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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46) 안드레예브와 박병길은 일제의 밀정이 맞는가 ?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12.14|조회수81 목록 댓글 2

무적 황군(皇軍)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46) 안드레예브와 박병길은 일제의 밀정이 맞는가?

(원제 : 메즈도우소비차(МЕЖДОУСОБИЦА, 국제전).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저자 : 스말야크 (В. Г. Смоляк, 1937-2008))

안드레예브와 바실리 박 (박병길)

안드레예브(Иван Тихонович Андреев)

안드레예브(И. Т. Андреев)는 1884년 피트라그라드(Петроградской) 지방의 두비키(Дубки) 마을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니항사건, 혹은 니콜라옙스크 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2015년 방송내용

1920년 니항사건, 1921년 자유시참변에서 활동한 안드레예브(Иван Тихонович Андреев)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러시아로 귀화한 핀란드인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선원, 화부, 조타수로 발트해 일대의 상선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핀란드어와 덴마크어를 포함한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습니다.

안드레예브는 15년 정도 차르군대에서 군복무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안드레예브의 군복무 기간과 최종 계급, 니콜라예프스크 항구에서의 역할, 아무르주에서 경찰서장 혹은 경찰국장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남한 일부 네티즌과 달리 안드레예브는 니항 주민 1만 5천여명이 대피하였다고 주장하여,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할린섬의 백만 장자 페트로프스키(Петровский, Филипп Емельянович)와 같이 사할린섬 북부가 소련에 반환될 때 일본으로 갔다가 중국 상해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무렵, 중국 상해는 만주의 하르빈과 함께 러시아 백파들의 거점중 하나로 알려졌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장교 학교를 졸업하고 소위가 되어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용감함을 대해 그는 두 개의 세인트 조지 훈장(двумя Георгиевскими крестами)를 받았습니다.

 

1917년 2월 혁명이후 그는 대가족과 함께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로 돌아와 그가 만든 시부치(Сивуч, 바다사자) 어장에서 어업을 시작했습니다.

 

1918년 일본 시베리아 침략군이 아무르강 하류를 점령하는 동안,

이 무렵 안드레예브가 포병 전문가로 니항 일대의 백파 군대에 동원되기 전까지는 어업에 계속 종사하였습니다.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가 1920년 2월경 니콜라예프스크를 막았을 때, 그는 백파군대에서 파르티잔 편으로 넘어갔습니다.

안드레예브는 파르티잔들이 1918년에 해체된 츠니르라흐 요새의 대포를 복구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니항 인근 츠니르라흐 요새

니항 우측 츠니르라흐 요새의 구조

1920년경 니항 우측 츠니르라흐 요새 일대를 점령한 일본군

니항 우측 츠니르라흐 요새 일대

파괴된 츠니르라흐 요새 일대의 대포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에서 퇴각한 안드레예브는 포병을 지휘한 후 암군-마리인스크 전선의 세르고-미하일로프스키(Серго-Михайловском)방면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안드레예브의 부대는 주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거주자로 구성되었습니다.

 

트리피츤에 의해 집, 재산 및 가족을 잃고 반강제적으로 피난민이 되어 기아에 허덕이는 운명이 된 사람들의 기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예브는 과연 트리피츤 부대에 침투한 일본 밀정인가 ?

안드레예브는 트리피츤에 대한 음모를 이끈 일제와 백파의 밀정입니까?

 

특히 아무르주 자유시(‘스바보드니’ 라고도 한다) 일대에 있다가

그는 1921-1922년경 이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사할린섬 북부에 살았지만 그를 일본 요원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1925년 소련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되고

일본군이 사할린섬 북부에서 철수할 무렵(1922~1925년경) 그는 사할린섬 북부를 떠났습니다.

그는 1932년경 중국 상하이에서 망명중 사망했습니다.

 

 

트리피츤과 파르티잔 지도부를 향한 음모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기 위해,

아무르강 하류지역 사람들은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역겨운 수단을 사용할 수 있었고 끔찍했던 볼셰비키들의 실험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번역자 의견 : 일본 밀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시의 파괴와 주민들의 고통

우선,

우리는 대피중 도시의 파괴와 주민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타이가 숲을 통한 피난길의 어려움, 식량 부족, 대피 경로에 출몰한 강도 및 산적, 이러한 주제 및 기타 주제에 대한 다양한 소문.

 

공통점은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이라는 아나키스트가 비극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입니다.

파괴된 니항사건 일본군 충혼탑 (니항일본인회 회장 시마다가 주도하여 세웠다)

오늘날 러시아에 있는 니항 사건 추모비

트리피츤의 금화 약탈설

트리피츤이 피난민은 운명에 맡기고,

소수의 원정대와 함께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하기 위해, 이미 니콜라예프스크(니항, 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에서 압수한 금 혹은 금화를 보냈다는 소문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르주(흑룡주)의 주도 블라가베셴스크의 시내 지도 1925년경

1920년경 트리피츤 부대와 독립군 사할린의용대의 이동경로 (피난민은 제외)

(※번역자의 의견 : 당시 니항 일대의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권을 장악하였던 일본인 '시마다'가 발행한 돈이 화폐로 통용되고 있었으나, 금으로 만든 러시아 루블화는 가치를 상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금이라고 하면 니항 주변의 금광에서 채굴한 금과 금으로 만든 돈(루블화)을 말한다.)

 

(사실, 라브로프-티그라프(И. Лавров-Тигров)의 지휘하에 소수 파르티잔 부대가 실제로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로 갔습니다.

