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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47) 트리피츤의 체포, 안드레예브와 박병길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12.19|조회수53 목록 댓글 2

무적 황군(皇軍)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47) 트리피츤의 체포, 안드레예브와 박병길

(원제 : 메즈도우소비차(МЕЖДОУСОБИЦА, 국제전).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저자 : 스말야크 (В. Г. Смоляк, 1937-2008))

트리피츤의 체포

1920년 7월 4일 새벽에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가 이끄는 반란군 파르티잔들은 께르비(Керби) 마을의 남동쪽 외곽에 상륙했습니다.

 

트리피츤은 증기선 암군네츠(Амгунец)에 본부를 두었습니다.

비지마나프(И. Видьманов)의 지휘하에 그에게 충성하는 직계 부대는 두 번째 배인 무람(Муром)에 있었습니다.

 

강변 근처의 빈 창고에는 또 다른 파르티잔 그룹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야코프 트리피츤 편에는 최소 600명의 잘 무장한 파르티잔들이 있었습니다.

께르비 인근의 암군강

안드레예브와 박병길이 지휘하던 반란군 이동로

아렐-칠야(Орель-Чля) 일대

트리피츤의 체포와 지지자들의 무장해제

트리피츤의 체포와 께르비의 수비대의 무장 해제는 어땠습니까?

 

증기선 암군네츠(Амгунец)는 강변 근처에 서 있었지만 통로에 배들은 없었습니다.

강은 조용합니다.

하얀 안개는 아직 물에서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모두 잠들어 있습니다.

 

리아도르스키(А.Н. Леодорский), 바실리 살라스킨(Василий Салазкин), 표트르 카발료프(Петр Ковалев), 바실리 팍(바실리 박, 와실리 박, 한국명 : 박병길, Василий Пак), 야코프 예시파크(Яков Есипов) 등을 포함한 파르티잔 그룹이 타고 있는 보트가 증기선 암군네츠(Амгунец)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증기선 암군네츠(Амгунец)

 

근무중인 장교는, 리아도르스키를 알아보았고, 근무중인 장교가 끝내도록 허용했습니다.

 

리아도르스키가 근무중인 장교와 이야기하는 동안, 다른 파르티잔 그룹이 배에 탑승하고 총을 쏘지 않고 사령관 트리피츤의 경호원들을 무장 해제했습니다.

 

리아도르스키(А.Н. Леодорский)은 트리피츤이 자는 선실로 갔다.

 

 

리아도르스키(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Леодорский)는 누구인가 ?

트리피츤의 체포가 리아도르스키(А.Н. Леодорский)에게 맡겨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리아도르스키(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Леодорский)는

아무르강 하류 지역인 수하노바(Суханово) 마을의 주민이었습니다.

 

1919년 시다로프(Сидоров)라는 성으로 께르비 인근 광산의 산악 경찰로 일했습니다.

치미르마노프카(Циммермановка) 마을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데올로기적인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라고 소개했고, 곧 마리인스크에서 파르티잔편으로 넘어간 미드베제프(Медведев, 메드베데프) 대령의 백파군대 병사들 중 한개 중대병력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의 신뢰를 누렸습니다.

 

 

트리피츤의 체포 과정에 대한 회고록들

(순순히 체포되었다.)

많은 회고록들에서 트리피츤의 체포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매우 상세합니다.

차이점은 사소한 세부 사항에만 있습니다.

 

리아도르스키가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의 선실을 두드렸습니다.

 

- “누구세요? 뭐가 필요하세요? ”

트리피츤의 졸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저입니다. 리아도르스키.

당신의 요구가 도착하였고, 그리고 사소프(Сасов-Беспощадный Ефим Варфоломеевич)에게서 긴급한 꾸러미를 가져 왔습니다.”

 

- “리아도르스키? 체포되지 않았나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나요?”

 

-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출격을 하여 우리 전초기지 앞에 나타났습니다.

보고서의 세부 사항.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오두막 문이 열리고 트리피츤이 문지방에 나타났습니다.

리아도르스키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고 트리피츤은 꾸러미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 “꾸러미를 주세요.”

 

조금 물러서서 리아도르스키는 리볼버 권총을 들고 트리피츤을 겨냥했습니다.

 

- “손 들어! 당신은 체포되었습니다.”

 

 

박병길(독립유공자로 서훈)의 활약

박병길(Пак)과 리비츠키(Левицкий)는 뛰어 올라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을 잡았습니다.

