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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40) 께르비로 가는 고난의 피난길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11.23|조회수68 목록 댓글 2

무적 황군(皇軍)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40) 께르비로 가는 고난의 피난길

(원제 : 메즈도우소비차(МЕЖДОУСОБИЦА, 국제전).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저자 : 스말야크 (В. Г. Смоляк, 1937-2008))

1920년 5월 하순이 되자 일본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불가능함이 더욱 명백해졌다.

사할린 섬 북부와 마주보는 데-카스트리(Де-Кастри) 만에 약 2만여명 일본군이 상륙했다.

 

5월 24일경, 타막(Тамак)이 지휘하는 일본군 부대가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에서 마리인스크(Мариинск)에 도착했다.

니콜라예프스크는 포위되기 시작했다.

연해주 수찬지역(수청지역)의 조선인 파르티잔들, 독립군들

연해주 수찬지역의 항일 파르티잔들

연해주의 파르티잔들

파르티잔 사령부는 니콜라예프스크 주민들중 주로 여성과 어린이, 부상자와 병자들을 암군강을 따라 께르비 일대의 광산 지역으로 대피시키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여자와 어린이들의 피난길은 극동의 타만 피난길 (Героический поход Таманской армии)

그것은 극동의 타만 행군길이었습니다.

(※таманский поход, 1918년경 러시아 적백 내전중 타만반도 일대에서 피난했던 볼셰비키 계열 타만 군대와 주민들의 피난 행군길. 그러나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에 전쟁이 벌어져 크림반도와 타만반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2022년경 파괴되었다)

 

대략 15,000 피난자 중 7,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였으며 거대한 행열을 이루었다.

 

3천여명의 파르티잔 부대는 피난민들을 호송하며 암군(Амгунь), 타이가 숲, 마럄(марям), 께르비(Керби) 지역의 늪을 따라 이동했습니다.

 

5월 20일 첫 번째 증기선이 니콜라예프스크를 떠나 암군(Амгунь, 암군 강)으로 향했고, 그 후 매일 두세 척의 증기선이 음식을 실은 바지선을 이끌고 출발했습니다.

증기선, 바지선, 어선, 돛단배, 보트 등등, 이용 가능한 모든 수상 수송선이 피난에 동원되었습니다.

5월 말까지 약 4,000여명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대피했습니다.

 

 

배로 피난갈 수 없는 사람은 걸어서 대피

선박을 통한 피난 목록에 없는 사람들은 걸어서 께르비(Керби)로 피난을 떠났다.

 

지난 5월 중순, 지역 집행위원회의 명령으로 도시 주민들이 께르비 마을로 대피하기로 하고,약 600 베르스타(верст, Верста́, 약 600km 정도) 정도의 걸어서 피난하기 위한 도로와 이동로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도로는 수리되었고, 다리가 부분적으로 건설되었고 경로를 따라 영양(식량) 보급소들이 건설되었습니다.

 

께르비로 가는 고난의 피난길

그러나 이러한 사전 작업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예프스크 주민들의 께르비로 가는 피난길은 “죽음의 길(дорогой смерти)”이 되었다.

수천 명의 민간인과 파르티잔들이 이 길을 지나갔다.

니항사건의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과 동료들

니콜라예프스크(니항, 니콜라옙스크)의 파르티잔 간부들

파르티잔 지휘관중 한명인 스트롈쵸프-쿠르바타프(Стрельцов-Курбатов)는 이 피난길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나의 지휘 하에 후퇴하는 부대는 매우 번거로웠습니다.

위생부대, 의사들과 의료진, 봉제작업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걸어서 타이가 숲을 지나갔고 몇 마리의 말만이 우리와 함께 있었고 음식은 꾸러미로 운반되었습니다.

 

모든 말들이 마리(мари)지역 등의 습지 피난길 이동에 성공한 것은 아니며, 일부 말들은 전혀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말들은 총에 맞았고, 우리들은 말고기를 먹게 되었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습지와 늪에 떨어졌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 파괴 준비

대부분의 니콜라예프스크 주민들이 도시를 떠났을 때 그들은 파괴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5월 중순, 혁명군 사령부 회의에서 도시의 운명이 결정됐다.

