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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베리아 침략사 7. 알렉산드라프스크(Сахалин Александровск) 항구 무혈 함락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10.25|조회수143 목록 댓글 2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38) 일제 시베리아 침략사 7. 알렉산드라프스크(Сахалин Александровск) 항구 무혈 함락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이 휴전상태가 되자,

일제는 트리피츤 부대가 해방시킨 북사할린섬(北樺太)과 니콜라예프스크(니항, 廟街, Николаевск)을 재점령하려고 한다.

트리피츤 부대와 박일리야가 지휘하던 사할린 부대의 장례식

4월참변 이후 일본의 목적

석유를 전량 수입했던 일본

니항을 점령해야만 아무르강 수상 교통을 활용할 수 있으며, 북사할린섬에 풍부한 석유, 석탄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제는 석유를 수입하는 국가였다.

 

당시에도, 휘발유•경유(디젤)•중유 엔진은 군함, 기차, 차량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었고, 미국•영국•러시아 등이 독점하고 있던 석유자원 확보는 사활을 걸어야 할 정도였다.

 

 

니항 일본거류민 학살에 대한 배상을 받기 위한 ‘북사할린섬(北樺太) 보장점령(保障占領, 1920. 4. 21. 경부터 ~ 1925. 5. 15. 일경)’ 이라는 명목으로 공격 개시

일제는 북사할린섬 공격을 보장점령 등이라고 둘러대고 공격을 개시한다.

 

 

러시아•시베리아를 장악한 소련과의 협상을 꿈꾸고 백파 러시아인과 일제 주구들의 망명에 인색했던 일본

이 과정에서 패퇴하는 일제 침략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신청이 인정된 러시아인은 A.Y.구트만(각종 공식도서와 백과사전에서 민간인 학살의 증거로 인용되는 책의 저자) 등등 수백여명 밖에 안된다는 소리가 있다.

 

니항에서 러시아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한 안드레예브(И. Т. Андреев, 자유시 포병부대장, 독립유공자 김낙현•박병길•이지택의 동료), 사할린섬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의 백만장자 페트로프스키(Петровский, Филипп Емельянович)는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사할린섬의 거부 페트로프스키(Петровский, Филипп Емельянович)

사할린섬의 거부 페트로프스키(Петровский, Филипп Емельянович)

일본으로 망명이 인정된 러시아인

 

이용 가치가 없어진 대부분의 백파계 러시아인들은 일본이 아닌 미국, 중국, 만주 등지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러시아에 남았던 극소수의 백파계 러시아인들에게 스탈린 독재시대는 가혹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제정러시아 지배층이 아니었던 사람도 엄단해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1945년 이후 남한의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등의 후손들도 일본으로 가지 못하고 사회 지도층으로 군림하게 된다.)

 

 

1905년 러‧일 전쟁시 일본의 사할린섬 민간인 학살과 주민 이주

러‧일 전쟁중 제물포, 여순, 봉천 등에 이어 1905년 일본은 러시아령이던 사할린 섬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민간인들까지 학살하였다.

당시 사할린섬에 거주하던 러시아 주민의 상당수는 북위 50도 이상의 사할린섬 북부로 탈출하거나, 아무르강 하류의 교통요충지인 니항, 사할린섬 건너편의 연해주 등지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일본군의 사할린섬 공격

 

최근 한국 독립운동사에 일본에 우호적이라고 잘못 알려지고 있는 니항(니콜라예프스크) 주민의 상당수가 1905년 사할린섬 학살과 추방 때문에 탈출해온 사람들이었다.

 

“사할린섬 남부에서 길야츠크 민족의 보트를 타거나, 걸어서 혹은 말을 타고, 어린이들과 함께 알렉산드라프스크로 산과 늪을 지나 탈출에 나섰습니다.

아무도 일본 사무라이들의 잔학 행위에 대한 끔찍한 이야기를 믿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부진-비치(Д.С. Бузин-Бич)는 일본이 1905년 사할린섬 남부에서 어린이, 여자까지 모두 몰살시켰다고 주장하지만,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가 명확하지는 않다.

