(原暉之)」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 무렵

 

일제가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당시 한국 독립군들은 ‘일제의 개, 앞잡이 놈, 악질 친일파’라고 불렀다고 한다.

 

※00유공자 박00에 대해서는 원래 니항에서 일제에 협조한 죄목으로 처형대상자 명단에 올랐으나, 조선인 부대장 박일리야의 고종사촌여동생이었던 홍마리아의 약혼자가 박00이었고, 박일리야의 비호를 받아 처형을 모면했다는 소리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러한 가운데 1920년 4월 일본군이 교통요충지이며 자원의 보고인 사할린주와 니콜라예프스크(니항)을 점령하기 위해, 사할린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니항의 독립운동가 신문 '국민성'

사할린주와 니항의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발행한 신문 '국민성'

 

일제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공격. 1920년 4월 21일경 공격하였다. 7월달이 아니다.

 

참고자료

(1)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1942년생~) 『시베리아출병(シベリア出兵):革命と干渉1917–1922』1989年 東京 (Хара Тэруюки. “Сибэриа сюппэй. Какумэй то кансё”|”Сибирская экспедиция - революция и интервенция”. Токио, 1989)

 

(2) Hosoya, Chihiro(1920년 생~2011년 사망). “ORIGIN OF THE SIBERIAN INTERVENTION, 1917—1918.” / The Annals of the Hitotsubashi Academy, vol. 9, no. 1, 1958, pp. 91–108. // JSTOR. (дата обращения 21.03.21)

 

(3) https://news.yahoo.co.jp/articles/f3d9da28f4b45a63c9ae895dcdacced6ec3ab6ba?page=2

 

(4) (미국 시베리아 파견군 장령)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Уильям Сидней Грейвс),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Американская авантюра в Сибири 1918-1920)』 (※일제의 시베리아에서의 만행을 기술하며 최소 수십만 민간인 학살 참여를 주장)

(5)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악질 친일파 ‘시묘노프’의 활약상을 기술한) Борисов Б.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атаман Г. М. Семенов и его борьба за освобождение России от большевиков. — Вена, 1921. — 62 с.

 

(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니콜라예프스크에서의 朝鮮獨立示威行列 請願 拒否의 건], (在ニコラエウスク領事代理 副領事 石田虎松), 1919년 04월 03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6_1640

 

(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國民의 聲이라는 週刊新聞의 발행에 관한 건], 石田 (領事代理), 1919년 05월 05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7_0100

 

(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朝鮮新聞 再刊에 관한 건, 石田(니콜라예프스크領事代理 副領事), 1919년 10월 20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7_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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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10.23 완충국가로 극동공화국 건설이 확정되었군요 연해주 4월 참변은 일제의 러시아 영토를 확보하자는 마지막에서 시작되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0.24 예, 요즘 러시아 일본 역사학계에서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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