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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무적 황군(皇軍)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51) 피난민들의 대피처 제공에 인색했던 다른 지역들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12.28|조회수141 목록 댓글 3

무적 황군(皇軍)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51) 피난민들의 대피처 제공에 인색했던 다른 지역들

(원제 : 메즈도우소비차(МЕЖДОУСОБИЦА, 국제전).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저자 : 스말야크 (В. Г. Смоляк, 1937-2008))

무적황군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목차:

동료에 대한 기억들

мяти товарища--------------------------------------------------------------------------- 3

아버지에 대한 한마디

Слово об отце ------------------------------------------------------------------------------- 4

서문

Вместо предисловия ----------------------------------------------------------------------- 5

피로 덮인 최후

Кровавый финал ---------------------------------------------------------------------------18

아나스타시요프카 마을 회의

Анастасьев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24

야코프 이바나비치 트리피츤

Яков Иванович Тряпицын -------------------------------------------------------------25

니나 미하일로브나 레비제바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Лебедева ----------------------------------------------------------25

볼셰비키 운동 또는 혁명의 구성 요소

Партизанское движение, или составные части революционности --------------27

아무르강 하류에서의 혁명운동

Поход в низовьях Амура-----------------------------------------------------------------30

시간 순서

Связь времен -------------------------------------------------------------------------------33

스파스크 폭풍우의 밤, 니콜라예프스크의 날들

«Штурмовые ночи Спасска, Николаевские дни» -----------------------------------34

해방된 도시

Освобожденный город -------------------------------------------------------------------40

니항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43

니항사건(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

니항 코뮌

Николаевская коммуна-------------------------------------------------------------------50

트리피츤의 반대세력에 대한 정책

Антибуферная политика Тряпицына --------------------------------------------------57

트리피츤에 대한 음모

Заговор против Тряпицына--------------------------------------------------------------62

니콜라예프스크 코뮌의 마지막 날

Последние дни «Николаевской коммуны»-------------------------------------------69

불타버린 니항시(니콜라예프스크 시)

Сожженный город-------------------------------------------------------------------------73

트리피츤의 체포

Арест Тряпицына--------------------------------------------------------------------------87

피에는 피, 죽음에는 죽음

Кровь за кровь, смерть за смерть ------------------------------------------------------92

결론

Заключение ---------------------------------------------------------------------------------98

1920년 니항사건, 혹은 니콜라옙스크 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결론

결론으로,

신문 «DV 시간(Время ДВ)»에 (2004년에서-2005년)사이에 나(저자 스말야크)의 자료가 게재되었을 때의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니항사건 당시 거행된 반일열사 장례식

니항사건 당시 거행된 반일열사 장례식

나는

나의 작업을 아무르 강 하류 지역에 대한 러시아 내전사에 대한 연구의 완성이 아니라

이 문제를 계속 연구하도록 젊은 역사가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출판된 원고에서 기록 및 기타 문서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오늘날의 젊은 역사가들은 사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편애 없이 기록 보관소에 있는 문서를 읽을 것입니다.

신문 «DV 시간(Время ДВ)»의 편집자는 독자들로부터 여러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의 한 학교 역사 교사가 물었습니다. :

“1925년까지 일본이 니콜라예프 사건 때문에 북부 사할린을 점령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역사 과학 박사, 교수 슈리긴(А. П. Шурыгин)(모스크바 주립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나의 지도교수)은 사망 직전에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콜라예프스크 사건(1920년 3월)이 러시아-일본 관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고 했습니다.

 

아나톨리 페트로비치(Анатолий Петрович)는 연구를 마칠 시간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의 원고에서 분리된 조각을 제공하겠습니다.

 

“일본군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니항)에 있는 일본 수비대의 죽음을 그들 나라의 제단으로 가져가, 러시아 내전에 계속 개입하고 내전을 연장할 구실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20년 3월 일본 전함 미카사(Микаса)와 순양함 미시마가 타타르 해협(Татарский пролив)에 파견되었습니다.

 

4월 21일, 2,000명의 병력이 사할린섬 북부 알렉산드라프스크(Александровск-на-Сахалине, 일명 ‘아항’)에 상륙했고,

일본은 사할린 섬 북부에 대한 5년간의 점령을 시작했습니다.

연합국들의 시베리아 간섭과 일제의 만행을 다룬 책들

 

(※번역자의 의견 : 1920년 4월 21일경 일본군의 사할린섬 북부 공격은 사할린섬과 당시 행정구역상 사할린주에 거주중인 조선인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다.

미국 간섭군 사령관 「윌리엄 S. 그레이브스(William S. Graves)」의 일본 침략정책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라.

남한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1920년 7월의 일본군 북사할린섬 보상 공격점령설은 A. Y. 구트만 등의 러시아계 친일파시스트들이나 혹은 ‘일본주장이라면 모두 맞다’는 개똥 같은 소리이며, 오늘날 러시아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4월 27일, 런던 주재 일본 대사관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니항) 사건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그곳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일본 거류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다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일본정부는 1920년 7월 3일자 선언에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러시아 극동 영토에 일본 군대가 주둔하게 된 근본 원인이라고 다시 한 번 언급했습니다."