좌측 부진-비치

 

(※물론 이와 반대로 러시아에는 ‘일본이라면 무조건 환영하는 자’도 분명 있었고, 조선에도 1910년 한일합방시 일본을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고, 오늘날 한국의 경제발전은 일본의 식민지근대화정책 덕분이라는 사람도 분명 있다.)

 

1920년 니항 주민중 1905년 사할린섬 학살에서 탈출해온 사람들이 트리피츤에게 적극 협조한 것도 사실이고, 일제의 압제를 받던 민족이 트리피츤 부대를 열렬히 환영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니0 000 민회’ 간부 같은 사람은 일본민족은 아니나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트리피츤 부대에게 처형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과 주구들의 사할린주 일대 어업권 확장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오호츠크해 일대의 어업권을 획득하였고, 캄차트카에서 약 28개의 어장과 니항 인근 2개 어장을 임대한 후 점점 더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제1차대전 무렵에 이르러서 일본인들의 니항 인근 어장과 어망, 양어장 확보는 니항 어민들의 생존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아무르강 입구에 어망만 설치하고 굴러들어오는 물고기를 잡아 일본인과 앞잡이들만 배를 불리면, 그것을 환영할 사람은 자본가와 일제밖에 없었고,

 

세계 최대규모의 풍요로운 어장에 위치했던 니콜라예프스크 어민중 상당수가 일본인과 제정러시아 지배층의 ‘농노, 쿨리’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세계 최대 어장중 하나인 아무르강 하류 니항

일제시대 사할린섬 인근 어장

‘니항사건 일본인 포로 처형’은 단순히 파르티잔 지휘부를 몰살시키려던 일본군의 야습과 ‘연해주 4월참변’의 보복으로써만 일어난 것은 아니며,

침략자들과 그들의 주구에게 숨기고 있었던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은 더욱 달랐다고 한다.

1920년 2월 29일 박000가 지휘하던 부대 200여명이 무혈입성하자 니항의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들은 모두 나와 만세를 부르고 환영하였다고 한다.

그들에게 박000는 해방자였고, 1919년 중국의 5‧4운동과 마찬가지인 민족해방이었던 것이다.

 

 

볼셰비키의 북사할린섬 알렉산드라프스크(Александровск) 항구 해방

니항 해방과 비슷한 시기인, 1920년 1월 13일에서~14일경, 사할린섬 북부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에서도 반콜차크 쿠데타가 일어나 모든 권력은 주로 볼셰비키로 구성된 임시 혁명위원회 손에 넘어갔고, 임시 연합 집행위원장은 알렉산드르 짜프카였다.

 

1920년 3월 9일에서~10일경 첫 번째 사할린섬 소비에트 대회는 집행위원회 부서의 혁명적 책임자를 선출했으며 나중에는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선출했다.

 

 

트리피츤 부대의 대응책

일제가 연해주 일대에서 4월 참변을 일으키자, 니항도 곧 공격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고, 트리피츤 부대 역시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다.

 

4월 9일경 일본군의 사할린섬 북부 알렉산드라프스크(Александровск) 공격에 대비하라고 트리피츤이 명령하였다.

 

1920년도 사할린주 행정구역

 

1920년 4월 10일경 니항의 파르티잔 부대가 상급부대에서 지시를 받지 못하자

일본군과 일본해군을 위한 군사기지 건설을 막기 위해 주민들을 일단 께르비로 대피시키고, 니항과 동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츠니르라흐(Чныррах)요새를 파괴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니항에는 4월 20일경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의 일본군과 볼셰비키 군대 사이의 전투 소문이 닿기 시작했고, 이후 하바로프스크에서 볼셰비키군이 무장 해제되었다거나 해빙이 되면 일본군 구원부대가 확실히 니항으로 올 것이라는 등, 자세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야만적 4월 학살과 하바로프스크에서 볼셰비키군의 무장 해제, 극동 공화국의 수립 등의 소식은 교통의 요충지인 니항 주둔 파르티잔들에게 즉각적인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다.