 

그는 피난민을 위한 식량을 사기 위해 블라가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로 금을 전달해야했습니다.

이 금들의 운명은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라브로프-티그라프(И. Лавров-Тигров)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가 보이카-파블라프(Д. Бойко-Павлову)에게 금을 넘겼다고 주장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당시 니항, 연해주 일대에는 내전시기 러시아의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종이돈 루블화는 가치를 상실하다시피 하여, 외국화폐와 금화, 은화 등이 화폐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금’이라고 하면 일반적인 거래를 위해 쓰이는 화폐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피난길에 계속된 유언비어들

다른 사람들의 대피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모든 아프고, 늙은 피난민들이 근절될 것이며, 이를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습니다.

(실제로는 무선 송수신소의 기초를 짓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니나 레비제바(Н. Лебедева)가 유대인이며,

우유로 목욕한 다음 아이들에게 주었고,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대피한 고아들을 독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신 교환원이 편지 메시지 전달에서 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고아원에 보내기 위해’를 ‘고아들을 중독시키기 위해’로 잘못 작성했습니다.)

이러한 유언비어들과 추측들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니항사건에서 파괴된 일본군 니항수비대 병영

(독립유공자 박병길, 이지택, 김낙현, 최호림과 관련된) 안드레예브의 반란 성공 원인

트리피츤을 전복하기 위한

안드레예브의 지도하의 파르티잔 포병부대원의 성공에 대한 원동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략적 이유로 트리피츤은

1연대 아무라프-카자다예프(Б. Амурову-Казадаеву) 사령관에게 우스치-암군스카예(Усть-Амгуньское) 캠프에서 일본인을 몰아내고,

그곳에 파르티잔 방어 기지를 만들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작업은 파르티잔 중대의 지휘관 리아도르스키(Леодорский)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는 힘이 부족하여 이 전투 임무 수행을 거부했습니다.

 

 

 

명령 불복종자들의 해임 결정

6월 27일 트리피츤은 우진스키 창고(Удинский склад)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군사 협의회 회의를 열었고 암군-마리인스크(Амгу-но-Мариинсконо фронта) 전선의 몇몇 지휘관을 해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방면의 사령관이었던 사소프(Сасов)에게 맡겨졌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사소프 휘하에 있던 리아도르스키(Леодорский)와 안드레예브(И. Т. Андреев)가 1920년 6월 19일 파르티잔 붉은 군대의 제 101호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그 자리에서 총살당합니다.

현재로서는 부적절한 조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라프-카자다예프(Б. Амурову-Казадаев)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우진스크(Удинск)로부터 전방 전선으로 갔습니다.

니항사건 당시 파르티잔 간부들

트리피츤의 안드레예브에 대한 명령

1920년 6월 29일 트리피츤은 전직 포병 지휘관 출신 동지(안드레예브)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안드레예브는 포병 창고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이것은 안드레예브가 이런 포병 창고가 위치한 께르비(Керби)에 도착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해당합니다.

 

안드레예브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안드레예브 일파의 반란 시작

아무라프-카자다예프(Амуров-Казадаев)가 안드레예브(И. Т. Андреев) 일파를 처리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안드레예브는 도착한 사람들을 무장 해제했습니다.

 

같은 날 저녁,

안드레예브(И. Т. Андреев)와 리아도르스키(Леодорский)는 주로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의 전 거주자인 지지자들을 배에 태운 후, 암군(Амгуни)강을 거슬러 우진스키 창고로 올라갔습니다.

 

 

전직 고려인 부대장 사소프의 체포

그들은 총을 쏘지 않고 전선 사령관이며 상관인 사소프(Сасов)를 무자비하게 체포했습니다.

 

 

러시아 기록에 독립유공자 박병길(В. Пак)의 등장

아노쉬킨(М. Аношкин), 리아도르스키(А. Леодорский), 팔리타예프(Е. Полетаев), 바치예프(С. Бачеев), 바실리 박(В. Пак, 혹은 와실리 박, 한국명 박병길 : 독립유공자), 파블라프(Н. Павлов), 니키파라프(А. Никифоров) 및 니콜라예프(Н. Николаев)로 구성된 임시 군사 혁명 캠프 본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안드레예브(И. Т. Андреев)는 이 본부의 회장이자 반란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반란군들은 께르비(Керби)를 기습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번역자 의견 : 남한에서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박병길(В. Пак, 전직 니항 鮮人 民會회장 혹은 주무(主務)혹은 서기 추정)은 특이하게도 다른 독립군들이 일본군들에게 ‘조선비적(선비), 공산비적(공비), 토비, 강도, 마왕, 도적, 악마, 강간범’ 등으로 불려질 때도,

 

니항 일본인회 회장이었던 시마다의 회고록, A.Y.구트만의 저작물, 안드레예브 관련 기록, 독립유공자 김낙현‧이지택의 기록에도 우호적인 선량한 사람 혹은 ‘안드레예브’의 동료로 기록되어 있다.

 

박병길은 또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9쪽에 따르면 니항 민회의 주무(主務)였다고 한다.

대체로 일본 영사관 협력단체인 친일단체의 간부 혹은 회장을 한 것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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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12.15 안드레예브는 트리피츤 부대에 침투한 일본 밀정이 아니군요 박병길은 우호적인 선량한 사람 안드레예브의 동료로 기록되어 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2.16 예.
    일본 밀정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고, 밀정이 맞고 일본군 앞잡이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일본인과 협조'한 것은 좋게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본인들은 좋아했지만.......

    평가가... 대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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