 

 

일본과 볼셰비키와의 평화교섭

그 후,

일본은 여러 국제회의들,

특히 대련(1922년 7월), 워싱턴(1921년 11월 ~ 1922년 2월), 장춘(Чанчунь, 1922년 9월 2일 ~ 26일) 회의에서 이 문제를 거듭 제기했습니다.

극동공화국의 대략적인 영역, 실제 행정력이 미친 것은 아니며, 볼셰비키의 허수아비 국가에 불과했다.

 

극동공화국 페트로프(Ф.Н. Петров)의 일본 요구에 대한 대응 방법

대련 회의(Дайренской конференции)에서 극동공화국(ДВР) 대표단은 부총리 페트로프(Ф.Н. Петров)였고, 대표단의 군사 고문은 블류헤르(В. К. Блюхер)였습니다.

 

일본 대표단은 극동공화국(ДВР) 정부에 ‘17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니콜라예프스크 문제를 해결을 위해,

극동공화국(ДВР)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동안 일본 국민이 입은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사할린섬 북부를 80년 동안 일본에 임대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관중인 기록물에는 원본 ‘페트로프(Ф.Н. Петров)의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대한 언급’ 이 있고

그는 일본의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니항)에서 죽은 일본인들의 죽음에 대한 보상 요구’에 대하여,

‘일본군의 간섭기간 동안 일본인에 의해 극동에서 사망한 주민들의 죽음과 파괴들에 대한 보상 요구’로 대응했다고 썼습니다.

 

(관련 역사토론에서)

내 요구가 일본인 학자를 여러 번 능가했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대한 토론에서 질문을 없애 버렸습니다.

일본 수비대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니항)에 진입한 소비에트 군대에 대한 적대 행위를 먼저 시작했다고 문서화했을 때,

그들은 특히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니항 일본영사관 이시다 영사 가족과 니항일본인회 회장 시마다 등의 사진

 

니항사건에 대한 일본과 러시아 역사 학자간의 대립

토론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러시아 버전의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인정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번역자의 의견 : 이것은 남한도 마찬가지이다. 남한의 유명 반공학자 김창순, 소설가 박경리, 독립유공자 이지택, 최호림, 김낙현은 일본의 니항사건 주장을 거의 베낀 주장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1920년대의 한국의 신문보도,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주장조차 배제한다.

 

실제로도

오늘날 러시아에도 열심히 찾아보면 니항 주민중에 자신의 조상이나 이웃이 ‘트리피츤 부대’에 의해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도 한다.

한국에도 일제 강점기의 일본 덕분에 한국이 이정도 발전했다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대련 회의(Дайрен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는 결론 없이 끝났습니다.

워싱턴 국제 회의(Вашингтонская международная конференция)는 러시아 정부와 극동공화국 정부(ДВР)의 참여 없이 개최되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은 태평양에서의 미국(США, 미국)과 일본 대결의 맥락에서 이 회의에서 고려되었습니다.

일본 대표 시데하라(幣原 喜重郎, Сидехара, 일본 거물 정치인으로 수상 역임)는 일본이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과 관련하여 시데하라(幣原 喜重郎, Сидехара)는 일본의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남은 대안은 하나뿐입니다 :

합당한 만족을 얻기 위해, 의사 소통이 가능한 책임 있는 정부가 러시아에 설립될 때까지, 범죄가 저질러 진 러시아 사할린 섬의 일부를 보복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파괴된 니항사건 일본군 충혼탑, 높이 20미터가 넘는 거대한 충혼탑이다.

오늘날에는 파괴된 니항사건 일본군 충혼탑, 높이 20미터가 넘는 거대한 충혼탑이다.

오늘날에는 파괴된 니항사건 일본군 충혼탑, 높이 20미터가 넘는 거대한 충혼탑이다.

장춘(Чанчунь, 1922년 9월 2일 ~ 26일) 회의

창춘(Чанчун) 회의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РСФСР)과 극동공화국(ДВР)의 공동 대표단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북부 사할린섬 문제와 연결하지 말 것을 제안했습니다.

 

일본 대표단은 북부 사할린섬 점령이 '니콜라예프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거듭 밝히며 북사할린섬에서의 철수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1925년 5월 일본군의 북부 사할린섬 철군(유전, 탄광 등은 1944년까지 계속 활용)

북부 사할린섬에서 일본은 1925년 5월 중순까지 부를 착취하며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추가 연구를 위한 좋은 주제입니다.

 

 

트리피츤을 살해한 사람들이 일본 밀정이 맞는가?

하바로프스크에 거주하는 바짐 실룐카(Вадим Силенко)는 “트리피츤을 살해한 사람들이 일본 스파이라는 것이 사실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로 둘 수 없습니다.