 

 

 

알렉산드라프스크 무혈함락과 짜프카의 살해

4월 21에서 22일경 사할린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薩哈嗹 亞港, Александровск)에 일본군 파견대가 상륙하여 빨치산들을 물리치고 쩸스토우측 백군계 정권을 다시 수립하였다. (1920년 5월 5일자 동아일보)

 

2,000여명의 일본군 병력과 군함 미카사, 미시마 등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군함 미카사

일본 군함 쇄빙선 미시마

(1925년까지의 사할린섬 북부 점령기간중 일본군이 사단 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소리도 있다)

이 과정에서 파르티잔과 주민들에 의한 결사항전은 없었다.

 

알렉산드라프스크 주민 대다수는 아직도 러시아내전에서 중립적인 자세를 지키고 있었으며, 장기간에 걸친 내전과 4월 참변으로 피난갈 곳도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주민들의 상당수는 1905년 일제의 사할린섬 학살을 피해 쫓겨온 사람들이었다.

놀랍게도 사할린섬 북부의 지배층 상당수가 일본군에게 협조하였다.

 

 

사할린섬 북부 파르티잔 부대의 니항(니콜라예프스크) 후퇴

사할린주를 해방시켰던 트리피츤이 파견한 파르티잔 부대원들과 사할린섬 혁명위원회의 군대는 니항(니콜라예프스크) 지역으로 후퇴해야 했다.

일본군은 알렉산드라프스크 공격중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북사할린섬의 최대 도회였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의 건물들은 모두 무사했다.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주민들이 나중에 불타버린 니항 주민들처럼 께르비, 하바로프스크, 블라가베셴스크, 자유시, 북사할린섬으로 피난을 떠나 고생하지는 않은 것이다.

 

(※오늘날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1920년 주로 목재로 지어진 사할린섬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대부분의 건물들과 당시 부잣집 대저택 등도 오늘날 거의 대부분 버려지거나 철거되어 남아 있지 않는 것을 볼 때, 당시 기술적 한계와 구식으로 지어진 1920년대의 모든 건물들이 문화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든다.

대다수 니항의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6‧25사변중 한국 서울과 평양의 건물들이 니항, 하바로프스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보다 더 파괴되었지만 모든 주민들이 학살당한 것은 아니다.)

 

 

무혈함락으로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의 건물들은 보존되었다.

도시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일본군의 무혈입성을 허용해서 사할린섬 북부 주민의 주택 등의 편의를 확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일본군 역시 연해주 4월 참변처럼 백파와 중국‧미국 간섭국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무고한 주민들에 대한 대학살극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의 번화가

 

볼셰비키인 짜프카(Цапко, Александр Трофимович, 1884년경 출생 ~ 1920년 5월경 사망)는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기 위해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에 남았다.

 

1920년 5월 17일(~ 혹은 5. 20.일 사이) 아침쯤, 일본군은 짜프카를 체포하였고 저녁에 군함에서 사할린섬 집행위원회 초대 의장이었던 그를 살해했다.

짜프카(Цапко, Александр Трофимович, 1884년경 출생 ~ 1920년 5월경 사망)

 

 

 

알렉산드라프스크(Александровск) 점령에 대한 신문 보도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인 <사벳스키 사할린>이 일본군의 사할린섬 북쪽 절반을 점령한 방법을 보도한 것입니다......

 

“1920년 4월 22일, ‘사할린섬의 일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2,000여명의 일본군이 알렉산드라프스크에 상륙했습니다.

소비에트 정부의 지지자 중 일부는 본토로 피난갔고, 일부는 탄압 받았습니다.

북사할린섬의 권력은 일본군에 넘어갔다.

 

토지 소유 및 처분과 관련하여 러시아인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여러 법령이 발표되었으며, 광업, 어업, 벌목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도입되었으며, 추출된 자원을 러시아 본토로 수출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수많은 세금과 수수료가 부과되었습니다.

 

러시아계 주민의 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

1925년까지 러시아계 인구는 거의 1/3로 감소했습니다.

가장 수익성이 높은 기업과 산업은 일본의 손에 있었습니다.