카발료프(Ковалев)는 선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지만 트리피츤은 그를 불렀습니다.

 

- “어디에? 거기에는 벌거벗은 여자가 있다!

그녀가 옷을 입고 나가게 한 다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비제바(Лебедева)는 이미 문지방에 서 있었고, 트리피츤의 어깨에 가운을 던졌습니다.

 

- “무슨 일이야? 왜 불안해 합니까?”

 

- “당신을 체포합니다. 복도로 나가십시오.”

리아도르스키가 레비제바에게 명령했습니다.

 

- “누가 반란을 일으켰습니까?

왜 전선이 포기되죠?“

 

- “전선은 모스크바의 명령에 충성하는 붉은 전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암구나-트르스카바(Амгуно-Тырского) 전선의 모든 수비대원 전체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라고 리아도르스키가 대답했습니다.

 

트리피츤과 레비제바(Лебедева)는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총격 없이 반란군은 께르비의 수비대를 무장 해제했습니다.

 

 

증기선 무람(Муром)도 무혈 무장해제

증기선 ‘무람(Муром)’에서 그들은 강변에 접근하는 무장한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경보 신호에 따라,

반란군 전투원들이 해변으로 뛰어 증기선 사슬 아래에 눕습니다.

 

부대장 비지마노프(И. Видьманов)는 증기선 무람에 없었습니다.

그의 부관인 알샨스키(И. Ольшанский)는 부대원들에게 전투 준비를 명령했지만,

알샨스키(И. Ольшанский)가 개인적으로 아는 파르티잔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전투 명령은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께르비 일대

아무르강 일대의 여객선들

 

파르티잔 미하일 카자치코프의 기억들

파르티잔 미하일 카자치코프(Михаил Казачков)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그날 아침 형 알릭세이(Алексей)는 부대에서 근무중이었습니다.

일부 군인들이 소총을 준비하고 증기선 무람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고 그는 경보를 울렸습니다.

놀랍게도 접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지인들과 그의 남동생 이반(Иван)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가까이 오라고 소리쳤다.

 

이반(Иван)이 와서 알릭세이(Алексей)에게 트리피츤과 그의 본부가 이미 체포되었으며 파르티잔이 그들을 재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알릭세이(Алексей)에게 저항하지 말고 무기를 내려 놓으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반은 모든 것이 정리되는 즉시 무기가 반환될 것이라고 형을 안심시켰습니다.

 

이 중대는 스스로 무장 해제했습니다.”

 

께르비의 전체 수비대는 거의 같은 방식으로 무장 해제되었습니다.

체포된 약 500명의 사람들이 철제 바지선에 갇혔습니다.

니항의 배들

 

트리피츤에 충성하는 부대의 항복

트리피츤에 충성하는 부대는 왜 전투 없이 반란군에게 항복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은,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쓴 부진-비치(Д. Бузин-Бич)였습니다.

 

“트리피츤은 자신의 실수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가 불타지 않았다면 주민들이 대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니항사건 당시 파르티잔 간부들

 

니콜라예프스크 주민들의 피해

트리피츤은 니콜라예프스크 사람들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높은 가격에 지불하도록 강요했습니다.

 

1920년 7월 6일 께르비에서 반란군 총회가 열렸습니다.

현재 상황에 대한 보고서는 임시 군사 혁명 본부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의장이 작성했습니다.

회의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명시했습니다.

 

“수비대 회의는 군사 혁명 사령부의 호소와 이 문제에 대한 보고서들을 듣고,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아노쉬킨(Аношкин) 및 니차예프(Нечаев)는 그들의 견해를 공유하고 승인합니다.

 

그는 군사혁명본부에

자신이 시작한 일을 과감하게 수행하고, 우리들의 지지를 희망하며,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와 함께 소비에트 노동자 농민 권력의 이상을 함께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청합니다.”

 

체포된 사람들과 관련하여 공공 인민 법원에서 그들을 재판하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대해 께르비(Керби) 지역의 전체 인구에서 즉시 선거를 실시해야 합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항사건) 추모비

오늘날 남아 있는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항사건)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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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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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12.19 박병길과 리비츠키가 트리피츤을 체포했군요 또한 총격없이 반란군이 께르비의 수비대를 무장해제 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2.20 예. 그렇습니다.
    소련 공산당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아나키스트였던 트리피츤이 저평가 된 점이 분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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