 

 

야코프 트리피츤 처형후 친일파들의 행동

야코프 트리피츤(Я. Тряпицын) 처형 이후 이 사람들의 행동은 정말 이상합니다.

 

주인공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트리피츤에 대한 봉기 조직자이며 독립유공자 박병길, 김낙현, 이지택의 동료, 1921년 자유시참변 당시 자유시 포병 부대장,

 

압친니코프(А.З. Овчинников)- 트리피츤의 처형을 결정한 법원 회장(법원 대표)

 

은 트리피츤이 총살된 후 실제로 해외(일본을 거쳐 다른 나라로 이주함)로 나갔습니다.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압친니코프(А.З. Овчинников)는 1935년 미국에서 ‘러시아 극동에서의 붉은 파르티잔 운동에 대하여(О красном партизанском движении на российск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라는 회고록을 출판했습니다.

 

 

1920년 니항사건과 1921년 자유시 사건 당시 일제 밀정들의 활약

트리피츤을 처형한 법원의 부회장이었던 바라비요프(П.Я. Воробьев)는 이미 1920년 9월 일본군이 점령한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니콜라예프스크의 비극(Николаевской трагедии)’을 조사하는 민간위원회에 증언했습니다.

 

바라비요프(П.Я. Воробьев)의 진술은 외부와 연결된 파르티잔 붉은 군대 사령관의 행동을 평가하는 데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1920년 니항사건 당시 사할린의용대와 피난민들의 이동로

피난민들의 대피처 제공에 인색했던 다른 지역들

(트리피츤을 처형하라는 공산당의 비밀 지시는 과연 없었는가?)

특히 바라비요프(П.Я. Воробьев)는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의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니콜라예프스크 피난민들이, 금의 제공 같은 특정 조건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과

동지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트리피츤의 희생자라는 파르티잔의 깨달음은 트리피츤을 전복하려는 계획으로 이어졌습니다.

파르티잔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의 (그리고 일부 조선인들의 협조) 지도하에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이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 니항)에 있을 때, 그는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와는 직접 유선으로 연결을 했고 이를 통해 모스크바와도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전보가 트리피츤으로 직접 전달되었습니다.

그중 하나의 전보에서 레닌(Ленин)은 그를 지역 소비에트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트리피츤에 대한 학살 이후,

새로운 사령관이 된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는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의 볼셰비키인 지역 집행위원회에 편지를 보냈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트리피츤과 그의 측근들이 처벌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

공산당 시대의 암울함

아무르강 하류에서 소비에트의 권력 회복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 받았는지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게라시멘카 나탈리아 미하일로브나(Герасименко Наталья Михайловна)는 동시베리아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 법학 아카데미의 마케팅 부서장입니다.

그녀의 처녀적 이름은 ... ‘트리피츠나(Тряпицына)’입니다.

 

야코프 트리피츤(Яков Тряпицын)은 그녀 아버지쪽 삼촌입니다.

 

당신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 이 고등 교육을 받고 지적인 여성은 이 책이 출판되기 전에는 친척의 운명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소비에트 당국은 사람들의 역사적 기억을 뿌리째 뽑았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1917년부터 표면적으로는 일본과의 평화를 꿈꾸던 일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시도는 야코프 트리피츤이 1920년 처형된 후, 1925년 소련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로 드디어 실현된다.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사할린주 니항에서 중국인 마을 한쪽에 있었던 가장 멸시받던 민족의 지도자들이 일본-소련간의 평화 교섭에 있어서 의외로 장애물이 되곤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공로로, 2006년경 한국에서 사할린 부대장 박일리야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 스말야크의 이 책은 그가 사망한 후 몇 년 뒤에 출판되었습니다.

즉, 스말야크의 책은 완전한 내용이 아니며, 오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출판을 둘러싼 논쟁도 있습니다.

 

그뒤 프치츤, 프라예르만, 주코프스키-주크를 비롯해 트리피츤을 미화하는 문학도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의외로 파니 카플란(Фани Каплан), 마리아 스피리도노바(Спиридонова,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주코프스키-주크(Жуковский-Жук И.И.), 마흐노(Махно, Нестор Иванович) 등을 언급하는 역사가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유명 작가 루빔 프라예르만의 책속 사진들. Р.И.Фраерман

주코프스키-주크(Жуковский-Жук И.И.) 의 책 '니나 레비제바와 야코프 트리피츤'

러시아의 유명 작가  루빔 프라예르만 의 <황금색 수레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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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12.28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극동공화국의 공동 대표단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북부 사할린섬 문제와 연결하지 말라고 했으나 일본 대표단은 관련이 있다며 철수에 동의하지 않았군요 하지만 결국에는 1925년 5월 일본군은 북부 사할린섬에서 철군해고 유전, 탄광등은 1944년까지 계속 활용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2.29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말 잘 보내십시오.

    예. 그렇습니다.
    국제관계라는 것이 선전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다른 것이 많고.

    힘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곳이죠..
  • 답댓글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12.29 신룡기2 신룡기님도 연말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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