 

(※번역자의 의견 : 당시 한국내 신문보도와 일본군측 자료에 따르면, 니콜라예프스크 주변에 숨어있거나 잔류했다가 일본군측에 투항한 주민들도 최소 500명 이상이며, 대략 1,000여명 이상에서 수천여명이 일본군과 백파측에 투항하였다.

 

오늘날 공개된 일본측 사진에도 이 사실이 명확하게 나온다.

남한의 몇몇 독립기념관 공식도서 등에서 사실이라고 떠들어 대는 ‘여자와 어린이들은 트리피츤 부대가 몰살시켰다’는 등의 헛소리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일본에서조차 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인터넷에 짜깁기해서 조작하는 글들이 자주 인용하는 A.Y.구트만(친일파시스트)의 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이다.

 

 

일본인 생존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중 조선출생은 과연 없었는가?

그리고 대략 수십여명에 이르는 일본인 및 일본여성 생존자들도 피난가지 않고 남았다가 일본군이 다시 공격해왔을 때 일본군에게 투항(구원)한 것으로 보여진다.

시마다 회고록 등에 따르면, 반자이 야습에 동참하지 않았고, 집단자살에도 동참하지 않은 일본여성들은 일본으로 생환해서도 냉대를 받았다.

문제는 이 일본인이라고 알려진 여성중 일부가 조선출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니항에서 발행된 독립운동가들의 신문 '국민성'

 

트리피츤의 도시 파괴 주장

일부는 주민들을 피난 보내고, 도시는 그대로 놔둘 것을 제안했지만, 트리피츤은 도시의 파괴를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도시를 불태우고 전체 인구를 피난시키면, 외국에게 매우 의미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번역자의 의견 : 많은 외침을 받았던 한국에서 방화를 통한 후퇴전술(청야전술 등)은 매우 자주 쓰여진 방어기술중 하나다. 무기•식량•병영을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주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 적의 침략을 영구화시키는 등등 매우 위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저항 없이 후퇴하는 것도 침략자에게 침략을 정당화하는 그럴싸한 명분을 주었고 자주독립을 위한 장애물이 되곤 하였다.

그러나 도시 거주자들의 가옥을 불태운다는 점에 있어서 고통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때 이 지역의 주도(州都)였고 아무르강 하류의 가장 오래된 도시의 운명은 도시를 파괴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오랜 역사를 갖는다고 알려진 니항의 러시아계 주민 역사는 당시 100년도 되지 않았다. 완전 파괴되었다고 알려진 니항의 일본인 거주지는 대부분이 완공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건물들이었다.)

파괴 되기전 니항

1920년 6월 이후 일본군의 재공격시 모습

니항의 상당수 항구와 건물들이 파괴되지 않았고, A.Y.구트만 등이 몰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자와 어린이들이 자주 보인다.

니항 주민중 상당수가 일본군에게 투항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친일파 A.Y.구트만 등등을 제외하고는, 일제는 대부분의 백파계 러시아인들의 일본 망명을 받아주지 않았다.

일본의 선전 자료. 남한 인터넷에서 떠도는 자료가 상당수가 일본의 자료거나 일본측 주장이다.

 

오자수정

압치니코프 에서 -> '압친니코프' (일본으로 도주한 니항사건의 일제밀정)

셰르쇼프 에서 -> '셰르셰프' (자유시 참변 당시 볼셰비키 군대 2군단장)

치니르라흐 에서 -> '츠니르라흐' (니콜라예프스크 인근의 제정러시아 시대 해안 포대)

니콜라옙스크 에서 -> '니콜라예프스크' (오늘날의 하바로프스크 주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의 예전 명칭)

뜨랴피친, 트리아피친, 뜨래피친 에서 -> '트리피츤' (Тряпицын의 일본식 발음을 러시아 발음으로 변경)

아우스셈 을 -> ‘아우셈’(О. Ауссем) 로

로 변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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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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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11.24 께르비로 가는 피난 길은 죽음의 길이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1.24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나라나 전쟁통 피난길은 고난의 길이었던 모양입니다.
    대략 600킬로미터를 민간인들이 걸어서 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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