사할린섬 석유는 일본인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1920년 초에 중단되었던 지질 조사가 재개되었습니다.

이 작업은 쿠하라 회사와 일본 해군부에서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1921년부터 오하(Оха, 혹은 ‘아하’) 유전의 상업운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할린 유전을 개발하기 위해 쿠하라, 미쯔비시, 오쿠라, 니혼 오일 컴파니를 포함하는 호쿠신카이(Хокусинкай) 주식 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사할린의 거의 모든 석탄 매장량이 일본 기업으로 넘어갔습니다...... (신문보도 중략)

1920년대 일본군 점령하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1920년대 사할린섬 북부의 광산

Вот как описывает оккупацию северной половины острова старейшая газета области «Советский Сахалин»: «22 апреля 1920 г. в Александровске был высажен 2-тысячный японский военный десант с целью «защиты япон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острова»… Часть сторонников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ушли на материк, часть была репрессирована японцами. Власть на Северном Сахалине перешла к японскому военно-административному управлению. Был издан ряд постановлений, ограничивающих права рус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относительно владения и распоряжения земельными участками, введён жёсткий контроль за горными выработками, рыбными промыслами, лесоразработками, наложен запрет на вывоз добытых ресурсов на материк, были установлены многочисленные налоги и поборы. Началось вытеснение рус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К 1925 г. население граждан России сократилось почти на треть. Наиболее доходные предприятия и отрасли оказались в руках японцев. Особое внимание японцев привлекла сахалинская нефть. Были возобновлены геолог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прерванные в начале 1920 г. Работы финансировались фирмой «Кухара» и морским министерством. С 1921 года началась промышленная эксплуатация Охинского нефтепромысла. Для разработки сахалинских нефтяных месторождений было создано акционерное общество «Хокусинкай», в которое вошли фирмы «Кухара», «Мицубиси», «Окура», «Ниппон ойл компани». К японским фирмам перешли практически все угольные месторождения Сахалина».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조선인들에 대한 보도내용

오늘날까지 자원개발과 영토를 둘러싼 다툼이 있는 사할린섬 유전

참고자료

(1) https://www.fondsk.ru/news/2020/04/24/100-let-nazad-japoncy-zahvatili-severnyj-sahalin-50706.html

 

(2)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1942년생~) 『시베리아출병(シベリア出兵):革命と干渉1917–1922』1989年 東京 (Хара Тэруюки. “Сибэриа сюппэй. Какумэй то кансё”|”Сибирская экспедиция - революция и интервенция”. Токио, 1989)

 

(3) https://news.yahoo.co.jp/articles/f3d9da28f4b45a63c9ae895dcdacced6ec3ab6ba?page=2

 

(4) (미국 시베리아 파견군 장령)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Уильям Сидней Грейвс),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Американская авантюра в Сибири 1918-1920)』 (※일제의 시베리아에서의 만행을 기술하며 최소 수십만 민간인 학살 참여를 주장)

 

(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니콜라예프스크에서의 朝鮮獨立示威行列 請願 拒否의 건], (在ニコラエウスク領事代理 副領事 石田虎松), 1919년 04월 03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6_1640

 

(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國民의 聲이라는 週刊新聞의 발행에 관한 건], 石田 (領事代理), 1919년 05월 05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7_0100

 

(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朝鮮新聞 再刊에 관한 건, 石田(니콜라예프스크領事代理 副領事), 1919년 10월 20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7_0830

 

(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 6, 亞港在留鮮人의 革命記念祭 行列參加에 관한 件, 鈴木相之助(亞港日本總領事館總領事代理), 발신일 1925년 11월 09일

 

(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2, 배일선인유력자명부 이동(異動)에 관한 건, 菊池義郞(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발신일 1921년 06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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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10.25 사할린섬 북부의 지배층 상당수가 일본군에게 협조하였군요 일본군은 알렉산드라프스크를 무혈함락하면서 무고한 주민들에 대한 대학살극을 저지르지는 않았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0.28 예. 그렇다고 합니다.
    사할린섬이 지금도 세계적인 석탄, 천연가스 보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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